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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목회자요 신학자요 개혁가 입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를 세계적인 개혁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성직자로서 다음엔 법률가로서, 그리고 인문주의 학자로서 최상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와 이러한 교육은 개신교를 체계화하고 그것을 성도들의 삶의 적용시키는게 기여했습니다. 루터가 용기있게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던 개척자라면, 칼빈은 개신교의 교리들을 한데 묶어 체계를 이룩한 심오한 사상가였습니다.
칼빈의 하나님을 위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적극적이고 열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이 조그마한 비리나 어두움도 허락하지 않는 과감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단적 사상, 불경건하고 불순한 것들을 털끝만치도 허용하지 않은 그의 용단이 때로는 독재자라 악평을 듣기도 했지만, 본질적인 측면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과 충성심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더불어 고난받고 희생하는 데에 철저하게 자신을 ‘드림’의 정신은 그의 내면 속에서는 철저한 비움과 순결함으로 응집되어 나타납니다.
칼빈의 생애는 역경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개혁가로서 선봉에 나섰을 때 숱한 쫓김과 핍박 속에 숨어지내야 했고, 말년에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 할 정도로 극심한 병으로 신음해야 했습니다. 편두통과 사일열, 폐렴, 좌골신경통, 통풍, 치질, 위장병, 담결석 등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여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뒤늦게 결혼하여 5년만에 얻은 아들을 곧바로 잃게 되었고, 난산 끝에 아내는 4년 정도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던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자기를 비워내는 영성생활이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칼빈과 같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성도들 중 한 분인 존 칼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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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 칼빈의 종교개혁 – Hollis
칼빈의 종교 개혁 루터와 쯔빙글리를 개혁 1세대라고 한다면, 칼빈은 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파리 북동부 피카르디 지방 노용(Noyon)에서 1509년 7월 10일 …
Source: hoibin.tistory.com
Date Published: 7/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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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인물탐방 칼빈 편 | 진짜배기
칼빈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더불어 가장 명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고 국내에 출판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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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중심 사상 –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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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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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 – 나무위키
한국 장로회 내에서는 영어식으로 존 칼빈(캘빈) 또는 요한 칼빈이라고도 불린다.[3]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초기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며 금욕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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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종교개혁과 인식론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칼빈의 종교개혁과 인식론 The Reformation and Epistemology of John Calvin … 이러한 칼빈의인식론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사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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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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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종교개혁(존 칼빈) – 네이버 블로그
칼빈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개혁이었다. 바른 목회가 이루어지는 교회로서 그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5/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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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칼빈 종교 개혁
- Author: 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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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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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 칼빈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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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빈의 종교 개혁
루터와 쯔빙글리를 개혁 1세대라고 한다면, 칼빈은 개혁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파리 북동부 피카르디 지방 노용(Noyon)에서 1509년 7월 10일 출생하였을 때, 루터는 이미 4년이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칼빈이 겨우 읽기를 배우고 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칼빈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루터는 95개 조문의 항의문을 게시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루터와 칼빈에게 적당한 시간차(25년)를 두셔서 당신의 일을 적절하게 수종들게 하셨음을 볼수있다.
칼빈과 루터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칼빈은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반면, 루터는 사교적이며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칼빈은 가끔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성품이 치밀하고 과묵하며 꼼꼼하고 대찼던 반면, 루터는 자유분방하여 각계 각
층의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는 호탕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러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앙이 같다는 데에 뿌리박은 상호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1539년 루터는 칼빈의 작품「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가에 대해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주는 공개서한」(Open Letter to Cardinal Sadoleto on Why the Reformation Was Necessary)을 읽고 그 마음에 큰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또한 1545년 4월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한 책방에서 칼빈이 저술한「신앙의 교훈과 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을 사서 읽고 “이 저자야말로 학식과 경건을 겸전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만약 외콜람파디우스와 쯔빙글리가 처음부터 이처럼 명료했다면 그처럼 좋지 못한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가 피상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칼빈은 심오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칼빈은 항상 루터를 변호하였는데, 쯔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늙은 루터를 비난하자, “부디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며, 얼마나 용기 있게, 강건하게, 유능하게, 학식 있게, 효과적으로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적그리스도를 쳐부수느라고 계속 열성을 기울였는가를 보십시오.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대로 아래와 같은 입장에 추호도 변화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나를 가리켜 악마라고 한다해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 부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와 같이 루터와 칼빈은 서로 아끼고 존경하는 사이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1)개종하기까지의 칼빈
(1)출생과 초기 교육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피카르디 지방의 노용(Noyon)에서 신흥 중산층이었던 제라르 꼬뱅(Gerard Cauvin)과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Jeanne Le France)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벵은 대대로 이어내려 오던 와즈(Oise) 강 뱃사공 일을 하다가, 1500년경에는 퐁 레베크의 고향집을 떠나 노용에 와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인 쟌느와 결혼했다. 그 후 그는 장인 덕분에 노용 시청 서기가 되었고, 그 후에는 대성당의 교구 서기로서의 일을 보았는데 이때 칼빈이 태어났다.
칼빈의 어머니 쟌느 르 프랑스는 당시 교양이 높은 가문으로 알려진 노용의 캉브레 호텔업자의 딸이었다. 쟌느 르 프랑스는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며 학문과 경건과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으로 알려졌는데, 칼빈은 외모와 지성 그리고 종교성 모두가 어머니 쪽으로부터 유전 받은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으므로 칼빈은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보살핌과 사랑 가운데 자라났으며, 열한 살 때는 노용 성당에 있는 라 게진느(La Gesine) 채플의 사제 보조직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칼빈은 노용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523년 8월 파리로 유학하여 라 마르슈(de la Marche) 대학에 등록하여 라틴어의 대가인 코르디에(Mathurin Cordier)를 만나 라틴어를 배웠고, 인문주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로 사제가 되기 위하여 몽테귀(de Montaigue) 대학으로 전학하여야만 했다.
몽테귀 대학에서 칼빈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옥캄주의자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를 만나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메이저는「대 영국사」(History of Great Britain, 1521), 복음서 주석」(Commentary on the Gospel, 1529)과 같은 책을 써서 위클리프, 후스, 루터의 개혁 운동을 비판하였는데, 이러한 비판은 어린 칼빈으로 하여금 종교개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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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문주의자 칼빈
교구 성직록(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칼빈은 1528년 초반에 몽테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529년 3월 노용의 참사회와 불편한 관계가 된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신학을 포기하고, 다시 법률을 공부할 것을 명하였다. 효자였던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를레앙(Orleans) 대학으로 전학하였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만난 현실적인 보수주의자 피에르 드 레스트왈르(Pierre de L’Estoile) 교수에게서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나 엄청난 정신적 영향을 받아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문주의 사상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헬라어를 가르치던 멜쉬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칼빈이 볼마르 교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볼마르 교수가 당시 유명한 이태리의 르네상스에 사상적 영향을 끼친 법학자들이 모여 있는 부르쥬 대학(Universites de Bourges)으로 전근 갔을 때, 거기까지 그를 따라서 학교를 옮긴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볼마르 교수는 헬라어를 가르치면서 신약성서 원문을 가지고 칼빈 등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다. 쟈끄르 페브르 교수로부터 종교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청년 칼빈은, 볼마르 교수로부터 신약 성경 원문을 배우면서 이러한 사상이 더욱 자라게 되었다.
역사가 프로리몽 드 레몽(Florimond de Raemond)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말하기를 볼마르야말로 칼빈에게 ‘이단 교리의 달콤한 맛’을 최초로 맛보게 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은 나바레 왕비의 관할지인 부르쥬에서 멜쉬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 교수를 만났는데 이는(칼빈에게는) 불행하고도 불운한 만남이었다. 볼마르 교수는 그리스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언어학에서는 매우 박학하고 탁월한 교수였다. 그는 칼빈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볼마르는“칼빈의 기억력은 매우 탁월했으며 정신력은 활발했고, 강사의 의도를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로 간단 명료하게 정리해서 표현해 낼 줄 았았으며, 그것을 다시 더 쉽고 더 아름다운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 놓는 데 매우 탁월하고도 섬세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 두었으며 다른 학생들보다 더 깊이 사랑했다. 하루는 함께 산책을 하는 중, 볼마르 교수는 칼빈에게 신학에 헌신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쥐스티니엥(Justinien)의 법전을 그만두고 모든 학문 중의 학문이요 학문의 여왕인 신학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으며…볼마르는 또한 그에게 루터교의 비밀 교리에 대해서도 몇 가지를 들려주었다…(칼빈이 노용으로 간 후에는) 편지로 내왕을 했고, 그가 독일로부터 입수한 서적들(개혁 사상이 담긴 서적들)을 보내주었으며, 칼빈에게 주님의 교회를 계몽하는 사업을 계속할 것을 부탁했다. 칼빈은 그 위대한 사업(종교개혁을 뜻함) 가운데로 자기를 밀어 넣었던 사람이 볼마르라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1531년 5월 26일 봄에 칼빈은 법학사 학위를 받고 그 후 법률 공부를 4년 더 해서 1535년에 법률 면허증을 받았으나 법학 박사학위는 끝내 거절하고 받지아니했다. 그러나 이렇게 갈고 닦은 그의 고도의 법학 지식은 후일에 그가 표현하는 교리의 정확한 언어 구사와 논리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부친의 사후 그는 다시 인문주의자가 되기를 꿈꾸면서 파리로 돌아와서 삐에르 당느(Piere9Danes) 교수로부터 고급 헬라어를 거의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배우면서 프랑소와 바따블(Francois Vatable) 교수로부터는 히브리어를 배웠다. 이것이 후일 그가 구약과 신약 성경을 주석하는 데 필요한 어학 실력의 기초가 되었다. 넓은 범위에 걸친 그의 인문학의 지식 섭렵의 경지를 두고 귀빠뗑(Gui Patin) 같은 이는 칼빈을“유럽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방대한 양에 해당하는 그의 주석을 자세히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칼빈의 박학다식한 지식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는 1532년「세네카의 관용론 주석」(Commentary on Lucious Anneas Seneca’s Two Books on Clemency)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칼빈은 자신을 인문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다. 이어 3가지 종교적인 질문, 곧 이교와 기독교, 미신과 진정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인간 영혼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 통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칼빈의 이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은, 베틀즈 교수(Ford Lewis Battles)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 그가 바른 종교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주석을 통해 학자들의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돈을 만질 수 있게 되자, 신학을 연구하여 학자가 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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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칼빈의 회심과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회심의 중대한 전환점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Psalms)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일어난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갑자기 회심시키셔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보다 교훈하기에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정이 보다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하던 공부를 아주 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열심은 식어가고 있었다.’
칼빈은「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한 후 오를레앙 지방에 1년간 머물다가 1533년 8월에는 노용을 방문하고, 10월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만성절(All Saints Day) 날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마튀렝(Mathurins)
교회에서 파리 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빈이 초안하였다. 칼빈은 이 연설문에서 검이 아니라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평화, 모든 학문의 유용성,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 분은‘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의 진노를 초래하였다. 대노한 프란시스 Ⅰ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사랑하는 도시 파리, 우리 왕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심히 불쾌합니다. 우리 왕국의 최고 대학에는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칼빈과 콥은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소환에 응하면 처형될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은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을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 빌딩으로 도망한 후 피신할 수 있었다.
19세기 칼빈 연구가 아우구스트 랑(August9Lang)의 저서 칼빈의 회심(Die Bekehrung Kalvins, 1897)에 의하면, 니콜라스 콥은 루터가 이미 1522년 만성절 설교에서 사용했던 본문(마 5:3)과 제목을 다시 사용하였다고 했다.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은 이 원고가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의 엄격한 전통에 매여 있으면서 성직록의 혜택으로 많은 신세를 져온 칼빈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부패상을 등지고 조국과 고향을 떠나 한평생 종교개혁 운동에 몸바치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칼빈은 1534년 노용에가서성직을 반납하였으며, 두 차례나 잠시 동안 투옥 당하는 경험을 맛보았으며, 파리에도 들르고 오를레앙과 포이티에르도 방문하였는데, 포이티에르 근처의 한 석굴 속에서 최초로 개혁주의 신조에 따른 성찬식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판판한 돌을 성찬상 대신 사용하였다.
프랑스 내에서는 날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상태였던 차에 마침 발생한 플래카드 사건(the Affair of the placards)으로 드디어 문제는 폭발하게 되었다. 1534년 10월 18일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은‘교황제 아래서 실시되는 미사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조문’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붙이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암보아즈(Amboise)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어 있는 형편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이 사태를 더욱 극화시켜서, 이러한 더러움으로부터 다시 파리시를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촛불을 켜들고 노트르담 사원까지 엄숙한 행렬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교의 저택에서 벌어진 향연에 참석한 국왕은 자기 영토에서 이러한 해독을 제거시키겠노라고 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발생한 일반 대중들의 폭발을 더욱 조장하듯이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빈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마음을 보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섬멸하겠노라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칼빈은 그의 사촌 로베르 올리베땅(Robert Olivetan)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을 썼다. 올리베땅의 성경은 1년 뒤인 1535년 뇌샤텔(Neuchchatel)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한편, 재침례교도에 의하여 영혼 수
면설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자, 이단 사상의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한 칼빈은 1534년「영혼 수면설에 관하여」(Psycho pannychia)라는 책을 써서 영혼이 천국에서 육체의 부활 때까지 잠자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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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칼빈과 기독교 강요
(1) 기독교 강요 저술 동기
칼빈은 1535년 초반에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프랑스 남서부에 있던 친구 뒤티에(Du Tillet)의 집에 피신하였다. 훌륭한 장서를 다량 소장한 뒤티에의 집은 연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칼빈은 그곳에서 프랑스 당국에 의해 고난받는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 문답서요,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왕에게 밝히는 변증서인「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535년 8월 23일에 완성했다.
1536년 3월 바젤의 인쇄업자 토마스 플랫터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빈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우선 주님께서 보실 때에 너무나도 값진 내 동생의 죽음의 의미를 의롭지 못한 자들 앞에서 옹호하며, 또한 똑같은 위협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 놓여 있으므로 이들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있다.
그는 이 작품을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하였다.
“고명하신 왕이시여, 제가 처음 이 일에 착수하였을 때는 나중에 폐하께 헌정할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단지 경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경건으로 덕을 세우기에 적합한 기본적인 책을 써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노력은 특히 저의 동포인 프랑스인들에게 유익을 줄 생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악한 사람들이 맹위를 떨쳐 폐하의 나라로부터 건전한 교리를 추방해 버린 것을 알았을 때 저의 저작을 폐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삼음으로써 폐하로 하여금 그 교리가 저 악한 사람들이 불과 칼로써 그토록 위세를 부리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이 문제는 당신이 들을 가치가 있고 알 가치가 있으며 판단할 가치가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죄인들이며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며 세상의 모든 권세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적들은 우리의 교리가 새롭고 불확실하며 기적들에 의해 확증되지 않았고 교부들의 일치된 목소리에 상반되며 유구한 관습에 반한다고 말합니다…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 우리의 교리를 새로운 것이라고 함으로써 저들은 그 거룩한 말씀을 새로운 것이라고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가 저들에게 새로운 것임은 저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 바울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뱔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 아무리 저들이 우리의 교리의 불확실성을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저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면, 우리는 저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고백하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공포나 하나님의 심판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0 저들이 기적들을 요구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온갖 기적들에 의해 확증된 복음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를 옛 교부들과 대립시키는 것은 마치 교부들이 우리의 대적들의 악한 행위를 선동하기라도 한 듯이 말하는 것으로써 중상모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 또한 저들이 관습에 호소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만약 인간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면, 선한 사람들은 이전의 관습들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다수가 더 나은 길을 선택한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다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이내 관습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 저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단이거나 교회가 여러 세대 동안 죽어 있었다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많은 괴로움이 되지 않습니다…
B 끝으로 저들이 우리의 교리의 전파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주장하며 비위에 거슬리게 소요들과 소동들과 분란들을 열거하는 행위에는 전혀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시여, 다시 폐하께 말씀드리오니, 우리의 대적들이 이른바 ‘새로운 복음’은단지 폭동을 선동하고 악을 방종되이 행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넌지시 얘기하는 말에 동요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분열이 아니라 화평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순결, 관용, 자비, 절제, 인내, 중용을 비롯한 모든 미덕의 본보기로서 우리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을 섬길 것입니다…”
칼빈은 이 책을 출판하면서 신변 보호 차원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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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 강요의 내용 ②
제2권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그러나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도신경에 이렇게 나와 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마찬가지로 우리의 저자는「기독교 강요」제2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며 우리를 중보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여기서 칼빈은 타락과 원죄를 다루면서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
죄 또는 죄로 인하여 인간 위에 걸려 있는 저주에서 피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마음이 새롭게 될 때까지는 정죄받을 만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완전히 상실되어 스스로를 치유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한 생각을 품지조차 못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외부, 곧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도덕법에 대한 해설로 이어진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에게 구원의 근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복음 아래에서 세상에게 더 온전히 계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관한 논의가 제기된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구원의 온전한 효력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야 했다는 것, 그는 실제로 참 인성을 취했다는 것,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 제사장, 왕, 선지자라는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그의 공로와 권능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을 획득하고 적용하려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가 실제로 구속주의 사역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에 관하여 듣는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다룬 사도신경의 조목들이 해설되어 있다.
제3권 은혜를 받는 방법과 은혜로 인한 열매들에 대하여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없다면 그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사도신경에‘성령을 믿사오며’로 나온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켜주는 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제3권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성령,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로부터 거져 주시는 칭의, 중생, 회개의 유익들을 받는 수단인 믿음을 다룬다. 회개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칼빈은 다음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안에서 낳는 저 지속적인 회개를 강론한다.
그런 다음 칼빈은 거저 주시는 칭의라는 주제로 되돌아가며 그리스도 안에 쌓여 있는 약속된 축복들을 우리가 받아 가지는 손으로서의 기도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저자는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택하심을 다룬다. 이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수여하신 것 외에는 우리 안에서 아무런 선도 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어 복음의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중생의 온전한 효력들과 행복의 온전한 향유를 위하여 우리는 마지막 부활로 넘겨진다. 이 세상에서 경건한 자들의 행복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위해 마지막 부활을 바라보아야 한다.
제4권 은혜의 외적인 수단에 대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믿음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복음의 설교를 사용하고 규례들과 치리의 사용을 명하였기 때문에, 사도신경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따라서 우리의 저자는 제4권에서 교회 그리고 성령이 교회를 부르고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들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적인 나라를 다스릴 때 사용하는 홀인 말씀의 설교, 세례, 성찬.
그리고 세속정부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교회를 위한 가정이자 피난처인 한에 있어서, 칼빈은 그러한 정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축복으로서 교회는 이 일시적인 피난처로부터 하나님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될 그 영원한 유업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마땅히 감사함으로 그러한 정부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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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빈과 제네바
(1) 제네바에 오기까지의 칼빈
칼빈은 1536년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한 후원을 얻기 위해서 페라라(Ferrara)의 공작 부인이요 공주인 르네(Renee)를 만나려고 페라라를 방문하였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종교적 관용 조처가 내려지자, 파리로 돌아와 신변을 정리하고 공부를 더하기 위해 그의 동생 앙뜨앙느(Antoine)와 이복 여동생 마리(Marie)를 데리고 스트라스부르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제3차 합스브르그-발로아(Habsburg-Valois) 전쟁으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직행로를 이용할 수 없어 제네바를 거쳐가는 우회 도로를 택하여야만 했다.
칼빈은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방문을 받았다. 칼빈은 당시의 기억을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파렐은 나를 제네바에 머물도록 강권하였다. 그가 사용한 수단은 상담이나 권면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나는 이러한 폭언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드시는 것과 같이 느꼈다. 그 당시 내가 은신처로 정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지름길이 전쟁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단 하룻밤만 제네바에서 묵고 급히 떠날 결심이었다…비열하게 신앙을 버리고 로마 천주교회로 되돌아간 한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를 알리는 바람에 나의 존재가 드러났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매여있던 파렐은 나를 붙잡아 두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나는 개인 연구에 전력할 것을 결심한 뒤여서, 다른 일에는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간청 정도로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일 내가 긴급한 시기에 도움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하나님이 내가 추구하는 은둔과 평온한 학문 생활에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나는 마침내 계획하였던 여행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칼빈은 파렐의 강권에 의하여 제네바에 정착하였고, 1536년 9월 1일 제네바 교회에 부임하였다.
제네바는 스위스 연방의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프랑스와 이태리와의 교역 중심지로 사보이(Savoy)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16세기 초반 프리브르그(Fribroug)와 베른(Berne)의 도움으로 독립을 했고, 1534년 부도덕한 생활로 악명이 높던 주교를 몰아내었다. 제네바의 행정은 200인의 귀족으로 구성된 대의회와 25인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관할하였고, 시민들로 구성된 총회는 4인의 평의원과 재정관을 선출하여 시정을 행사하였다. 제네바 시의회가 로마 천주교회 신앙을 옹호하는 사보이에 대하여 정치적인 반란을 시도한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교황제의 노예 상태에 매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렐의 설교를 통하여 제네바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렐은 1485년 프랑스 도피네 지방의 가프(Gap)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인문주의자 르페브르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였다. 그는 1521년 온건한 개혁자인 브리소네의 비호 아래 설교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후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유랑 생활을 하다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부쳐를 만나 교제하였다. 그는 1532년경부터 제네바에 와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네바에 도착한 파렐은 제네바 시민들이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격렬한 설교를 감행했기 때문에 도리어 시민들의 감정에 자극을 주게 되어, 하마터면 생명까지 빼앗길 뻔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친구들과 같이 제네바 시를 떠날 수 있었다. 파렐은 일단 퇴거했다가 베른(Bern)에 있는 친구 프로망(Antoine Froment)을 제네바 시에 파송하였으나 그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실패의 원인은 당
시 제네바 시민들이 개혁 신앙의 참 뜻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파렐의 설교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렐은 이에 힘을 얻어 프로만과 함께 다시 제네바로 향하였고, 1534년 3월 1일 제네바 시 당국으로부터 설교권을 얻기에 이르렀다.
파렐, 올리벳탄, 젊은 안톤 프로망 등은 제네바 속에서 설교 및 선전공세를 통해 그 분위기를 일신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운이 다했다고 할 수 있는 주교측에서 제네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그는 제네바 시가 자유와 안보를 위한 투쟁과 복음주의적 사상 사이에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535년 6월 장기간 계속된 교리논쟁을 통해 파렐과 비레는 무능한 카톨릭측의 대변자들을 물리치고, 중앙 성당을 비롯한 여러 교회들을 과감하게 차지하였다. 성상 파괴론자들(Iconoclasts)은 교회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을 부수고 성자들의 조각들을 우물 속에 빠뜨려 버렸다.
그해 8월 대의회에서는 미사집전을 중지시켰으며, 그 후 수개월 간 카톨릭 성직자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니, 프로테스탄트측 지도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다. 1536년 1월 프로테스탄트인 베른 시는 사보이 가를 격퇴시키고 점령하였으나, 오랜 논란 끝에 이 도시를 독립시키는데 합의하였다. 1536년 5월 21일 스위스 직접 정치에 따라, 각 가족들의 남자 가장들이 대성당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만장일치로 복음주의적 형태의 예배를 실시하기로 가결하였다. 교회 재산은 시의회에서 감독하기로 하였으니, 쯔빙글리가 쥬리히에서 실시한 바와 같은 국가 – 교회 형태의 제도가 성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 시기에 파렐은 제네바에 들른 칼빈을 강권하여 이 도시의 개혁에 참여하도록 붙잡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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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네바에서의 칼빈
칼빈은 성 피에르(St. Pierre) 교회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는 일로 제네바 개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제네바 시 당국은 칼빈을 그 이름조차도 거명하지 아니하고 ”저 프랑스인’이라고 불렀다. 제네바에 도착한지 한달 후인 10월에 로잔에서 카톨릭과 개혁자 사이에 성찬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칼빈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인정을 받아 정식으로 설교하게 되었다.
1537년 1월 교회의 개혁을 기대하면서 파렐과 함께 ‘교회 행정에 관한 조례’(Articles Concerning the Government of the Church)를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조례는 4개 조항의 개혁안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① 바울의 가르침대로 찬송할 때 시편을 사용할 것, ② 매주일 성찬을 행할 것, ③어린이를 위한 교육을 실시할 것, ④ 결혼 법을 개혁할 것 등 이었다. 칼빈은 예배의 개혁을 위하여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고, 어른들도 찬송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결혼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와 재침례교도의 교리가 매우 위험한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곡된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붕괴할 수 있다고 본 칼빈은 제네바를 신앙적인 공통점을 가지는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교훈과 신앙고백」
(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이라는 신조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모든 시민들은 10명씩 그룹을 지어 이 조문을 준수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 노력은 1537년의 포고령이 제정됨으로써 그 절정을 이루었다. 칼빈은 세속 정부도 하나님에 의해 수립된 것은 인정하였으나, 정부가 교회의 고유한 특권을 침해하거나 순수하게 영적 문제들에 대해 상관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점차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 조직을 정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사치를 금하는 각종 법규 및 윤리에 관한 규칙들을 통해 전통적으로 시의회에서 취급하던 도덕에 관한 문제들은 사실상 교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주요 인물들을 시의 모든 구역에 배치, 임명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예방하고 악덕한 행위를 보고하도록 시켰다. 마
태복음 18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포고령은 규정하기를, 만약 잘못을 범하는 신자가 있을 때에는 우선 형제의 사랑으로 권면하도록 하고, 그 후에도 개선의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에 알리도록 하였다. 만약 계속 죄를 범할 경우에는 목사가 공개적으로 그 자를 비난하고 회중 가운데서 축출시킨다는 것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기 신자들의 도덕 생활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반동적 경향을 보이는 반대파의 세력들이 그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이 본래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시내에 프랑스계 난민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해 간다는 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로잔에서 목사직을 맡고 있던 정서적으로 불안전한 경향을 보이던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는 그곳에서의 비레의 활동을 흠잡기 시작하였다. 카롤리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칼빈에게 반삼위일체적 경향이 있다는 중상을 하기 시작했다. 베른 시의회는 칼빈의 입장을 두둔하는 한편, 그곳 영내에서 카롤리가 설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로 되돌아갔으며 결국 다시 카톨릭으로 재 개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칼빈의 위치는 약화되었으며, 제네바 내에서 그의 권위도 손상되었다.
한편 제네바 자체 내부에서도 쟝 필립페(Jean Phillipe)라는 자의 지도 하에 강력한 반대당이 결성되기 시작했으니, 그는 개혁을 반대하고 목사들이 도덕문제를 취급하는 것과 강제로 신앙고백을 시키는 것 등을 반대하였다. 1538년 2월 칼빈의 대적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요직을 차지하게 되니, 목사들은 강단에서 이들을 반박하였다.
한편, 베른 정부는 베른 식의 예배, 성례 의식 규범을 전 영내에서 실시하고자 하였으니, 이 가운데에는 성찬 때에 무교병의 사용과 세례식에 사용하는 성수반(Baptismal Fonts)의 보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과 파렐은 이러한 요구를 제네바 안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으므로, 베른식 예배 규범을 일단 유예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소위원회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1538년 부활절에 설교하였으나, 이처럼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성례식을 베푸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 다음 날 200인 의회는 모임을 갖고 칼빈과 파렐에게 사흘 내에 그곳을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제네바를 떠나 베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취리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곳에서 교회의 체제, 지리문제 등에 관한 자기들의 입장을 밝히고 일반적인 호응을 받았다.
파렐은 누사텔로 돌아갔으며, 칼빈을 스트라스부르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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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칼빈과 스트라스부르그
(2)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개혁 운동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빈은 1538년 9월부터 1541년 여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체재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3년 동안 칼빈은 주로 목회와 상담과 저술로 시간을 보내며, 개혁의 견문을 넓히는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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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그에 대하여 독일의 종교개혁사가인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종교개혁이 가능하도록 여러 조건이 이곳보다 잘 갖추어진 곳은 유럽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동시의 위정자들은 종교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정치적 입장에서 능란하게 처리했다. 그 결과 스트라스부르
그는 저 위대한 시장 요한 스트룸(John Strum)의 지도 하에 비록 제국도시 가운데서 최대의 위용과 부를 자랑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면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드나드는 인문주의자들의 무리, 학문과 교양이 풍부한 시민들, 독일신비주의운동이 남겨 놓은 내적 경건의 전통, 라인강으로 인해 예부터 문명의 통로가 개통되어 자유로운 정신이 교류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약동하는 생명력은 부쳐라는 한 개혁가의 영혼 속에 깊숙이 흘러 들어가
용해되었으니 축복 받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스트라스부르그는 사가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의 안디옥’ 또는 ‘서남 독일의 비텐베르그’라고 불려 질만큼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부쳐와 교제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 권징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부쳐의 예배 방식을 따라 예배 의식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난민 교회를 섬겼다. 특히 교회 음악에 있어 영창이나 오르간 음악보다는 시편 찬송을 더 선호하여, 시편 중 18개를
작곡하였고, 찬송을 편집하여「찬송가」(Book of Music)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찬송을 기도와 함께 공적 예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 칼빈은 공적인 기도가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여 예배에서 찬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예배 사상은 나중에 개혁 교회의 예배 모범이 되었다. 칼빈의 프랑스 피난민 교회는 약 500여 명의 교인이 모이곤 하였는데, 한 방문객의 말을 빌리면, 그의 교회는 ‘노래하는 공동체’(singing community)라고 표현할 정도로 찬양을 중요시하였다.
칼빈은 부쳐의 영향으로 교회 연합에도 깊은 관심을 표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한 어디서나 누구하고도 협동할 수 있다는 것과 자유로운 협동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이와 같은 칼빈의 주장은 부쳐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칼빈은 1539년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기독교 연합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자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참가하였고, 1540년 부쳐와 함께 하게나우와 보름스에서 열린 교회 연합을 위한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541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공식 사절로 레겐스부르그 회의에 참석하여 콘타리니 추기경과 멜랑톤을 만나기도 하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면서 기독교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목회하는 가운데 틈틈이 네델란드의 개혁자 요한 스트룸이 세운 중등학교에 출강하여 신학을 강의하면서 교육적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경험은 나중에 제네바에서 매우 유용한 개혁의 수단이 되었다.
칼빈은 친구들의 권유함을 받아 이곳에서 결혼하였다.
칼빈은 언제나 무리하여 일을 하는 편이었으므로 친구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결혼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 생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희랍인들이 트로이를 공격한 것처럼, 오직 아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카톨릭과 싸웠다는 중상을 듣기 싫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칼빈은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부를 찾는데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칼빈의 내조자의 조건은“겸손하고 소박하고 평범하고 인내심이 깊어야하고 내 건강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40년 칼빈은 베자의 소개로 세 자녀를 둔 과부 이델레트 드 부레(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였다. 이델레트는 네델란드에서 박해를 피해 온 재침례교도였으나 부쳐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들은 1542년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일찍 잃게 되었다. 그때 칼빈은“우리 아버지 는 우리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신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사람들이 그에게 자녀가 없음을 비방할
때, “나는 무한히 셀 수 없는 영적인 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응수하여 자녀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델레트는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549년 사망하였는데, 후에 칼빈의 적들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그녀가 지루함
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고 악평하였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이었으며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으나 결혼 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곳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1539년「로마서 주석」을 간행하였고, 「기독교강요」개정판을 내었으며, 「사돌레토 추기경에게 보내는 서신」과「기도서」그리고「성찬론」을 각각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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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칼빈과 제네바 개혁운동
칼빈과 파렐이 떠난 뒤, 제네바는 로마 천주교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개혁자들이 빠져나가자, 로마 천주교회 당국이 제네바를 회유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539년 5월 추기경 야고보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성령께서 계속하여 교회의 칙령과 종교회의들을 인도하셨으므로”로마 천주교회에 오류가 없으니, 오류 없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선동하였다. 그는 제네바 시민들에게“전체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여 교회의 칙령과 교회 법과 성례를 지키던가, 아니면 분열과 계략을 일삼는 인간들을 따르던가”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당면한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는 선동을 잠재울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유일한 대안은 칼빈이 돌아와 민심을 수습하고 개혁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칼빈에게 “어두움이 지난 후에 빛을 소망한다.”라는 말이 겉봉투에 쓰여진 간절한 내용의 재청빙 서한을 보냈다.
‘제네바 시장과 시의회는 우리의 훌륭한 형제요 탁월한 친구인 칼빈 선생님께 편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의 확장만이 당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한 제네바시의 대·소의회와 총의회(총의회는 자신들의 이
름이 여기에 쓰여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을 매우 간절히 우리에게 부탁하였습니다)의 이름으로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당신을 초청합니다. 우리들이 당신을 절실히 요청하는 이곳에서 당신의 옛 직무를 다시 맡아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떤 어려움이나 곤란도 느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면에서 당신을 예우하고자 합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삶이 죽음과 같이 힘든 과정이었으므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내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죽어야 하는 그런 십자가보다는 일백 번 죽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다.”고 심경을 토로하였지만, 이번에도 파렐의
경고와 권면 때문에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칼빈이 돌아오자 제네바 시의 모든 민중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귀환을 환영하였고,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는 연봉으로 250 플로린스(florins), 12섬의 밀, 1,000리터
의 포도주로 사례를 책정하고, 칼빈의 계획대로 제네바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스위스에 다시 돌아온 칼빈은 제네바를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교회 헌법을 만들기를 원해, 이를 위한 위원회 구성에 시의회가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소위원회는 칼빈을 돕기 위해 6인의 위원을 임명하였고, 위원회는 3주만에 헌법 작업을 마쳤다. 위원회는 그 초안을 시의회에 제
출하였는데, 소위원회와 중위원회를 거친 후, 마지막 단계로 11월 20일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제네바 교회 헌법’(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이다. ‘교회 헌법’은 지역 교회의 자율과 평등 사상을 강조함으로 감독 정치에서 볼 수 있는 위계 질서 사상을 배제하였고, 신약의 가르침대로 장로 정치의 골격을 유지하였다.
칼빈은 치리법원을 세워 세속 정부와는 별개로 파문권을 행사함으로써 정부가 교리 및 교회 내 치리문제에 개입하는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곳에서는 도시 내에서 각종 부도덕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치리법원은 아주 사소한 범죄까지도 검토하고 재판하였으며, 음탕한 춤, 가슴을 깊게 판 여인들의 의상, 카드놀이, 술 취하는 것 등도 심한 제재를 받았다. 제네바는 당시 악명높은 매춘의 도시로 꼽히고 있었으므로 칼빈은 이에 대해
매서운 태도를 취하고자 보다 호된 처벌을 주장하였다.
칼빈의 주장에 의해 술집들은 일단 문을 닫고, 보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카페들을 다시 열어 이곳에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참고삼아 찾아보도록 하기 위해 프랑스어판 성경을 비치하도록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소비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다시 술집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술, 이단, 간음, 신성모독, 난동 등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심각한 범죄들은 세속정부에 이관되었다. 어떤 시민은 자기 개를 칼빈이라고 이름지었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러한 법 집행 과정에서는 고문에 의해 자백을 얻어내는 사례도 허다하였는데, 4년 동안 58명이 처형당하고 76명이 유배당하였다. 칼빈은 법률에 대한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공공질서에 관한 부문에도 밝았기 때문에 순전히 세속적인 문제들에 관하여도 의회들과 평의원들의 자문에 응하였다.
칼빈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라는 소공화국에서 거의 절대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이처럼 그의 지식의 노련한 힘과 인격의 영향력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결과 제네바는 짧은 시간안에 순결한 교회와 개혁된 정치질서의 영광으로 빛났다. 칼빈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제네바로 몰려들었다. 또 여러 곳에서 폭정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영향력과 그 지배 아래서 안전한 거처를 찾아 제네바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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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칼빈과 제네바 개혁운동
(1) 개혁의 반대자들
칼빈의 제안대로 ‘교회 헌법’이 시정부에 의하여 통과되었지만, 제네바 개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었다. 다수의 시민들이 칼빈의 도덕적인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대항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인 방종파(Livertines)는, 칼빈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엄격한 윤리 생활을 요구하자, 칼빈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카드놀이 제조업자였던 피에르 아뫼(Pierre Ameaux)는, 칼빈의 개혁 운동으로 유흥을 멀리하는 풍조가 일어나 막대한 재정적인 손실로 파산지경에 이르자, 1546년 1월부터 칼빈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중상 모략하였다.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는데 앞장섰던 아미 페린(Ami Perrin)도, 부도덕한 그의 장인과 아내가 장로 법원에서 치리받자, 칼빈의 개혁 운동에 대하여 사사건건 반대하였다. 특히 그는 1553년 원로원 회원으로 당선되자, 장로 법원이 가졌던
출교권을 시의회로 환원시키려고 하여 칼빈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칼빈은 반삼위일체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33)의의 도전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에서 궁정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라고사(Saragossa)와 툴루즈(Toulouse)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이태리와 독일을 여행하면서 필립 멜랑톤과 마틴 부쳐를 만났다. 그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를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을‘삼위일체 오류론’(De Trinitatis Erroribus)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1541년부터 1553년까지 비엔나의 대주교 주치의로 일하였다. 이때에 그는 칼빈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얼마 못 가서 그의 정체를 발견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 익명으로 쓴 ‘기독교의 재건’(Christianismi Restitutio)에서 그의 모든 사상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프랑스 리용에서 체포되어 화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 집행 전에 탈출하여 제네바로 향하였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로 온다는 말을 듣고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칼빈의 적들이 많으므로 그들과 합하면 칼빈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제네바로 왔다. 그러나 제네바 시 당국은 그가 도착하자마나 체포하였고, 이단과 신성모독 죄로 정죄하였다. 당시의 법 형평상,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상은 성도의 영혼을 죽이는 염병으로 간주되어 화형에 해당되는 벌을 받곤 하였다. 세르베투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제네바 시가 세르베투스에게 화형 선고를 내리자, 칼빈은 좀 더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것을 시의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적대적이던 시의회는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칼빈은 2개월 13일간 세르베투스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그의 개심과 수정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1553년 10월 27일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르베투스 사건 이후, 칼빈과 제네바 시 당국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의 도전을 받았다.
그는 사보이 출신으로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을 만나 개종하였으나, 인문주의적인 사상 때문에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1544년 아가서를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단적인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자, 바젤로 가서 신학을 가르치던 중 ‘이단에 관하여-그들은 박해받아야 하며, 어떻게 취급되어야만 하는가’라는 글을 써서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해 비판하면서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하였다.
카스텔리오는 삼위일체론, 예정론, 자유의지론, 신론, 천사론 그리고 종말론 등을 구원과 관계없는 교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추방하거나 구속, 투옥, 화형, 교수형을 선언하는 것은 교권의 횡포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교리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생활이므로, 교회가 교리적인 문제로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1551년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개종하여 제네바 근교에서 의원을 개업한 볼섹(Jerome Hermes Bolsec)의 중상 모략을 받았다.
그는 원래 파리에 소재한 카멜파(Carmelite) 수도사였으나, 이태리에서 의학 수업을 받은 후 프랑스의 샤블레(Chablais)에서 생활하면서 칼빈과 교제하였다. 그는 1551년 제네바에 도착하여, 칼빈의 예정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다고 주장하며 칼빈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네바 당국은 그를 중상 모략 죄로 체포하고, 바젤, 취리히, 베른의 교회들과 함께 정죄하였고, 그 해 12월 제네바에서 영구 추방하였다. 그는 샤블레에서 칼빈에 대한 인신공격을 계속하면서 예정 교리를 비판하던 중, 1562년의 오를레앙 교회회의와 1563년의 리용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칼빈의 반대자들은 신학적으로 그릇된 사상을 주장하며 정치적인 세력으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야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칼빈을 괴롭혔다. 그가 자주 다니는 골목에 사나운 개를 풀어놓는다던가, 예배 중에 교회를 향하여 총을 쏜다던가, 그가 설교할 때 크게 기침 소리를 내어 설교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네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곳으로 만들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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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칼빈은 죽을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였다.
칼빈은 중간키에 창백한 안색이었으며, 검은머리와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특히 그의 광채나는 눈동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의복은 소박하였으며 음식도 약간만 먹었고 잠도 적게 자는 편이었다. 굉장히 재치가 있었고 관찰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놀라운 천부적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명랑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익살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으며, 특히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보통 그의 태도는 엄숙하였으며, 어조는 단순하고 직접적이었고, 심사숙고한 후 심각하게 말을 꺼내곤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소위원회에서는, 하나님은 칼빈에게‘당당한 위엄을 갖춘 성품’을 부여하셨다고 회상하였다.
몸이 약했던 그는 13가지나 되는 병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움직이는 병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였다. 여러 해 동안의 과로와 피곤과 교회를 위한 근심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장시간 집무를 계속하였다. 부디 휴식을 취하라고 권하는 친구들에게 그는“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걸 보시면 어떻게 하지?”라고 답하였다. 너무나도 몸이 쇠약해져서 정상적인 업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기가 미처 처리하지 못하는 서기의 급료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그의 수입은 상당한 편이었으나 주로 구제사업을 위해 이것을 바쳤기 때문에 재산은 불과 얼마 되지 아니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에는 들것에 실려 교회당에 가서 강단에 앉아서 설교하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에 진력을 다하던 칼빈은 1564년 2월 6일에 마지막 설교를 하고 병석에 누었다. 5월 2일에는 최후의 편지를 누사텔에 있는 파렐에게 보내어 빨리 제네바에 와서 함께 마지막 날들을 지내자고 부탁하였다. 칼빈은 임종시까지도 ‘여호수아 주석’을 집필하던 가운데 있었는데, 결국 이를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격이 되었다. 테오도레 베자는 칼빈의 마지막 날들을 묘사하여 “겨우 영혼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하였다. 칼빈은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베자의 품에 안기어 임종하였다. 다음날 사람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플랭-팔리에(Plain-Palais)의 일반 묘지에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매장하였다.
칼빈은 진정 위대한 용기와 완전한 헌신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베자는 기록하였다. “나는 칼빈의 생활을 16년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 결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죽음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첨가할 수도,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완강한 고집, 성급함, 갑자기 폭발하는 분노, 충동성과 너그러움과 개방성의 부족등 모든 인간적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기독교권의 위기에 나타난 영적 거인이었다.”
19세기의 온건한 회의론자 에른스트 르낭(Ernst Renan)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칼빈은 당대 제일의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만약 칼빈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사실과 다르거나 혹은 너무도 막연한 판결이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1536년에 시작된 칼빈의 종교개혁은 한때 실패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좌절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개혁 운동을 전개함으로 1555년에 이르러서는 어느정도 그 틀이 잡히게 되었다. 성경이 가정, 교회와 국가 영역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고, 인간적인 권위는 사라지고 성령의 지도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개혁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낙스는, 제네바는“사도 시대 이후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였다. 나는 다른 곳에서 전례를 본 적이 없다.”고 기술하였고, 영국의 개혁자 존 베일은“제네바는 내게 놀라운 비밀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고, 가난 가운데서도 살 수 있는 성소와 같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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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인물탐방 칼빈 편
칼빈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더불어 가장 명성이 높은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고 국내에 출판된 책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블로그에서 지도를 함께 보면서 그의 삶을 가볍게 따라가보는 것도 나름의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출생 및 공부
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장 칼뱅, 장 깔뱅과 같은 이름들 중에서 어떤 것을 쓰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존 칼빈이라고 하겠습니다. 칼빈은 프랑스 파리의 북쪽에 있는 지역인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프랑스식 이름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죠.
칼빈의 아버지는 나름 중산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주교의 비서이자 참사회 감독관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칼빈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와는 달리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제로 만들고 싶었했기 때문에 12살 때 칼빈은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5년 정도 후에 칼빈의 아버지는 생각을 바꾸고 칼빈을 오를레앙에서 법을 공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칼빈은 인문주의를 접하고 빠져들게 됩니다.
오를레앙과 이후 부르주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칼빈은 그리스어와 분석적 사고와 논증을 통해 설득하는 방법들을 습득했습니다. 칼빈은 논증에 있어서 자신의 논점을 확신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래서 심지어 별명이 “목적격(the accusative case)” 별명도 참 이었다고 합니다.
칼빈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의 아버지가 1531년 죽음을 맞게 되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칩니다. 그리고 1532년에 다시 부르주로 가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때 칼빈은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책을 출판합니다.
종교개혁에 합류
칼빈의 회심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회심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공부를 하던 시기에 인문주의의 영향도 받고 또한 칼빈 본인이 성경과 교부들을 공부하는 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과 관련해서 분위기가 악화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1528년 과격한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파리에 있는 마리아와 아기의 형상에 있는 아기의 머리를 자르고 마리아상 덮개를 짓밟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에 관대한 편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이때부터 루터파에 대한 강경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러한 과격한 파괴 방식은 루터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1534년에는 가톨릭의 미사에 대해 비판하는 벽보가 프랑스 전역에 붙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필이면 왕의 침실문에도 그 벽보를 붙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보이는 사람 36명을 화형시켜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는 종교개혁에 적대적인 분위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칼빈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과격파들을 싫어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이러한 이유로 칼빈이 쓴 첫 신학작품이 로마 가톨릭이 아닌 재세례파에 대한 반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무튼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칼빈의 신변도 위태로워졌습니다. 1533년에 파리 대학의 새 총장이 된 니콜라 콥은 루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고 그 때문에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칼빈도 관원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게 되죠.
1535년에 칼빈은 바젤로 피신을 하는데 이곳에서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초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프랑수아 1세에게 이 책을 헌정합니다. 사실 프랑수아 1세도 위에 언급한 안 좋은 일들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아지긴 했지만 교회의 개혁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무엇보다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과격하고 위험한 이단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책의 인기는 엄청났습니다. 초판은 9개월만에 매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여러차례 중보되어 1560년에 최종판이 나오게 됩니다.
제네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지적인 논증 능력도 탁월했고 학문적 저술 능력도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적성에도 맞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이 학문과 저술에 소명이 있다고 여겼죠. 그랬기에 칼빈은 조용한 곳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라는 지역으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칼빈은 잠시 몰래 파리로 돌아갔었고 그곳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면 전쟁의 위험으로 인해서 제네바를 우회해서 가야했습니다. 그때가 1536년이었습니다. 당시 제네바는 이미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곳이었죠.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던 사람은 기욤 파렐이었는데 그는 종교개혁을 함께 이끌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그래서 곧바로 칼빈을 찾아간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말합니다. 당연히 칼빈은 자신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놔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을 하게 되고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의도치 않게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됩니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가 된 것이죠. 지금은 제네바는 국제적인 도시이고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여담이지만 전 제네바에 가면 Le Relais de l’Entrecote라는 레스토랑을 가보고 싶더군요. 프랑스에도 지점이 좀 있는 이 사실이 맛을 보장해준다는 스테이크집입니다. 메인메뉴는 스테이크 단 하나라는 사실도 뭔가 맛집의 냄새가 나긴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녀와서 블로그에 후기를 남겨놨더군요.
아무튼 마치 억지로 제네바에 남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해서 칼빈이 사역을 대충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제네바에서 남아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여겼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생각과는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이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게을리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결코 수월할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제네바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은 원했기는 했지만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이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칼빈과 파렐이 철저하게 개혁을 진행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반발했습니다. 사람들은 칼빈이 범죄자들이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결국 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칼빈과 파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당시 취리히에 있던 불링거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쫓겨나는 것이 확정되고 칼빈은 원래 목적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됩니다.
스트라스부르
스트라스부르에 가게 된 칼빈은 원래 생각했던 대로 조용히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곳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는 마틴 부처에게 붙들려 프랑스 난민교회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사역은 제네바와 비교할 때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스트라스부르는 지금도 매우 아름다운 도시로서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으면서 마틴 부처에게 신학과 목회사역의 방향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며 종교개혁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칼빈의 친구들이 그를 결혼시키기를 원했고 결국 두 아이가 있는 과부였던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하게 됩니다. 칼빈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지만 또한 어려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칼빈 부부의 아들은 태어난지 두 주만에 세상을 떠났고 칼빈의 부인 이들레트도 1549년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죠. 이런 일들이 칼빈을 힘들게 했습니다.
제네바 복귀 및 개혁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을 한지 몇년이 되지 않아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됩니다. 칼빈이 추방된 뒤 제네바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 기회를 틈타서 가톨릭 주교인 사톨레토 같은 사람이 제네바를 다시 가톨릭 진영으로 되돌리려고 편지를 보내는 등 애를 썼습니다. 결국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에게 사톨레트의 글에 대한 반박을 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리고 칼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물론 칼빈은 선뜻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파렐과 부처의 설득으로 인해 제네바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네바로 복귀한 칼빈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 복귀했을 때 그가 설교를 통해 이전에 자기를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쫓겨날 때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부분을 이어서 강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칼빈이 어떤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죠.
칼빈은 냉정한 독재자라는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사실 그런 여건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제네바의 시민조차 아니었기에 그는 투표권도 없었고 당연히 세속적인 공직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아무튼 칼빈은 이렇게 제네바로 돌아와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하게 됩니다.
칼빈은 아무 생각 없이 제네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교회법을 만들어서 제시했고 겸손해진 상황이었던 제네바 시의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교회법에서 칼빈은 교회의 사역 직분을 목사, 교사(doctors), 장로, 집사들의 4가지 직분으로 나눕니다. 칼빈의 관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랬기에 칼빈은 올바른 목양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몇몇 목사들과 12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컨시스토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교회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 컨시스토리는 매주 목요일 만나서 일을 수행했습니다.
쉽지 않은 개혁
물론 그뒤로도 제네바에서의 사역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철저한 개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네바 사람들은 프랑스 등 각종 지역에서 제네바로 몰려온 수많은 난민들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는데 이 악감정은 피난민 출신인 칼빈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칼빈을 방해하기 위해서 그가 설교할 때 일부러 기침을 하거나 의자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식의 치사한 방법으로 설교를 방해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칼빈마저도 자신의 사역이 거의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에 주눅들어서 물러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반전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1555년 제네바에서의 선거에서 칼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의원에 뽑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에 반발한 반칼빈파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피신해서 칼빈을 적대하던 사람들이 뿌리가 뽑히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덕분에 이때부터 칼빈은 원했던 일들을 더 힘있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칼빈이 한창 힘든 상황이었을 때 벌어진 사건이 바로 세르베투스 사건이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자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 가톨릭과 종교개혁 진영 모두에게 이단이었습니다. 그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위기에 몰려있을 때 몸을 피해서 제네바로 왔는데, 체포된 이후 오히려 담대하게 칼빈을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칼빈이 처형을 당하게 되면 재산을 몰수하라는 제안마저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칼빈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검사로 세우고 세르베투스를 사형시키게 되죠.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칼빈은 두고두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칼빈은 의회에 관대한 사형 방법을 요구하기도 했고 세르베투스를 설득하려고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칼빈은 사형선고에 영향을 미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윤리 기준으로는 칼빈이 확고하게 사형을 반대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칼빈의 상황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칼빈이 감당한 일들
아무튼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칼빈은 종교개혁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 있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고 당시 뿐만이 아니라 이후 시대에도 서구 시민사회의 원리를 세우는 것이나 공교육과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철학에도 영향을 주는 등 많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평소에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해보겠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했고 격주로 매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매주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3시간씩 투자했고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고 목사로서 나그네들을 돌보고 사람들을 견책하는 일들도 했습니다. 목요일에는 성도들의 훈육을 위한 컨시스토리에 참여해서 그 회의를 이끌었으며 금요일에는 목사회(the congregation)라는 이름의 성경 연구 컨퍼런스를 이끌었습니다. 설교를 하지 않는 주의 주중이라고 여유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통해 제네바로 온 피난민들을 가르치고 권고했으며 각지에서 박해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탄원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경 주석도 저술해서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주석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을 다루었고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쉽고 간결명료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정말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죠.
그뿐만이 아니라 칼빈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프랑스의 지하 교회들과 접촉하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나 다른 지역의 개신교를 따르는 통치자들에게 조언도 하고, 난민들을 훈련시켰으며, 선교사들도 파송해서 남아메리카에도 선교사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59년에는 목회자들을 기르기 위해서 대학과 아카데미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목회자 칼빈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했지만 무엇보다 칼빈은 목회자였습니다. 칼빈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교회의 목사로 여겼고 자신의 최고의 의무가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칼빈은 성경을 해설하고 적용하는 것을 최고의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로손(Lawson)은 칼빈을 설교단을 자신의 사역의 심장이라고 여기는 성경의 해설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칼빈은 성경 외에는 다른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칼빈은 매일 성경을 설교했으며, 설교의 능력 아래에서 제네바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제내바의 시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것에 대해 변화됨으로써, 존 녹스가 훗날 말한 것처럼 이 도시는 복음이 유럽의 남은 지역과 영국과 신세계로 뻗어나가는 시발점인 새로운 예루살렘이 되었다.”
또한 로손에 의하면 칼빈이 설교할 때 우선적으로 전하는 대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상은 위대한 이 신학자의 명성과 능력에 가장 덜 감흥을 받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칼빈은 그 대상에게 가장 강력하게 설교했고 그가 쉽게 마음을 닫게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굴까요? 바로 칼빈 자신이었습니다. 즉 목회자로서 칼빈은 설교할 때 항상 자신을 염두에 두고 설교한 것이죠. 이것은 모든 목회자들이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날들
많은 일들을 감당했지만 사실 그것들을 다 해내기에 칼빈은 몸이 너무 약했습니다. 그는 굶기를 밥 먹듯 했고 하루에 한 끼를 아주 조금만 먹었다고 합니다. 몸이 약했기 때문에 더 소식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칼빈이 활동하기가 조금 편해졌던 시점인 1555년부터 그의 건강은 오히려 급격히 안 좋아지게 되어서 관절염, 담석으로 인한 통증, 치질, 신장염, 신장 결석, 통풍, 담 등 정말 안 아픈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64년에 삶을 마치게 됩니다. 원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의 사람이었던 칼빈은 죽을 때에도 자신을 평범한 묘지에 묻어서 무덤에 표시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자신이 원했던 길이 아니었고 자신의 기질상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음에도 칼빈은 이렇게 전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주변의 방해와 공격, 그리고 몸의 약함을 안고서도 말이죠.
칼빈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이제 영국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추구한 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후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S. J. Lawson, The Expository Genius of John Calvin
F. L. Cross & E. A. Livingstone (Eds.), I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이정숙, “제네바 컨시스토리”
Over de auteur 재국 디자이너를 꿈꾸던 공대생 출신 신학도. 『신앙탐구노트 누리』의 저자이며 초보 아빠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교회사를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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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중심 사상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 종교개혁의 시작 존 칼빈의 종교개혁 칼빈주의 신학 예배의 개혁 언약 신학 칼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전개와 영향력 종교개혁 5대 강령
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은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이다.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그리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루터의 반박문을 증명하는 유일한 문서인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의 육필원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17년 루터는 엘베 강변 비텐베르크에서 대학의 오랜 관습에 따라 모종의 명제를 논쟁용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형태라서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대하여 급진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형태로 촉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의 불길은 타올랐고 유례없는 변혁이 시작되었다. 신앙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종교개혁 이전의 칼케돈파인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비 칼케돈파인 오리엔트 정교회와 신교 혹은 개신교로 불리는 장로교, 개혁교회,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교파로 분리되었다. 종교개혁은 존 칼빈에 의해 신학적으로 완성되어, 제네바를 중심해서 전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존 칼빈의 종교개혁(John Calvin, 1509-1564)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이후 칼빈의 제자였던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 (Reformed Church)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확고하게 하였다.
1537년 1월에 칼빈은 제네바의 대 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 등 네 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의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고, 어린이들에게는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 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 의회와 대 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네 차례 집행하며, 결혼 광고는 예식 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 시는 칼빈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 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고 파렐과 칼빈을 아리우스주의자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 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파렐, 칼빈은 제네바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다. 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스트라스부르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 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내면서 연구와 함께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등 목회 일에 전념하였다.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특별평의원들은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하였다.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져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1539년 10월 대 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빈은 보름스 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싸여 있었다. 이때 파렐의 충고가 칼빈에게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 제도의 수립과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빈과 시의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 전쟁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빈도 이들로 인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개혁은 철저하였다.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에 대하여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신앙 본래의 모습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중 성경적인 부분은 유지하였으나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단호하게 개혁하였다. 미사를 폐지하여 성경적 예배로 바꾸었으며,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다. 또한 인본주의적 공로사상과 우상 숭배적 관행을 개혁하였다.
칼빈주의 신학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바꾸고자 한 종교개혁은 결국 개신교회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존 칼빈의 영향은 매우 컸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칼빈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그의 신학은 기독교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만큼 기독교 신학과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유럽 전역으로 개혁이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다.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을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을 ‘칼빈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것은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칼빈주의(Calvinism) 즉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는 존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 종교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었고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 잡은 사상이다. 이와 같이 그 사상의 체계적인 정리와 발전에 칼빈이 미친 커다란 영향으로 인해서 ‘칼빈주의’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칼빈주의가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발생하였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빈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빈주의를 말할 때에는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별칭들이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칼빈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개혁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서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네덜란드)가 있으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 신앙고백은 침례 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예배의 개혁
칼빈주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서 예배(성경, 기도, 찬송, 헌금)를 성찬과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방도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구절은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예배)하지 말라”이다. 이 둘째 계명은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를 출애굽기 32장 4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언약신학
칼빈주의 신학은 언약을 중심으로 심화되어왔다. 언약신학 (Covenant Theology)은 칼빈주의의 은혜 강조를 잘 드러내는 중심 개념이 되었다.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 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 자들은 언약이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하며, 성경의 여러 가지 언약이 결국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첫 번째는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다.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죗 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은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되었다고 본다.
두 번째는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이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 죽음이 왔다고 본다.
세 번째는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이다. 아담이 실패한 이후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빈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전적 타락설에서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이나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주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칼빈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 (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에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합력설(synergism)로서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단독설(monergism)로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이것이 잘 알려진 것은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 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 5대강령’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전적타락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은 그 질(質)이 달라서 그중에는 구원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믿음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지만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여기서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으니”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그리스도를 진실 되게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무조건선택 : 전적타락 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3) 제한속죄 :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언약’ 또는 ‘은혜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 : 요한복음 6장 37절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5) 성도의견인 : 요한복음 6장 39절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언약’과 연관이 있다.
칼빈주의의 전개와 영향력
존 칼빈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그리고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빈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 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 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 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질서에 관련하여 바벨탑 이야기에 사람들 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적인 성경해석을 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참된 의미와는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고 함으로써 개혁파 교회의 교리를 악용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 고백을 실천하였다.
칼빈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개혁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존 칼빈의 사상은 유럽 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프랑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에 영향을 주었다.
칼빈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으로 관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와 칼빈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제네바는 본래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빈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네 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신학이 사회 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과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을 금지하거나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고,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퓨리턴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유럽이 점차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박해받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개혁 5대 강령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다섯 가지의 ‘솔라’(Five Solas)로 요약된다.
첫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진리냐 비 진리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경 밖에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이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 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다.
세 번째는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효력을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인간 쪽에서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총을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오직 은혜의 교리는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 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네 번째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 역시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 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다섯 번째는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며 우리는 개혁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아 ‘오직’의 신앙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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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지성 중심의 자율적 인식론을 강하게 배격했으며 지성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임을 강조했다. 바른성경적 인식론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서 지성을 도구로 삼는 것이지 결코지성에서 출발해서 그 지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님을 칼빈은 경고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아퀴나스와는 달리 죄의 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 of sin)을 강조한다. 죄의 영향을 받은 지성은 스스로 자율성, 중립성, 독립성 등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성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힘입어 된 것이므로(행 17:28), 칼빈은 그 인식론적 행위의 순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이성의 도구성(instrumentality)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가능하게 하는 근본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율적 이성을 비판한 것이다. 칼빈의 인식론은 한마디로 성경을 그 중심에 놓고 그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상적 혹은 신학적 방법론들을 동원하는 구조라고 하겠다. 이러한 칼빈의인식론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사상에 도전할수 있는 동기와 이유를 제공했다.
Calvin strongly opposes to the autonomous epistemology centering around human reason. And he emphasizes that to know God as the ground of intellect is the true knowledge of man. For Calvin, the Biblical epistemology starts with God and uses human knowledge as an instrument, not starts with reason and judges Him with it. Unlike Aquinas, Calvin emphasize the noetic effect of sin in an affirmative way. The intellect affected by sin can’t be autonomous, neutral, or independent by itself, rather must be dependent upon the order of God. Since all human activities, including intellect, become possible in God(Acts 17:28), Calvin claims that at the moment of epistemological activity of man, he must acknowledge the epistemological possibility by God. Calvin never denied the instrumentality of reason, but declined the autonomous reason denying its ground. In sum, the epistemology of Calvin centers around the Scriptures and asks for all kinds of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methods as complementary. This kind of epistemology of Calvin was clear enough to oppose to the theology and thoughts of Roman Catholic church and solid enough to provide the motive and reason for the opposition.
스위스 종교개혁(존 칼빈)
스위스의 종교개혁
(존 칼빈)
칼빈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다른 외래어에서 보듯이 다양하다. 존 칼빈, 요한 칼빈, 쟝 깔뱅, 요하네스 칼비누스(라틴어표기의 우리말 음역)등이 있다. 칼빈은 종교개혁 제 2세대 사람으로서 프랑스 파리 북동쪽 노용에서 태어났으나 종교개혁운동은 스위스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제 2세대는 1세대보다 조직신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조직신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가톨릭의 비판에 대해 자신들을 보호할 복음적 신학의 기본개념들을 제시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사상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청교도를 중심으로 구체화되어진 후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 체계화의 기틀을 놓았다.
1.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1536년 초반 노용에서 기독교 강요라는 소논문을 출판한 그는 슈트라부르크에 정착하여 개인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지만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찰스5세에 의해 일어난 전쟁으로 노용에서 슈트라부르크에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통과하는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제네바 시는 파렐과 캘빈의 종교개혁이 쟁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칼빈이 그 도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요청하였고 칼빈은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그는 제네바에서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어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재세례파의 공개 도전과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였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제네바 시에서 신앙훈련의 견고한 기초를 마련하려는 그의 시도는 저항에 부딪쳐 축출되어 1538년에 슈트라부르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기독교 강요를 새롭게 손질하여 출판하였으며 1539년 최초의 주석 ‘로마서‘를 내어놓았다. 여기서 독일의 멜랑톤과 슈트라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와의 우정을 통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슈트라부르크의 3년은 목회적이나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완전한 성숙기를 가져다주었다. 이곳에서 프랑스 난민들은 칼빈의 목회 전반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람된 열정을 쏟으며 목회 일에 전념하였다.
칼빈이 없는 동안 종교적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었으나 1540년 파렐에 동조하는 인물들이 다시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1540년 10월22일 시의회는 칼빈에게 다시 복귀를 원하는 초청장을 보내었다. 칼빈이 정중히 거절하자 1541년 2월 다시 설득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541년 9월13일 33세의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제네바의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시켜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이겨나갔다. 종교개혁 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이 기간은 개신교의 칼빈(1509-1564)과 가톨릭의 로욜라(1491-1556)에 의해서 주도된 때였다.
칼빈은 제네바 시 목회 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자, 교육가로, 저자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칼빈의 종교개혁 목적과 동기
칼빈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개혁이었다. 바른 목회가 이루어지는 교회로서 그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전히 행사되며 성령의 역사가 구체화되어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인식되어지는 교회를 추구하였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존귀와 성령의 역사, 복음의순수성과 바른 교회를 위해서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적 목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였다. 이 땅위의 교회가 상처받지 않는 온전한 교회이길 노력하였다. 칼빈의 전 생애의 목적은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고 더욱 밝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인가에 목적이 있었다.
제네바는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오히려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하여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며 범법자들을 회개시켜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었다. 엄중한 죄를 지은 자는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 출교를 명하고 회개했을 때 다시 회복시켜주었다. 특히 목회자들을 성경지식과 품행에 대한 심사 교인들의 교화능력여부를 시혐을 통해서 분석한 후 목회자로 내세웠다.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다.
3. 칼빈 신학의 사상
칼빈 신학의 요점은 하나님 중심사상이다. 특성은 하나님 주권과 영광,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은혜, 유일무이한 규범으로서의 오직성경,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내적조명, 목회 적 전인적 신학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칼빈의 이 5대추구가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둥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성령의 능력을 강조한 칼빈은 주관적이거나 감정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 불변한 전적 확신과 큰 순종 가운데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 중심사상은 하나님 절대주권에 입각할 때 삶 전체가 신앙이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기독교적 삶에 근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성취의 최고의 목표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며 그분의 왕권에 겸손히 순종한다. 칼빈의 체계 속에서 앞장 서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사고에 대한 그의 강조였다.
하나님의 주권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사람과 사건에 미치며 하나님의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초임을 나타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세계의 목적이며 유일한 근원이시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 속에서만 인간사회나 개인행동이 바르게 정돈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모든 삶에서 실존적 참여가 요구되는 신학이며 삶을 함께 이야기하는 신학이다.
4. 칼빈의 신학의 영향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중심이었다. 성경신학자였던 칼빈은 문자적 역사적 방법론을 자신의 성경해석학적 방법론으로 가져왔다. 성경 해석은 칼빈의 주석에서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키르리안, 오리겐,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바실리우스, 닛시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등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특히 어거스틴에게서 자유의지, 성찬이해, 예정교리 등에 영향을 받고 있다. 칼빈의 성경해석은 독창적 이라기보다는 어거스틴을 위시한 앞선 교부들의 해석에 빈번하게 도움을 받고 있어 전통적 해석에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주의를 배격하면서도 버나드를 빈번히 인용하고 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성경번역을 종종 그대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루터는 내적 경험에서 은혜와 믿음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반면 칼빈은 우선적으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집중하고 여기서부터 그의 모든 신학 행위는 출발하고 있다. 칼빈은 루터를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는 그를 향해 탁월한 그리스도의 사도, 복음의 전령, 하나님의 선지자 등으로 불렀는데 그렇다고 루터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칼빈에게서 발견되는 루터의 저작들로는 교회의 바벨론 적 포로(1520) 기독교인의 자유(1520) 대 교리 문답(1529) 소 교리 문답(1529) 등이 있다. 루터와 비교할 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학사상은 성찬론, 예정론, 교회 직분론 등이다.
칼빈은 루터보다 한 세대 후에 태어나 활동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루터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 결론이 날 때까지 신학적 문제들을 예리한 지성과 담대함으로 추적하였으며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자신의 사상을 따라 형성하려 하였다. 그 결과 칼빈은 개신교(Protestantismus)의 정체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5. 칼빈의 일대기
칼빈의 연대표(1509-1564)
유년시절과 교육(1509-1536) 1509.7.10 칼빈은 교육법률 자문관이었던 게라르 코벵의 아들로 노용에서 태어남 1523-1527 철학, 인문주의, 유명론 그리고 교부학과같은 기초교육을 파리에서 받음 그는신학을 했으나 성직 소명에 회의를 느끼고 신앙의 문제에도 회의를 느꼈다. 1527-1528 석사학위 취득과 그 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르레앙으로 감 1531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파리로 돌아왔다. 1531-1533 파리 대학에서 인문주의적인 연구를 하였다. 히브리어 헬라어에 박학한 인문주의자였다. 법학박사 학위 취득 1533.8-1534.5 교회의 본래적 순결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명을 느끼는 종교경험을 하게 되는 급격한 회심으로 로마가톨릭과 결별함 1533.11.1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그의 마5:3을 주제로 취임연설문을 작성해주었다, 소르본느에서 이 연설을 이단으로 제소하였고 파리로부터 그의 고향 노용으로 도주하였다. 그의 고향에서 12세 때 받은 가톨릭 성직소명 특혜를 포기하게 되었을 때 종교적 박해의 위험을 받게되어 바젤로 피신한다. 1534.10 슈트라부르크를 지나 바젤로 갔다. 이때에 연구에 몰두하여 개혁의 지식을 얻었다. 1534-1536 바젤에 가는 동안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고 1월에 바젤에 도착 1536.8(27세) 기독교 강요(그리스도교 경건의 신앙심 학습법으로 개신교를 대표하는 조직신학 작품이 됨)의 초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수정 보완되었는데 1539년 1543-1550 그리고 최종판이 1559년에 출판되었다. 이글의 초판 발행으로 프랑스 개신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첫 번째 제네바 시기(1536-1538) 1536 여행중 제네바에 유숙하는 동안 파렐의 초청을 받아 종교개혁에 동역. 8월에 성 피에르 교회에서 바울서신을 해설하는 강사로서 시작 1538 강력한 종교생활을 제네바 시민들에게 요구함으로 부활절에 제네바에서 추방당함. 제네바를 모범적 공동체로 만들려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스트라부르크에서의 체류(1538-1541) 1538 제네바 추방 후 몇 달 동안 바젤에 머물던 그는 부처의 초청으로 슈트라브르크에서 3년간 프랑스로부터 종교적인 이유로 도망 온 이들을 위한 공동체를 섬겼다. 1538-1540 마르틴 부처와 친교, 로마서 주석(1539), 독일 종교개혁가 멜랑톤과 친분 두 번째 제네바 시기(1541-1564) 1541 1539년부터 제네바 교회는 분열이 일어났는데 피첼의 추종자들에 의해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고 9월13일에 교회법의 초안이 시의회에 제출하여 통과됨. 교회회의가 출교의 힘을 갖게 되었으며 제네바 전 시민의 개인생활위에 힘을 행사함. 춤과 도박 등이 금지되는 엄격한 종교생활을 시민들은 요구받으며 때로는 처형되기도 하였다. 자쿠에스 그루에트와 파울모네 등이 간음죄와 칼빈 모독죄 등으로 처형되었고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부인사건으로 이단이 되어 화형 당함. 1554-1560 1555년에 이르러 모든 저항은 끝나고 칼빈은 당당히 제네바시의 선생이 되고 외국인 취급을 끝내고 영구적 제네바 시민권을 얻는다. 성만찬 논쟁 안에서 루터교도들과 함께 논쟁 1559 개혁교회의 정신적 중심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 1564.5.27 죽어 다음날 그의 비문을 통하여 표식을 하지 말라는 그의 유언대로 프랭 파레 묘지에 장사되어 오늘까지도 그의 무덤이 분명히 알려지지 않고 잇다. 칼빈은 루터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다면 그의 작업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칼빈의 후계자는 데오도르 베자(1519-1605)였다. 베자는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예정론을 대변하는자가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 목회 기간 동안 교회적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자, 교육가로, 저자로 그의 명성과 영향은 넓게 퍼져나갔다. 그의 신학적 통찰력, 주석적 재능, 언어지식은 종교개혁가들 중에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저술가가 되게 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루터교회 이외의 개신교회 속에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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