북베트남 남베트남 차이 | 하노이여자 Vs 호치민여자 Hanoi Women Vs Ho Chi Minh Women 최근 답변 4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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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베트남 지역에 수립된 북베트남의 괴뢰 국가에 대해서는 남베트남 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유 베트남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미국에 망명한 정치체에 대해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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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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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패망의 원인 – 네이버 블로그

하지만 북베트남의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남베트남에 스며들어 사회 곳곳을 장악했고 좌파들의 선동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넘어갔으며 국민들도 정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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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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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알기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지리와 역사 – VEYOND

수도는 북부의 하노이지만 유명한 관광지들은 중부의 다낭 및 호이안이고 경제수도는 남부의 호치민이라는 특징이 있다. 북부와 중부, 남부는 지역간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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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eyond.asia

Date Published: 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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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 베트남에도 지역감정이 있을까? – 여성신문

그 뒤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수도로 기능했던 … 한 네티즌은 하노이와 호찌민의 차이를 설명하며 밤 11시에 하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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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womennews.co.kr

Date Published: 1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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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와 호치민 – 브런치

19세기까지도 북부 홍하 델타와 남부 메콩 델타의 농민 간에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컸었다. 18세기에 베트남이 남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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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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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역사 :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 | ㅍㅍㅅㅅ

남베트남의 패망 뒤에는 사회의 안정을 뒤흔든 북베트남 정부와 그들의 … 관점에서 바라보는 베트남 패망의 원인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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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pss.kr

Date Published: 7/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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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줄 가치가 없는 정부였다 – 한겨레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군 탱크가 사이공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점령 … 국력에 대한 비교는 평가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만큼 큰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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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6/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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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여자 VS 호치민여자 Hanoi Women VS Ho Chi Minh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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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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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트남 공화국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남베트남 지역에 수립된 북베트남의 괴뢰 국가에 대해서는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남베트남 지역에 수립된 북베트남의 괴뢰 국가에 대해서는 남베트남 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유 베트남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미국에 망명한 정치체에 대해서는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미국에 망명한 정치체에 대해서는 자유 베트남 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남베트남의 지도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어: Việt Nam Cộng Hòa비엣남 꽁 화 ? ), 약칭 남베트남은 1955년 10월 26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북위 17도 베트남 군사분계선 이남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군사분계선 이북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과 대치하였다.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랑스와 비엣민의 휴전으로 1954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분단되었는데, 가끔 베트남 공화국의 전신인 베트남국(1949년 6월 14일 – 1955년 10월 26일)을 남베트남의 역사에 포함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진영에선 정치이념에 따라 북베트남과의 구분을 위해 자유 월남, 자유 베트남 등으로도 불렸다.

역사 [ 편집 ]

제1공화국 [ 편집 ]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10월에 남베트남에 수립된 나라로, 초대 총통은 응오딘지엠이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였고, 베트남 공화국이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나라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고위 관료 및 군대 중추는 프랑스 치하에서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던 자였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서 북부의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에 밀렸다. 일례로, 베트남 공화국의 정규군인 베트남 공화국군의 장교 중 95% 이상이 프랑스군 및 프랑스의 괴뢰군이었던 베트남 국민군에서 장교를 수행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는 태생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국체(國體) 전반이 과거 프랑스의 괴뢰국이었던 베트남국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상태였다는 점에서도 문제점이 지적됐다.

1956년 응오딘지엠은 토지 개혁을 실시했으나, 이는 토지 분배가 아닌, 소작료 제한책에 그치는 개혁이었기 때문에 지방 농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러한 소작료 인하는 오히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월맹 게릴라 조직이 남부 일부 지역에서 실시했던 소작료 인하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소작료를 강제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농민의 삶은 이전보다 후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과로 소작 쟁의가 끊이질 않았다.

한편,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 조직은 이를 파악하여 소작농과 빈민을 규합하였고, 그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이 성립되었다.

응오딘지엠의 정책에 미숙성을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은 행정 고문관을 보내 농촌 통제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농민의 반감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심각한 부패는 국민 단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 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이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 게릴라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소작농을 탄압했고, 이는 전체적인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군부시기 [ 편집 ]

응오딘지엠은 군부 관리도 실패하였다. 남베트남군 장교의 대다수는 프랑스 치하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전력이 있었는데, 응오딘지엠은 나름 남베트남 정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군 출신 인사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군부 지지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1963년에 군부 실세이자 군사 최고 고문이었던 즈엉반민이 쿠데타를 감행하였고, 응오딘지엠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권좌를 잡은 즈엉반민도 다른 군부에 의해 쿠데타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연이은 쿠데타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제2공화국 [ 편집 ]

기나긴 혼란 끝에 응우옌반티에우가 1966년에 군부의 지지를 받는 데에 성공하였고, 1967년에 그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의 행정 혼란은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정부패, 행정 무능, 권위주의 등의 문제가 청산되지 않았다. 특히, 미군, 대한민국 국군을 비롯한 수많은 지원군이 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베트남 공화국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최악이었기에 게릴라 군대에 불과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빈번하게 패배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 베트남 전쟁이 종전되었다. 이에 따라 남베트남 지역에 주둔했던 외국 군대는 모조리 철수하였다. 그러나, 산악 지대는 이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공산 세력인 남베트남 인민혁명당이 지지력을 확고히 확보한 후였으며, 남베트남의 무능, 부패, 빈부격차 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북부 베트남이 총공세를 펼쳤고,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하였다. 이로써 베트남 공화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정부 [ 편집 ]

정부 조직 [ 편집 ]

베트남 공화국에는 다음과 같은 정부 조직들이 존재했고, 각 조직 부서들의 장은 우리나라의 장관에 해당하는 총장(Tổng trưởng)이 맡았다.

문화교육부 ( Bộ Văn hóa Giáo dục ) 주소 : 33–5 Lê Thánh Tôn

) 주소 : 33–5 Lê Thánh Tôn 외교부 ( Bộ Ngoại giao ) 주소 : 4–6 Rue Colombert (현재의 4–6 Alexandre de Rhodes)

) 주소 : 4–6 Rue Colombert (현재의 4–6 Alexandre de Rhodes) 보건부 ( Bộ Y tế ) 주소 : 57–9 Hong Thap Tu (현재의 57-9 Nguyễn Thị Minh Khai)

) 주소 : 57–9 Hong Thap Tu (현재의 57-9 Nguyễn Thị Minh Khai) 사법부 ( Bộ Tư pháp ) at 47 Lê Duẩn

) at 47 Lê Duẩn 국방부 ( Bộ Quốc phòng ) at 63 Lý Tự Trọng

) at 63 Lý Tự Trọng 국가경찰사령부 ( Bộ Tư lệnh Cảnh sát Quốc gia ) 주소 : 258 Nguyễn Trãi

) 주소 : 258 Nguyễn Trãi 공무통신부 (Bộ Công chính và Truyền thông) 주소 : 92 Nam Kỳ Khởi Nghĩa

남베트남의 지도자 목록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남베트남 패망의 원인



군대에서 정신교육을 받을때 항상 단골로 나오는 소재는 바로 남베트남의 패망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남베트남은 북베트남보다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앞선 나라였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남베트남에 스며들어 사회 곳곳을 장악했고 좌파들의 선동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넘어갔으며 국민들도 정부를 불신하였다.

그리하여 1975년 남베트남은 결국 패망하고 공산화되어버렸다. 이후 베트남 공산당은 남베트남의 지식인들을 잔혹하게 숙청하고 탄압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보트피플이 되어 베트남을 떠났다. 군대에 다녀왔으면 많이들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요지는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정신력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적의 선동 선전에 넘어가지말자 이런 것일텐데..

그런데 과연 남베트남은 좌파 및 베트콩의 책동에 의해 패망한 것일까? 베트남 역사와 당시 상황을 잘 공부해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얘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독립운동가 호치민(1890~1969)

베트남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이다. 하지만 1945년 3월 2차대전이 한창일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몰락하였고 그 틈을 타 일본군이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한다. 그리고 일본은 바오다이를 옹립하여 새로운 괴뢰정부를 세운다. 하지만 일본이 8월에 패망해버리고 이후 그 독립운동가 호치민과 그가 조직했던 베트민(베트남 공산주의 단체)이 베트남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며 바오다이를 몰아낸다.

이후 베트남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또한 프랑스의 식민지회복을 돕기위해 들어온 영국군,프랑스군 그리고 일본군까지 섞여 굉장히 난잡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결국 1946년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바오다이를 다시 왕으로 세우고 이에 반발한 베트민 민병대와 충돌하면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1950년 북쪽에는 베트남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전쟁은 계속된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완전히 철수해버린다. 이후 총선거를 치르기로 하였으나 호치민이 당선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베트남은 분단된채 총선을 치뤘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제각기 부정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한다.

응오딘지엠 (1901~1963)

불교탄압에 반발하여 분신자살하는 승려.. 베트남사회의 혼란을 보여준다.

이때 남베트남의 대통령은 딘지엠이었는데 딘지엠은 부정선거를 통해 98.5%라는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딘지엠은 천주교신자였는데 당시 베트남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교를 탄압하였고 공산당을 비롯한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였다. 또한 그의 측근과 일가족은 권력을 남용하여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그리고 지주에게 토지를 되돌렸고 세금을 높이는 정책으로 농민들의 민심을 잃는다. 결국 1963년 딘지엠은 군부의 쿠데타로 쫓겨난다.

하지만 이후에도 쿠데타는 계속되었고 무려 10차례나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 얼마나 막장스런 상황인가 그러니 자연스래 국민들은 정부에 등을 돌렸고 개혁을 요구하는 대학생 및 지식인들의 시위는 계속 되었다. 남베트남군은 베트콩만 만나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도망갔고 무기를 팔아먹는 일까지 일어났다.

또한 남베트남 전투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북베트남으로 도주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런 막장스런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미군은 국내의 반전여론과 더불어 남베트남 정부가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고 판단하여 철수해버린다. 이렇게 버림받은 남베트남은 패망해버린다.

베트남전쟁과 월남의 패망

여기까지 읽었으면 남베트남이 망한 이유는 다른데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남베트남은 간첩의 선전에 넘어가 망한 것이 아니라 썩어 문드러진 나라이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냥 망할만한 나라니까 망한것이다. 당시 베트남의 상황은 호치민을 비롯한 공산당이 프랑스의 지배때부터 민족 운동의 중심이었고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오히려 남베트남의 우파정권은 프랑스나 일본에 협력했던 기득권, 엘리트 계층들이 모여 급조된 정권이었고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전혀 정통성없는 반민족,반민중적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적인 요인을 탓할 것이 아니다. 내부가 잘 단결되어있고 사회가 공정하고 안정되어있다면 망하겠는가?

독일 통일 당시에도 서독에 무수히 많은 동독간첩이 흘러들어갔고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했다는 사실이 있는데(심지어 빌리 브란트 총리의 비서가 간첩이기도 했다.) 어째서 서독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동독이 망했을까? 냉전시대 미국을 비롯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공산주의가 퍼졌고 이념대립과 시위가 빈번했는데 이들 나라는 전부 공산화되었는가?

대부분 나라가 망하는 것은 내부분열이 주원인이다. 나라가 잘단결되어있으면 국민이 선동에 넘어가지도 않고 외침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도자의 역량에 달린 것이다. 군대에서 가르치는 이러한 남베트남 사례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앞뒤 상황과 배경 맥락을 싹둑 자르고 단순히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선동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러한 이야기를 떠벌리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 돌리고 내부의 부정을 덮어버린다던지 기득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베트남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것을 느끼는가? 군대에서는 항상 월남 패망의 교훈을 잊지말자고 한다. 나 역시 교훈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군대 정신교육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말이다.

베트남을 알기 위한 두 가지 키워드 : 지리와 역사

한국에서 베트남이란 국가는 여행가기 좋은 곳,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 개발도상국, 과일이 맛있는 곳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국정부는 신남방정책을 통해 베트남과 협력을 추구하며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을 지원하는 등 경제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인식은 주로 경제와 관광에 집중되어 있다. 베트남의 역사와 군사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베트남’과 ‘군사’라는 키워드의 결합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을 떠올리게 하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얼마나 잘 싸웠는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게 할 뿐이다. 또한 한국이 세계 6위의 군사강국임을 감안하면 20위가 넘어가는 베트남이 강력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만,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은 가히 동네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베트남 사람들이 스스로를 미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강력한 국가로 인식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출처: 구글지도

유럽에 영국과 프랑스가 있다면, 동남아시아에서는 태국과 베트남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남아시아라는 개념은 태국, 베트남, 미얀마 등이 있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육상지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이 있는 해상지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리핀이라는 3개의 지역을 묶어서 부르는 것이다. 이 3개의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묶여있으나 실질적으로 별도의 문화권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상호교류 역시 적다. 다만, 본 글에서는 가독성을 위해 인도차이나반도의 육상지역을 동남아시아로 명칭함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베트남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일견 허세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 베트남의 쌓아온 역사와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는 강국이라는 점에 근거한다. 따라서 본 글은 베트남이 어떻게 동남아시아에서 강국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현대의 베트남이 걱정하는 국가적 위협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격을 마주한 베트남(출처: 한국무역신문)

1. 길게 늘어진 국토로 인한 실질적 분단

베트남은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가장 특이한 점은 남중국해를 따라서 국토가 길게 늘어져있다는 것이다. 수도는 북부의 하노이지만 유명한 관광지들은 중부의 다낭 및 호이안이고 경제수도는 남부의 호치민이라는 특징이 있다. 북부와 중부, 남부는 지역간 차이가 상당하기에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장기여행이 아닌 이상 하나의 지역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라오스와의 국경과 가까울수록 험준하다(출처: 구글지도)

우선, 수도인 하노이가 있는 베트남 북부는 총인구 9,400만 중 25%가 사는 핵심지역이다. 수도답게 베트남이라는 정체성이 시작된 곳이며 남부의 호치민과 더불어 국가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이 하노이와 하이퐁과 같은 도심지는 옅은 녹색이지만 라오스와의 국경으로 갈수록 미개발상태의 정글과 험준한 산맥으로 인해 육로교통이 지극히 제한된다.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은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 요소지만, 군사적으로는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주는 플러스 요소이다. 따라서 베트남은 험준한 산맥을 바탕으로 서부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베트남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국민 영웅 ‘쯩자매'(출처: Wikimedia Commons)

베트남에 가해지는 가장 큰 위협은 북쪽의 중국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단군왕검에 해당되는 ‘쯩자매’가 중국(당시 한나라)과 시작한 독립전쟁으로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된다.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더 이상 중국의 일부가 아닌 베트남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독립을 했지만, 중국은 베트남의 독립과 함께 많은 영토를 잃었기에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시 베트남을 정복했으며 베트남이 실질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은 천 년이 지난 10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독립 이후에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 중국과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오기 전까지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과의 전쟁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남만(남쪽의 이민족=베트남)은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고, 동이(동쪽의 이민족=한반도)와는 달리 정복했을 경우 풍부한 남방의 물자를 얻을 수 있었기에 중국의 남만 정벌은 나름대로 수지타산이 맞는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입장에서 보면 이유 없이 수천년을 괴롭히는 이웃국가였고 이러한 역사는 지금까지도 베트남의 대중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침략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베트남은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힘이 필요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국력이란 인구와 농토였으며 북쪽은 중국, 서쪽은 산맥으로 막혀있는 상황에서 베트남 민족은 생존을 위해서 남쪽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서쪽으로 안남산맥이 자리해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은 불가피했다(출처: 위키백과)

다낭과 호이안이 있는 베트남 중부까지도 안남산맥으로 인해 서부로의 진출이 불가능하니 필사적으로 남쪽으로 영토확장을 추진했고 약 1000년에 걸쳐서 최남단의 호치민으로 대표되는 메콩강 삼각주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베트남의 입장에서야 진출이고 원래 메콩강 삼각주를 가지고 있었던 캄보디아 입장에선 강대국의 횡포에 불과하겠지만. 메콩강 삼각주는 기후가 온난하고 물이 풍부해 3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지역임과 동시에 메콩강과 바다에 접해있기에 주변과의 교류도 유리한 곳이었다. 그래서 수도 하노이를 뛰어넘는 더 큰 경제력을 가진 베트남의 심장부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호치민은 베트남 경제력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업시설 역시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은 경제는 남부의 호치민, 정치와 군사는 북부의 하노이로 양분되어 있다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상당히 높기에 중국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고 대중의 반중감정과 달리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북부의 하노이의 경우 중국과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천 년 넘게 중국을 경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군사력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반면 호치민의 경우 주변국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이 없기에 경제에 전념할 수 있으며 북부에 비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다. 게다가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은 정복한 지 이제 200년이 조금 넘은 곳이기에 여전히 북부와 인종 및 언어적 차이를 보이며, 문화적으로도 북부는 중국의 영향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고 남부는 동남아시아 문화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베트남전쟁으로 인해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정복하고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을 북베트남 지도자의 이름인 호치민으로 바꾸기까지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남베트남의 인민들은 북베트남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지는 않았지만 환영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부와 남부가 정서적으로 단합되어 있지는 않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산맥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히 북부와 남부가 정서적으로 분리되어있는걸 넘어 실제로 자연환경 역시 분리되어 있다. 베트남 중부는 그 폭이 굉장히 얇은데다가 소수민족들이 사는 산악지대로 구성되어 있어 국가의 허리는 굉장히 취약한 편이다. 북부와 남부의 양대 심장지대가 가지는 이러한 차이성은 지속적으로 베트남 지도자들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2. 베트남의 근대사는 전쟁의 역사

다시 산맥지도를 보면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 북부와 중부는 산맥으로 인해 라오스와 차단 되어 있지만 남부와 캄보디아의 국경지대에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없다. 이렇게 국경이 인접한 국가들끼리는 보통 사이가 좋지 않으며 베트남과 캄보디아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래 베트남 남부가 캄보디아 땅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은 미국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를 통해 군사작전과 보급을 실행했다. 미국 역시 베트남의 영토가 아니지만 보급을 끊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폭격을 가했고 전쟁당사국이 아님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물론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이러한 상황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베트남이 강국이었기에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이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서도 인접국에 대한 베트남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라오스는 워낙 산악지대였기에 인구가 적고 경제력이 낮아 크게 견제하지 않았으나, 캄보디아의 경우 군사적으로 위협적이라고 판단이 되자 캄보디아를 침공해 점령하고 꽤나 오랜 기간동안 괴뢰국을 세워 베트남의 안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중국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잃게 만들었기에 중국을 크게 자극했고 결과적으로 중월전쟁이 터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도 베트남은 사실상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미국과의 통일전쟁, 캄보디아 침공, 중월전쟁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끝나고 베트남은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일시적 해방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라오스와 캄보디아에게 좌우의 태국과 베트남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친중국가로 돌아서는 동기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현대에 이른 베트남은 또다시 위협을 느끼게 된다.

3. 베트남의 현재상황과 전략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친중국가가 되었기에 베트남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으로부터 포위당했다는 위협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은 [3 NO] 정책을 선언했다.

군사동맹에 참여하지 않는다. 베트남의 영토에 외국군사기지를 설치하지 않는다. 외부세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정책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지키기에는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트남도 [3 NO] 정책을 엄격히 지키기보다는 실정에 맞게 유동적으로 행동하는 편이다.

중국이 남중국해로의 진출을 시작했기에 베트남으로서는 동쪽으로부터의 공격도 준비해야만 하고, 중국입장에서도 남중국해 진출에 방해될 ‘현지’ 국가는 베트남이 거의 유일하기에 중국-베트남간 분쟁은 점차 격화될 것이다. 즉, 베트남은 남부를 제외하면 중국에 포위당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적대세력이 베트남 중부에 진출하는 순간 베트남은 쉽게 양분될 것이며 베트남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가장 걱정하고 있다. 이렇게 취약한 중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정공법인 해군기지와 같은 인프라 설치를 통해 강화할 수 있지만 사실 더 빠르고 쉬운 방법이 존재한다.

국토가 너무 얇아서 분단의 위협이 있다면 두껍게 만들면 해결될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해군력강화를 통해 방어하기에는 베트남의 경제력이 아직까지 부족하고, 설령 무리해서 해군을 강화하더라도 중국해군과 맞설 수준까지는 아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닌 국가체급의 차이 때문에 애초에 불가능하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육군을 강화해서 서부로 팽창하는 것이다. 서부로 팽창하면 서부의 위협을 제거하면서 동부의 바다로부터 오는 국토분단의 위협에도 방어할 여유가 생길 것이 아닌가?

당연하게도 라오스와 캄보디아 역시 이렇게 생각하기에 더욱더 친중국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친중국가라서 위협을 받아 팽창을 생각하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베트남으로부터 팽창의 위협을 받기에 친중국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베트남은 해군증강이 제한되고 서부로의 팽창은 역효과의 가능성이 크니 현실적인 방법은 베트남의 소프트파워를 키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베트남이 비교적 거대한 경제력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경제적 이득을 주고 베트남문화에 많이 노출시켜 적대감을 줄이는 방식으로 친중국가일 필요가 없도록 라오스와 캄보디아에게 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두 국가를 베트남과 중국에 대해 중립상태로 만들어야 서부로부터의 위협을 줄일 수 있다.

남중국해 중국 군사기지 현황(출처: 서울 퍼블릭 뉴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은 사실 미국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단순히 베트남이 미국 편에 서서 반중전선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지렛대 삼아 중국과 베트남이 적절한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베트남의 경제는 중국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고 무엇보다 미국은 멀지만 중국은 가깝다. 앞서 언급한 [3 NO] 정책에 의해 미국-베트남 간의 군사동맹도 없고 미군기지도 없다. 그러니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3 NO] 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베트남-미국-중국이라는 삼각관계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중국해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미국 외에도 인도나 호주, 일본 심지어 러시아라는 선택지도 가능하니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베트남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된다.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과의 전쟁사나 다름 없고 반중감정이 가장 심한 나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은 중국을 적대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 베트남은 중국을 적대하거나 중국에 굴복하는 상황보다는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협력과 공존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상호존중을 추구하는게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베트남으로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미중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남중국해로 진출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 모두 베트남에게 자신의 편이 되라고 제안하고 있지만 베트남으로서는 어느 쪽의 손도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어느 쪽의 손도 뿌리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베트남은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베트남에 관심이 있다면 향후 베트남의 결정과 행보는 상당히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베트남 역사의 시작은 중국과의 독립전쟁이었다. 그 후 천 년 넘게 민족의 생존을 위해 외세와 맞서 살아남은 베트남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베트남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베트남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글쓴이 차태호

베트남이 좋아서 베트남에 대해 글을 씁니다.

[WWW] 베트남에도 지역감정이 있을까?

하노이 VS 호찌민

하노이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 호찌민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영상 캡쳐. ⓒ유튜브 meWOW

1000년에 이르는 중국 지배와 연달아 이어진 프랑스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1945년 마침내 해방된 베트남은, 1954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한 북베트남과 자본주의를 이념으로 삼은 남베트남으로 갈라지게 됐다. 그 뒤 벌어진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수도로 기능했던 사이공(Sài Gòn: 호찌민의 옛 이름)을 점령하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해냈다. 전쟁이 끝난 뒤 남베트남의 편에 섰던 인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졌는데 수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트피플도 이 과정에서 발생했다.

1600km에 달하는 국토 길이를 가진 베트남에서 각각 북쪽과 남쪽 끝에 자리한 하노이와 호찌민은 물리적인 거리와 오랜 세월 적으로 지냈던 역사가 혼합돼 날씨부터 음식, 사람들의 성향까지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흔히들 하노이를 행정 중심의 도시, 호찌민을 경제 중심의 도시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각 도시의 사람들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지역차이를 넘어 외국인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수준의 이질감을 전제로 한다. 실제 인터넷에서는 두 도시의 차이를 비교하며 희화화하는 영상이나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자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보수적 하노이, 개방적 호찌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자료 조사가 필요할 만큼 하노이와 호찌민은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적도에 가까운 호찌민이 일 년 내내 여름인 것과 달리 하노이에는 우리나라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이 있다.

날씨의 영향으로 하노이와 호찌민은 각각 특화된 음식을 갖고 있는데 하노이에서는 소금이 많이 든 쌀국수와 분짜(bún chả, 완자와 면을 함께 먹는 음식)가 유명하고 호찌민은 채소와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쌀국수와 달콤한 음식이 발달했다. 정작 외국인들은 중부 지역인 후에 지방의 음식을 가장 선호하는 데 반해 하노이와 호찌민의 각자의 음식이 베트남을 대표한다고 설전을 벌인다.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하노이와 베트남 경제의 중심인 호찌민은 도시의 색깔과 분위기 역시 크게 다르다. 한 네티즌은 하노이와 호찌민의 차이를 설명하며 밤 11시에 하노이 사람들은 잠자리에 드는 반면 호찌민 사람들은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러 나간다고 묘사했는데 직접 겪어본 두 도시의 느낌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노이의 경우 상대적으로 엄격하고 경직돼 있는 데 반해 호찌민은 클럽과 술집에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넘쳐나며 친절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다.

언어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어감이 조금씩 다르고 발음 또한 적잖이 차이 나는데 수도인 하노이 언어가 표준어인 만큼 호찌민의 언어는 방언으로 취급된다. 하노이가 좀 더 정중하고 딱딱한 느낌이라면 호찌민의 방언은 부드럽고 친절한 느낌이 강하다.

하노이와 호찌민의 지역 갈등

문화의 차이가 큰 만큼 하노이와 호찌민의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지역 간의 차이를 의미하는 꿉 포 디아 픙(cục bộ địa phương:지역감정)은 지역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뉴스 제목으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고 폐쇄적인 지역주의를 타파하자는 전문가의 칼럼 역시 각종 매체에서 종종 눈에 띈다. 일상에서 하노이 사람들, 혹은 호찌민 사람들이 서로를 험담하는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베트남 내의 지역감정은 점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처럼 극명한 두 지역의 차이에 대해 하노이는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 아래 있어 예의와 신중을 높게 여기는 반면 외국 기업의 진출이 활발한 호찌민의 경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중요시한다는 평가도 있고, 해방 후 북과 남으로 갈라진 역사가 만들어 낸 간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통일 후 하노이가 행정 수도로서 발전을 거듭한 반면 호찌민은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돼 있었다는 피해의식이 작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보트피플, 유학, 이민 등으로 베트남을 떠났던 이들이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베트남의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양 지역 간의 갈등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감지된다. 하노이 사람들은 부를 감추고 내세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반면 해외파들의 활약이 활발한 호찌민에서는 부와 소비를 당당한 노동의 보상으로 여겨 자랑하는 추세인데 그 모습을 두고 호찌민 사람들은 하노이의 과묵함을 음흉하다고 표현하고 하노이에서는 호찌민의 자유분방함이 천박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질수록 다시 또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는 셈이다.

축구가 지역감정 해결?

이와 같이 오랜 시간 굳어져 온 베트남의 지역감정에 최근 변화의 기미가 포착됐다. 바로 몇 달 전 치러진 아시아 축구연맹 U-23 챔피언십 대회에서의 선전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남북의 진정한 통일을 이룩한 것은 축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승을 기원하며 각 지역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했던 순간만은 지역감정이 허물어지고 베트남이 하나가 됐다고 많은 베트남인들이 입을 모은다. 이미 몇 달이나 지난 탓에 그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지만 하나가 돼 응원하는 경험이 베트남 국민 모두에게 통합과 단결의 가치를 깨닫는 새로운 기회가 돼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노이와 호찌민의 지역감정은 한국의 그것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나뉘었던 과거의 기억, 비행기로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물리적인 거리감 그리고 거기에서 기인한 문화적 간극이 현재까지 견고하게 유지되며 지금의 지역감정으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지역 갈등이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지내온 베트남 사람들이 최근 경험한 통합과 화해의 시간을 통해 불필요한 미움과 편견을 없애고 하나 된 베트남으로 성장해가는 날이 빨리 오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 축구를 통한 한국의 역할이 미세하게나마 기여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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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와 호치민

베트남의 중심 도시는 하노이와 호찌민이다. 북부의 하노이는 홍하 델타 지역에 자리 잡고 있고, 남부의 호찌민은 메콩델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는 하노이이지만, 인구나 경제로 보면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개명한 호치민이 더 큰 도시이다. 하지만 하노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베트남의 수도였고,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에도 수도였기에 역사적으로 보면 하노이가 베트남의 중심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베트남 전쟁에서 하노이의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사이공에 승리해서 통일을 했으니, 사이공보다는 하노이가 베트남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역사의식에는 물론 문제가 많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차이가 꽤 심하고, 역사적으로도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러니 어느 도시가 베트남의 중심이라 하기에는, 외부인의 시각으로는 많이 부족하니 단언은 하지 말자.

호안끼엠 호수

베트남은 북부와 남부가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지금 현재 베트남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노이가 속한 북부지역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북부 베트남은 오랜 기간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었던 유교 문화권이고 한자 문화권이다. 하지만 중부 베트남은 힌두교 문화권인 참파 왕국이 거의 천년 간 지배하기도 했고, 남부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변방 정도로 여겨졌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야 베트남은 남부지역의 메콩델타 지역을 영토로 복속시켰다.

띠라서 그 이후에 중부와 남부 지역에 북부 베트남인들이 이주해오면서 원주민인 참파인, 크메르인과 섞이게 되는데,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에 이 세 지역의 문화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세기까지도 북부 홍하 델타와 남부 메콩 델타의 농민 간에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컸었다.

18세기에 베트남이 남쪽까지 세를 확장해서 점령했다고 하지만, 이 또한 남북 간의 갈등이 심한 시절이었다. 16세기에 당시 북부 베트남의 남쪽 끝이었던 중부지방에서 반란 정권이 수립된다. 응우옌 정권이라 불리는 이 집단은 북부의 중앙정부와 대립하면서 남쪽으로 세를 확장해서 18세기까지 메콩델타 지역을 장악했는데, 이 기간 동안 북부 베트남과 남부 베트남은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 대략 200여 년가량 내전을 치렀던 것이다. 감정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다.

베트남이 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 시초는 18세기 말, 중부 지역 빈딘의 떠이선 출신 삼 형제가 응우옌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으로 진격해 홍하 델타를 장악하며 시작되었다. 떠이선은 북쪽의 중국을 격퇴시키고, 남쪽의 태국군도 물리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루었는데, 이때가 1788년이었다. 그러나 남부 사이공에서는 또 다른 정권, 쟈딘 정권이 수립되었고, 15년간의 내전을 거쳐 남부 사람이 주체가 된 세력이 떠이선을 물리치고 19세기 초에 새로운 왕조를 수립했다. 이 왕조가 현재의 베트남 전체를 통괄하는 최초의 통일 왕조 응우옌 왕조이다. 응우옌 왕조의 국호가 비엣남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통일 베트남의 역사는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1802년에 응우옌 왕조가 베트남을 통일했지만, 1859년에 프랑스가 사이공을 중심으로 식민지배를 시작했으니, 실질적으로 통일 베트남의 역사는 고작해야 57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독립을 위한 저항이 계속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프랑스가 물러가고 1945년에 호치민이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봉건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이 들어서지만, 이후 다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갈라져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모두들 알다시피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접수하고 통일을 이룬 것이 1975년이다.

따라서 남북 간의 대립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짧았던 통일 왕조시대를 거쳐 또다시 남북 간의 긴 내전을 겪었으니, 이런 역사가 남북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전쟁이 종식된 1975년 이후를 진정한 통일 시대로 본다면 베트남 통일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그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베트남의 역사에 대한 짧은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베트남 여행이 조금 더 알차게 다가올 것이다.

사이공 인민청사 앞에 위치한, 아이를 안고 있는 호치민동상은 최근에 손을 들고 있는 동상으로 바뀌었다.

하노이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호치민이다.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그의 이름을 따서 통일 이후 호치민으로 개명을 했다. 그러니 베트남에서 호치민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혁명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체 게바라를 꼽지 않을까. 별 달린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티셔츠에 새겨진 팝컬처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지만, 불꽃같은 삶을 드라마틱하게 살고 간 체 게바라가 위대한 혁명가라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20세기 위대한 혁명가로 호치민을 꼽고 싶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탐독한 이 겸손한 혁명가는, 오늘날의 베트남이 있게 만든 장본인이고, 지금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로 불리며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인근 국가에서도 호찌민의 초상을 걸어놓고 있는 집을 볼 수 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깊은 굴곡을 지닌 유서 깊은 도시, 하노이 역에 도착한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라오까이에서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하노이에 내려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로 택시를 타고 갔는데, 베트남 택시가 악명이 높은 지라 걱정을 했다. 여행지에 대한 선입견은 직접 경험을 통해 크게 수정되는 일이 많다. 베트남 택시에 대한 악명을 익히 들었지만 정작 나는 호치민과 하노이를 여행하는 도중에 택시 문제를 겪은 적이 없다.

이런 골목에 위치한 호텔 문 앞까지는 택시가 들어가지 못한다

택시는 정확하게 내가 예약한 호텔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정확하게 내려주었다는 표현은, 우리가 묵을 숙소가 위치한 호텔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 내려주었다는 말이다. 하노이의 호텔은 좁은 골목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택시가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파에서 미리 검색을 하고 예약을 한 호텔인데, 저렴한 가격에 시설이 깔끔해서 매우 만족스러운 호텔이었다.

사파에 머무를 때도 비가 왔는데, 하노이에 머무를 때도 자주 비가 왔다. 비 오는 거리의 정취가 하노이의 좁은 골목들과 어우러져 이국의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풍겼다.

논란의 역사 :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이후, 탄핵 심판의 결정을 인용해달라는 사람들과 탄핵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세 대결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특히 탄핵 심판의 무효를 주장하는 측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사주와 언론 미디어의 조작에 의한 탄핵임을 주장하고, 체제 전복을 위한 날조라고 이야기 하면서 SNS상에 국가 체제 전복을 위한 시나리오라고 말하는 이야기들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접하고 종북 척결을 내세우는 탄핵 반대파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바로 그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남베트남의 패망에 대한 주장이었다. 남베트남의 패망 뒤에는 사회의 안정을 뒤흔든 북베트남 정부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베트콩의 날조된 여론, 그리고 날조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속아 넘어간 남베트남 지식층의 동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남북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남베트남의 지식층이 어떻게 숙청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이야기도 따라 온다.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숙청의 진실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해외 유학 시절 많은 베트남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베트남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었다.(대부분의 친구들이 자유로운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영어 실력을 갖추지는 못해서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면서 베트남의 패망의 원인을 미군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분석을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남베트남 국민의 측면에서 바라본 적은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이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깊게 알아보아야 했다. 남베트남의 패망 이후 엄청나게 증가했던 ‘보트피플’의 슬픈 이야기부터 베트남 패망 시 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영화와 책을 통해서 접해 본지라, 정말 정부와 사회의 불안이 공산당의 날조와 여론 조작에 의거한 것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남베트남은 왜 패망하였는가?

남베트남의 패망에 대한 조사를 거치다 보니, 국내 자료들과 해외 자료들 간의 차이점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특히 미국의 군사적인 관점에서 베트남 패망을 바라본 자료들이나 북베트남의 관점에서 바라본 남베트남의 패망의 원인, 한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베트남 패망의 원인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국내 자료들의 경우 베트남 패망의 원인으로 북베트남의 역할과 메트민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지리적·전술적인 이격성을 지적하는 자료들이 많았다.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상에 북베트남의 공산화 전술에 의해 사회·정치적인 불만이 확장되어 멸망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패망에 관하여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단순히 북베트남 또는 공산당의 책동으로 인하여 남베트남이 무너질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공산당과 북베트남의 선전이 남베트남 국민에게 유효하게 먹혔느냐?’는 질문이며, 이에 대한 답변으로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과 실행’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일 북베트남과 공산당의 전략이 유효했다고 가정해 보자. 왜 그런 전략이 미국이나 서방국가들의 공산화에서는 효력을 바루히하지 못했는가? 6~70년대 미국의 반전 운동이나 흑인 인권 운동을 보면, 그런 운동들을 조정해서 공산화를 시도하는 방안도 가능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남베트남의 멸망에 단순히 공산당의 책동만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은 일치된 국민 여론이나 강요된 단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프랑스의 패전으로 귀결된 이후, 제네바 협약을 통해 프랑스와 베트남 정부가 휴전을 체결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몰락하는 상황을 틈타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전역을 장악하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 아래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바오다이(Hoàng đế Bảo Đại)를 옹립한다. 명목상 ‘독립 베트남 왕국’의 수립이라고 했지만, 실지로는 일본의 위성국가였던 ‘만주국’의 부이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위치였다. 바오다이는 이후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할 때까지 독립 베트남 왕국의 황제로 있다가 1944~45년에 베트남에 닥친 대기근을 거치며 세력을 확장한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이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자 보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호치민은 1941년 오랜 기간의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베트남에 돌아와 베트민을 결성했다. 그가 베트남 무장 투쟁을 시작한 이래 1945년 8월의 무장 혁명은 베트남 독립의 주춧돌이 되었다.

한편 1945년 7월에 독일 포츠담에서 연합군 간에 회담이 열렸다. 연합국은 인도차이나의 위도 16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맡도록 하고, 프랑스의 식민지 수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합의한다. 이 아래에서 영국군으로 구성된 인도차이나 상륙군이 8월 중순에 인도차이나 지역에 진군하여 일본군의 무장 해제 및 연합군 포로의 지원 작업을 진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연합군의 태평양 지역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제지하면서 전체적인 일정이 뒤로 밀리게 된다. 맥아더는 8월 28일로 예정되어 있는 일본 정부와의 항복문서 서명 이전까지는 어떠한 군사적 작전의 수행도 불가하다고 주장했고, 항복 문서 서명식이 태풍으로 인해 9월 2일로 연기되기까지 했다. 이러면서 8월 한 달간 베트남은 이미 항복을 한 일본군과 8월 혁명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고 있던 베트민이 동시에 장악을 하고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권력·군사력의 공백기를 틈타, 호치민과 그의 추종 세력은 하노이와 사이공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특히 치안과 군사력의 공백기를 틈타 자신들과 정치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세력들을 암살하거나 숙청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정치적·사회적 입지를 장악해 나갔다.

한편 맥아더의 반대로 군사 작전 진행을 방해받고 있던 영국군은 맥아더가 일본 정부에게 정식 항복 문서를 받은 3일 뒤인 9월 5일, 의료 및 지원 부대인 11대대를 낙하산으로 투입했다. 이후 9월 13일 영국군 본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상륙군이 인도차이나 지역의 일본군으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게 되는데, 이 항복을 받은 인도차이나 상륙군의 사령관 더글라스 그레이시는 베트남의 정치적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레이시는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있던 프랑스 식민지 군을 급한 대로 무장시켜 사이공 지역을 중심으로 치안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 베트민이 장악하고 있는 행정 시설과 관공서를 일부 무력을 사용하여 되찾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움직임은 베트민을 비롯한 베트남 주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사이공을 중심으로 영국군·프랑스군·일본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베트민과 그 추종세력, 그리고 연합세력들로 구성된 민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1964년 프랑스 식민지 군이 다시 투입되어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 호치민과 베트민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과 끊임없이 작은 규모의 게릴라 전투를 진행한다. 동시에 베트남 내부에 남아 있던 우파 국가주의자들의 지도자들과 추종 세력들에 대한 숙청 작업도 진행한다. (※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를 ‘위대한 숙청(Great Purge)’으로 부른다)

1946년 12월 19일, 베트민 민병대의 총사령관인 보구엔 지압 휘하 30,000명의 베트민 민병대가 하노이의 지배권을 두고 대규모로 충돌하게 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 속에서 프랑스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북쪽의 지배력을 확산하고 있던 호치민에 대항하여 사이공에 새로운 왕을 올린다. 이 왕이 일전에 자신들이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던 바오다이이다. 바오다이는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통해 남부 베트남 왕국을 프랑스 연합의 일원으로 두겠다는 서약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는 이로 인해 북쪽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게릴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베트민 및 베트남 인민 공화국,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이후 1950년, 북쪽에 위치한 베트남 인민 공화국은 소련과 중국 모택동 정부로부터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사이공에 위치한 바오다이의 베트남 왕국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정식 정부로 인정받았다. 이러면서 상호 간의 경쟁은 내전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 전역에 대한 개입을 주장했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 5성 장군으로 역임하며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정보당국의 보고에 따라 프랑스군이 베트남을 다시 실효적으로 지배하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다시 한번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전쟁에 휘말릴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개입은 거부한다.

이런 가운데, 소련과 중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호치민과 베트민은 보구엔 지압의 지휘 아래 프랑스 식민지군 주력을 라오스와 베트남 인접 지역인 디엔비엔푸에서 고립시켰고, 이를 통해 항복을 받아냈다. 프랑스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얻어낸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와 북베트남 정부는 16도선을 경계로 하여 300일 동안의 기한을 가지고 주민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협상했다. 또한 이 기간이 끝나면 베트남 정부 구성을 위한 자유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북베트남에서는 소수였던 카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약 100만 명이 남베트남으로 이주하였고, 남베트남에서는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가운데 3년 동안 북베트남 정부는 토지 지대를 혁신적으로 낮추는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지역 농부들에게 분배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공식 기록으로 1만 4천 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남부 베트남 왕국은 프랑스 정부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바오 다이가 우파 정치인이자 유능한 관료 출신인 응오 딘지엠을 총리로 임명하여 북베트남과의 정책 대결에 돌입했다. 응오 딘지엠은 학창 시절부터 유명한 수재였으며, 프랑스 치하의 바오 다이 왕정에서 돋보이는 업무 능력과 청렴함으로 많은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응오 딘지엠은 베트남의 자주적 결정권을 넓혀 나가는 노력을 했고, 3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독립 운동가와 정치 세력들을 만나 관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이 처음으로 그에게 정부 요직을 제안하기도 했을 정도로 유명한 능력자였다.

하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응오 딘지엠은 정치적으로 융합될 수 없는 북베트남 정부 대신 바오 다이 치하 남베트남의 총리로 취임하기로 결정하였고, 프랑스 망명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그가 처한 남베트남의 상황 역시 쉽지는 않았다. 허수아비 왕인 바오 다이는 권좌만 가졌을 뿐 실권은 가지지 못했고, 남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부역자들과 대형 군부 간의 경쟁, 그리고 당대 최대 범죄 조직이 경찰을 운영하고 있는 혼란의 무정부 상태였다.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여 나라를 운영하게 된 응오 딘지엠은 자신의 친인척과 주변 친구들을 중심으로 국가 운영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 북베트남에서 이주한 100만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은 딘지엠의 정치적 지지층을 넓혀주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딘지엠은 자신을 공격하던 군부를 비롯한 우파 정치 세력을 공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정치적 혼란의 상황에서 프랑스와 북베트남 정부,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 간 협의된 제네바 조약에 따른 통일 총선이 다가오자 양측의 긴장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 총선이 UN의 감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총선의 관리감독을 지역 책임자가 진행한다는 조약 속 내용을 부정하는 내용이 되어 긴장의 수위를 높였다. 특히, 자유 총선이 실시될 경우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산주의자 호치민이 국가의 수장으로 뽑힐 것이며 바오 다이가 권좌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공포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퍼져 나갔다. 이는 베트남 전역과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막을 수 없다는 우려에 빠진 미국이 남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결국 1955년 10월 23일 남베트남에서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딘지엠은 자신의 동생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는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전체 투표수의 98.5%에 달하는 찬성을 얻어 정권을 장악, 자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미국의 정보 관계자와 정권 조언자들은 60~70%의 지지를 얻는 것이 훨씬 보기에 자연스럽다고 조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딘지엠은 지지율이 권력의 권위를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 지지율을 높였다. 북베트남 역시 조작된 투표 속에 99%의 찬성을 얻어 북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딘지엠은 남베트남 일반 국민의 폭넓은 지지는 얻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이었다.

당시 베트남 국민의 대부분이 불교 신자였던 반면 일부 지배층과 지식층은 천주교 신자였다. 이와 같은 종교적인 차이는 정치적인 분열로 이어졌고, 공산주의자 척결을 내세운 딘지엠 치하에서 천주교를 제외한 종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는 곧 남베트남의 국민적인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딘지엠이 1955년에서 57년 기간 동안 처형한 정치범이 1만 2천여 명인데, 1958년에는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가 4만여 명을 넘어서는 공포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절대 권력을 지니 딘지엠의 측근인 동생과 친인척들이 정부 주요 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부분에서 각종 부정부패를 일으켰다. 종합적으로 딘지엠에 대한 국민적 평가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군부 역시 최악의 무능을 보이면서 군기 문란 행위를 지속하다 절대적인 전력 우위의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패배하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딘지엠은 자신의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59년 ’10호 법안’을 발표한다. 모든 정치적 혼란 행위에 대해 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법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딘지엠에 대항하는 저항 세력인 National Liberation front (NFL – 베트콩)이 결성되었고,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산하게 된다.

딘지엠의 정책 중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토지 정책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돌려준 것이다. 그렇게 토지를 돌려받은 지주들은 농부들에게 자신들이 수 년 동안 받지 못한 토지 이용료를 강제로 받아내려 하였고, 정부는 심지어 이를 돕도록 군대를 동원해 주었다. 이는 지대를 낮추고 빚을 탕감해주는 북베트남의 정책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군부는 능력이 아닌 정치적 세력에 의해 승진이 결정되었다. 지주들과 결탁하여 무리한 지대를 강제하는 행위로 크게 민심을 잃은 정부는, 그에 따라 군인들이 각종 무기와 장비를 베트콩 및 북베트남에 매각하기 시작하면서 군사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미국은 딘지엠 정권이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고 판단한다. 베트남 군부에게 쿠데타를 통한 딘지엠의 퇴출을 승인하자,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기 시작한다.

1963년 군부는 딘지엠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다. 하지만 이에 끝나지 않고 상대 군부를 몰아내기 위한 크고 작은 쿠데타가 2년간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정국은 내전이 반복되며 통일된 정권의 운영 아래 정책적으로 개발하거나 집행하는 것이 부족한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상태는 미국의 대대적 개입이 있었던 1965년 이후 공군 참모총장인 응유엔 카오키와 응유엔 반 티에유가 각각 총리와 국가 위원회 수장으로 임명되면서 최고치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들의 정책 역시 딘지엠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식과 사상에 대한 검열의 강화, 시민 자유의 억압을 통한 공산당 척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1967년 반 티에유는 자신들의 정적을 몰아내고 미군이 강요한 총선을 조작하여 34%의 지지율을 얻어냈고, 이로 대통령에 임명된다. 하지만 그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다를 게 없다. 미국은 사회 각계각층의 반전여론이 거세졌다.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던 닉슨은 워터 게이트로 사임했다. 이후 미국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면서 북베트남에 의한 남베트남의 패망은 가속화된다. 1975년 봄 공세(호치민 캠페인)시에는 남베트남군의 수뇌부와 정부의 무능으로 제대로 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 것 또한 이에 박차를 가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이 아니다, 민심의 이반이다

역사적인 기록들과 사실들을 두고 확인해 보면, 남베트남의 패망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나 여론조작에 의해 일어난 간사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베트남의 기득권 세력과 정부 인사들, 군부의 부정부패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사유라 본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나라도 내부 단결 없이 외부의 침략을 이겨낸 경우는 없다. 작고 힘없는 나라라 할지라도 지도층이 각성함에 따라 백성들이 화합하게 되면 큰 나라도 쉽게 나라를 공격하거나 침략할 수 없다. 하지만 지도층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면 그 틈을 타고 국민들의 불만이 올라오게 되고, 그 불만들을 이용한 다른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거나 외세의 침략을 받는 듯 혼란이 계속되게 된다.

남베트남의 정권을 잡았던 딘지엠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배경과 유능한 관료라는 후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베트남을 북베트남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 기회가 있었다. 비록 허상뿐이었던 바오 다이 황제 아래 총리로서 기회를 잡은 것이었지만, 공산당과의 대결이라는 중대한 명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까지 지원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기득권의 권익과 이해관계를 보살피지 않고 개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딘지엠은 분에 넘치는 권력을 가진 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망쳐 놓은 남베트남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그 뒤를 이은 어떤 정권도 해결하지 못하는 병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바오 다이 황제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한 황제라는 오명과 향락에 빠져 살아 국민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때 권력자로서 국민적인 지지를 얻어 남베트남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혹자들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활동한 북베트남 간첩들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약 딘지엠 정권이 국민적인 지지를 얻었다면,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행하면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였다면, 비판을 수용하면서 건전한 토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이루어냈다면-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무능하지 않았다면 간첩의 준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나라가 흥망성쇠의 길을 걷는 데 있어서 지도자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조선 시대의 대학자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외침(外侵)이 아니라, 공직자의 부정부패에 의한 민심의 이반(離反)이다.

만일 이 나라가 정말로 종북 세력에 의해 여론이 호도되고 조작되어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정부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눈감고 ‘그럴 수 있다’ 말하기보다는 나서서 사회의 악을 척결하여 민심의 이반을 다스린 후 그런 주장을 펴야 하지 않을까?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들의 의미를 폄하하고 다수결에 의한 소수의 탄압이라 주장하기 전에, 민심이 자신들을 떠나게 된 이유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반성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는 세상이 되길 기대해 본다. 우린 적어도 그런 정치인을 가질 자격은 갖춘 국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문 : 로빈의 서재

지켜줄 가치가 없는 정부였다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가 영원히 ‘미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20년의 세월과 아까운 젊은이들의 목숨이 필요했던가.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군 탱크가 사이공의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점령한 직후 남베트남군 병사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면서 버리고 간 군화들이 사이공 인근 1번 국도에 널려 있다. 자료사진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32)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

베트남 전쟁은 어떤 교훈을 주었는가? 미국 사회에는 확실한 교훈을 주었다. ‘베트남’이라는 단어는 곧 실패와 좌절을 의미했다.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전략으로 싸운 전쟁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실패는 세계적 차원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큰 타격을 주었다. 세계 경찰국가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미국의 동맹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1978년 이란을 시작으로 1979년 니카라과가 미국의 품에서 벗어났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독재자들이 필리핀과 한국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다행히 1980년대 후반 공산정권의 연이은 몰락으로 필리핀과 한국은 제1세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실패 이후 당분간 다른 지역에 대한 개입도 꺼리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뒤 미국은 약 10년 동안 다른 지역에 대규모로 개입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이후 1983년 그레나다 상륙 이전까지 해외 파병과 개입을 꺼렸다. 석유의 보고 이란이 넘어가도, 중남미의 주요 국가인 니카라과가 넘어가도, 심지어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사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침공을 받아도 미국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탈레반을 비롯한 반군에 대한 지원은 계속했지만. 카터의 인권외교 역시 베트남 전쟁의 교훈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경험한 베트남 전쟁은 모두 달랐고, 따라서 각각이 갖고 있는 교훈이나 기억도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만약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한다면, 의도적으로 다른 교훈과 기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닉슨과 베트남 참전에 반대했던 클린턴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었고, 클린턴이 적성국 북베트남을 계승한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으리라. 베트남 관련 영화 중 초기작인 (1978)에 나오는 상이용사들 사이의 대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군인 1: 참전하고 돌아온 사람이 다시 가겠다고 하는 경우는 처음 봐. 내 머리론 이해가 안 돼.

군인 2: 잠깐만. 난 이해는 돼. 왜냐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곳에서 했던 일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으니까. 목숨 바쳐 싸우다 돌아왔는데 그게 다 헛된 일이었다고 하면 무슨 보람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말이야.

군인 3: 그래서 다시 돌아가는 거군.

군인 2: 그래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내가 한 일은 옳은 일이고 이건 영광의 상처다. 내가 하반신 마비가 되고 사람을 죽인 걸 정당화해야 해. 그래서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거야. 솔직히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데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 수 있겠어?”

대부분의 베트남전 참전자들이 갖고 있는 기억과 교훈은 결코 밝지 않았다. 아니 밝을 수가 없었다.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 그들을 간호하면서 그 고통을 함께 느꼈던 이들이 귀국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호가 아니라 냉대의 눈초리였다. 마치 모든 참전자들이 밀라이에서의 학살에 가담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존슨, 닉슨 행정부와 공범이라는 것인가?

미국의 대통령들은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미국 정부의 결정은 문제가 있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결정에 의해 그곳에 갔던 모든 분들은 다 애국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애국적인 노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국가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단순했다. 남베트남의 패망으로부터 한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미국 못지않았다. 같은 분단국가였다. 그리고 자신의 안보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서 미국보다도 큰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은 하나의 성전이었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한국이 지지했던 측이 패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무소불위의 존재라고 믿었던 미국마저도 남베트남 정부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는 것을 목격했다. 한-미 동맹에 안보를 의지하고 있었던 한국에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베트남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 했고, 베트콩이 악의 축이었다는 지금까지의 정부의 주장은 모두 거짓말이었나?

공산주의는 전염병이라고 했다

베트남에 왜 공산주의가 퍼졌을까

국민들이 쓸데없이 갑론을박

토론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도대체 누가 토론을 하게 만들었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 잃었다

전쟁·안보위기로 피해 입은 분들

애국자고, 보상에 최선 다하겠다”

박정희는 그런 담화문 발표했어야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하루 전인 1975년 4월29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인도차이나반도 사태는 우리에게 더없이 귀중한 교훈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특별담화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공산주의와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우방 강대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주국방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로부터 이기기 위해서는 ‘부질없이 앉아서 갑론을박 토론만 하고 시간을 허송’해서는 안 되고, ‘정부와 군과 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힘을 하나로 뭉쳐 총력으로 대결’해야 한다. 그리고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님이 다 부서진 배 12척으로, 왜적의 함정 수백척과 싸우실 때 장병들을 독려하시며 하셨던 말씀”인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말로 특별담화를 마무리했다.

한국 정부는 분명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동병상련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남북한이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때였다. 197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에서 남한이 북한을 넘어섰지만, 남과 북의 국력에 대한 비교는 평가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만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베트남 상황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선명 야당으로서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투쟁을 내세우고 있었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왜 투쟁의 깃발을 접었겠는가? 남베트남 패망을 일주일여 앞두고 김 총재는 스스로 박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의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5월21일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벌였던 야당의 총재가 대통령과 긴급조치 9호로 헌법에 대한 비판을 모두 불법화시킨 유신 대통령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베트남의 충격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수회담 직후 김 총재는 ‘국정 전반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격의없이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면담 내용을 다 털어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간단한 성명을 발표했다. 베트남 상황의 충격으로 선명 야당 총재는 꼬리를 내렸다. 이후에도 회담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남베트남 패망 직전 김일성의 중국 방문에 대한 설명이 김영삼 총재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신 정부에 남베트남 패망은 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회였다. 유신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내놓았던 담화는 바로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담화를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때까지 유신 정부가 추구해 왔던 바를 중단 없이 계속 추구하라는 것이었다. 자주국방과 총화단결이 바로 그것이었다. 야당도 스스로 반유신 투쟁을 접었다.

한국 정부가 발표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국민 사과였다.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한 것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한-미 동맹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전달했어야 한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을 결정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미국이 철수를 결정할 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철수계획을 미루다가 더 많은 피해를 봤다. 베트남 파병으로 군인들도 힘들었지만, 그로 인한 한반도 안보위기로 소중한 국민들에게 피해를 끼쳤다. 전쟁과 안보위기로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은 애국자였고, 이들에 대한 보상에 최선을 다하겠다.

정의롭지 못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유엔과 제3세계에서 한국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북한과의 외교전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해 비동맹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지만, 한국 대표는 회의장의 문지방도 넘지 못했다. 주한미군 감축을 막기 위해 파병을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주한미군은 감축되었다. 대통령의 담화에는 그 어느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플러스알파’를 노렸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동맹국의 위치에 서려고 했다. 일본이 경제적 측면에서 제1의 동맹국이라면, 한국은 군사적 의미에서 그 자리를 노리려고 했다. 베트남에서는 철수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타이나 캄보디아라도 들어가려고 했다.(동아일보 1970년 4월27일치) 베트남 파병을 통해서 얻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미련 때문인 것처럼도 보였다. 만에 하나 타이와 캄보디아에 한국군이 파병되었다면 1973년 타이의 민주화, 1975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한국군이 고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확대에 대한 미국의 지지가 1951년부터 시작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군이 타이나 캄보디아에 주둔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의 군사동맹국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유신 정부의 독주는 이제 완전히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이후 긴급조치 9호는 10·26 사태까지 장장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정부와 대통령을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은 모두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던 그 체제가 남베트남 패망으로부터 4년이 지난 뒤 스스로 무너졌다.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몰락이 재현되는 건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놀란 미국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을 외면한 채 신군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일이 한반도에서 재현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반도의 안정을 통해 최소한 일본은 지켜야 한다. 1950년이나 1980년이나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1894년 류큐(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겨준 뒤 조선은 안 된다고 개입한 청나라나 1975년 북베트남의 승리를 지켜본 뒤 한국이 불안해서는 안 된다고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미국의 속마음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유신체제는 왜 속절없이 무너졌을까? 한국 정부는 남베트남 패망으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대통령의 담화에 나타난 내용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더 중요한 교훈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남베트남 정부는 지킬 만한 가치를 가진 정부였는가? 지킬 만한 가치가 없는 정부였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미국은 응오딘지엠(고딘디엠)을 베트남의 워싱턴이라 했고, 응우옌반티에우를 프런티어 정신을 가진 지도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켰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길에 널브러져 있는 군인들이 버리고 간 군복이었다. 지엠은 사살되었고, 티에우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은 베트남으로부터 왜 떠났는가? 미국 내부의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와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정부였기 때문에 미국이 지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의 대중매체와 의회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내부 부패로 인해 중국 대륙을 잃은 장제스(장개석)와 부패와 독재로 혁명에 의해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던 이승만에 대해 지지를 철회한 경험을 갖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또다시 잘못된 포석을 했던 것이다.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가 영원히 ‘미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20년의 세월과 아까운 젊은이들의 목숨이 필요했던가.

든든한 정부와 탄탄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정부와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최대한 공정한 선거제도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는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합리적으로 권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제도이고, 그렇기에 이들의 권력에 대해 사회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정부와 정치인들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남베트남 정부는 과연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가? 모든 선거는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렸다. 심지어 어떤 선거는 투표자의 수보다 더 많은 득표수가 나오기도 했다. 선거보다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지도자들이 더 많았다. 중요한 정책은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입안, 실시되었다. 지주와 가톨릭은 그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소작인과 불교도들은 차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층은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도대체 이들이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지, 왜 서민들은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냉전은 이러한 교훈들을 모두 가려버렸다.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절대 명제 속에서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일생에 큰 오명을 입은 월터 로스토(미국의 경제학자)였지만, 그가 했던 명언이 있다. 공산주의는 하나의 전염병이다. 전염병은 몸이 약한 사람한테 급속하게 번진다. 베트남에 왜 공산주의가 퍼졌을까? 국민들이 쓸데없이 갑론을박 토론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도대체 누가 국민들로 하여금 토론을 하도록 만들었는가?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인간은 바보다. 금방 망각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늪에 빠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민주주의와 투명성,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교훈을 한국 사회에 주었다. 민주화는 이룩했지만, 지금 한국은 그 셋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담화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질없이 앉아서 갑론을박 토론만 하고 시간을 허송’하고 있다. ‘정부와 군과 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힘을 하나로 뭉쳐 총력으로 대결’하기 위해서 베트남 전쟁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안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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