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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조각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들은 미즈타마라 불리는 물방울을 모티브로 세계관을 넓혀갑니다. 일본의 자랑이기도 한 그녀는 국가에서 주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어요. ‘호박’ 같은 작품은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죠? 파라다이스 호텔이나 제주도 본태미술관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는 조현병으로 불리는 정신분열증을 아주 어려서부터 앓고 있습니다. 작품은 정신분열증이 표현된 산출물이라고도 볼 수 있죠. 쿠사마 야요이의 숨겨진 작품관에 대해 해설합니다.
5월 19일 그녀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가 한국에서 개봉합니다. 영화를 통해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뉴욕에서 명성을 떨치기까지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직접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참고 글 –
이주헌 미술평론가, 쿠사마 야요이 인물특강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71
BGM – Soft Da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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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마 야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등 야요이의 어린시절은 자신의 상태를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29/2022
View: 8805
개인의 상처와 시대의 질곡을 극복해 온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
쿠사마가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 …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쿠사마 야요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Source: www.daljin.com
Date Published: 7/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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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쿠사마 야요이 어린시절
- Author: 발칙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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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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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쿄토시립 미술 공예학교(현 교토예대) 졸업.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출생, 1957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일본으로 돌아온 야요이는 나이 48세부터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에 구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일본관에 초대일본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004년 도쿄모리 미술관에서 KUSAMA TRIX 전을 오픈하였다. 시드니 비엔날레(2000), 타이페이 비엔날레(1998) 등 다수의 대형 국제전시를 비롯, 총 100여 회의 단체전 및 100여 회의 개인전을 오픈하였다. 문학활동으로는 20여권의 시집 및 소설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생애 [ 편집 ]
어린시절 [ 편집 ]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나 자란 쿠사마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1926년 히로히토 국왕의 왕위 계승, 1931년 만주 침공 그리고 당시의 불길한 전운 모두가 구사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소녀 시절을 전쟁 상황 속에서 보냈으며, 실제로 군수 공장에서 낙하산 재봉 일을 하기도 했다.[1] 그녀의 상태를 병이라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등 야요이의 어린시절은 자신의 상태를 이해받지 못한 채 깊은 상처 속에 지나가게 되었다. 일본의 부유한 가정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열 살무렵부터 심한 착란증상을 보였다. 환영을 보기 시작하며 발작과 착란에 시달렸으나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이 부족한 탓’이라며 체벌을 가했다.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고 강박증에 시달리던 구사마는 어린시절 치유받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작가시절 [ 편집 ]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물방울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자신의 환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하던 그녀는 1952년 23세 때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호 박사는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후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개의 물방울 무늬 오브제를 깔아놓는다. ‘개당 2달러!’였던 쿠사마의 사인이 적힌 수많은 물방울은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장을 받게한다..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강박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쿠사마 야요이(くさまやよい, Kusama Yayoi, 1929~)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을 추구할 뿐이다.
– 1985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くさまやよい, Kusama Yayoi, 1929~)
스토리온의 ART & LIFE 또다른 영상
http://program.interest.me/storyon/artandlife/2/Board/View?b_seq=1
쿠사마 야요이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였다
강박신경증과 편집증 그리고 불안신경증으로 인한 병을
자신 스스로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녀의 활동이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둠속에서 밀려오는 공포와 같은 영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괴로움. 하얀 좁쌀들이 벽을 타고 흐르던지 평면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들.
하나하나 모두 벽에서 끄집어내려고 하기위해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있다.
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 마츠모토시에서 출생하고,
1947년 교토시립예술학교에 입학해 1952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쿠사마는 이 전시를 통해 현재까지 지속해오는 작업의 모티브인 유기적으로 연결된 망(net)과 점(dot)
등으로 이루어진 250여 점의 작품을 발표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호박에 대하여
호박은 애교가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는
어린시절부터 마음의 고향으로서
무한대의 정신성을 지니고
세계 속 인류들의
평화와 인간찬미에 기여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호박은 나에게는 마음속의
시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
호박은 말을 걸어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성한 모습으로
세계의 전 인류가 살고있는 생에
대한 환희의 근원인 것이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내는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땡땡이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자신의 환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하던 그녀는 1952년 23세 때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호 박사는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 이후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개의 물방울 무늬 오브제를 깔아놓는다. ‘개당 2달러!’ 였던 쿠사마의 사인이 적힌 수많은 물방울은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초청장을 받게한다.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 1985 쿠사마 야요이
그녀의 작품에서는 무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무한 거울 방 이라는 설치작품인데
끈임없이 이어지는 무한속에서의 반복과 그 속에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준다.
밑에있는 작품은 소멸의 방이라는 설치작품이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관람객이 직접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수 많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쿠사마 야요이가 느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고 스티커를 붙여나가는 과정에서 도트가 채워져
최초의 방의 모습은 소멸되어버린다.
무한공간 ㅡ 무한증식
뉴욕에서 어느 날 캔버스 전체를 아무런 구성없이 무한한 망과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 붓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 손을 봤을 때, 빨간 점이 손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 손에서부터 점이 번지기 시작해서 나는 그 점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점들은 계속 번져가면서 나의 손, 몸 등 모든 것을 무섭게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응급차가 와서 벨뷰병원에 실려갔다. 의사가 진다하기를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정신이상과 심장수축 증상에 대한 진단이 나왔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나는 조각과 퍼포먼스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내 작업의 방향 변화는 언제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쿠사마 야요이
예술가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벽면을 타고 끊임없이
증식해가는 하얀 좁쌀 같은 것들을
벽에서 끄집어내어 스케치북에 옮겨 확인하고 싶었다.
현재 쿠사마야요이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오는 06월 15일 까지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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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증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예술가가 된 92살 일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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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마 야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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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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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원본 편집] 구사마 야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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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 – 아트인사이트Article author: www.art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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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 – 아트인사이트 [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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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쿠사마 야요이(くさまやよい, Kusama Yayoi,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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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 핸드메이커(hand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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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연대별 대표작품 소개
1 유년기
2 초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3 뉴욕에서의 전성기
4 다시 일본으로
5 다시 예술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다
6 우리의 영원한 영혼
쿠사마 야요이 연대별 대표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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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어린시절
Article author: artlec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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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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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쿄토시립 미술 공예학교(현 교토예대) 졸업.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출생, 1957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일본으로 돌아온 야요이는 나이 48세부터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에 구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일본관에 초대일본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004년 도쿄모리 미술관에서 KUSAMA TRIX 전을 오픈하였다. 시드니 비엔날레(2000), 타이페이 비엔날레(1998) 등 다수의 대형 국제전시를 비롯, 총 100여 회의 단체전 및 100여 회의 개인전을 오픈하였다. 문학활동으로는 20여권의 시집 및 소설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생애 [ 원본 편집 ] 어린시절 [ 원본 편집 ]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나 자란 쿠사마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1926년 히로히토 국왕의 왕위 계승, 1931년 만주 침공 그리고 당시의 불길한 전운 모두가 구사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소녀 시절을 전쟁 상황 속에서 보냈으며, 실제로 군수 공장에서 낙하산 재봉 일을 하기도 했다.[1] 그녀의 상태를 병이라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등 야요이의 어린시절은 자신의 상태를 이해받지 못한 채 깊은 상처 속에 지나가게 되었다. 일본의 부유한 가정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열 살무렵부터 심한 착란증상을 보였다. 환영을 보기 시작하며 발작과 착란에 시달렸으나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이 부족한 탓’이라며 체벌을 가했다.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고 강박증에 시달리던 구사마는 어린시절 치유받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작가시절 [ 원본 편집 ]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물방울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자신의 환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하던 그녀는 1952년 23세 때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호 박사는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후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개의 물방울 무늬 오브제를 깔아놓는다. ‘개당 2달러!’였던 쿠사마의 사인이 적힌 수많은 물방울은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장을 받게한다.. 각주 [ 원본 편집 ] 외부 링크 [ 원본 편집 ] [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노란 호박에 수많은 검은색 점이 그려져 있는 이 작품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로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쿠사마 야요이’하면 떠오르는 이 작품은 이다. 그녀는 항상 호박의 모티프는 ‘자신’이며, ‘자아’라고 한다. 그녀에게 호박은 어린시절 교감하던 자연을 상징하고, 순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박은 그녀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고 말한다. 작품 을 포함한 쿠사마 야요이의 많은 작품에는 그녀만의 아픔과 괴로움이 담겨있는데, 이는 그녀가 앓고 있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어린시절 집안 사업을 책임지는 어머니의 지속적인 폭력, 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인한 불우한 가정사와 전쟁이 일어나는 불안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10살 때 심각한 정신 착란 증상을 처음 겪게 되었다. 다음은 그 당시 그녀가 남긴 글이다. “어느 날 나는 테이블보에 새겨진 붉은 꽃무늬를 보고 있었는데, 그 무늬들이 훨훨 날아 온방을 채우고, 내 육체와 우주를 가득 채우는 환상과 둥근 물방울 무늬가 공중을 떠다니다가 저에게 붙는 환각을 경험했어요.” – 쿠사마 야요이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질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시절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질환을 가진 채 성장했다. 23살에 그녀는 나가노 대학의 교수인 니시 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니시 마루 시호 박사는 환영으로 나타나는 물방울 모양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업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 이후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물방울 모양을 미술적 소재로 삼아 작품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으로서 예술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시절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의 강박관념적인 정신질환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뉴욕활동 초기 시절 제작한 이다. 멀리서 보면 섬세한 단색조로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캔버스를 가득채우고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하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유기적 결합을 통해 존재하다는 의미로 끝없는 그물망을 만든다. 그녀의 강박관념을 표현한 이 미니멀리즘 작품은 이후 그녀의 작가적 모티프를 형성하게 된다. 시리즈는 작품 안에서 감상을 하면 무한성을 느낄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울 속에서 반복과, 그 속에 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는 작품이다. 쿠사마 야요이는 작품을 하면서 내 삶의 표면, 내 강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이어갔지만, 오브제와 캔버스는 한계가 있었고, 이후 무한에 대한 표현으로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쿠사마 야요이가 느끼는 환영과 환각의 반복과 무한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어, 그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이름은 이다. 하얀색의 빈 방에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스티커를 부여해서 방 안에 아무곳에나 붙이게 하고, 이렇게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서 최초의 방이 점차 소멸해가는 참여예술이다. 예술 작품을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는 미술관의 절대적인 규칙을 허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시작해 점차 물방울 무늬의 스티커가 증식해가는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질환의 증상이다. 관람객이 이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그 시간만큼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적 환영에 같이 시달리면서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 쿠사마 야요이에게 ‘작품’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의 예술 활동이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시달려온 정신질환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강박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다. 그녀가 겪는 헛것이 보이는 기괴한 환각과 학대를 당했던 아픔, 개인적인 집착과 강박관념은 완전히 치료되지 못하는 그녀의 정신질환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경쟁력이다. 현재 그녀는 1977년 뉴욕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 내에 쿠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그녀의 삶에서 보여지는 예술에 대한 애정과 끈기는 지금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 2030세대 현대인에게 더욱 큰 위로와 극복 에너지로 돌아오게 되며서 작품의 매력을 더 부각시키는 기능으로 순화한다고 생각한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쿠사마 야요이는 올해 84살이다. 보통의 경우 이 나이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다가올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이 나이를 맞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쿠사마의 경우에는 이와는 무척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쿠사마는 초기 일본의 활동에서부터 미국, 유럽, 남미, 호주, 중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60년 넘게 회화뿐 아니라 콜라쥬, 조각,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최근에도 쿠사마는 국제적 규모의 전시를 여러 번 개최하여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고 있으며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와 같이 새롭게 순회가 예정된 전시가 계획되는 것도 있다. 2011년에 발간된 작가의 자서전 에서 쿠사마는 자신을 아직도 성취해내야 하는 일이 있는 작가(aspiring artist)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작품 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이 아직도 이세상의 구석에 몰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스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을 극복해내고싶어한다는(‘to triumph over the pain of feeling cornered and trapped,’) 의욕을 내보였다. 쿠사마가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환각(hallucination)이다. 환각은 우리의 오감에 모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감각과 다르게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자극이 없이도 스스로 드러나서 마치 실제로 어떤 상황과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이러한 환각을 체험하는 상황은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이기보다는 뭔가 불안정하고, 결핍과 신경쇄약이나 공포 등이 그 촉발원인으로 개입되는 상황인 경우가 적지 않다. 쿠사마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과 관련하여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호안 미로는 카탈루니아에서 파리로 이주해 온 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 하루에 말린 무화과 몇 개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배고픔을 참아냈는데, 이 때 그는 정자를 죽이는 피임약물이 수프 위에 둥둥 떠다니는 환각을 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쿠사마 역시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에 동물이나 식물들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다든지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 주변으로 오로라처럼 빛이 발산되는 시청각적 환각을 경험하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작가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쿠사마에게는 환각을 촉발하는 요소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 내에 상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일본 나가노 지방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의 체벌과 욕설이 수반되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자살충동과 망상에 빠져 그리 행복하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린 쿠사마에 대한 모성의 결핍은 쿠사마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버려진 느낌이었다는 자서전의 고백에서 그 심각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쿠사마의 어린 시절은 2차대전 전쟁중이었으며 10대에 들어서면 2차세계대전의 당시자인 일본이 처한 전쟁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라서 쿠사마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살던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결핍의 시간을 지내야 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전쟁의 막바지에는 어린 쿠사마 마저 군수공장에 반강제적으로 불려가 낙하산 재봉 작업을 해야 했었다. 어머니에 비하여 아버지는 쿠사마에게 위협적이기보다는 무심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아버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모습처럼 쿠사마의 아버지도 여성 문제로 아내와 다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여러 차례 보여주는 가장이었으며 어린 쿠사마의 형제들과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무책임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사의 경험으로부터 쿠사마는 결국 남성에 대한 혐오와 거부의 심리를 키워 나아가게 된다. 쿠사마의 작품 가운데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돌기들은 이러한 남성혐오와 더 나아가 남성성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 작가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출품작 가운데 2004년작인 이나 2012년작인 과 같은 작품들은 원래 쿠사마가 갖고 있는 남성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과 태도를 담고있다고 볼 수 있다. 쿠사마에게 어린 시절의 불행과 불안에 대한 중요한 탈출구 가운데 하나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20대 초반 시절부터 일명 폴카점(Polka Dot)이라는 점무늬 패턴과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연속되는 패턴(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infinity nets’라고 불렀다)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쿠사마가 10살 때인 1939년에 그린 두 점의 연필 드로잉 소품에는 이미 작가의 성숙기에 대표적 표현 기법으로 자리잡는 이러한 점들과 유사한 패턴이나 그물망 형식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쿠사마가 작품화면 속에 점을 도입하는 것을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작가 부모의 가업인 씨앗 배양작업에서 일상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씨앗이나 배양과정에서 뿌려주는 물(방울)을 점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환원하여 작품에 도입한 것으로부터 폴카점으로 진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 무한으로 증식되는 점과 그물의 패턴은 곧 우주의 무한함과 영원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1959년 뉴욕의 브라타(Brata)화랑에서 열린 첫 미국 개인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그물’이 곧 자신의 과거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 전시에서 도널드 저드는 쿠사마의 그물 작품 한 점을 구매하였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마주하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는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가서 현실을 이탈하는 환상과 공상을 무한대로 증식시켜 나아가는 것이었을 거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쿠사마는 회화 100여 점, 조각 8점, 설치작품 6점 내외, 그리고 영상 작품을 출품했는데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2008년작 는 이런 의미에서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표 역할을 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성으로서의 쿠사마를 자연스런 남녀관계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평생을 통해 쿠사마는 자연스런 이성으로서의 남자친구를 갖지 않았다. 오직 한 번의 예외가 있다면 26살 연상의 미국작가 조셉 코넬(Joseph Cornell)과의 플라토닉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데, 미술잡지 Artforum과의 인터뷰에서 쿠사마는 그들 둘 사이의 관계가 10년 정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쿠사마가 성적 접촉을 싫어하는데 마침 코넬이 성불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쿠사마에게 정신적으로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으며 1972년 코넬이 사망하자 쿠사마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앞서 쿠사마가 27살인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데에는 미국의 케네스 칼라한(Kenneth Callahan)과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대학에서 일본화를 공부한 쿠사마는 당시의 일본미술계의 위계적 질서와 도제적 수업분위기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955년 우연히 오키프의 화집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편지와 자신의 수채화 작품을 보냈다. 동시에 쿠사마는 칼라한에게도 자신의 작품과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던 쿠사마에게 오키프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고 칼라한은 쿠사마의 작품에 매료되어 이듬해 시애틀에서 그녀의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쿠사마는 이 일에 고무되어 마침내 1957년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 채로 일본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향했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쿠사마는 집 뒤편 강둑에서 그때까지 제작했던 수천 점의 작품들을 불태워버리며 미국에서 보다 나은 작품 활동을 하겠노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었다. 시애틀에서 한 해를 머문 뒤 쿠사마는 뉴욕으로 이주하였는데 곧바로 대담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면서 현지 작가들과의 교류에 돌입하여 당시 뉴욕의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주류에 편입된다. 1961년 쿠사마는 도널드 저드와 에바 헤스가 살던 건물로 이사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이 작가들과 깊은 친분을 쌓게 되는데 특히 에바 헤스는 쿠사마와 절친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자서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이 이 때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쿠사마 야요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쿠사마의 평면과 입체 작품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반복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일정한 패턴이 무한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은 부분적으로 팝아트적 특징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환각에 입각한 초현실적인 성격과 단색조의 대형 화면에 기계적인 반복을 전면적으로 작품에 적용하는 면에 있어서 미니멀아트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1963년부터 쿠사마는 거울을 이용하여 작품이 차지하는 공간의 볼륨을 무한대로 확장시킴으로써 확산을 통한 강박증의 희석과 이를 통해 새로운 미학적 의미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여정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쿠사마의 작품은 주제면에 있어서 다분히 개념적이면서 내용적으로 페미니스트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반복에 의한 주제의 객관화(depersonalization)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공포와 불안을 일상의 평범한 소재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번에 출품한 (1994)나 (2008), (2008), (2011)과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개념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쿠사마가 1960년 전후로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남성 작가 중심으로 활발하게 미술의 담론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1년 를 출간하여 젊은 작가들의 전위적 실험미술을 옹호하였고, 플럭서스 운동에 가담한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64년이었다. 같은 해에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에 쿠사마도 팝아트,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965년에는 록펠러재단에서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그 당시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듯이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이번에 출품된 과 같은 설치작품은 쿠사마가 그 무렵 미국의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에 집중하면서 사방 벽과 천정까지 모두 점들로 뒤덮이는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킨 설치 작품이다. 1966년 쿠사마는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장 앞 야외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1500개의 플라스틱 공을 설치하고 한 개에 1200리라(약 2달러)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이듬해에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라는 주제로 누드 인물들을 통해 보디페인팅 형식으로 작품을 펼쳐 보여주는 해프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뉴욕의 주요 장소에서 벌인 이러한 해프닝 작업은 뉴욕 미술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68년 쿠사마는 영상 작업에 착수하여 이라는 회사와 라는 프러덕션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반대운동으로 누드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하면서 당시의 동료작가들과 미디어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쿠사마 야요이는, 그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말처럼 미디어와의 접촉에 매우 민감하며 상당히 정성을 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점무늬 의상에 오렌지색이나 ,코발트색과 같은 강렬한 색상의 가발을 쓰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연출된 듯한 모습은 작가의 강한 자아와 정신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태도로 인해 미디어는 그녀를 사실적으로 보도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신비화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쿠사마는 작품활동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일찍이 뉴욕에서 활동할 때부터 작업도중 과로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하여 종종 병원신세를 지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자품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는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쿠사마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어진 정신적인 위기와 고통을 창작활동을 통해 극복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의 지나치리만큼 연출된 듯한 미디어와의 접촉 모습이 작품을 떠나서 작가의 개성에 집중하게 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 일찍이 쿠사마가 23세 때인 1952년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는 쿠사마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었다. 그리고 1962년 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쿠사마는 주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모방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가리고 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신경쇄약으로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자서전에서 쿠사마 자신도 스스로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적으로 서술하여왔고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자진하여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기도 하였다. 뉴욕에 머물던 동안에 1970년 잠시 일본을 다녀간 쿠사마는 이 무렵부터 작품활동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78년 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이번에 출품된 영상작품 는 이 환각적인 자서전적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상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쿠사마는 작품제작보다 문학활동에 시간을 더 많이 쏟게 되며 소설과 시에 몰입하여 많은 작품들을 출간한다. 이외에도 쿠사마는 최근까지 수십 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시화집 등을 출판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쿠사마의 작품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1966년 베니스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지 27년만에 마침내 1993년 일본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다. 그 후 쿠사마는 타이페이, 시드니, 발렌시아 등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열리는 수많은 비엔날레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쿠사마는 이제 이러한 활발한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일본 교육부와 외교부 장관상을 받을 뿐 아니라 200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의 작품 제목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을 발췌해보면 Love, Soul, Forever, Eternal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은 영원한 사랑, 정신적인 사랑, 사랑의 영원성, 무한한 정신세계 등인데 쿠사마의 작품들 역시 작가가 관심을 두는 주제인 이러한 표현의 범위 안에서 ‘예술에 내재한 진리’(truth in art)의 추구를 위해 반복적으로 창작되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쿠사마는 판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몇 년을 주기로 자신의 판화집 총목록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자신의 판화 작업을 작품 속의 점이나 그물망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처럼 작품이 판화기법을 통해 수적으로 확장되는 것과 유사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점으로 덮여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명쾌하면서도 모호하다. 반복되는 점과 그물망 무늬는 매우 노동집약적이고 강박적이어서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랑한 리듬감과 묘한 에너지의 발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들은 얼핏 보기에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랜 연륜에 의해 이루어진 단순함의 무게를 쉽게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쿠사마는 평론가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적극적으로 상업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점차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아 200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녀의 작품이 510만 불에 낙찰됨으로써 당시로서는 살아있는 여성 작가 가운데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쿠사마는 점차 상업화랑으로부터 초청을 받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고시안 화랑에서 2009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최근까지 이 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하였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화화나 조각의 성격과 함께 디자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디자인적인 요소는 그녀의 작품을 미술관이나 화랑을 벗어나 백화점의 디스플레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에 접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쿠사마는 2012년 5월 루이비통의 아트디렉터 마크 제이콥스와 협업하여 가방과 손지갑 등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울 무늬를 응용한 제품들을 출시하기도 하였다. 최근 쿠사마는 바쁜 해외 전시 일정 가운데에도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2013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힐즈에서 열린 롯폰기 아트 나이트(Roppongi Art Night)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모습을 거대한 풍선으로 형상화한 과 개를 형상화한 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사랑과 예술을 믿어온 지난날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 등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있지만 커다란 희망을 갖고 우리들의 인생을 살아가자”고 호소하였으며 “나의 물방울은 사랑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가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평생 자신을 붙잡아 온 환각과 불안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쿠사마는 고령에 악화된 건강을 이겨내면서 현재까지 그것을 물감과 펜과 연필로 묘사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쿠사마는 마침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환각과 불안을 작품 속에 녹여 넣어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이 창조적 표현이나 치유와 위안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2012년 7월 자신의 고향인 일본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영원의 영원의 영원(永遠の永遠の永遠)’전에 참석한 구사마는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자작시를 읽으며 거기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를 이렇게 먹어버린 것이 유감이지만…. 저는 오랫동안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 이력을 살펴보고 나면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평생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역경을 극복한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을 가시화한 더욱 더 의미 있는 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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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쿠사마 아카이브 포스터 /콜론비아츠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이보다도 유니크한 예술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 ‘쿠사마 아카이브’ 전시가 국내 최초 ‘콜론비 아츠 갤러리’에서 열린다. ‘무엇이 쿠사마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들었을까,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기까지 그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콜론비아츠 갤러리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 전을 기획, 온라인 전시를 진행 중이다.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에서는 대표작인 ‘호박’ 등의 조각 작품, 물방울 무늬와 그물 패턴 등의 회화 작업들이 주로 전시되어 왔고 최근 쿠사마의 그림이 23억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시는 이러한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인생의 발자취에 중점을 두고, 어떤 인생의 여정이 지금의 쿠사마를 만들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플루어 쇼’ 오리지널 포스터 /콜론비아츠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는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와 이후 도쿄 세이와 정신병원에 종신 환자로 입원 후 현재까지 병원 근처 신주쿠의 작업실에서 펼쳐 온 삶의 여정을 조망할 수 있는 전시 포스터, 책, 잡지, 사진 등의 오리지널 인쇄물과 컬래버레이션 아트상품, 조각 등의 오브제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콜론비 아츠 갤러리 안선영 대표는 “쿠사마는 세계적인 기업과의 콜라보, 비엔날레, 갤러리 전시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모든 작품들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며, “여러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 모든 수집품도 일관된 색깔과 흐름을 보여 아카이브 자체가 하나의 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술품을 왜 수집하는가’, ‘누가 미술품을 사는가’라는 질문부터 ‘동시대 미술 수집가의 역할’에 대한 다소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 /오드
조각과 설치미술이 주인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의 현대 화가로 회화, 공연, 영화, 패션, 시 소설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 이후에 대두한 현대미술의 경향 중 하나인 개념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페미니즘, 미니멀리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추상표현주의의 일부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이며, 때로는 성적이다. 일본에서 온 예술가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중요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유년기의 쿠사마는 식물 묘목장, 종자 농장을 소유한 상인 부모님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호박 그림을 즐겨 그렸고 가끔 환상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 당시 그리고 만든 작품은 이후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쿠사마는 그림이나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서둘러 그린 후 치워버리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가 순종적인 주부의 역할을 하길 바랬으며 쿠사마는 어머니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생각했다. 또 아버지에 대해서는 ‘밖에서 여자들과 많이 노는 타입’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어머니가 자신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바람을 염탐하도록 시켰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일종의 ‘성’이 평생의 경멸하는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그는 특히 남근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나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항상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 누구와도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섹스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내 안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암울한 어린 시절은 자연히 그의 예술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점은 영감이자 예술이다,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flickr
쿠사마는 10살 때 ‘섬광, 오오라, 혹은 점으로 울창한 들판’이라 묘사했던 환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환상 속에는 쿠사마에게 말을 건네던 꽃, 그가 예술가로써 살아가는 과정, 영원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자기망각’등이 포함되어 있다. 꽃밭에 서 있던 쿠사마는 끝없는 점들로 이루어진 들판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환상을 겪었으며 그의 예술은 그가 환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족과 자신의 마음 속으로부터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집 근처 강가를 덮고 있던 매끄럽고 하얀 돌에 매료되었으며 그가 봤던 돌들이 점(dot)에 대한 지속적인 집착을 낳았으며, 또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끼친 영향이라 말한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 공장으로 가 일본 군인들을 위한 낙하산을 바느질하고 조립하는 일을 하다 제2차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그는 공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가끔 이야기하며, 공급 경보가 매일 울리고 대낮에 미국 전투기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사춘기는 ‘닫힌 어둠 속’ 이었다 회고한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은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시기 즈음, 그는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자유에 대한 개념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1948년 교토 시립 예술 공예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서양 문화를 배격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쿠사마는 천 년 전의 전통 일본 기술과 재료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일본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스타일에 실망했던 쿠사마는 1950년대 마츠모토, 도쿄에서 연달아 자신만의 그림 전시회를 열며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경향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쿠사마는 주로 종이에 수채화 또는 기름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벽, 바닥, 캔버스에도 그리다가 나중에는 집안의 물건, 나신의 어시스턴트까지 대상을 확대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폴카 도트, 즉 물방울 무늬를 동원해 작품을 만들었다.
수많은 점의 향연, 인피니티 네트 /flickr
그의 거대한 물방울 점, ‘인피니티 네트 Infinity Nets’는 그의 환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인 ‘인피니트 네트’는 환상을 암시하는 일련의 네트와 점으로 뒤덮인 모습이다. 그는 그림에 온통 점을 더함으로써 자신과 작품 자체를 더 큰 우주로 끌어당기고, 우주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의 지구는 우주에 있는 백만개의 별 중 하나인 물방울일 뿐이다. 폴카 도트(물방울 무늬)는 무한대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다. 폴카 도트로 자연과 우리의 몸을 지우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라고 전했다.
쿠사마의 ‘플라워’ 설치 전시물 /flickr
1954년, ‘Flower’란 작품을 소개하며 쿠사마가 언급한 코멘트는 인상적이다. “하루는 식탁에 있는 식탁보의 붉은 꽃 패턴을 보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똑같은 무늬가 천장, 창문, 벽을 덮었고 급기야 방 안, 내 몸과 우주를 덮었다. 나는 마치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 속에서 회전하며 곧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겁이 났다. 나는 빨간 꽃의 마법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내 밑에 있는 계단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곧 나는 발목을 잡혀 계단에서 떨어졌다”
도쿄와 프랑스를 거쳐, 쿠사마는 27세가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숨막히는 가정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의 대표 여성 작가인 조지아 오키프에게 ‘화가의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란 편지를 보냈고 조지아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나라에서 예술가는 먹고 살기 어렵다’ 라며 쿠사마에게 일종의 경고를 했지만, 그와 더불어 조지아는 쿠사마에게 미국으로 와 누구에게든지 당신의 작품을 보여주라는 충고를 한다.
당시 쿠사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일본에서 미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쿠사마는 일본 사회가 너무 작고, 비굴하며, 봉건적이고, 여성을 경멸하는 사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며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화가 난 쿠사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의 많은 작품들을 파기했고, 기모노에 지폐 달러를 덜렁덜렁 꿰맨 채 태평양을 건넜다. 쿠사마는 곧 시애틀로 이사해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의 전시 /flickr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뉴욕 미술계는 많은 여성 딜러들조차 여성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꺼릴 정도로 남성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로 활약했으며 무정부주의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에게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사마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남성 작가들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기성 미술계에서는 외면을 받았지만 그는 전략적으로 그의 후원자들을 만나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61년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미술가 도널드 저드, 조각가 에바 헤세가 있는 건물로 옮겼고 에바 헤세와는 친한 친구가 된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독특한 단발 가발과 화려한 패션을 한 채 대중 앞에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Infinity Mirrored Room /flickr
I’m Here, but Nothing /flickr
그는 그의 ‘인피니티 룸 Infinity room’ 작업을 계속했다. 많은 거울이 정렬된 특별 제작된 방 안에는 다양한 높이에 매달린 수십개의 네온컬러 볼이 있다. 관람객들은 거울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을 반복적으로 보며 끝이 없는, 무한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쿠사마의 ‘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I’m Here, but Nothing’ 전시는 간단한 가구가 있는 방 벽에 수백 개의 네온 물방울 점이 빛나고 있다. 이것은 자신과 방 안의 모든 것이 지워지며, 무한한 공간이 생기는 착각이 드는 결과를 낳는다.
Accumulations /flickr
반복되는 형태에 대한 쿠사마의 관심은 어수선한 캔버스와 사물을 특징으로 하며, 그의 작품 ‘집적 Accumulations’으로 표현된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우편 스티커, 계란 상자 등을 이용해 마치 혹과 같은 형태로 행과 열을 만들어 배열했다. 나중에는 남근으로 장식된 기성품 조각을 만들며 이 시리즈는 절정에 달한다. 많은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이 남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그의 페미니즘적 경향이 보인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쿠사마의 작품을 연구해 온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는 ‘만약 대다수의 여성이 자신의 주관성을 부인하며 지배에 복종하는 구조가 있었다면 쿠사마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쿠사마의 남근을 이용한 작품들은 남성 지배적인 세계에 대한 억압의 진술처럼 보인다. ‘집적’은 그의 과거, 초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혼란, 남근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공황을 반영한다. 이 작품은 팔리진 않았지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그의 특별한 성격과 성향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6년까지 쿠사마는 거울, 조명, 여러 설비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재정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설상가상 이 당시 쿠사마는 과로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많은 남성 예술가들은 그의 이 창의적인 시도를 모방했다. 루카스 사마라스, 앤디 워홀 등의 백인 남성 예술가들은 쿠사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작품을 만들었고, 이 남성 예술가들은 유명해졌다.
Peep Show /flickr
1966년 쿠사마는 획기적인 전시인 핍쇼(Peep Show)를 개최했는데, 핍쇼는 관람객이 머리를 내밀 수 있는 내향 거울로 만들어진 8각형의 방으로 관객들이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설치물로써는 처음 하는 시도였다. 이것은 쿠사마가 계속 탐구해 온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예술 방향을 바꾼 루카스 사마사르는 훨씬 더 권위 있는 갤러리에서 자신의 거울에 비친 설치물을 전시했다. 물론 쿠사마의 핍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쿠사마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마땅히 벌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돈도 이 작가들만큼 벌 수 없었다. 한때 배신과 좌절감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쿠사마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쿠사마는 센트럴 파크, 브루클린 브릿지 같은 눈에 띄는 곳에서 종종 나신으로 나타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그 일례로, 그는 리처드 닉슨에게 베트남 전쟁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신과 섹스를 하게 될 것이라며 공개 편지를 쓰기도 했다.
현재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 전시 중인 Narcissus Garden /flickr
196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쿠사마는 1,500여개의 미러볼을 행사장 정원에 허락없이 설치하기도 했다.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이라 불리는 이 퍼포먼스 아트에서 그는 허영심의 상징인 미러볼을 저렴한 아이스크림 값마냥 단돈 2달러에 팔았다. 고가의 미술품만 상대했던 당시 비대중적인 예술계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쿠사마의 작품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많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을 시행하기도 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의미로 나체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뉴욕 신문에 실린 그의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그가 자신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며 관심을 끈다고 비판했다. 점점 더 낙담하던 그는 1973년, 다시 일본에 돌아와 강제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의 우울증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는 본능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소설, 시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으며, 그의 작업실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종종 ‘예술이 아니었다면 난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라 밝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여러 편의 소설, 시집, 자서전 등을 출간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가 뉴욕을 떠난 동안 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예술가로써 잊혀진 존재였지만 그에 관한 많은 회고전이 그를 다시 세상에 떠오르게끔 해 주었다.
쿠사마 야요이의 분신과도 다름 없는 호박 /flickr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관이 성공을 거둔 데 이어 검은색 점 무늬로 장식한 그의 대표 작품인 ‘노란 호박 Great Gigantic Pumpkin’을 만든다. 이 호박은 그에게 일종의 분신이며 자화상 그 자체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호박이 좋다. 그 유머러스한 모양과 따뜻한 느낌, 그리고 인간과 같은 특성 때문이다. 나는 호박의 그런 인상을 표현하고 싶어 호박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호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Infinity Mirror room /flickr
그는 예술가로써 끊임없이 일했다. 2012년 전시회에서는 여러 개의 아크릴 캔버스 작품들을 전시했고, ‘인피니티 미러 룸 Infinity Mirror room’의 무한한 공간을 탐험하는 것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거울로 정렬된 정육면체 모양의 방과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조명이 깜박인다. 이 형태는 삶과 죽음을 의미했다. 쿠사마는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이 환경, 이 방을 자신의 오랜 꿈의 표현으로 보았다. ‘유리를 통과한 앨리스처럼 나 쿠사마는 환상과 자유의 세계를 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후 하이네 온스타드 박물관, 노르웨이 현대미술관, 스웨덴의 현대미술관, 핀란드의 헬싱키 미술관을 돌며 100개 이상의 작품과 대규모 미러 룸 설치 관객들을 맞이했다. 1960년대 쿠사마의 실험적인 패션 디자인을 발표한 것을 포함해 만든 이후 대중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초기 작품 몇 개도 같이 선보였다. 2017년에는 도쿄에 야요이 박물관을 개관해 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Walking Piece /OTA FINE ARTS, TOKYOYAYOI KUSAMA STUDIO INC.
18개의 컬러 슬라이드로 연속된 이미지인 ‘워킹 피스 Walking Piece’에서 쿠사마는 기모노를 입고 우산을 든 채 뉴욕 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기모노는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서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한 관념이자 성역할 같은 것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검은색이고, 겉만 흰색으로 칠했을 뿐 가짜 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쿠사마는 미지의 탐험을 하며 사람들이 없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는 이유 없이 울다가, 걸으면서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퍼포먼스는 아시아계 미국 여성들이 끊임없이 직면하는 고정 관념들을 포함한다. 쿠사마는 세계 최대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분류해 보는 부조리를 보여줌으로써 백인 미국 관객들이 그를 분류하며 보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그는 뉴욕 회색의 텅 빈 거리를 걸으며 이민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했다.
예술로 증명하는 자신의 존재, 쿠사마 야요이가 존경받는 이유
Infinity Net White No28 /Christie’s.
최근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매출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발표한 ‘2021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상반기 결산’과 ‘낙찰총액 상위 5순위 작가별 KYS미술품가격지수 분석결과’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낙찰 총액은 약 121억원으로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이미 세계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 낙찰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쿠사마의 ‘무한 그물(White No28)’은 2014년 71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한 바 있다.
최근 그의 작품 세계를 그린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가 개봉 중이다. 쿠사마의 삶, 작품 세계를 담은 최초의 영화로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 관심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박’을 비롯해 인피니티 네트, 인피니티 미러 룸과 더불어 초기 회화 조각품, 설치미술까지 그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오드
특히 그의 목소리로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아티스트가 되기까지의 여러 일화를 직접 듣는 것도 별미일 것이다. 힘겨운 삶을 예술로 마음껏 표현하며 치유하려 노력했던 그는 30년간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단지 예술이 좋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한다. 그저 죽을 때까지 예술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열정으로 하여금 한없는 존경을 받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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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의 강박신경증과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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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라고 하면 물방울무늬, 호박 등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쿠사마의 작품에서 물방울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녀의 강박신경증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되었는지 알아보자.
쿠사마 야요이의 일생
– 1929년 일본 나가노에서 부유한 가정의 4남매 중 막내로 출생
어린 시절 지속되는 전쟁을 겪으며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것을 병이라 인식하지 못하고 교육 부족이라고 여겨 매질을 하였다. 쿠사마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정신질환이 악화되었다.
– 1958년 일본을 떠나 뉴욕에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
당시 그는 다른 어떤 여성 미술가들보다 팝 아트 양식에 가까웠지만, 여성이자 비서구인이라는 점 때문에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남성이 주도하던 팝 아트에 대해 날카롭고 위트 있는 관찰을 할 수 있었다.
– 1973년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며 병원 맞은편에 작업실을 마련해 작품 활동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에서의 정신적 환각 증상과 병에 대한 이해가 없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은 쿠사마 야요이 에게는 평생 정신적 질환이 되었다, 그녀의 작업은 이런 한 어린 시절의 정신 강박 증세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녀에게 예술 표현은 절실한 삶의 길이고 하나의 정신적 치료요법이었다.
그의 작업은 그의 정신적인 증세와 집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강박신경증과 환영
그녀는 10살 때 처음으로 환영을 경험하기 시작했는데 식탁보의 빨간 꽃무늬 패턴을 보고 나면 그 잔상이 망막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색의 파편들이 온통 뒤덮여 그 속에 파묻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곤 했었다고 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강박신경증 정신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강박신경증은 강박관념과 강박행위를 반복하고 지속하는 신경증이다. 원하지 않으면서도 저지할 수가 없어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의식하는 고통스럽고 불합리한 관념, 영상 및 충동이다. 강박관념을 일으키는 동기는 의식해서는 견딜 수 없는 충동이나 소원으로서, 잠재하고 있는 죄악감 등이다.. 그래서 무의미하고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강압에 의하여 반복해서 수행하는 어떤 행동을 말한다. 강박 증과 집착은 창작활동과 맞물릴 때 종종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되는데, 야요이 쿠사마도 이 경우였다
언뜻 보기에 가볍고 경쾌하게만 보이는 쿠사마 야요이의 물방울무늬의 작품 속 끊임없이 계속되는 동그란 점들은 쿠사마의 강박증세가 빚어낸 예술이 담겨 있다. 거울·풍선·마카로니·헝겊·오브제 등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그의 반복·집적을 과장해 갔고, 작업의 폭은 더욱 넓어지게 된다. 광기는 때론 창조적 정신이 지닌 특별한 자산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쳤기 때문에 천재인 것은 아니다. 다만, 환상을 가질 수 있는 힘들을 해방시키고, 자극하게 한다.
쿠사마 야요이 작품의 특징
1. 무한한 반복
쿠사마는 항상 같은 패턴의 반복과 그러한 반복의 발전으로 인한 집적을 보여준다. 반복은 그의 작업의 매우 중요한 구성의 요소이다. 1960년대의 동시대의 Pop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쿠사마도 반복(repetition)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반복은 그녀의 예술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연약하고, 집요할 정도로 구성된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젊은 예술가들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무한공간
무한이라는 개념은 광기를 중심으로 펼치는 쿠사마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무한의 사다리(2000)는 사다리 양끝에 거울을 설치하여 마치 한쪽 끝은 땅속 깊숙이 박혀있고 또 다른 한쪽은 무한히 하늘을 향해 치솟는 시작도 끝도 없는 사다리를 형상화한다.
3. 물방울무늬와 그물망
환영이 나타나던 시기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던 물방울무늬는 끝없는 점이 되어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물체에 찍힌 것처럼 보인다. 쿠사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생물유기체적 형태와 강박적인 물방울무늬에 대한 집착은 그의 불안정한 내면세계를 반영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덮어버릴 듯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원색의 물방울무늬 또는 그물망은 곰팡이가 증식하는 모습을 닮았다. 쿠사마의 작품은 강박과 불안 속에서 싹튼다. 그가 즐겨 쓰는 기묘한 형태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규칙적이고 안정된 세계의 구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4. 심리 공간의 확장
그녀의 작업은 눈이 어지러울 만큼 명도 대비와 착시효과를 강조한다. 이때 관람자는 현미경으로 본 세포 속에 자신이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시각적 효과는 그림을 통해 지각되는 심리적 공간을 확장시킨다. 즉, 반점들이 평면회화 위에서만 머물지 않고, 비일상적이고 기괴하고 생경한 심리충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녀는 또한 패션이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사진가들로 하여금 이들 작품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한 자신의 모습을 찍도록 했다. 사진은 성적으로 고정된 자신의 한계를 확장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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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노란 호박에 수많은 검은색 점이 그려져 있는 이 작품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로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쿠사마 야요이’하면 떠오르는 이 작품은 <호박>이다. 그녀는 항상 호박의 모티프는 ‘자신’이며, ‘자아’라고 한다. 그녀에게 호박은 어린시절 교감하던 자연을 상징하고, 순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박은 그녀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고 말한다.
작품 <호박>을 포함한 쿠사마 야요이의 많은 작품에는 그녀만의 아픔과 괴로움이 담겨있는데, 이는 그녀가 앓고 있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어린시절 집안 사업을 책임지는 어머니의 지속적인 폭력, 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인한 불우한 가정사와 전쟁이 일어나는 불안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10살 때 심각한 정신 착란 증상을 처음 겪게 되었다. 다음은 그 당시 그녀가 남긴 글이다.
“어느 날 나는 테이블보에 새겨진 붉은 꽃무늬를 보고 있었는데, 그 무늬들이 훨훨 날아 온방을 채우고, 내 육체와 우주를 가득 채우는 환상과 둥근 물방울 무늬가 공중을 떠다니다가 저에게 붙는 환각을 경험했어요.” – 쿠사마 야요이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질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시절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질환을 가진 채 성장했다. 23살에 그녀는 나가노 대학의 교수인 니시 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니시 마루 시호 박사는 환영으로 나타나는 물방울 모양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업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 이후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물방울 모양을 미술적 소재로 삼아 작품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으로서 예술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시절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의 강박관념적인 정신질환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뉴욕활동 초기 시절 제작한 <작품 No.F>이다. 멀리서 보면 섬세한 단색조로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캔버스를 가득채우고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하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유기적 결합을 통해 존재하다는 의미로 끝없는 그물망을 만든다. 그녀의 강박관념을 표현한 이 미니멀리즘 작품은 이후 그녀의 작가적 모티프를 형성하게 된다.
<무한의 거울 방> 시리즈는 작품 안에서 감상을 하면 무한성을 느낄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울 속에서 반복과, 그 속에 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는 작품이다. 쿠사마 야요이는 작품을 하면서 내 삶의 표면, 내 강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이어갔지만, 오브제와 캔버스는 한계가 있었고, 이후 무한에 대한 표현으로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쿠사마 야요이가 느끼는 환영과 환각의 반복과 무한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어, 그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이름은 <소멸의 방>이다. 하얀색의 빈 방에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스티커를 부여해서 방 안에 아무곳에나 붙이게 하고, 이렇게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서 최초의 방이 점차 소멸해가는 참여예술이다. 예술 작품을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는 미술관의 절대적인 규칙을 허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시작해 점차 물방울 무늬의 스티커가 증식해가는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질환의 증상이다. 관람객이 이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그 시간만큼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적 환영에 같이 시달리면서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
쿠사마 야요이에게 ‘작품’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의 예술 활동이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시달려온 정신질환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강박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다. 그녀가 겪는 헛것이 보이는 기괴한 환각과 학대를 당했던 아픔, 개인적인 집착과 강박관념은 완전히 치료되지 못하는 그녀의 정신질환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경쟁력이다.
현재 그녀는 1977년 뉴욕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 내에 쿠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그녀의 삶에서 보여지는 예술에 대한 애정과 끈기는 지금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 2030세대 현대인에게 더욱 큰 위로와 극복 에너지로 돌아오게 되며서 작품의 매력을 더 부각시키는 기능으로 순화한다고 생각한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쿠사마 야요이는 올해 84살이다. 보통의 경우 이 나이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다가올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이 나이를 맞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쿠사마의 경우에는 이와는 무척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쿠사마는 초기 일본의 활동에서부터 미국, 유럽, 남미, 호주, 중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60년 넘게 회화뿐 아니라 콜라쥬, 조각,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최근에도 쿠사마는 국제적 규모의 전시를 여러 번 개최하여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고 있으며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와 같이 새롭게 순회가 예정된 전시가 계획되는 것도 있다. 2011년에 발간된 작가의 자서전
에서 쿠사마는 자신을 아직도 성취해내야 하는 일이 있는 작가(aspiring artist)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작품 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이 아직도 이세상의 구석에 몰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스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을 극복해내고싶어한다는(‘to triumph over the pain of feeling cornered and trapped,’) 의욕을 내보였다. 쿠사마가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환각(hallucination)이다. 환각은 우리의 오감에 모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감각과 다르게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자극이 없이도 스스로 드러나서 마치 실제로 어떤 상황과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이러한 환각을 체험하는 상황은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이기보다는 뭔가 불안정하고, 결핍과 신경쇄약이나 공포 등이 그 촉발원인으로 개입되는 상황인 경우가 적지 않다. 쿠사마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과 관련하여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호안 미로는 카탈루니아에서 파리로 이주해 온 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 하루에 말린 무화과 몇 개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배고픔을 참아냈는데, 이 때 그는 정자를 죽이는 피임약물이 수프 위에 둥둥 떠다니는 환각을 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쿠사마 역시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에 동물이나 식물들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다든지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 주변으로 오로라처럼 빛이 발산되는 시청각적 환각을 경험하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작가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쿠사마에게는 환각을 촉발하는 요소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 내에 상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일본 나가노 지방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의 체벌과 욕설이 수반되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자살충동과 망상에 빠져 그리 행복하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린 쿠사마에 대한 모성의 결핍은 쿠사마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버려진 느낌이었다는 자서전의 고백에서 그 심각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쿠사마의 어린 시절은 2차대전 전쟁중이었으며 10대에 들어서면 2차세계대전의 당시자인 일본이 처한 전쟁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라서 쿠사마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살던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결핍의 시간을 지내야 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전쟁의 막바지에는 어린 쿠사마 마저 군수공장에 반강제적으로 불려가 낙하산 재봉 작업을 해야 했었다.
어머니에 비하여 아버지는 쿠사마에게 위협적이기보다는 무심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아버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모습처럼 쿠사마의 아버지도 여성 문제로 아내와 다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여러 차례 보여주는 가장이었으며 어린 쿠사마의 형제들과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무책임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사의 경험으로부터 쿠사마는 결국 남성에 대한 혐오와 거부의 심리를 키워 나아가게 된다. 쿠사마의 작품 가운데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돌기들은 이러한 남성혐오와 더 나아가 남성성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 작가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출품작 가운데 2004년작인 <영적 재생의 순간(The moment of Regeneration)>이나 2012년작인 <천국으로 가는 계단(Ladder to Heaven)>과 같은 작품들은 원래 쿠사마가 갖고 있는 남성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과 태도를 담고있다고 볼 수 있다.
쿠사마에게 어린 시절의 불행과 불안에 대한 중요한 탈출구 가운데 하나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20대 초반 시절부터 일명 폴카점(Polka Dot)이라는 점무늬 패턴과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연속되는 패턴(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infinity nets’라고 불렀다)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쿠사마가 10살 때인 1939년에 그린 두 점의 연필 드로잉 소품에는 이미 작가의 성숙기에 대표적 표현 기법으로 자리잡는 이러한 점들과 유사한 패턴이나 그물망 형식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쿠사마가 작품화면 속에 점을 도입하는 것을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작가 부모의 가업인 씨앗 배양작업에서 일상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씨앗이나 배양과정에서 뿌려주는 물(방울)을 점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환원하여 작품에 도입한 것으로부터 폴카점으로 진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 무한으로 증식되는 점과 그물의 패턴은 곧 우주의 무한함과 영원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1959년 뉴욕의 브라타(Brata)화랑에서 열린 첫 미국 개인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그물’이 곧 자신의 과거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 전시에서 도널드 저드는 쿠사마의 그물 작품 한 점을 구매하였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마주하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는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가서 현실을 이탈하는 환상과 공상을 무한대로 증식시켜 나아가는 것이었을 거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쿠사마는 회화 100여 점, 조각 8점, 설치작품 6점 내외, 그리고 영상 작품을 출품했는데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2008년작
는 이런 의미에서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표 역할을 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성으로서의 쿠사마를 자연스런 남녀관계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평생을 통해 쿠사마는 자연스런 이성으로서의 남자친구를 갖지 않았다. 오직 한 번의 예외가 있다면 26살 연상의 미국작가 조셉 코넬(Joseph Cornell)과의 플라토닉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데, 미술잡지 Artforum과의 인터뷰에서 쿠사마는 그들 둘 사이의 관계가 10년 정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쿠사마가 성적 접촉을 싫어하는데 마침 코넬이 성불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쿠사마에게 정신적으로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으며 1972년 코넬이 사망하자 쿠사마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앞서 쿠사마가 27살인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데에는 미국의 케네스 칼라한(Kenneth Callahan)과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대학에서 일본화를 공부한 쿠사마는 당시의 일본미술계의 위계적 질서와 도제적 수업분위기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955년 우연히 오키프의 화집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편지와 자신의 수채화 작품을 보냈다. 동시에 쿠사마는 칼라한에게도 자신의 작품과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던 쿠사마에게 오키프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고 칼라한은 쿠사마의 작품에 매료되어 이듬해 시애틀에서 그녀의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쿠사마는 이 일에 고무되어 마침내 1957년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 채로 일본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향했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쿠사마는 집 뒤편 강둑에서 그때까지 제작했던 수천 점의 작품들을 불태워버리며 미국에서 보다 나은 작품 활동을 하겠노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었다.
시애틀에서 한 해를 머문 뒤 쿠사마는 뉴욕으로 이주하였는데 곧바로 대담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면서 현지 작가들과의 교류에 돌입하여 당시 뉴욕의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주류에 편입된다. 1961년 쿠사마는 도널드 저드와 에바 헤스가 살던 건물로 이사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이 작가들과 깊은 친분을 쌓게 되는데 특히 에바 헤스는 쿠사마와 절친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자서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이 이 때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쿠사마 야요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쿠사마의 평면과 입체 작품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반복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일정한 패턴이 무한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은 부분적으로 팝아트적 특징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환각에 입각한 초현실적인 성격과 단색조의 대형 화면에 기계적인 반복을 전면적으로 작품에 적용하는 면에 있어서 미니멀아트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1963년부터 쿠사마는 거울을 이용하여 작품이 차지하는 공간의 볼륨을 무한대로 확장시킴으로써 확산을 통한 강박증의 희석과 이를 통해 새로운 미학적 의미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여정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쿠사마의 작품은 주제면에 있어서 다분히 개념적이면서 내용적으로 페미니스트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반복에 의한 주제의 객관화(depersonalization)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공포와 불안을 일상의 평범한 소재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번에 출품한
(1994)나 (2008), (2008), (2011)과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개념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쿠사마가 1960년 전후로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남성 작가 중심으로 활발하게 미술의 담론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1년
를 출간하여 젊은 작가들의 전위적 실험미술을 옹호하였고, 플럭서스 운동에 가담한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64년이었다. 같은 해에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에 쿠사마도 팝아트,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965년에는 록펠러재단에서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그 당시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듯이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이번에 출품된 과 같은 설치작품은 쿠사마가 그 무렵 미국의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에 집중하면서 사방 벽과 천정까지 모두 점들로 뒤덮이는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킨 설치 작품이다. 1966년 쿠사마는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장 앞 야외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1500개의 플라스틱 공을 설치하고 한 개에 1200리라(약 2달러)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이듬해에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라는 주제로 누드 인물들을 통해 보디페인팅 형식으로 작품을 펼쳐 보여주는 해프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뉴욕의 주요 장소에서 벌인 이러한 해프닝 작업은 뉴욕 미술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68년 쿠사마는 영상 작업에 착수하여 이라는 회사와 라는 프러덕션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반대운동으로 누드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하면서 당시의 동료작가들과 미디어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쿠사마 야요이는, 그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말처럼 미디어와의 접촉에 매우 민감하며 상당히 정성을 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점무늬 의상에 오렌지색이나 ,코발트색과 같은 강렬한 색상의 가발을 쓰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연출된 듯한 모습은 작가의 강한 자아와 정신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태도로 인해 미디어는 그녀를 사실적으로 보도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신비화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쿠사마는 작품활동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일찍이 뉴욕에서 활동할 때부터 작업도중 과로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하여 종종 병원신세를 지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자품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는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쿠사마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어진 정신적인 위기와 고통을 창작활동을 통해 극복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의 지나치리만큼 연출된 듯한 미디어와의 접촉 모습이 작품을 떠나서 작가의 개성에 집중하게 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 일찍이 쿠사마가 23세 때인 1952년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는 쿠사마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었다. 그리고 1962년 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쿠사마는 주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모방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가리고 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신경쇄약으로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자서전에서 쿠사마 자신도 스스로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적으로 서술하여왔고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자진하여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기도 하였다.
뉴욕에 머물던 동안에 1970년 잠시 일본을 다녀간 쿠사마는 이 무렵부터 작품활동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78년
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이번에 출품된 영상작품 는 이 환각적인 자서전적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상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쿠사마는 작품제작보다 문학활동에 시간을 더 많이 쏟게 되며 소설과 시에 몰입하여 많은 작품들을 출간한다. 이외에도 쿠사마는 최근까지 수십 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시화집 등을 출판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쿠사마의 작품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1966년 베니스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지 27년만에 마침내 1993년 일본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다. 그 후 쿠사마는 타이페이, 시드니, 발렌시아 등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열리는 수많은 비엔날레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쿠사마는 이제 이러한 활발한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일본 교육부와 외교부 장관상을 받을 뿐 아니라 200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의 작품 제목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을 발췌해보면 Love, Soul, Forever, Eternal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은 영원한 사랑, 정신적인 사랑, 사랑의 영원성, 무한한 정신세계 등인데 쿠사마의 작품들 역시 작가가 관심을 두는 주제인 이러한 표현의 범위 안에서 ‘예술에 내재한 진리’(truth in art)의 추구를 위해 반복적으로 창작되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쿠사마는 판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몇 년을 주기로 자신의 판화집 총목록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자신의 판화 작업을 작품 속의 점이나 그물망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처럼 작품이 판화기법을 통해 수적으로 확장되는 것과 유사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점으로 덮여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명쾌하면서도 모호하다. 반복되는 점과 그물망 무늬는 매우 노동집약적이고 강박적이어서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랑한 리듬감과 묘한 에너지의 발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들은 얼핏 보기에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랜 연륜에 의해 이루어진 단순함의 무게를 쉽게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쿠사마는 평론가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적극적으로 상업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점차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아 200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녀의 작품이 510만 불에 낙찰됨으로써 당시로서는 살아있는 여성 작가 가운데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쿠사마는 점차 상업화랑으로부터 초청을 받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고시안 화랑에서 2009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최근까지 이 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하였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화화나 조각의 성격과 함께 디자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디자인적인 요소는 그녀의 작품을 미술관이나 화랑을 벗어나 백화점의 디스플레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에 접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쿠사마는 2012년 5월 루이비통의 아트디렉터 마크 제이콥스와 협업하여 가방과 손지갑 등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울 무늬를 응용한 제품들을 출시하기도 하였다.
최근 쿠사마는 바쁜 해외 전시 일정 가운데에도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2013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힐즈에서 열린 롯폰기 아트 나이트(Roppongi Art Night)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모습을 거대한 풍선으로 형상화한 <야요이짱>과 개를 형상화한 <린린>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사랑과 예술을 믿어온 지난날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 등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있지만 커다란 희망을 갖고 우리들의 인생을 살아가자”고 호소하였으며 “나의 물방울은 사랑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가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평생 자신을 붙잡아 온 환각과 불안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쿠사마는 고령에 악화된 건강을 이겨내면서 현재까지 그것을 물감과 펜과 연필로 묘사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쿠사마는 마침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환각과 불안을 작품 속에 녹여 넣어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이 창조적 표현이나 치유와 위안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2012년 7월 자신의 고향인 일본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영원의 영원의 영원(永遠の永遠の永遠)’전에 참석한 구사마는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자작시를 읽으며 거기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를 이렇게 먹어버린 것이 유감이지만…. 저는 오랫동안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 이력을 살펴보고 나면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평생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역경을 극복한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을 가시화한 더욱 더 의미 있는 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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