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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는 어떻게 다른가? – 기독정보넷
천국이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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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하늘나라 아니고 ‘하나님 나라’ – 브런치
천국, 하늘나라 아니고 ‘하나님 나라’ · 기독교인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 있는 낙원, 천국을 떠올리지는 않는가. · 그러나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2/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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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 – 하나님나라, 천국, 하늘나라, 낙원, 천당
물론 낙원을 우리는 천국, 혹은 천당, 하늘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낙원과 천국, 낙원과 하나님나라는 구체적으로 살피면 그 의미가 좀 다르지만 우리는 …
Source: researchheresy.com
Date Published: 1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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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리고 하늘나라 >는 같은가? (1)
<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리고 하늘나라 >는 같은가? (1). 1. 들어가는 말. 사탄과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처음 두 명의 통치자이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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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 나무위키:대문
1. 하늘나라2. 사후세계로서 특정조건을 만족시키면 갈 수 있는 곳. 2.1. 이슬람의 천국2.2. 기독교의 천국. 3. 현실?4. 추상어로서의 천국5.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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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하늘 나라 천국
- Author: Gyunam Bak :박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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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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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천국, 하늘나라, 낙원, 천당
하나님 나라, 천국, 하늘나라, 낙원, 천당
이인규
성경에는 우리 사후 영혼이 가는 곳에 대해서 하나님나라, 천국, 하늘나라, 낙원등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일반적으로 천당이라는 용어도 있지만, 이 단어는 사실 성경에 없다.
이 단어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1.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히브리어 “말쿠트 야훼”. 알람어 “말쿠타 디스마이아”,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실레이아 톤 우리논”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하나님의 통치영역을 뜻하는 개념이다. 영어로는 Kingdom of God, Kingdom of heaven이라고 번역한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과 동일시 되어진다.
예를 들면 몰록은 암몬의 신이었고 그모스는 모압의 신이었던 것처럼(왕상1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였다.
즉 여호와는 만유의 주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지만,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시는 여호와 유일신의 통치적인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민족들과 교제나 혼인을 할 수 없었으며, 땅을 얻기 위한 영역적 전쟁은 곧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동일시 되었으며,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였다. 우상을 숭배하는 종족들은 전쟁에서 모두 죽여야만 했던 것도 그 이유이다.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 가서도 여호와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노새 두 마리에 실어가기를 엘리사에게 요청한다(왕하 5:17-18)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토가 동일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었으며, 그들의 장막에 거하시는 분이었으며, 나아가서는 그들의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동일시 되어져 왔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에게 제자를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라고 물었을 때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의 출현을 그들의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줌으로서 정치적이며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인물로써 기다리고 있었기에, 세례요한마저도 예수님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의 남북조가 멸망을 당하고 포로기를 거치며 그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어짐으로서, 그들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점차 지리적 영역이나 정치적 실체만의 개념에서 떠나게 된다. 즉 국한된 영토적인 개념에서부터 넓은 영역적이며 내면적인 개념으로 생각되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큰 갈등과 긴장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의 실체적이며 영역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충성된 개인들의 내면적인 믿음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간주하게 되며, 마지막 때와 연관되어지는 종말적이며 심판적이며 영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된 관점에서 마지막 때 인류를 심판하시는 역사의 정점에서의 새로운 왕국의 출현을 고대하게 된다.
성경에 있어서, 예수님의 해석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는 세 가지의 개념으로 정의되어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즉 과거적 개념의 하나님나라, 현재적 개념의 하나님나라, 장래의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조화있게 이해하여야만 한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나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신정정치의 영역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인 성도로 구성되는 내면적인 영역
셋째는 종말적이며 미래적이고 궁극적인 세계의 실체
안토니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리출(Ritschl), 하르낙(Harnack), 그리고 도드(C.H. Dodd)는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반면에 봐이스(Weiss), 슈바이처(Schweitzer), 그리고 몰트만(Moltmann)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개혁주의종말론, 안토니 A. 후크마, 기독교문서선교회, 65-66쪽)
감리교의 존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사실에 대한 두 개의 술어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하늘에서 누릴 행복한 상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상태로서, 이것은 소유한다기보다 인간 심령 속에 있는 하늘의 영광스런 상태이다. 이것은 지상에 실현되는 복음의 시대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백성들의 사회인데, 먼저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이 천국이 특히 지상의 것으로 표시되기도 하고, (천상의) 영광의 상태로도 나타났으나, 보통으로는 둘 다 함께 포함한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성광문화사, 345-346쪽)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되며,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것이며,(마 11:2) 하나님 나라는 오직 능력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고전 4:20)
나라의 본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8:12)
농부에게 맡겨진 포도원은 빼앗김을 당하며(마21:33-40) 왕궁의 혼인잔치는 택한 사람들인 이스라엘 외에 청함을 받은 이방인들로 채워질 것이다.(마 212:1-14)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겨자씨의 성장에 비유되었으며(마 13:31) 여자가 가루 서말에 넣어 부풀어지는 누룩에 비유되었는데(마 13;33) 그것은 진행적이며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져 가는 영역적인 개념이 분명하다. 또한 밭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어짐으로서(막4 :3-20) 선택적이다.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하나님 나라는 계속 진행되며 확장되어진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르켜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마 3:2)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과 그 나라가 임재한 것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눅 11:20)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내면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강조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이라고 설명하였다.(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없는 내면적 영적실체이며, 믿는 성도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또한 성도들을 곧 그의 나라와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된다(벧전 2:9. 계 1:6. 5:10)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 1:6)
주님이 직접 가르쳐 준 기도문은 그 나라가 임할 것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하신다.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요 3:3. 5) 또한 믿는 자들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마 6:33)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며(요 18:36)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다(눅 19:11)
반면에 우리가 죽어서는 가는 천국, 소위 낙원 또는 천당이라고 불리는 곳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장소적인 개념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
그 나라는 미래적이며 장래적인 의미로 비유하셨으며(눅 19:11 이하) 또한 종말적으로 주님과 만나게 되는 장소로 설명하기도 하였고(마 26:29), 불의한 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6:9. 15:4. 갈 5:21. 엡 5;5)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12)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3-24)
사도바울은 자신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예수와 함께 거할 것을 소망하였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사도요한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천국보좌에 있음을 보았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계 20:4)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종말적이고 궁극적으로 사후영혼이 가는 장소의 실체라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택하신 몇몇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시며(막 9:1) 그 변화산에서 보여준 사건은 상상적인 허상이 아니라, 영적이며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하여 “죽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서기관에게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았음으로 설명하시며(막 12:34) 분명히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였다.(눅 13:28) 계시록에서의 그 나라는 갑자기 나타나게 되며 완성되어진다. 궁극적으로 구원과 멸망, 영생과 영벌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게 되어짐으로서(계 20:7-10) 그 나라는 심판을 거쳐야만 한다.
“내가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셨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 할 것이라.“ (단 7:13-14)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다.
그 나라는 이방인을 포함한 예수를 믿는 성도들로 구성되어진 영적인 영역으로서 점점 확장되어지며 진행되어지게 될 것이다. 그를 믿는 자발적인 개인들로 구성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내적이며 영적인 실체로써 점점 그 영역을 넓히게 되어질 것이며, 마침내 종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선택적이며 심판적으로 완성되어지며,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짐으로서, 현실적인 세상나라를 모두 포괄하게 될 것이며, 그 나라는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세세토록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이미 임한 나라이며 또한 진행적이며, 그 나라는 영적이기도 하며 실제적이기도 하며, 그 나라는 현재적이기도 하며 궁극적이기도 하며, 그 나라는 통치적 영역적이기도 하며,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개념을 갖고 있기도 하며, 그 나라는 실제적이기도 하며 내면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 나라는 마침내 세상나라를 포함하여 모두를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세세토록 그리스도가 왕 노릇을 하게 되어질 것이다.(계 11:15)
그 나라는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하나님만이 높힘을 받게 될 것이며(사 2:11) 그 분이 몸소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며(사 11:9)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가 곧 교회가 될 수는 없다. 믿는 성도도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가 곧 성도가 될 수는 없다. 교회(에클레시아)의 의미는 성도들의 회중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믿음의 영적 세계도 하나님 나라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영적인 내면세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사후에 가는 곳, 역시 하나님 나라이다. 물론 사후에 가는 천국만이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매우 다양한 관점을 갖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도 과거, 현재, 마래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나라, 천국”이라는 용어를 말할 때에는 정확한 관점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교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구분을 하지 않으며, 너무 남용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것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신정정치의 영역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인 성도로 구성되는 내면적인 영역
셋째는 종말적이며 미래적이고 궁극적인 세계의 실체
하나님나라는 다양한 개념을 포괄한다.
하나님나라는 영역적인가, 통치적인가? 혹은 영역적이며 또한 동시에 통치적인가?
하나님나라는 과거적인가, 현재적인가, 혹은 미래적인가? 혹은 과거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가?
죽어서 가는 사후의 천국(낙원)은 하나님나라가 아닌가?
또한 하나님나라는 이미 도래한 것인가? 궁극적으로 실현되며 성취되는가? 혹은 진행적이며 확장되어지는가?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은 포괄적인 의미로써, 어떤 한가지의 개념만을 하나님나라의 정의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으며, 또한 궁극적이며 종말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온전히 성취되며 실현되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즉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존재하였다.
현재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그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진행하고 있으며, 종말적인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2. 천국과 하나님나라는 다른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와 천국을 다르게 본다. 예를 들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며, 하나님나라는 내면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과 하나님 나라가 다르다고 볼 이유가 없다. 마태와 마가, 누가는 서로 같은 내용의 구절에 단지 천국과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호환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가 같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래 성경구절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가복음 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누가복음 8: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누가복음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누가복음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가복음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같은 구절에서 천국과 하나님나라의 단어를 동시에 언급하면서 동일한 개념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비롯하여, 모든 성경기자들은 하늘(우라노스, Heav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개념은 우리의 머리 위, 하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항상 대기권 위, 혹은 어느 구름 옆, 어느 별 옆이라는 정해진 위치적인 개념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여 나타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때로 간혹 성경에 충실한 복음주의자마저 하늘이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대기권의 구름 위, 하늘의 궁전이라고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베뢰아 계열의 귀신파들은 창세기의 궁창을 마귀의 처소로 본다.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았다는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늘(우라노스, Heaven)이라는 개념은 “포괄적인 천상(하나님이 계시는)”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하늘이라는 의미는 장소적인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개념과도 같이 사용되어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리이다”라는 하늘과 땅을 문자적으로 구분하는 물질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은 아니라고 본다.
“여호와께서는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말쿠트)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주의 나라(말쿠트)는 영원한 나라(말쿠트)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145:13)
위에서 인용한 성경구절과 같이, 마태는 천국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 6:33, 12:28, 19:24, 21:31, 21:43등에서는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호 데오스, Kingdom of God)라는 단어와 천국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마태가 말하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또 위에서 보았듯이,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용어를 거의 호환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즉 실제적으로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없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렇게 단어를 혼동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3. 낙원은 어떤 곳인가?
사람은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낙원으로 간다. 물론 낙원을 우리는 천국, 혹은 천당, 하늘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낙원과 천국, 낙원과 하나님나라는 구체적으로 살피면 그 의미가 좀 다르지만 우리는 낙원도 천국이며 하나님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낙원은 천국에 포함되어진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천국(하나님 나라)은 위의 1번 제목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넓고 다양한 포괄적인 의미를 갖지만, 그러나 궁극적이며 종말적으로 완성될 천국은 예수 재림 후에 부활된 구원 받은 자들의 영원한 거처를 말하며, 낙원은 재림 전에 죽은 자들 중 의로운 자들의 영혼이 예수님의 재림까지 시한적으로 머무는 영적인 개념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중간상태의 교리에 대해서,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어 왔으며, 정통신학적인 학자들 중에서 일부는 중간상태의 교리를 반대하기도 하는데, 많은 견해가 있으며, 그 중에서 문제가 있는 견해들도 있으므로 조심하여야 할 견해들도 있다. 특히 영혼수면설이나 영혼멸절설과 같은 견해들은 인정할 수 없다.
이근삼 교수의 책에서 중간상태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 오엔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떤 생명도 거부한다. 이유는 몸이 죽으면 영도 죽고, 영과 육은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이퍼는 신자는 죽음의 순간에 중간적 몸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적 몸이 죽음으로 포기되고 부활로 영적 몸을 받는 중간에 몸없이 있지는 않는다고 한다….. 마틴 루터는 중간상태란 수면의 경험과 같다고 했다. 수면 시간 중의 일들은 전적 의식이 없는 것과 같다…. 칼빈은 의식없이 잠잔다는 견해를 반대한다. 죽은 의인들의 영혼은 살아서 조용한 쉼을 즐긴다…. 벌카우어는 중간상태를 인간학적 서술이나 이론적 설명으로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레이 썸머스는 분리된 상태를 중간상태라고 말하며 이것은 죽음 이전의 자연적 몸과 부활 후의 영적 몸 사이의 상태를 말한다고 했다. (이근삼, 개혁주의 조직신학개요2, 372-373쪽)
이근삼교수는 “‘분리된’이란 말은 개인들의 죽음과 부활 간의 중간에 경험하는 영적존재의 상태를 말할 때 사용한다. 이 분리된 상태가 의인들과 악인들과 다같이 죽은 후 부활 전까지 의식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 상태에서 영은 몸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의인들에게는 그것이 의식적 기쁨과 행복의 상태이나 악인들에게는 의식적 고통의 상태이다. 성경은 죽을 때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행복 또는 고통을 의식하는 존재의 상태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또한 몸은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실 때 부활하여 변화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죽음과 부활 두사건 간에 영혼이 의식적으로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같은 책, 373쪽)
침례교의 김용복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죽음과 사후세계의 문제는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 경험에 대해서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인지 모르겠다. 특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에 대한 문제는 더욱 더 그렇다. 이 주제는 죽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거나 구원의 신앙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거나 필요 이상으로 탐구하려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제가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서 끼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김용복, 회중주체적조직신학, 616쪽)
김용복 교수는 존 캘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중간상태의 교리를 주장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에 반영되었다고 말한다.
– 장 칼뱅은 중간상태란 신자들에게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잠정적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죽음 이후, 즉각 새로운 몸을 부여받거나 죽으면 영혼과 몸이 함께 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몸을 떠난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의 싸움의 수고를 마치면 복된 안식에 들어가고, 거기서 약속된 영광을 누리기를 기쁨으로 기대하며 기다린다”고 주장했다. 칼뱅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게으름이나 무감각 또는 나른함 같은 것이 아니라 양심의 고요함 그리고 안정”을 누리는 휴식상태에 드러간다. 그러나 이 휴식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직 부활한 신령한 뉵체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년에서 완벽한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최후 심판까지 기다려야 한다. 중간상태에 대한 칼뱅의 해석은 이후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신앙고백서들에 대체로 반영되었다“ (김용복, 회중주체적조직신학, 619쪽)
또 어떤 책에는 개혁주의는 중간상태의 교리를 부정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음과 천국의 중간장소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개혁주의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죽은 영혼이 거하는 낙원을 곧 천국이라고 한다는 것뿐이며, 사후영혼이 거하는 천국을 부정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1. 사람의 육체는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 버린다. 그러나 불멸의 생존을 누리는 사람의 영혼(죽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는다)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곧장 되돌아간다. 이신칭의를 얻고 완전히 성화된 영혼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 올라간다. 이들은 여기에서 광채와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육신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사악한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지며, 이들은 여기에서 큰 고통과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성경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가야할 곳은 바로 이 두 장소 이외에는 없다고 가르친다. (웨인그루뎀 번역, 32장 죽음 후의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사후영혼이 가는 낙원,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성경은 천국, 하나님나라이며 천국이라고도 표현하므로, 우리는 낙원을 천국이라고 부른다고 이미 설명하였다.
중간상태를 지지하는 견해에는 사후영혼이 가는 낙원은 어떤 물질적이고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상태적인 개념이라고 본다. 사후영혼이 가는 낙원이 지구상 어느 장소나 지역에 실존하는 것은 아니며, 하늘의 장소, 즉 달이나 화성, 명왕성 옆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후 영혼이 머무는 장소가 지리적이며 물리적, 물질적일 수는 없다.
개신교의 중간상태의 교리는 카톨릭의 연옥 교리와는 전혀 다르며, 이러한 중간장소적 개념을 우리는 부정한다. 그곳은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와 같이 회개의 기회가 다시 없기 때문이다. 즉 사후영혼이 가는 낙원은 천국을 가는 중간에 있는 장소와 물질적인 장소의 개념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하나님나라, 천국은 우리가 신체적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사는 장소로서 물리적인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낙원은 구체적으로 신약에 세 번이 언급된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는 먼저 낙원에 대한 정통신학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물론 성경적인 개념을 외면하면서, 교리와 신학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은 아니며 성경적인 근거를 함께 설명할 것이며, 이 용어적인 개념을 정통신학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다.
“중간상태는 영혼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간상태가 있다는 것은 부활과 최후심판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인정한다. 그러나 중간상태에 있는 영혼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 상태의 성질에 대하여서는 많은 의견의 차이가 있다.” (신복윤, 종말론, 개혁주의신행협회 156쪽)
“중간상태는 불완전한 상태이다. 죄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완전히 성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인 완전을 갈망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지금 천당에 있지만, 그들은 죽음의 순간부터 몸의 부활 사이에서 아직 궁극적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 중간상태에 살고 있으며 최종상태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그들의 행복은 아직 완전한 것이 못된다. 이 불완전은 첫째로 비정상적인 상태, 즉 영혼이 육체없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사람의 육체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물질세계와 접촉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 있는 영혼은 부활한 신체와 연합하여 완전한 상태에 들어갈 것을 전망하고 있다.
둘째로 중간상태가 불완전상태라는 것은 주의 백성에게 약속된 상금이 죽을 때나 중간상태에서는 베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중간상태는 성도들이 지금 천당에서 살고 있지만, 그 천당이라는 제한된 장소에 머물고 있는 상태이다. 그들이 천당과 함께 유업으로 약속된 땅을 아직 소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신복윤, 종말론, 개혁주의신행협회, 169-170쪽)
웨슬레의 견해는 어떠하였을까?
– “우리가 죽음에 이르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심판을 받아 지옥 또는 천국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먼저 죽음 가운데서 부활해야 한다. 즉 심판 전에 부활이 있게 된다. 이런 생각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의식하게 되고, 죽은 자의 영혼은 이곳에서 활동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즉 죽음 직후에서 부활 이전까지 영혼이 머무는 곳을 생각하게 된다. 웨슬리도 이 상태를 생각하고 이를 중간상태(the intermediate state)로 본 것 같다. 사실상 웨슬리는 중간상태를 말하였는데, ”모든 선한 사람들의 영혼이 휴식을 취하며,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것“으로 보았다. (존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459쪽)
– 영혼의 불멸설과 관련하여 웨슬리는 육체의 부활 이전까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물 중간상태가 있다고 본다. 웨슬리가 가르치는 중간상태의 개념은 카톨릭이 말하는 연옥의 개념과 아주 다르다. 웨슬리는 천주교의 연옥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히 고통받는 사람들 외에 죽은 다음 고통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습니다”. 연옥에서는 죄인들이 다시 갱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웨슬리의 중간상태는 믿음이 독실한 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 낙원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중간상태에서는 구분이 있을 뿐이지 아직 심판은 아니다 (존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460쪽)
다시 말하여 대부분의 개혁주의와 웨슬레안의 중간상태 교리를 지지한다. 루이스 벌콥에 의하면, 4세기 전부터(400년까지) 현재까지의 개혁주의 교리는 중간상태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 영혼의식설을 지지하는 개혁주의신학자들은 중간상태가 사람에 따라 ‘지복의 상태가 아니면 고통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신학에 친숙한 사람들은 중간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데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영혼과 몸 사이에서 일시적인 분리를 가져온다. 신자들은 죽으면 즉시 축복의 장소로 가며, 불신자들은 고통과 형벌을 받는 비참한 장소로 가게 된다. 각각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음부는 악인들을 위한 중간 장소로써, 중간상태이기는 아지만 거기서 지옥의 고통을 맛볼 것이다.(눅 16:23-27) 이 견해에 따르면 중간상태와 구분되는 천국과 지옥은 낙원과 음부의 영원한 상태요 부활시 결합된 육체와 영혼이 함께 있는 곳이다. 물론 중간상태와 최종상태가 어떻게 다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거의 동일한 경험이 될 것이다. (김용복, 회중주체적조직신학, 619-620쪽)
– 개신교회는 중간상태의 개념은 보유하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간적인 장소의 개념은 거부한다. 죽을 때에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즉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간다고 주장되었다. 몸이 없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현존한다는 것이다(고후 5:6). 이 영혼들의 의식적인 상태 안에 실존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관계는 계속 되며 파괴되지 않는다(롬 8:38). 이것은 복되고 안식하는 상태이다(계 14:13). 이 상태는 신자들의 최종적인 상태는 아니다. 인간은 영인 것과 마찬가지로 몸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없는 상태 안에는 오직 부활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없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다. 약한 자들의 영혼들은 주님의 현존으로부터 추방되는데, 거기에서도 그들은 의식적인 상태 안에서 실존한다. 이것은 고통과 불안의 상태이다. 그것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악한 자도 부활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영원한 부끄러움과 모멸으로의 부활하며, 심판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오톤 와일리, 웨슬리안조직신학, 484-485쪽)
중간상태에 대한 교리를 비판하는 일부 신학자들도 있지만, 그러나 중간상태가 없다는 명백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신학자들은 없다.
또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은 영혼수면설을 주장하지만, 어느 유명한 정통신학자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사전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 또한 낙원은 의로운 자가 죽은 후에 사는 거처로 간주되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낙원과 반대되는 곳은 악인들이 죽은 후에 가는 음부(스올/하데스)로 간주되어 있다. 예수님과 함께 처형을 당하는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그 날 그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아가페성경사전, 241쪽)
안토니. A. 호크마는 종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인간의 미래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 속에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포함되어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재림을 수반하게 될 사건들, 즉 부활, 최후의 심판, 새 땅의 창조등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생각해 보기 전에 우리는 소위 “중간상태”라고 불리우는 것에 관해 우리의 주의를 집중 시킬 필요가 있다.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죽은 자들이 처해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 시대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인간의 영혼들은 구원의 완성이나 파멸의 절정을 기다리면서 안식을 취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왔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견해가 계속 가르쳐져 왔으며 특히 연옥에 관한 교리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칼빈은 루터보다 중간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반대하면서도 중간상태의 교리는 계속 지지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교인들은 영혼들은 단순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칼빈은 Psychopannychia 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이 책에서 칼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간상태란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축복의 상태는 잠정적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르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대 이후로 중간상태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져 왔으며 개혁주의 신앙고백들 가운데 반영되고 있다.(안토니. A. 호크마, 종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33-134쪽)
호크마는 이 글 다음에 중간상태의 교리를 반박하는 일부 신학자들의 견해도 소개하고 있으며, 중간상태에 대해서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견해도 언급하지만, 호크마의 견해는 중간상태에 대한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143쪽-156).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가지 측면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며, “중간상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하면서 중간상태의 교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준다”(156쪽)라고 결론을 맺는다.
성경에서 중간상태의 교리가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눅 24:43일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4:43)라고 하신 말씀을 인정한다면, 강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 날, 그 강도의 영혼은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여야만 한다.
즉 정통신학은 분명히 예수님 재림 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십자가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며, 그렇다면 그 강도는 부활하지도 않았고, 예수님 재림 이전에 심판도 없이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서 엄격히 말하자면, 부활하여 거하게 되는 천국과 사후영혼이 머무는 낙원으로 불리는 천국은 다르다는 것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2:9)
본문 전체의 의미로 볼 때에,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신다는 뜻은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한 자는 심판 날까지 형벌 아래에 둔다는 것은 심판 때까지 고통을 받는 음부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낙원에 대한 개념이 가장 잘 묘사된 것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성경구절일 것이다. 다음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 이 비유에 나오는 사후생활에 관한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사후생활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후생활에 관하여 되돌이킬 수 없이 좋은 가능성과 바꾸어질 수 없이 악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덧붙혀 말해야 한다. (도널드거스리, New Testament Theology 820 쪽)
크레그 볼룸버그의 “비유해석학”을 인용한다.
– 그래서 이 비유의 중요한 교훈이 이런 경향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1) 나사로처럼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이끌려 갈 것이다.
(2) 부자처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맛볼 것이다. (263쪽)
호크마주석은 누가복음 16장 22절의 ‘아브라함의 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막 12:26;행 7:32)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 2 :23)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간접적이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단 7:10; 마 25:31,46; 롬 14:10; 고전 15:44; 히 9:27)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23:43; 고후 12:4; 계 2:7; 6:9-11; 7:9,10; 20:13).
–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는다”(눅16:25) 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부자가 가기를 아주 갈망하는 아주 안락한 곳에서 – 분명히 지옥불이 타오르는 곳이 아닌 – 의식을 가지고 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 전이기 때문에 나사로도 구약의 성도와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신자들도 죽은 후에 바로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중, 520쪽)
물론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매우 광역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에서는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개념의 천국을 말한다.
바울은 고후 12장 4절에서처럼 낙원에 갔다 온 적이 있다. 구약에도 낙원은 세번 묘사된다. 느 2;8의 삼림. 전 2;5의 동산. 아 4;13의 과수원이며 에덴동산을 가르킨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낙원을 죽은 자의 영혼이 최후의 심판까지 대기하는 중간적인 상태의 개념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나 최종심판에 영향을 주는 회개의 기회가 없다. 또 낙원은 천국이며, 천국을 가는 중간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카톨릭은 연옥이라는 중간개념을 설명하며, 연옥은 영세를 받았으나 공덕이 부족하여 천국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이 소정의 정화기간이 되면 천국으로 옮기는 곳으로 믿으며, 이것은 본인과 친지와 가족의 기도와 간구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중세의 면죄부 사건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천국은 현재적이며 진행적이며 확대되어지며, 종말적으로 완성되어지며 그 통치영역을 더욱 확장하며 진행될 것이다. 영역적이며 개념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적인 의미를 포괄한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종말적인 개념의 장소로 생각하는 곳도 물론 천국이다.
천국에 대한 현재적이고 내면적인 의미만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종말적이며 궁극적인 개념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성경에는 변화산 사건이 있다.
이 변화산 사건에 대해서 복음서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마태: 죽기 전에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마 16:28)
마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막 9:1)
누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다.(눅 9:27)
모세와 엘리야는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고, 죽어야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왕국을 “죽기 전에” 보여주었으며 “죽기 전에” 미리 주님이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 죽음과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들에 함축된 내용
1) 신자나 불신자 모두가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만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살아있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불신자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비록 죽음이 인간의 적이기는 하나(하나님께서는 원래 인간이 죽음을 당하도록 의도하지는 않으셨다) 현재 그것은 극복되었으며 하나님께 사로 잡힌 바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저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강 가운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죽음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데려가시려는 주님의 목적을 수행하는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3)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중간상태가 있는데, 거기서 신자와 불신자들은 각기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를 경험한다. 비록 이러한 경험들이 최종상태의 그것보다는 그 강도에 있어서 심하지 않지만, 질적인 면에서 볼 때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경험들이다.
4)이생과 내생 양쪽 모두에 있어서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는 은혜이지 행위(공로)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불완전한 것들을 제거할 사후의 정화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밀라드 J 에릭슨, 종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78-79쪽)
물론 천당이란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가는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천국도 하나의 장소적 개념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영혼이 사후에 가는 것으로 성경이 말하는 구절은 생각보다 많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사도요한은 하늘 보좌에 가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음을 보았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 6:9)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직접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2-6)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3-24)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사후 영혼이 의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하는 곳도 있지만, 영혼의 사후세계와 의식적 활동이 존재한다는 성경적인 증거는 그 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 2장26절에는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라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시체는 영혼이 없는 것이며 이것은 사후에는 영혼이 시체와 함께 무의식상태로서 함께 존재한다는 영혼수면설 교리와 다르다.
또한 스데반은 죽임을 당하기 직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부르짖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곡식과 물건이 풍족한 부자의 영혼을 도로 찾아간다는 누가복음12:20 역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취하여 가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지만, 죽으면 영혼은 육체를 떠나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혼은 무의식상태로 사체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 나거늘….”(눅 8:55)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나니아와 그 아내가 사도들의 발 앞에 팔았던 밭의 값을 속이었을 때에도 “혼이 떠나갔다”(행 5:5. 5:1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 다윗은 그의 어린 아이가 죽자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그것은 사후에 다윗이 어느 곳에 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
사도바울은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또 성경은 예수가 재림하실 때에 의인과 악인들 모두가 부활을 하여 심판을 받으며, 의인들은 영생으로, 악인들은 영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안토니 후크마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 바울은 우리가 사후에 그리스도와 이러한 밀착됨을 어떻게 경험하게 될지에 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우리는 이런 교제의 본질에 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형태의 영상도 그려볼 수 없다. 그때에 우리는 더 이상 육체 안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들과 불완전함들 그리고 우리의 현재적 삶을 괴롭히는 죄악들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롭게 됨은 육체의 부활이 일어나는 순간까지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상태 동안 우리 믿는 자들의 상태는 칼빈이 가르쳤던 것처럼 불완성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며 잠정적 축복의 상태인 것이다.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상태의 교리는 육체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벌카우워가 지적하듯이 신자는 미래에 관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안토니 후크마, 종말론, 156쪽)
4. 천국 지옥의 간중
사람이 죽지 않고 천국과 지옥에 다녀올 수가 있을까? 한마디로 공상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이 지금 기독교에서 대유행을 하고 있다. 너도 나도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고 간증을 하기에 이르렀고, 기독교서점에까지 이러한 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강사로 초청되고 있고, 이러한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 곧 낙원, 천당은 사후에 영혼들이 머무는 상태적인 개념으로서, 물질적이며 물리적이며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며, 살아서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매우 유치하고, 저차원적이며, 비성경적이며 비신학적인 개인의 천국 지옥 간증을 들어야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최근에 천국 지옥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목사의 말에 절대 순종하고 십일조를 잘 내면 천국에 가는가? 과연 천국이 보상적이고, 조건적이며, 행위적이며, 정말로 교회에서 헌금이나 혹은 봉사에 따라 차등이 주어지는가? 유치한 간증에는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복음이 실종되어 있다.
천국에서 보석이 박힌 저택에 산다는 간증이나, 혹은 행위에 따라 천국 저택의 평수가 넓어진다는 주장, 물질창고에 돈이 가득 쌓여 있다는 이런 엉터리 간증을 듣기 위해 목사들은 천국 지옥 간증자들을 초청하여 아까운 헌금으로 강사료를 지불하면서 간증을 듣는가? 그래야만 교회에 십일조와 헌금이 많아지고, 목사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 몇 평의 저택에서 살며, 어떤 보석이 박혀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느냐는 문제이다. 성경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그 기준은 오직 성경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 이상이 무엇이 중요한가? 다시 말하여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복음이 실종된 체험적 간증은 당연히 거부되어야만 하며, 이런 엉터리 간증을 듣기 위하여 그런 유치한 강사들이 초청되는 것은 그 교회 목회자들의 책임이라고 본다.
천국지옥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고린도후서 12장 2-6절이다. 과연 고후 12장의 바울이 낙원을 다녀왔다는 것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인지 성경을 살펴보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후 12:2~6).
바울은 낙원에 다녀온 것을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제 삼자의 입장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6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 본문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이유는 워낙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과 바울과 다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거나 그 책을 읽어보면 바울과 많은 차이점이 보인다.
첫째,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을 염려하여 제 삼자의 입장으로 글을 기록하는 반면에, 요즈음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는 사람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비성경적이며 자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적인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구원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행위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며, 천국에서도 부를 누린다는 매우 이상한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창 6:24, 히 11:5)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가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는가? 예를 들면, 엘리야의 경우(왕하 2:11)와 같이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 경우가 다른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는가? 특수한 경우를 보편화 한다면 예수님과 같이 물 위를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에녹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졌다는 것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낙원을 간 것이 몸 안인지 몸 밖인지를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혼이 몸에서 이탈되어 영혼만이 갔다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왜 몸 밖에서 유체이탈되었다고 단정하는가? 그렇다면 왜 바울은 몸 안인지 몸 밖인지 몰랐다고 말할까?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체험을 그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경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고후 11장23-25절에서 그는 거의 죽을 뻔했던 많은 체험들을 말하며, 행 14:19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친 적도 있었다.
넷째, 바울은 그러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다고 말한다.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특히 KJV영어성경과 NIV영어성경이 모두 그러한 번역을 하고 있다. 바울은 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성경의 내용과 달리 자유롭게 말을 하고 있을까?
[표준새번역] 이 사람은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 을 들었습니다. [현대인의성경] 나는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고 또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말 을 들었습니다. [KJV] How that he was caught up into paradise, and heard unspeakable words, which it is not lawful for a man to utter. [NIV]was caught up to paradise. He heard inexpressible things, things that man is not permitted to tell.다섯째,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경우가 지금도 간혹 있다. 기독교뿐 아니라 타종교, 혹은 무신론자도 그러한 체험을 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의학적인 견해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 가사상태라고 말하기도 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만일의 가능성을 위하여 죽은 사람을 곧 매장하거나 화장을 하지 않고, 삼일장을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실제로 죽은 지 며칠만에 다시 살아난 사람은 드물게 있지만, 죽은 지 일주일 이상된 사람이 살아난 적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 7:9-10).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여섯째,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말한다. 성경은 “영혼없는 몸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신(spirit)은 육신과 분리되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스데반은 죽음을 당하기 직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부르짖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두 죽음의 상태가 영(spirit) 혹은 혼(soul)이 사후에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자 “그 영(sprit)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눅 8:55)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나니아와 그 아내가 사도들의 발 앞에 팔았던 밭의 값을 속이었을 때에도 “혼(soul)이 떠나갔다”(행5:5. 5:1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부자의 죽음에 대해서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눅 12:20).
다시 말하여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갔다고 하면 그 몸은 죽은 시체가 되며, 성경은 단 한번도 사람이 죽지 않고 영혼과 몸이 분리된 경우를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의 경우도 그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에서 사도바울도 몸 밖으로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
천국 지옥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의 간증이 성경적이라면, 우리는 개인적인 간증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충분이 인지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초청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또 그들의 간증이 비성경적이라면 그들을 불러 그 간증을 들을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개인의 비성경적이며 주관적인 간증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을 믿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무속적이고 미신적인 속설에 미혹되지 말자. 성경은 우리에게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는 책이다.
5. 천국은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장소인가?
1) 맨션(mansion) 저택
최근에 천국과 지옥에 갔다가 왔다고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간증 집회를 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의 큰 저택이 천국에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의 공로에 따라 평수가 달라진다는 간증도 있으며, 빨간 스포츠카를 탄다는 주장도 있었으며, 벽에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으며, 보물창고가 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어느 여성 간증자는 천국에서 보석으로 치장된 흰 드레스를 입는다고 그의 책에서 쓰고 있다.
과연 천국이 이러한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곳일까? 왜 이러한 간증이 유행병처럼 번지게 되었을까?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한복음 14장 2절에 ‘거할 곳’에 대해서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을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킹제임스는 다른 번역성경과 달리 유일하게 mansion 이라는 번역을 하고 있다.
[KJV]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mansion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물론 다른 번역성경은 그런 내용이 없다.
[표준새번역]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일러주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현대인의성경]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NIV] In my Father’s house are many rooms;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I am going there to prepare a place for you.“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2)
‘거할 곳’이란 말의 헬라어는 ‘모나이’로 ‘메노’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서 ‘머물다, 거주하다, 쉬다’라는 뜻을 가진다. 즉 원문으로 보아도 맨션주택이나 궁전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단어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Vincent, Trench는 “여행 중에 나그네에게 안식을 주는 객사”를 가리킨다고 해석하였고, Bernard와 Barrett는 “일시적인 거처가 아니라 영원한 거처”라고 해석하였는데 그 개념의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 것이다. 영원한 거처로 해석하여도 “많은 거실이 있었던 동양의 거대한 궁전”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으며, “어떤 질적인 등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믿는 자들이 거할 처소가 얼마든지 있다는 수량적인 사실”을 언급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견해이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거주하여야 하는 곳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그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신구약 시대에서 천국의 연속성을 뜻하는 내용으로서 그곳이 저택이거나 궁전이라는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다.
2) 계시록 21장
(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계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계 21: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계 21장 18절부터 21절까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재료가 각종 보석과 금으로 되어있음을 설명한다. 이것은 천국에서의 부와 사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귀한 보석으로 비유한 것이며, 또한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되는 영광과 존귀한 가치성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계시록 21:10~1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0~11)
보석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의 영광으로 비유되고 상징된 것이다.
계 21장의 보석들에 대해서 혹간은 출 28:17~20의 대제사장의 흉배에 달았던 보석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계 21장에서 성령이 사도요한을 데리고 가서 보여준 새예루살렘성은 계 17장의 바벨론성과 대조되는 내용이다. 17절에서도 동일하게 성령이 사도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가서 보여준 바벨론성도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는데, 그것은 계21장의 보석과 달리 호화와 사치, 우상숭배를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3~5)
다시 말하여 천국의 재료가 문자적으로 금과 각종 보석이라는 몇몇 상징적인 성경적인 표현은 비유적인 개념으로서, 그것이 우리가 천국을 갈망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 보석이라는 물질 자체가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녀가 있는 바벨론성에도 금과 보석과 진주가 있지 않았는가? 금과 귀금속은 물질적인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을 뿐, 천국에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 5:3은 천국이 심령이 가난한 자(눅 6:20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의 재료가 물질적인 보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 2:2~3)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내용으로도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다. 성경만으로 부족하여 이상한 개인적인 간증을 들을 필요가 없으며, 혹간 오히려 그런 비성경적인 간증을 추종함으로서 신앙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롬 5:1~2).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도 물질적인 풍요함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에 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참고 자료 :
필자의 책들과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카페의 글과 신문사 컬럼을 다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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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P 신학사전, 아가페
아가페성경사전
라이프 성경사전
<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리고 하늘나라 >는 같은가? (1)
<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리고 하늘나라 >는 같은가? (1)
1. 들어가는 말
사탄과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처음 두 명의 통치자이다. 둘 다 두 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둘 다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사탄은 한 왕국의 왕관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왕관을 다시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담에서 예수님까지의 역사는 천국, 즉 실제적인 땅의 왕국에 대한 역사가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천국”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이 왕관을 쓴 사탄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는 사탄의 개인 소유(고후 4:4)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어떠한 간섭도, 특히 “성령의 칼”(히 4:12)로 부터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지구를 소제하고 단장하고 재장식해서 다음에 등장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일할 만한 상황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지도자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사탄은 항상 사기를 높이고 낙관론을 신봉하게 함으로써, “지도자들”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고 혼란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하는 그 일들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저 위대한 “긍정적 사고가”의 입장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탄의 첫 번째 말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창 3:1)이다. 사탄의 유일한 문제는 6000년 간의 부패와 타락과 사회적 붕괴와 전쟁과 죽음 등을 직면하면서도 어떻게 이 높은 사기와 고조된 낙관론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 (마 6:33)는 어떤 나라인가?
1) 마 6:33 -34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이 구절은 산상설교의 절정이다. 주님께선 32절에서 청중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신 후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 6:32) 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이교도들인 미국, 영국, 독일, 한국 등 이방인들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앞부분까지는 마찬가지이다(행 2:39; 3:22).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이방인들의 개인적인 아버지라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야 비로서 등장하는 새로운 계시이다. 산상설교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있었던, 다가오는 천년왕국의 규칙과 요소들의 윤곽을 잡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약적인 가르침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각각 어떤 나라인지 이미 공부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달리 영적인 나라로서, “거듭나면” 들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공포되는 이 때에는 아무도 거듭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도 교회 시대의 성도들처럼 영으로 태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왕국(천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인데, 이 영적인 상태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교회 시대에는 이 영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거듭남으로 들어가지만, 이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이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행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주제가 “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한 상태의 나라는 천국이 임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이 구해야 할 나라였다. 그래서 이 산상설교에는 완벽한 의가 요구되는 것이고, 이 “의”로 말미암아 이들은 천국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의는 엄청난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 설교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다 이루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선 이들이 지키지 못할 의를 완성하시고자 죽어야 했으며, 그 의가 입혀졌을 때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시대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아직까지 산상설교의 청중들은 거듭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구약의 메시야적 상황아래 있었을 뿐이다. 이들은 마태복음 5:20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를 지녀야 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았고, 유대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완전한 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이 의를 방해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하여 경고하신다
2) 마 19:24 『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라.』 (막 10:25, 눅 18:25)
19:24절 모든 학자들은 바늘의 귀 를 “낙타가 밤에 성문이 잠겼을 때 얻드려 기어가기 위해 그 무릎을 꿇어서 통고하는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작은 문” 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존경할 만한 분” 으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눅 18:25 참조), 그런 문은 어떤 고고학적 발굴에서도 결코 발견된 적이 없다.
따라서 학자들의 다음 단계는 이 구절을 바꾸는 것이다. 페쉬타(시리아 어 역본)에는 낙타 대신에 “밧줄”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시간 낭비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빈정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이것은 그분의 뛰어난 특성 중 하나이다), 또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다(핵심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과장하신 것이다).
막 1:15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시니라.』
1:1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4:17에서 전파하신 것과 같은 메시지가 아니다. 천국은 “문자적이고, 물이적이며, 눈에 보이는” 왕국으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실현하시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으로(눅 17: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1절) 믿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도덕적인 의” 의 왕국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으로 공부하지 않는(딤후 2:15) 이방인들이 망하도록 하나님께서 신약에 놔 두신 가장 거대한 거치는 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 계셨을 때에 이 두 왕국이 함께 존재하였다.’ 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두 왕국의 왕이시다
3)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기 시작하여,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더라. 』
17절에서 전파하시기 시작한 천국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은혜의 복음”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위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르다는 것과, “천국”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천국”은 다윗의 보좌에서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왕의 의로운 통치가 있는,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다. 이 “다윗의 보좌”는 이스라엘과 관계된 것이고, 그래서 이 왕국(천국) 복음은 자연히 이스라엘과 관계된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다고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천국과 교회는 종종 동일시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교회는 분명히 다르다. 천국(왕국)은 갑자기 세워지는 반면(set up, 단 2:44) 교회는 세워져간다(built up, 엡 2:20). 천국에는 “왕국의 상속자”들이 있는 반면(약 2:5) “교회의 상속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왕국에는 “왕국의 자녀들”이 있으나(마 8:12) “교회의 자녀들”은 없다. 교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왕국은 “몸”도 아니고 “성전”도 아니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또 “성전”이다. 왕국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왕국이 임하도록 구하며(마 6:10) 사람들이 왕국을 받아들이는 반면(눅 19:12), 교회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교회는 임하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는 오직 “불러냄을 받은 무리”(called out assembly)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요 3:3).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 그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들을 칭찬하시며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빈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이처럼 『진실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진실로 진실로” 하신 말씀은 이러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에게 이 얼마나 무례(?)한 반응이란 말인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을 아나이다.” 하고 말하는 손님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님께서는 대꾸하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대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어서 오십시요. 반갑습니다.” 하고 상냥하게 인사하며 손님을 맞아들이지도 않으셨다. “누추합니다만, 여기 좀 앉으시지요.” 하고 자리를 권하지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행은 맡아 놓았다는 것을 알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니코데모는 이런 무례한 꼴을 생전 처음 당해 보았을 것이다.
누가 당신을 찾아와 “당신은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이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적을 누가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말했다면, 당신은 두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필경, “아, 네, 감사합니다. 그걸 알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지난 사흘 동안 저는 죽은 사람을 세 사람이나 살려 놓느라고 아주 바빴답니다. 아이구, 이런! 어서 들어오십시요. 여기 앉으세요.” 하고 수선을 떨며 갖은 친절을 다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손님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으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이렇게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무례한 분이셨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멀리 갈 것없이 요한복음 4장만 보아도 우물가에서 만난 창녀와 같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대해 주셨던 그분의 온화하신 태도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어째서 이처럼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셨던가?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요 2:24).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게 행세하던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선입관 때문에 주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퉁명스럽게 대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니코데모가 종교적 지도계층에 속하는 이른바 “지식인”이었기에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말씀의 핵심을 꺼내셨던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를 흉내내는 현대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즉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뿐아니라 들어가는 것에 대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서 14:17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성령 안에서 의를 누리는 그분의 영적인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당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바로 이 순간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화평과 기쁨을 성령 안에서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나타난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비유를 하나 더 들어 말씀하시더라.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계시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눅 19:11).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막 9:1). 이것은 미래에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더욱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눅 17:20), 본문은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이것은 미래에 임할 천년왕국을 언급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3절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면 ‘장차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를 일찌감치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세워질 천년왕국을 “보는” 영광을 누리지 못할뿐더러,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지금 이 교회 시대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영적으로 들어가 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제적으로 임할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실제로 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영적으로 존재하고, 천년왕국 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존재하게 될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첫째, 지금 그 영적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고, 둘째, 그 실제적으로 나타난 나라를 보지 못하게 된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옳지, 예수님께서도 ‘물침례’ 구원을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생각한다. 캠벨주의자들이 그렇고 로마 카톨릭이 또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다면 요한복음 3장 그 어디건 “침례”에 관한 언급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1절, 2절, 3절…, 35절, 36절, 처음부터 끝절까지 눈씻고 찾아 보라.
어디에 “침례”와 관련된 말씀이 단 한 군데, 단 한 마디라도 눈에 띄는가? 캠벨주의자들이나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 어디서건 “물” 소리만 나오면 “여기 보세요, 물침례 이야기가 여기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흥분해서 떠벌이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는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또 이상한 것은 “침례”라는 말이 나올 때, 거기 “물” 이야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구절에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시무룩해져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그들은 로마서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가 물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돼 버린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례” 역시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모른 척 창 밖만 내다 본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언급하고 “물”은 “물침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4장에서 언급되는 “물”이나 “생수” 역시 “물침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한복음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배에서 흐르리라는 생수의 강들 역시 “물침례”와는 거리가 멀다. “물침례”에 정신이 혼미해진 자들이 “물” 소리만 나와도 그게 모두 “물침례”와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히스테리 반응과 같은 병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코필드는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라는 에베소서 5:26의 말씀과 연관해서 모든 물은 “말씀”을 예표한다고 못박고 있다(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캠벨주의자들이나 카톨릭이 어째서 물만 나오면 그것을 침례와 연관지으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미스테리다.
그렇다면 “물로 태어나는 것”은 무엇이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절에서 니코데모에게 먼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여기 5절에서 “물과 성령”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렇다면, 이 두 말씀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자, 니코데모의 질문을 다시 상기해 보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다. 『사람이 물과…』 즉 “사람이 어미의 태에서” 태어나고 나서, 또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 간명하게 결론을 내려 주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6절).
『육신으로 난 것』, 즉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 아니라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곧 “거듭남이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신다.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일단 어미의 태 속에 잉태되어 그 태로부터 태어난다. 이것은 육신적인 출생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육신으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간명한 설명인가! 어미의 태는 물 주머니다.
그래서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 그 아기는 물 속에 있게 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유대인들은 물이 생물학적인 출생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실을 산부인과 의사한테서 배운 게 아니라 바로 성경에서 배웠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 나는 새를 풍성히 내라.” 하시며』(창 1:20). 이처럼 지구 상에 존재하는 최초의 생명은 물에서 나왔다.
결국 요한복음 3:5의 “물로 태어남”은 생물학적인 출생을 의미하며, 그 사실을 성경 자체가 해석해 주고 있다. 물은 물침례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물침례를 받았던 사람이 없었다. 유대인이 받았던 침례는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들이 물침례를 받은 것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난 출생을 정결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따름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는 말씀은 오늘날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령하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해야 한다. “당신이 어미의 태로부터 태어난 출생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이 그것만 붙잡고 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당신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만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말이다.
6)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2:4-5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선명해진다.
『또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와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에 토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없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을 살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실천적인 삶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도 없고 말씀에 실천적으로 순종하지도 않는 자가 말만 앞세워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한다.
7) 계 12:10 『또 내가 들으니, 한 큰 음성이 하늘에서 말하기를 “이제 구원과 능력과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임하는도다. 이는 우리 형제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고소하던 그 고소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사탄은 “고소자”나 “검사” 같은 부류의 적으로 지적된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가 그리스도인들과 성도들을 환란 중간까지 고소해온 것을 듣는다. 환란 중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은 욥기 1,2장에서 그랬듯이 위 아래로 다니며 고소하고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행사한다.
3. 천국
우리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책이라는 것을 공부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의 언약에 따라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하시고 이제 침례인 요한의 예비로 그분의 왕국을 세우려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려 하시는 왕국은 어떤 것인가? 그 왕국은 어떤 모습인가?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제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침례인 요한과 예수께서 전파하신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 것이다. 마태복음 3장부터는 마태복음의 주제인 “천국”에 관한 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3장을 들어가기에 앞서 천국에 관한 내용들을 분명히 알아야 하기에, 피터럭크만의 책들을 바탕으로 천국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았다. 이 부분의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1969>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1999>를 참조 바람.]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1)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이다.
물론 이 세 나라는 모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인간들의 왕국”(단 4:32), “세상의 나라”(눅 4;5), “이 세상의 나라들”(계 11:15)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세 개의 나라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천국”을 피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천국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이 천국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다.
천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제시된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천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천국 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생각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3에서는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연결된 문맥인 5절에서는 “땅의 유업”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말하여 그 대상을 유대인에게 한정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1:12에서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라는 말은 천국을 영적인 나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 “사회운동가”, “해방자” 등으로 이해하곤 한다. 이들은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님의 조명 없이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영적인 이해가 전혀 없이 현상을 어느 정도만 보고 정확한 판단이 없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며, 영적인 나라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천국”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는 따로 있다. 우리는 그 나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나라들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태복음을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동안은 땅에 속한 그 왕국을 더 강조하겠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는 이 왕국, 즉 천국이 더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에서 제시되는 왕국과 메시야, 그리고 그 예언에 대한 성취와 성경에서 이 왕국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이 왕국은 마태복음의 주제가 되는 나라로서,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나라이며, 몸을 입고 들어가는 나라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거듭남과는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구약은 전체적으로 메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 왕은 단지 초림에 그 예언을 모두 성취하시지 않았다. 구약의 기술을 자세히 보면 왕이 나타나시는 것에 대해 초림과 재림을 함께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을 다시 자세히 보면 그 촛점은 초림보다는 재림에 더 많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에도 그 왕의 나타나심을 재림의 상황에 맞게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주제를 “재림”(His Advent 또는 His Second Advent)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과 연관해서 본다면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the kingdom)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우리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왕국”, 그것도 지상 왕국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 사실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저들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은 관점을 가졌는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그러한 “왕국”이 아니다. 지금부터 전개해 나갈 “천국”(왕국)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이해한다면 그러한 오해는 쉽게 풀릴 수 있으며,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맥락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천국이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라이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 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나라는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나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인데, 이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맞아들이기만 하면 거듭나지 않더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왕국은 다윗의 보좌로 대표될 수 있는데(눅 1:32,33), 그 보좌는 결코 영적인 보좌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땅의 보좌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나라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3) 이 두 나라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으니,
바로 하늘나라이다.
이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하늘나라는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나라는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 (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이 나라가 천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나라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 천국은 이 땅에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나라를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나라”(heavenly kingdom)라고 못박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령할 때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면 안되고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예수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틀리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지라도, 우리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하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이므로 본 주제에서는 비켜나기로 하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끌어 오신 두 왕국, 즉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 두 왕국은 성경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 하나님은 이 두 왕국들을 어떻게 계획하셨으며, 이 왕국들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이 왕국들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어가고 있으며, 또 이 왕국들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가야 할 내용들이다.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에 와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왕국들 중에서도 특별히 “천국”에 촛점을 맞추어서 공부해 볼 것이다.
왕국에 대한 역사를 맨 처음부터 살펴본다면 창세기 1:1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우주를 만드셨다. 그는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가 만든 모든 피조물들은 그에게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그에게 굴복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한 존재를 세우셨는데, 그는 바로 모든 영적 세계의 우두머리인 한 그룹(cherub)이었다. 그는 루시퍼(Lucifer, 사 14:12)라고 불린다.
에스겔 28:14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웠더니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네가 불의 돌들 가운데를 위아래로 걸었도다.』
여기서 “투로의 왕”으로 묘사되는 그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고, 모든 아름다운 보석들과 또 북들과 관악기들이 그를 위해 있었다(13절). 그는 보좌를 덮는 기름 부음 받은 그룹(anointed cherub)이었다. 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뜻한다(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이다. 우리는 지금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부를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왕이다(왕은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그는 제사장이다(제사장도 기름 부음을 받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왕이 정치적인 직책이라면 제사장은 영적인 직책이라는 것인데, 그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에서 영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과 실제적인 통치의(정치적인) 나라(“천국”)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이다.
그가 타락하여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이사야 14장에서는 그를 “바빌론 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사 14:4), 그를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진동시켰던 자”(사 14:16)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이끌고 내려올 만한 권세가 있다(계 12:4). 그러나 그는 교만으로 타락했다. 그리고 그가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이 두 왕국의 왕관을 빼앗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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