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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로 하신 말씀을 듣고 깨달을 자가 있고 깨달아서는 안 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첫 번째 이유가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취인 것들을 드러내리라(마 13:35)”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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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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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Q&A]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 국민일보
[믿음의 Q&A]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 A:비유는 진리를 쉽게 드러내기 위해서, 또한 진리를 숨기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 …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3/12/2021
View: 8299
비유로 말하는 이유: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 당당뉴스
말씀에 대해 아무런 깨달음이 없으니 회개가 안 되므로 결국 죄인인 인간이 구원에 이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소원을 …
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2/21/2021
View: 2368
(마태복음) 13:1-2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마태복음 13장은 흔히 비유장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한 장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려울 것 같지만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8/5/2022
View: 1106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 감 – 기독일보
나아가 그는 마태복음 7장 6절을 빌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전했다. 때문에 그는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
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5/4/2022
View: 3319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천국 비밀을 감추어두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까지라도 천국의 비밀을 알고 …
Source: prok.org
Date Published: 11/8/2022
View: 4409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나요? – GotQuestions.org
이에 대한 첫 번째 예는 예수님께서 씨앗과 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시기 전 당신의 제자들을 따로 떼어 군중이 없는 곳으로 …
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5/14/2021
View: 6073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 < 형람서원 ... - 본헤럴드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 두 관점이 수립된다. 첫째 예수 비유의 목적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사도들의 제시이고, 둘째 비유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
Source: www.bonhd.net
Date Published: 8/8/2021
View: 6775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 YES24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을 드러내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아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안타까운 일 …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12/18/2021
View: 3933
예수님이 자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마태복음 13:9-23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도는 천국의 비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상 생활과 관련된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서 깊고 오묘한 …
Source: loveofjesuschurch.com
Date Published: 3/2/2022
View: 8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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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비유 로 말씀 하신 이유
- Author: 타브의 바이블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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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2. 2.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a3rbltBKLqg
비유로 말하는 이유: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이유: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마13:13↔19(막4:12↔13,44절); 눅8:10; 사6:9~10 비교 참고 마13:13은 비유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비유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일까요? 알아듣지 못하게 할 바에야 왜 말하는 것일까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비유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주어진 말씀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13:10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을 어렵지 않게 다 알아들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만 보면 비유를 다 알아들은 제자들이 왜 알아듣지 못하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냐고 질문한 것이 됩니다. 그에 따라 11절에 나타나는 예수의 대답이 어떤 의중으로 표현된 것인지가 이해될 수 있습니다. ‘비유로 말을 해도 어렵지 않게 알아듣는 너희는 천국비밀을 알도록 허락되었기에 알아들었지만 그들에게는 천국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말은 해야겠고….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한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13:2의 ‘큰 무리’입니다. ‘너희’는 제자들을 가리키므로 제자들 외에는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알아듣는 자들이라서 비유로 말해도 상관이 없는데 제자들 외의 다른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를 않기 때문에 비유로 말한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가르치기는 해야 하겠… 그래서 비유로 말한 것이다?? 13절의 말씀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의도라면 19절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19절의 ‘아무나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문장을 직역하면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혹은 ‘누구든지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이라는 뜻입니다. 19절 대로라면, 천국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뺏긴다는 뜻입니다.알아듣지 못할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해 놓고 왜 못 알아듣느냐면서 알아듣지 못한 책임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에게 묻는다는 뜻입니다. 매우 비상식적인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3절과 19절은 모순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3절이 뜻하는 대로 비유의 진정한 의도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19절은 천국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식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말씀의 씨앗을 뺏기는데 그것은 알아듣지 못한 자의 책임이라는 의미이므로 13절과 19절은 서로 충돌하는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4:11~12에 의하면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주었으므로 비유로 말합니다. 그러나 외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한다고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지 않아서일 뿐만이 아니라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13절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나아가 33절에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둔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따로 해석해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34절). 그렇다면 제자들은 비유가 무슨 말인지 몰라도 나중에 해석을 통해 알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허락받았다는 것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요? 이런 논리적 모순에 대한 해석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예상 밖으로 미미한 선교적 결실에 대한 역설적 해석 예수 당시와 그 이후 예수 공동체의 사람들은 열심히 예수를 그리스도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그 결과는 늘 미미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예수 자신은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들에 관해 비유로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저자는 그 비유를 자기 시대에 적용하여 해석했다고 봅니다. 대체 왜 이렇게 선교적 결실이 미미한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가리셨기 때문에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구원으로 예정 받지 못한 자들이 너무 많은데… 아무리 많은 군중이 몰려 왔어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쉽게 말하려고 비유로 가르쳤어도 저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돌이켜 죄 사함을 받지도 못했다. 알아듣지를 못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막4:12 참조)… 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제기되지요.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계획이 없으셨다. 그래서…. 못 알아듣게 하셨다….?? 하지만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장점이 없지 않습니다. 비유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선교적 결실이 미미한 것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한 상황 속에서 받게 되는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네 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앗 비유와 관련하여 다른 씨들은 모두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했으나 네 종류 중의 하나로 25%에 해당하는 일부분이 큰 결실을 냈기 때문에 현재의 미미한 상황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2)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들은 자의 책임’에 중심을 두는 해석 비유와 관련하여 복음서 저자들은 사6:9~10을 인용하는데 이를 아람어로 번역한 탈굼역에 의하면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굼역에 의하면 인간들이 죄사함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 편에서 비유를 통해 쉽게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수고하셨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죄인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말씀을 깨달아야 하고 거기에 바탕을 두고 회개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를 못하니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말씀에 대해 아무런 깨달음이 없으니 회개가 안 되므로 결국 죄인인 인간이 구원에 이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소원을 두고 인간들이 말씀을 쉽게 깨달아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 쪽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13:19의 해석을 비롯하여 막4:13,44절의 해석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천국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듣는 자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무지 죄 사함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도 없습니다. 회개가 없으니 죄 사함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 사함이 없으니 구원의 은총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그 결과로 그에게 뿌려진 씨앗은 거두어집니다. (3)히브리어 성서의 사6:9~10을 인용한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에 따른 해석 위 (1)과 (2)의 견해는 비유에 대한 설명 중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뒷부분의 구절들을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나타나는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주어지지 않아서 그들은 도무지 비유를 못 알아듣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세 가지 정도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로 비유로 말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내용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비유를 들어 말하면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제각각입니다. 비유가 아닌, 정확한 한 가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도 그 사실을 접한 사람들 모두가 다 일제히 똑같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명쾌하게 특정 핵심사항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비유에 대해서는 그 반응들이 참으로 다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는 분명하게도 어떤 특정의 내용을 감추는 ‘은폐’의 기능을 갖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은폐의 기능, 감추는 역할은 아마도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한 사실을 들어 그것을 통해 예수를 설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교훈할 때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와 관련하여 가장 민감한 반응을 일으켰던 집단임을 보여줍니다(마21:45 참조). 따라서 때로는 가르치는 내용을 비유로 말함으로 그 의미를 매우 모호하게 하는 일종의 은폐의 기능을 하게 했다고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호의적인 사람들에게는 의미의 강화를 기하는 대신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그 의미를 상쇄시켜서 복음서 저자들이 몸담고 있던 교회공동체에 대한 적대감, 혹은 적대적 태도를 상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만한 사람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각각 몸답고 있던 교회공동체와 이런저런 관련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교회공동체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심지어는 적대적인 감정까지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를 보호하며 유지 발전시키는 일을 여전히 도모하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주변의 적대적 감정은 없애고 우호적이며 긍정적인 관점을 갖게 하는 일에 몰두해야 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에 따라 비유를 알아듣는 자들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되고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은 적어도 교회공동체에 대한 인상을 악화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역할과 관련된 시각입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제자들은 둔하기 그지없는 자들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가는 일에는 특별히 속도가 빠른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 교회공동체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수의 둔한 제자들처럼 천천히 알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교회공동체에서 중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계속 교육받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그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마가복음에서보다 똑똑한 제자들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말씀을 쉽게 알아듣는 편이고 빨리 깨닫는 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비유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교회의 제자들은 그 깨달은 내용을 자기들만 갖고 있으면 안 되기에 비유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해석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로부터 비유에 대한 해석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마태복음에서의 비유해석은 예수께서 자청하여 풀어주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비유를 쉽게 알아듣는 똑똑한 제자들이므로 해석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마13:10; 18절↔막4:10 비교참조). 비유는 원래 ‘좀 더 잘 알아듣기 쉽게 돕기 위하여’ 만들어진 문학적 도구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는 일종의 수수께끼 기능도 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와 같은 비유의 기능을 활용하여 적대자들이 섞여 있는 무리를 향해서도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활용도 높은 도구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 말을 하기는 해야 하겠고…. 말하자니 담벼락이고, 이때 필요한 것이 다윗을 향해 주었던 나단 선지자의 비유와 같은 기가 막힌 문학…. 오늘날에도 절대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비유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1-23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마태복음 13장은 흔히 비유장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한 장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려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쉬울 수 있다. 적어도 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외식하는 자와 같은 가치관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이 말씀이 비유라고 하시고 또 그것을 풀어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비유장을 보면서 이 비유장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누가 봐도 비유인 말씀을 하신 것만을 비유로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35)
즉 모든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액면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내라고 했다고 자신의 한 달 간의 수익을 앉아서 계산하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시는지를 아는 안목이 먼저라는 것이다.(그렇다고 십일조를 하는 이유를 또 액면 그대로 보물을 쌓을 곳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 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처음 나오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떨기에,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진다는 비유이다. 그렇게 되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예수님의 설명에 있어 핵심은 있는 자는 받아서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천국의 비밀에 대하여.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목적과 본질을 아는 자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천국의 비밀조차 다 빼앗길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풀어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씨 뿌리는 비유가, 비유의 내용 안에 있는 길가에 떨어진 씨나 돌밭에 떨어진 씨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보면 또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떨어진 각각의 씨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씨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다른 것을 뿌리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도 사람이고, 예수님도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사람에 대한 것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렇게 사람의 본질에 대하여, 사람이 존재 목적과,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만드신 목적과 정체성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씨의 정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비유이든 아니든 다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의와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본체이신 것이다. 그것이 또 창세부터 감추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비유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예수님의 화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전체가 바로 비유라는 것이다. 비로 이것을 알면 어떤 말씀이든지 들으면 들을수록 더 풍성해지고, 그 안목이 없으면 그나마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도 다 빼앗기듯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내용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을 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바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삶 전체가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였다는 것이다.
비유라는 것이 직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솝우화처럼 그냥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그 안에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도 비유다. 누가 홍길동전을 읽고 반정부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유가 표현된 표현과 비유로 전하고자 하는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차이인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는 안목이 없으면 홍길동전을 읽고서 알고 있는 내용마저 다 헛것이 되지만, 홍길동전이든 표현된 것 이면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안목이 있으면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어떤 말씀은 정말로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행동으로 지켜내려 하고, 어떤 것은 의미만 새기려 한다. 십일조는 1원짜리 하나 틀리지 않으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미만 새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을 지키는 것을 다르게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하다. 정해진 것이 없다. 시대 반영과 같은 엉뚱한 설교를 듣기도 했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구분의 기준은 없다. 다만 자기의 생각과 자신의 이익 그 뿐이다. 십일조 하는 것은 재물적인 축복을 기대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손해를 보는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그렇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기 안에 선과 악을 구분하듯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 내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삶이 의미하는 본질을 몰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온전히 안다면 성경 구절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언제나 일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안다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고, 어느 하나 모른다면 다 모르는 것이다. 고양이가 바다에 빠졌다고 고래가 되겠는가? 생명의 말씀을 안다면, 어느 구절, 어떤 말씀도 그 의미하는 바를 다 아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그런 말을 하는 목사는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어디 영원하신 말씀을 가지고 그런 망발을.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은 그 표현된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이 내용으로 있기에 다 비유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과 말씀은 어떤 것이 표현된 것이고 그 어떤 것, 곧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씨다. 또 비유다. 씨는 작지만 큰 나무의 모든 생명이 들어있고, 비유는 씨 안에 생명이 들어있듯 그 표현된 것 안에 본질이 들어 있어 비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만 말씀하신다고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으로 표현하신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히브리말로 <메시아>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문제,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빚진 죄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모든 것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의 본질이고, 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며, 사람에게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모든 사람에게 회복되어야 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그 성품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의 본질이고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본질을 아는 사람이 바로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가진 자의 가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것이 그것을 보고 듣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 회복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풍성해지기에 가진 자는 더 풍성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와 같이 그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진정한 본질을 알지 못하면 그나마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것 마저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목수의 아들이 죄인과 놀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형식만 보고서 예수님을 죽였다. 즉 비유의 표현만 보고 무엇을 이야기하시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혈통적인 자부심과 재산을 끝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본질을 깨달은 이들에게 다 빼앗긴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못 박은 그 유대인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질은 잊고, 그 표현 자체에 매몰되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형식만 보고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아는 하나님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듯 그 마저 다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화나 수사법에 대한 묘미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유대인들을 비꼬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님은 삶 자체가 비유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는 더 풍성하게 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그나마 가진 신앙마저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이다.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나요?
질문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나요?
답변
비유는 천상의 의미를 가진 지상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은 심오하고 신성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쉽게 기억되고, 등장인물들은 담대하며, 상징적인 의미가 풍부합니다. 비유는 유대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르침의 형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 특정 시기 이전에는 모두에게 친숙한 흔한 물건들(소금, 빵, 양 등)을 사용하여 생생한 비유를 많이 구사하셨으며, 가르침의 맥락에서 그 의미들은 상당히 명확했습니다. 비유는 더 많은 설명을 요구했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 중 한 시점부터는 오직 비유만을 사용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문제는 왜 예수님께서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비유가 의미하는 것을 궁금해 하도록 내버려 두셨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예는 예수님께서 씨앗과 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시기 전 당신의 제자들을 따로 떼어 군중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10-17).예수님께서는 이 때부터 당신의 사역에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오직 제자들에게만 그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의미하는 바를 그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영적 맹인으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들과 고집스럽게 믿지 않았던 자들, 즉 듣기는 들어도 실제적으로 자각하지 않고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자들 (디모데후소 3:7)을 뚜렷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일들을 분명히 알게 해주는 영적 분별력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 많은 진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요한복음 16:13) 성령의 은사를 받은 오늘날의 믿는 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진리의 빛에 눈 뜨게 해주고 영생의 달콤한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해줍니다.우리 주 예수님은 진리가 모든 귀에 달콤한 음악처럼 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깊은 것들에 흥미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 진실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유는 신성한 진리를 전달해주는 효과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수단이 됩니다. 우리 주님의 비유는 극히 적은 단어들 속에도 많은 진리가 담겨 있으며, 이미지가 풍부하여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귀를 기울이는 자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둔한 마음을 가진 자와 듣기를 더디 하는 자들에게 비유는 심판의 선언이 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
비유(比喩, Parable, 헬 파라볼레, 히 마샬)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동의한다. 당시 랍비들도 비유로 제자들을 교육했다고 한다. 그러나 랍비가 행한 비유와 예수께서 행한 비유는 같은 유형이 아니라고 한다. 랍비는 왜 비유로 말했고, 예수는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헬라어 ‘파라볼레, παραβολή’는 파라(para·옆에) 볼레(bole·던지다)이고, 히브리어 ‘마샬’은 진리 전달 수단, 지혜를 가리키는 말, 수수께끼, 이야기로 사용되었다. 비유의 목적이 무엇인가? 비유를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인가? 이해를 혼란시키기 위한 수단인가? 성경에서는 비유를 들어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했다(마 13:10-13, 막 4:11-12).
로버트 스타인(Robert H. Stein, 1935-)은 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1981년)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주기 위한 방편으로 비유(막 4: 11-12)을 난제로 규정하며, 수사법 중 반어법(irony)으로 해소했다. 반어법은 반어(反語)를 사용해서 숨겨진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기술 중 하나이다. 다드(C. H. Dodd, 1884-1973)는 비유를 “자연이나 일상에서 이끌어낸 일종의 은유(metaphor)나 직유(simile)”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에 대한 가장 유력한 연구자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이다. 예레미아스는 루터파 선교사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1910-1918까지 8년을 거주한 전력이 있다. 히브리어, 아람어 등에 탁월한 실력자로 알려졌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비유>를 1952년에 초판을 발행하면서 개정을 거듭했다. 예레미아스가 주장한 주요 요지는 “예수가 전한 비유를 1세기 청중들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는데, 사도들이 신비를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비유에서 예수의 직접 육성(ipsissimavox Jesu)을 들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 두 관점이 수립된다. 첫째 예수 비유의 목적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사도들의 제시이고, 둘째 비유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는 것이다. 두 관점의 주요한 상이점은 사도의 이해에 대한 태도이다. 예레미아스는 사도의 제시를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의 원리인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들 간의 연관성을 깨버린 것”에 것이다.
필자는 성경대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천국비밀(마 13:10),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 4:11)을 제자들에게 알리시기 위함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마 13:15, 막 4:12에서는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함을 목표로 한다고 하여, 더 깊은 미로로 인도하는 것 같다. 씨 뿌리는 비유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었다고 예레미아스는 설명했다. 예레미아스는 예수가 죽은 후 10년 안에 비유들이 다르게 해석되었다고 제시했다(11쪽). 그렇다면 20세기 팔레스타인에서 1세기 팔레스타인을 직접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류는 칼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년)에서 규정한 주전 8-3세기까지를 차축 시대(車軸時代, Achsenzeit, Axial Period)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로 산업혁명(18-19세기 초반)과 프랑스혁명(1789-1894)에서 의식의 대변혁을 이루었다. 그 시대의 산물 중 하나가 1775-1783년에 전쟁을 통해서 독립한 미국(America)이다.
예레미아스는 비록 선교사의 아들이지만, 산업혁명의 산물로 아시아를 정복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예루살렘에서 거주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 1세기 팔레스타인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妄想)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50년 전 역사 이해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인의 이해로 과거를 구현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사도의 이해로 바른 믿음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집단이다. 라이마루스의 후예들은 그 방식을 거부했다. 라이마루스는 자기 생전에 자기 작품을 공개하지 않고 죽었고, 유고작품으로 새로운 표지(standing point)를 확립했다. 예레미아스는 그 표지에 충실하게 적응해서 자기 확문을 이루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로 예수의 직접 음성을 듣고 예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확언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를 믿음으로 정진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깨닫지 못하게 했을까? 세례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고, 예수께서도 초기에 회개를 촉구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회개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다. 필자의 견해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도록 인내를 훈련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되지 않을 때의 자세는 교사를 인정하고 깊이 인내하는 훈련이 학생에게 필요한 자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더 깊게 설명했지만 비유를 깨닫는 제자는 없었다. 오래 참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결국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0-67)고 질문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떠나지 않겠다고 답변하셨다(요 6:68).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고 떠났다(요 6:71). 그리고 진정한 회개가 깨닫고 결행하는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에 등장한 이단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인데, 그들의 주된 가르침은 “깨달아 믿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사도들로 세우신 방식은 “복음을 듣고 믿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자기가 질 십자가 구속을 향한 여정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복음 선포이다. 11명의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고 가슴 칠 배신을 하였지만 예수 제자로 교회 기초가 되었고, 1명 제자는 예수를 팔았고, 가슴 칠 배신에서 자결하여, 영원한 저주에 이르렀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목차
비유로 예수님을 말씀하셨다(1)
비유로 예수님을 말씀하셨다(2)
비유로 예수님을 말씀하셨다(3)
씨를 통해 번성하게 하셨다(1)
씨를 통해 번성하게 하셨다(2)
씨를 통해 번성하게 하셨다(3)
씨를 통해 번성하게 하셨다(4)
씨를 통해 번성하게 하셨다(5)
비유풀이에 속지 말라
길가에 떨어진 씨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진 씨
좋은 땅에 떨어진 씨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1)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2)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3)
천국은 마치(1)
천국은 마치(2)
천국은 마치(3)
천국은 마치(4)
천국은 마치(5)
천국은 마치(6)
천국은 마치(7)
천국은 마치(8)
천국은 마치(9)
천국은 마치(10)
천국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해석하시는 성경
예수님은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
새 것과 옛 것
재능과 달란트(1)
재능과 달란트(2)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1)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2)
모세에게 주신 율법(1)
모세에게 주신 율법(2)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1)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2)
성령(1)
성령(2)
은사(1)
은사(2)
은사(3)
달란트 비유
신랑으로 비유하신 예수(1)
신랑으로 비유하신 예수(2)
신랑으로 비유하신 예수(3)
신랑으로 비유하신 예수(4)
신랑으로 비유하신 예수(5)
등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1)
등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2)
예수님은 품꾼을 찾는 집주인(1)
예수님은 품꾼을 찾는 집주인(2)
예수님은 품꾼을 찾는 집주인(3)
품꾼의 의무(1)
품꾼의 의무(2)
품꾼의 의무(3)
품꾼의 의무(4)
품꾼의 의무(5)
품꾼의 의무(6)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1)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2)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3)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4)
포도원 주인(1)
포도원 주인(2)
포도원 주인(3)
포도원 주인(4)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1)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2)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안다(1)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안다(2)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안다(3)
소와 나귀도 주인을 안다(4)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비유(1)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비유(2)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비유(3)
첫 사람 아담
유대인
율법
어떤 율법사의 질문(1)
어떤 율법사의 질문(2)
어떤 율법사의 질문(3)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1)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2)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3)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4)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5)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6)
혼인 잔치의 비유(1)
혼인 잔치의 비유(2)
혼인 잔치의 비유(3)
혼인 잔치에 합당치 못한 자
그리스도로 예복을 입어야
구약 때 택함 받은 자(1)
구약 때 택함 받은 자(2)
구약 때 택함 받은 자(3)
칼빈의 예정론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청하신다
혼인 잔치에서 택함을 받는 자(1)
혼인 잔치에서 택함을 받는 자(2)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참 빛으로 오신 예수(1)
참 빛으로 오신 예수(2)
예수께로 옮겨오는 것이 회개(1)
예수께로 옮겨오는 것이 회개(2)
좋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
3년의 공생애와 성령(1)
3년의 공생애와 성령(2)
회개 없는 열매는 못된 열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좁은 문, 예수의 문(1)
좁은 문, 예수의 문(2)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불법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생명의 문은 좁고 협착하여
거짓 선지자와 삯꾼
힘쓰라, 전심을 다하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문(1)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문(2)
믿음의 문, 구원의 문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1)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2)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3)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4)
비유하신 므나는 예수 이름
달란트 비유와 므나의 비유
각 사람에게 주신 예수 이름(1)
각 사람에게 주신 예수 이름(2)
한 므나 받은 자의 변명(1)
한 므나 받은 자의 변명(2)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임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시니(1)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시니(2)
잃은 양을 찾으시는 비유
양(羊)의 특성을 잘못 알고
양(羊)에 대한 성경 말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하늘에서는
둘째 아들의 비유
허랑방탕하여 허비하더니(1)
허랑방탕하여 허비하더니(2)
예수님을 둘째 아들로 비유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맏아들의 불만(1)
맏아들의 불만(2)
청지기 비유
빚을 탕감하는 청지기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므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더 지혜로움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
이 세대의 아들이 자기 시대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친구를 사귀는 세리와 죄인
종의 신분에서 친구의 신분으로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없어질 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등불의 비유(1)
등불의 비유(2)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1)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2)
많은 비유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인과 종의 비유
종이 주인의 자리에 앉는 복
혹 2경이나 혹 3경에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베드로가 주께 여쭤오되
많이 받은 자, 많이 맡은 자(1)
많이 받은 자, 많이 맡은 자(2)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은 충성
무익한 종이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설교자는 생명을 전해야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1)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2)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3)
낙원과 음부 사이의 큰 구렁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한 알의 밀(1)
한 알의 밀(2)
한 알의 밀(3)
한 알의 밀(4)
하신 일로 예수님을 증거하셨다
예지능 목사의 저서
예수님이 자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마태복음 13:9-23
이 말씀은 최근 어느 날 밤 밤 새도록 꿈 속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꿈 속에서 받은 것이기에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지 막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무조건 글을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놀라운 말씀의 비밀이 적혀져 나오는 것을 내 자신이 자주 경험합니다. 먼저 주님이 복음 사역하시는 중 자주 사용하신 말씀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에 모두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혹 선천적으로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고 나오는 분들도 있고 태어날 때는 정상적인 귀였는데 성장 과정에서 병으로 인해 듣지 못하게 되거나 사고로 인해 듣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육신의 귀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 중에 귀있
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 한 것은 육신의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귀를 말합니다. 영의 귀는 영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말합니다. 무슨 소리든지 잘 들을 수 있는 육신의 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영의 귀가 없으면 영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귀가 없더라도 영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가진 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주 말씀하신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 하신 것은 영의 귀를 가진 자로서 영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특별히 중요하고 주목할 만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에 자주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심오한 진리를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본문에서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천국에 대한 비밀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둘째로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천국의 비밀과 천국의 신비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과 그 천국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천국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6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3:5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올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용서 받고 영이 거듭나 영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마지막으로 천국에 가는 것은 부활을 통해서 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24, 25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30에서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런 비밀을 하나님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겠습니까? 그런데 천국에는 세 종류의 천국이 있습니다. 심령천국과 교회천국과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의 천국은 개인의 심령천국과 교회천국과 미래에 가지게 될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 일곱 천국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천국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중요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실 때에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질문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3:10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Them)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했습니다. 이 때의 예수님의 대답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너희와 저희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중요한 비밀을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마가복음 4:33,34에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도를 말씀하십니다. ‘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의도는 천국의 비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상 생활과 관련된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시기 원했습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을 물질적인 현상계의 경험으로 설명함으로써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칠 때에 살기 등등한 눈으로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곡해하려는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는 진리 자체는 분명히 전달하시되 말꼬리를 잡고 곡해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반대자들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데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니까 자신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시비를 걸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9-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너희와’ ‘그들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들을 말하고 그들은 비유의 말씀을 알아 들어서는 안될, 하나님의 은혜 밖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은 너무나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의 운명, 둘째로 인류의 운명이 걸린 말씀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2700여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사야서 6:9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넷째로 이사야 6장의 예언의 비밀
이사야 6장은 천상의 하나님 보좌를 보여 줍니다. 천국의 비밀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시고 그 옷자락이 온 성전에 가득하며 스랍천사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보좌 주위를 돌면서 서로 창화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밀착 시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중대한 메시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 예언을 이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유다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질 대로 완악해져서 제멋대로 행동하므로 그들의 완악한 행동과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대로 내버려두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다백성들의 그런 상태를 하나님은 다른 곳에 사용하실 작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잠깐 동안 구원의 기회를 연기하고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실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11:11에서 보여 줍니다.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회복할 수 없기 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했습니다. 또 로마서 11: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6:9-10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무엇을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도 자신들에게 찾아오신 메시야인 줄도 깨닫지 못하며 메시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너희 조상들이나 선지자들이 말하던 그 메시야라고 해도 그들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뿐만 아니라 10절에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둔하게 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이 백성들이 눈으로 듣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창세기 1:1의 온 우주를 창조하셨던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다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려 오신 것입니다. 창세기 3:15부터 온 인류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메시야가 자신들의 눈 앞에 나타났는데도 보기는 보아도 이 분이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야인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에 대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 13에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아도 메시야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에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의 ‘이루었다’는 헬라 원어 성경에는 ‘아나풀레루타이(αναπηληρουται)인데 이 말은 현재 진행 시제로서 이사야 6장의 예언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사야 6장의 예언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인데 이사야 선지자 시대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 까지 유대백성들의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의 예언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예언을 받던 이사야 선지자 역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지게 될 예언을 들었을 때에 동족을 향한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께 묻기를 이런 일이 언제까지 있을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대답은 이사야 6:11에서 보여 줍니다.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했습니다. 이사야 6:9-10의 예언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면 이사야 6:11도 예수님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다백성들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을 하셨는데 이사야 6:11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24에서 예언한 말씀과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6:9-11의 예언이 예수님 시대를 지나 거의 2700년에 걸쳐서 적용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실제적으로 서기 70년에 로마 장군 디토가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시켜 황폐케 했고 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이 멸망 당한지 2천년 만에 다시 나라를 회복했고 그리고 1967년 6일 전쟁 때에 다시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6:11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사야 6:9-10의 저주의 예언이 이천 칠백년 만에 풀리면서 유대인들의 감겼던 눈이 열기게 되고 귀가 열려 예수님이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13의 예언대로 유대인들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에서 소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들 중에 소수의 무리가 예수님께로 돌아 오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 당시의 거룩한 씨, 그루터기(Remnant)
예수님의 이 세상 공생애 때도 온 유대백성들의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히고 마음이 둔하여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그 때에도 눈이 열리고 귀로 들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1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이 사람들입니다.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육신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았으며 만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여기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라고 했는데 선지자들은 천국에 대한 비밀에 대한 부분적인 비밀을 하나님께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기록한 자들입니다. 또 ‘의인’이란 선지자들에 의해 그들에게 전달된 계시를 받아 들이고 믿었던 옛 언약 시대에 살았던 참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고대했겠습니까? 이들은 그렇게 메시야를 보기를 원했고 메시야의 천국비밀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지만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소수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고 그분을 눈으로 보았고 그 분의 천국비밀의 말씀을 마태복음 13장과 요한복음서에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8:56에서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볼 것을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메시야 대망 사상 및 그 역사와 관련시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1-3에서, 그의 아들 이삭의 후손 중에서 천하 만민에게 복을 미치는 메시야가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기뻐했습니다.
여섯째로 마태복음 13장의 일곱개 천국비유
마태복음4:17에서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의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 천국이 임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천상에서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지상통치가 실현된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세상에 임하시므로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이 때부터 천국이 사람에게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사역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마가복음 1:15에서 예수님의 첫번째 전파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사도행전 1:3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도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전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100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천국 비유는 천국은 본질 상 신적 비밀에 속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서 천국에 관해 부분적으로나마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일곱 개의 천국비유들은 천국의 기본적 속성과 각각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외적, 내적 측면에서의 천국의 확장 과정 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마13:1-23).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주고 천국의 확장 요인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에 의해 천국이 확장됩니다. 이 비유에서 복음을 받아 드리는 4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복음을 받아드리는 태도에 따라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마13:24-30).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현재적인 영적 천국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종말에 가라지가 뽑혀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천국의 성장 단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직 완성 되지 않은 현재적 천국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앞으로 완성될 천국에서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영원히 분리 될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가라지 비유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강조합니다.
3. 겨자씨 비유입니다(31-32절).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 줍니다. 천국의 외적 확장 과정을 보여 줍니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이 겨자씨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며 겨자씨를 심은 분은 성부하나님이십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복음의 교회운동이 겨자씨와 같이 아주 약하고 작게 시작되었지만 나중에 크게 성장해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이 나무에 깃들인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들어 오는 자마다 참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4. 누룩 비유입니다(33절).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 줍니다. 천국의 내적 확장 과정을 보여 줍니다. 복음이 인간의 심성, 곧 인격의 변화를 통해 전파됨을 강조합니다. 이 비유에서 천국복음이 은밀한 영향력과 내적 발전을 보여 줍니다. 조용하지만 꾸준히 그리고 눈에 뛰지 않게 영혼의 모든 기능과 온 세상을 사로잡는 천국복음의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교회에 위탁되어 있으며 이 복음은 교회를 통해 사회 각 전반에 침투해서 그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회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로마나라에 그랬고 유럽 사회에 그렇게 행사했고 대한민국에도 그랬습니다.
5. 감추인 보화 비유입니다(44절).
천국의 현재성을 보여 줍니다. 천국의 비밀한 속성과 절대적 가치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을 발견케 된 자의 전적 헌신을 요구합니다. 앞의 네 가지 비유들은 천국이 어떻게 전파되고 성장하는 가를 보여 주었는데,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개인적으로 천국을 소유한 자의 기쁨과 태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천국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감추인 보화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가 자기들에게 계시되기 전까지는 인간의 삶에 있어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천국을 소유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남의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그 사람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보화가 감추인 그 밭을 산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한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고 투자할 때에 비로소 큰 영적 축복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6. 값진 진주의 비유입니다(45-46절).
천국의 미래성을 보여 줍니다. 천국의 비밀한 속성과 절대적 가치를 보여 줍니다. 천국은 진심을 다해 찾는 자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값진 진주의 비유는 천국이 이 세상의 그 무엇 보다도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 진주는 그 당시 아주 고가품이었습니다. 부자가 아니고는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진주를 구하는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에서와 같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부요한 상인입니다. 이 사람은 진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좋은 진주를 구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세상의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곧 구도자를 의미합니다. 이 진주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샀다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라는 것은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크고 귀중하며 인간의 구원에 유일한 통로임을 말해 줍니다. 이 진주 장사는 그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았다고 했는데 이 진주상인은 부자인데도 이 좋은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이것을 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 인생과 모든 것을 팔고라도 사야할 크고 귀중한 분이십니다.
7. 그물 비유입니다(47-50).
천국의 미래성을 보여 줍니다. 현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천국 복음이 전파되나 종말에는 악인과 의인을 가르는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천국복음이 그것을 받아드리는 자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축복의 수단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초래하는 저주의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비유는 24-30절의 가라지 비유와 마찬가지로 현세에서의 선악의 공존과 최후의 심판 때에 양자가 분리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가라지 비유는 선악의 혼잡이 부지중에 되었으며, 가라지 씨를 뿌린 마귀의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물 비유는 선악의 혼잡이 예견되었으며 악을 멸하는 최후의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바다는 세상을 말하고 각종 물고기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각종 물고기는 세상에 사는 모든 인종과 민족, 사회적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과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삽니다. 여기서의 그물은 세상에서 사람을 낚아 구원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악인과 선인이 함께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물에 가득하매’한 것은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혔다는 것은 교회의 복음사역이 완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선악을 판별한 일만 남은 것입니다. ‘물가로 끌어 내고’했는데 영적으로 종말의 심판의 장소를 말합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에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중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을 골라 천국으로 악인을 골라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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