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언 –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인 3색의 리더십“?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you.pilgrimjournalist.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you.pilgrimjournalist.com/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일상의인문학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1,044,778회 및 좋아요 17,738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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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3인 3색의 리더십. 사무라이의 시대를 평정한 세 사람입니다. 이들은 어떤 리더십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었을까요?
이 세사람의 리더십은 일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참고할 만큼 유명합니다. 배은숙의 호락호락한 세계사 제31편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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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 나무위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몬(豊臣秀吉定紋) …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15/2022
View: 1461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언 – 네이버 블로그
도요토미 히데요시 실권하에 최대 난적 호조씨를 앞서서 멸망시키고 논공행상으로 이전의 자신의 영지는 포기하고 호조씨가 지배하던 간토 지방으로 이전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5/2021
View: 8445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언 |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가문 명언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녀. 은근히 일본 전국 시대센카쿠 시대, 1467년1563 오타쿠가 많다. 당시 타케다 신겐과 …
Source: you.maxfit.vn
Date Published: 12/15/2022
View: 4110
일본의 영웅들. 일본 영웅들의 명언. 일본을 바꾼 위인들 …
오다 노부나가 명언.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언시를 남깁니다. … 히데요시 뿐만 아니라 세계에 많은 영웅들이 그렇게 많은 걸 차지하고도 결국 …
Source: laboratoryofgenius.tistory.com
Date Published: 1/2/2021
View: 269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 – 꿈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
그 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묵묵히 힘을 길러 일본 전국을 통일했으며 약 260여 년에 걸쳐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Source: ahnji.tistory.com
Date Published: 8/9/2022
View: 3916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가문 명언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녀
은근히 일본 전국 시대센카쿠 시대, 1467년1563 오타쿠가 많다. 당시 타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
Source: namazone1.tistory.com
Date Published: 10/30/2022
View: 6367
사람 사귀기에 능숙했던 노부나가 – 김해뉴스
… 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천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흘러가게 된다. … 그는 죽어가면서 ‘적은 내부에 있다’는 명언을 남기고 한줌의 흙으로 …
Source: www.gimhaenews.co.kr
Date Published: 5/24/2022
View: 7368
알아두면 쓸데있는 일본의 위인 – 월간 ANDA
지략가 면모 갖춘 ‘지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다 노부나가의 명언을 하나 소개한다. … 뛰어난 지략가, 도요토미 히데요시(1582~1598)
Source: monthly.newspim.com
Date Published: 10/7/2021
View: 825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 1- 차별받는 농민으로 태어난 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켜 멀쩡한 나라를 침략,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 전국시대의 농민의 삶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명언이 있다.
Source: 2mansigan2.tistory.com
Date Published: 10/11/2021
View: 9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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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언
- Author: 일상의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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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5.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GRvxheoSY4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언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언
대장은 존경을 받는 것 같지만
사실 부하들은 계속 대장의 약점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두려워 하는 것 같지만 깔보고 있고,
친밀한 척 하지만 경원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랑을 받는 것 같으면서도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부하를 녹봉으로 붙들려 해도 안 되고,
비위를 맞추려 해서도 안된다.
부하를 멀리하거나, 너무 가까이 해도 안 된다.
또 화를 내도 안되고, 방심해서도 안 된다.
부하가 반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심복(心腹)이란 것인데
심복은 사리를 초월한 데서 생겨난다.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장이 좋아서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행동이 가신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유능한 가신들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가신들이 쌀밥을 먹는다면 너는 보리쌀이 많이 섞인 보리밥을 먹도록 해야 한다.
가신들이 아침에 일어난다면 너는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인내심도 절약도 가신을 능가해야 하고,
인정도 가신보다 많이 베풀어야 비로소 가신들이 심복하고 너를 따르며 곁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대장으로서의 수업은 엄격해야 하는 것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들 나가마쓰에게 활쏘기 훈련을 시키고 나서, 왜 대장이 될 사람은 남들보다 혹독하게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할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 – 꿈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오늘 소개드릴 인물은 CEO들의 리더 지침서로 손꼽히는 소설 대망의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일본 역사상 전국시대라 불리는 번혁기, 사회적 유동성이 격심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에도 막부시대를 연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어린 시절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을 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묵묵히 힘을 길러 일본 전국을 통일했으며 약 260여 년에 걸쳐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화
목차.
1.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개
2.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언
3. 결론
1.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개
갑자야화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와 끈기로 유명했습니다. 일화로 다케다 신겐에게 패해 죽을고 비를 넘기고 곧바로 화가를 불러 자신의 처참한 모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자신의 패배를 잊지 않고 젊은 날의 패기, 객기에 대한 교훈으로 삼았으며 오다 노부카쓰에게 배신을 당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당해 임진왜란에 강제 출병당할 위기에도 놓였으나 끝없이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여 기회를 기다렸고 마침내 목표를 이루어냈습니다.
다케다 신겐에게 위기를 넘긴 후 초상화
2.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
1) 존경받는 리더의 조건
대장은 존경을 받는 것 같지만, 사실 부하들은 계속 대장의 약점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깔보고 있고, 친밀한 척 하지만 경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랑을 받는 것 같으면서도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부하를 녹봉으로 붙들려해도 안 되고, 비위를 맞추려 해서도 안 된다. 또 화를 내고 안되고, 방심을 해서도 안 된다.
부하가 반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심복이란 것인데 심복은 개인의 이익을 초월한 데서 생겨난다.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장이 좋아서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행동이 가신들과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유능한 가신들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가신들이 쌀밥을 먹는다면 너는 보리쌀을 많이 섞인 보리밥을 먹도록 해야 한다. 가심들이 아침에 일어난다면 너는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인내심도 절약도 가신을 능가해야 하고, 인정도 가신보다 많이 베풀어야 비로소 가신들이 심복 하고 너를 따르며 곁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대장으로서의 수업은 엄격해야 하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들 나가 마쓰에 게 전하는 리더의 조건-
2) 그 밖의 명언
– 사람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아라.
–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 인내는 무사 장구의 근본이고, 분노는 적이다.
–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른다면 반드시 해가 미치게 된다.
–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말아라.
–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 자기의 분수를 알아라.
–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 풀잎 위에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3. 결론
준비가 되어 있고 참고 기다리면 그때가 온다. 그 길이 외롭고 고독하지만 반드시 때가 온다고 믿고 한발 한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은 제가 좋아하는 초한지의 대장군 한신의 과하지욕과 함께 인생 십계명에 포함시켜 두고두고 보려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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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가문 명언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녀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가문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 徳川家康, 1543년 1월 31일 1616년 6월 1일는 센고쿠 시대부터 ..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 성에 도착하는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직을 일시적으로 파직시켰다.자녀 11남 5녀막부 에도 막부사망 1616년 6월 1일; 스루가 국 슨푸시대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생애 · 가족 관계 · 주해 · 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
은근히 일본 전국 시대센카쿠 시대, 1467년1563 오타쿠가 많다. 당시 타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말 인내의 아이콘일까?
1614년과 1615년에 벌어진 오사카 동계와 하계 전투 후에, 전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으로 통일되는데, 이에야스는 지방 다이묘에게 한 개의 일본 전국시대 성城 한 방에 정리하기
비록 일본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정도는 안다.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다스리던 시기를 가리켜 에도시대라고 부르며,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화려한 사당, 도쇼구
–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 몇 해 전 일본에서는 역사상 최고의 경영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설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답니다. 그 결과 에도 막부를 창시한 도쿠가와 리더들의 보물창고
인내와 소통의 덕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의 명언을 하나 소개한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도요토미가의 무장 5 알아두면 쓸데있는 일본의 위인 월간 ANDA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중세의 무인. 에도 막부江戶사회를 확립했다. 나티배 오늘의 명언은? 나티배 오늘의 명언은 유명인들 나티배 오늘의명언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생!!
것들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에도는 오늘날 도쿄지역이다. 도쿠가와 가문에서 막부의 쇼군을 역임하던 시기를 흔히들 에도시대라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명언 中 도쿠가와 이에야스 인생명언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시즌 7 두견새의 행방도 여기서 유래했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말고도 아시카가 울지 않는 두견새
오고쇼로 있던 이에야스는 여전히 도쿠가와 씨에 위협적인 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오사카 성에 우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도요토미 씨의 부흥을 기원하기 자녀 11남 5녀막부 에도 막부사망 1616년 6월 1일; 스루가 국 슨푸시대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생애 · 가족 관계 · 주해 · 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
바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일본인들이입장에서 조선의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다는게 좀 짜증나네요. 이들의 성격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녀
1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년 1월 31일 생 1616 이에야스의 제자녀諸子女여러 아들딸들을 병기한다. 이에야스는 11남 5녀를 두 도쿠가와 家 계보
요주인養珠院, 15801653. 자녀. 10남. 이름.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2 16021671. 11남. 이름. 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리후사德 도쿠가와 이에야스/가족관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들에게 가르치는 리더대장론. 대장이란 존경을 받는 것 같으나, 실은 부하들이 계속 약점을 찾아내려 하고 있는 게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들에게 가르치는 리더대장론
히토츠바시一橋출신, 生 28男27女로 자녀 대부분을 각 지역 다이묘의 양자로 보냄내놓을 때까지 에도막부는 덕천가강이 의도했던 그대로 자신의 후손들이 260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
할복을 명받는다. 이를 예감한 리큐가 자녀들에게 남긴 와카일본 전통 시구. 28. 센괴승. 각종 불교 종파 섭렵. 훗날 이에야스의 스승 및 자문위원이 됨 “감옥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월간 ANDA
현대 리더십의 유형으로 인용되는 전국시대 3인방
강력한 리더십의 ‘용장’ 오다 노부나가
지략가 면모 갖춘 ‘지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인내와 소통의 ‘덕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 오영상 기자 [email protected]일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빼놓을 수 없다. 군웅할거의 시대요, 천하통일의 대망을 품은 각지 영주들의 다툼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은 혼란의 시대였다. 이 전국시대의 중심에 있었던 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다. 우리에게도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또는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친숙한 인물들이지만, 일본에서는 존경하는 위인 순위에서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는 세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이들은 현대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도 곧잘 인용된다. 우리가 흔히 리더십의 유형을 구분할 때 쓰는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이 전국시대 영웅 3인방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것이 ‘울지 않는 두견새’ 이야기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란 물음에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필요 없으니 목을 치겠다”고 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새가 울게 만들겠다”고 답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다. 울지 않는 새 한 마리를 놓고 세 사람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야기다. 현대의 리더십 유형에 이 이야기가 인용되는 이유는 ‘새의 목을 치겠다’는 노부나가는 대표적인 용장 타입이고, ‘울게 하겠다’는 히데요시는 지략가의 면모를 갖춘 ‘지장’,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에야스는 인내와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덕장’의 전형적인 예다.울지 않는 두견새 이야기와 함께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떡’ 이야기다. “노부나가가 쌀을 찧고, 히데요시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을 앉은 채로 먹은 건 이에야스”라는 내용이다. 두견새 이야기가 세 사람의 성격을 말한 것이라면, 떡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천하를 쟁취했는가를 설명한다.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건 분명 오다 노부나가다. 하지만 오다가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통일의 과업을 이룬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러나 천하를 손에 쥐고 평화와 번영이라는 과실을 맛본 것은 결국 마지막까지 참고 기다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종식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논할 때 오다 노부나가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조사 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일본인이 존경하는 위인 랭킹에서 1등을 도맡아 하는 사람 중 하나다. 오다 노부나가와 1위 자리를 다투는 인물은 전국시대 3인방의 한 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메이지(明治) 유신지사로서 일본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오다 노부나가는 지방의 작은 호족 출신이다. 어린 시절에는 ‘얼간이’라고 불릴 만큼 이상한 행동을 일삼았으나, 아버지가 죽고 가문을 이어받은 뒤부터는 타고난 전략적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특히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3만 대군을 고작 3000명의 군사로 무찌른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를 계기로 전국시대의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성정이 다소 포악하고 급하며 독불장군 경향이 있었지만, 결단력 있는 성격에 평상시에는 서민들과도 잘 어울릴 정도로 소탈한 모습을 보여 많은 이가 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카리스마 리더십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도 매우 유연했다. 1540년대 말 포르투갈의 상인들을 통해 들어온 총포가 전투에서 매우 유용함을 간파한 노부나가는 일본의 그 어떤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들보다 먼저 철포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위한 전술을 개발해 냈다. 노부나가가 만든 철포부대는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전국시대 전투 양상을 뒤바꿔놓기도 했다.하지만 천하통일을 눈앞에 뒀던 노부나가는 자신의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주코쿠(中國) 지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던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머물게 된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군사를 이끌고 혼노지를 습격하고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노부나가는 패하게 된다. 결국 그는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그 불길 속으로 들어가 자결한다.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에게 인간적인 모멸감을 줬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의 영지를 빼앗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천황의 권좌마저 노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야망을 눈치챈 천황파의 사주에 의해서다 등이다. 이유야 어쨌든 일본 전국시대 불세출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선 ‘내부의 적’을 언급할 때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고 말한다.오다 노부나가의 명언을 하나 소개한다. “의미 없는 일은 하지 마라. 돈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영혼을 잃기 쉽다. 명예를 구하여 일하는 사람은 기쁨을 잃기 쉽다. 권세를 탐하여 일하는 사람은 친구를 잃기 쉽다.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일을 위하여 일하라.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뛰어난 지략으로 말단 무사에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정도로 평가절하된 인물.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렸을 때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 29세 이후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그 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이름을 바꿔가며 전국시대를 살았다. 하시바라는 성은 노부나가로부터 ‘지쿠젠노카미(筑前守)’의 직위를 하사받은 후 사용했으며, 태정대신(太政大臣)과 관백(關白)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1590년 반대 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시대를 열었다. 우리에게 히데요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신분제를 극복하고 천한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히데요시를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뛰어난 지략가이며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겨울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넣고 따뜻하게 한 뒤 내놓아 노부나가의 총애를 얻었다는 일화는 그의 면모를 짐작게 해주는 대목이다.히데요시는 과업을 달성한 후 토지제도를 정비하고 신분제를 확립하는 등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무기 몰수령인 도수령(刀狩令)을 내려 농민들이 무장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책으로 농민들이 경작에만 힘을 쏟게 되면서 농업 기술이 발전했고 자연스레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히데요시가 근거지로 삼았던 오사카(大阪)가 일본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이 이때의 일이다. 이후 1592년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조선을 침략한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무역·상업 등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무역 확대설’ △히데요시의 개인적 공명심을 위해서라는 ‘공명설’ △다이묘 계급의 이익이나 도요토미 정권의 강화를 위한 ‘영토 확장설’이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패한 히데요시는 그 후 6년 뒤인 1598년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오사카의 상징인 오사카성(城)이 바로 히데요시가 지은 것이다. 천하통일의 야망과 장기 통치에 대한 염원을 담아 세워 올린 히데요시의 꿈과도 같은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시에도 이러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로 평가받는다. 치열했던 전국시대의 끝에 통일이라는 열매의 달콤함을 맛본 것은 바로 이에야스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에야스의 조부 때에 크게 번성했으나 아버지 대에 와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는 6살 어린 시절부터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今川) 가문을 오가는 인질 생활을 했다. 그의 인질 생활은 19살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음으로 독립의 기회를 맞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게 된다. 때를 기다리는 이에야스의 인내심은 이때부터 발휘된다.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와 승부를 벌일 기회를 얻지만 아직은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음을 직시하고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히데요시의 출병 요구에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자 사활을 건 승부를 시작한다. 바로 일본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기의 전투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다.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도요토미가의 무장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전투를 말한다. 당시 이 전쟁에 참여한 병력은 동군이 9만, 서군이 8만에 이르는 일본 역사상 최대 전투 중 하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江戶) 막부를 설립하고 이후 260여 년간 평화의 시대를 누린다. 에도 막부 시기 일본은 체제 안정을 통해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으며 이 평화를 바탕으로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이라고 느끼는 많은 것이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됐다. 에도는 오늘날 도쿄 지역이다.마지막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언이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 1- 차별받는 농민으로 태어난 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켜 멀쩡한 나라를 침략,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희대의 악인.
그러나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것과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빼면 잘 알지 못한다.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어떻게 통일했을까? 그리고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히데요시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관리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황을 기록한 징비록을 쓴 이유가
반성하고 훗날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희대의 악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마음으로 알아보자.
비천한 농민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5년 전인 1537년,
오와리 국( 현재 나고야) 아이치현 나카무라 마을의 가난한 농민 키노시타 야에몬과 어머니 나카 사이에서 태어난다.
아명(어릴 때의 이름)은 히요시마루라고 하지만 후대의 창작이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전국시대의 농민의 삶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명언이 있다.
“농민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명언은 장차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고,
현재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위인인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한 명언 아닌 명언이다.
존경받는 위인이라고 칭송받는 그 조차 농민을 저렇게 생각하는데 같은 시대의 다른 지배층들은 어떻까?
전국시대에 기본적으로 농민들은 지배층들에게 생산물품으로 여겨졌다.
즉 지배층에게 농민이란 단순한 물건이었고,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기본 세율 50 퍼- 80 퍼였고,
일본 사회 특성상 신분이 고정되어 있어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들, 손자까지,
영원히 농민의 굴레라는 쳇바퀴 안에서 지배층에게 뼛속까지 수탈당해야만 했다.
실제로, 얼마나 수탈이 심했는지 태어나자 이런 세상 속에서 살지 말라고,
부모가 자기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라는 풍습까지 있었으니 말 다했다.
이러한 전국시대에서 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
당시 오와리는 일본 3대 평야인 노비 평야가 있어 쌀 생산에 축복받은 지역이지만,
오다 노부히데라는 무사가 하극상을 일으켜 혼란한 지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 키노시타 야에몬이 죽고 어머니 나카는 몰락한 다인 치쿠아미와 재혼하게 된다.
새아버지 치쿠아미는 히데요시를 새롭게 탄생될 가정의 걸림돌이라 생각하여 학대했고,
히데요시도 그런 새아버지 치쿠아미를 싫어했다.
히데요시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8살이 되던 날, 새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지쳐서
고메이지라는 절에 스스로 가서 입적하려다가 곧 뛰쳐나왔고,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15살 때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죽은 친아버지 재산을 들고 세상을 방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새아버지와 다르게 히데요시 어머니 나카는 히데요시에게 상당한 모성과 사랑을 쏟아주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은 히데요시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효도한다.
훗날 히데요시가 출세하여 한 지방의 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자기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었고,
일본 천하통일이 된 이후에는 어머니에게 오만 도코로라는 칭호를 내려주고 ,
최고 벼슬 중 하나인 정 1품을 수여한다.
히데요시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는지 한 예로,
임진왜란 도중 온갖 잔인한 명령을 눈 깜짝 안 하면서 명령하던 히데요시지만,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충격으로 졸도해버린다.
이렇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히데요시는 취직할 나이가 되자,
아명을 버리고 새롭게 이름을 스스로 바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이름은 장차 그가 천하통일한 후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었고,
청년일 당시 그는 아명인 히요시마루에서 키노시타 도키치로 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마가와 가문의 하인으로서의 히데요시
히데요시 나이 18살에, 그는 고향인 오와리 국을 떠나 남쪽에 있는 도토미 국으로 간다.
도토미 국은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영토였고,
히데요시는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미츠시타 유키츠나의 밑으로 들어가 하인이 되었다.
당시 이마가와 가문은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3국을 지배한 강대한 가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팔자를 고치기 위해 고향 오와리를 떠나 먼 이곳까지 왔지만,
당시 히데요시는 비천한 출신으로 학문은 고사하고 실무담당 경험이 전무한 초짜,
그만 실수를 해버리고 쫓겨난다.
오다 가문의 이름 없는 머슴, 히데요시,
이마가와 가문에서 쫓겨난 히데요시는,
다시 고향 오와리 국으로 가서,
오와리 국을 지배하고 있는 오다 가문의 젊은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히데요시가 받은 직함은 고모노(小者),
고모노(小者)란 주인집에 살면서 허드레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머슴이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 취직했을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아버지 오다 노부타다가 재수 없게 넘어져서 죽었기에,
이른 시기에 다이묘 자리에 오른 애송이였다.
게다가 오다 노부나가는 지금으로서도 이해불가능할 정도로 파격적인 인물이어서,
오와리의 멍청이라고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던 사나이였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제삿날에 아버지 영정에다가 향초를 던지고 가는 행위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용서 못할 짓이었고, 이로 인해 오와리 국은 분열되었다.
여기에 남쪽에 위치한 최강 가문 이마가와 가문의 침략이 머지않았기에,
오다 가문은 내일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가문이었고,
이런 가문에서 히데요시가 받은 직위는 고작 머슴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고작 머슴인데 불구하고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했고,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 눈에 띄기 위해 엄청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이때의 유명한 일화로 주군 노부나가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겨울날 노부나가의 짚신을 가슴 품어서 데웠다는 일화는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 창작된 이야기이지만 이 정도로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을 만큼 일하는 이름 없는 머슴 히데요시,
히데요시의 노력은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가 빛을 보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름 없는 머슴에서 파격적인 승진 하여,
오다 가문의 본성인 기요스 성의 수리 실무자, 주방 실무자를 담당했고,
여기에서도 큰 성과를 내며,
오다 노부나가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히데요시라는 길거리 천한 농민은 점점 오다 가문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고,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는 분열된 오와리를 통일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3만 병력을 3천 병력으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격파하는 데 성공하여 오다 가문을 멸망에서 구해낸다.
2018/12/17 – [역사잡담/일본 역사] – 1561년 오케하자마 전투 (오다 가문 3천 vs 이마가와 가문 3만)
이름 없는 머슴 히데요시와 오와리의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
둘은 그렇게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여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
조강지처 네네와의 결혼
1561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25살이 되던 해에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딸 네네와 결혼하는데
당시에 드문 연애결혼이었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통설이 맞다면 네네의 당시 나이는 14살…….
하지만 히데요시가 늦게 결혼한 거지, 그때 당시에는 다들 이때 결혼했을 나이였다.
네네는 스기하라 가문의 여식이고, 히데요시는 길거리 농민 출신, 신분 차이가 있는 결혼이었고,
부모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혼에 성공한다.
이후 네네는 탁월한 안목과 정치적 능력으로 히데요시를 내조하여,
그를 천하인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인재 기반 없는 히데요시를 위해 어린 친척들을 손수 길러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키웠다.
네네에 대한 인물평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노부나가가 대놓고 히데요시한테는 과분한 여자라고 했을 정도로 비범했던 여성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네네를 두고 히데요시의 바람기는 유독 심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불륜 상대는 주로 신분이 높은 여성들,
이는 히데요시의 비천한 신분 콤플렉스 탓이었다.
히데요시의 바람기가 어찌나 심했는지,
네네가 아예 히데요시 주군 노부나가에게 편지를 써서 하소연한 적도 있었고,
이에 노부나가는 편지로,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당신은 더욱 아름다워졌더군. 히데요시가 당신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불만을 표하고 있는 모양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저 대머리 생쥐(히데요시)가 당신 정도의 훌륭한 여성을 다른 데서 얻을 수 있을 리 없으니, 당신도 아내로서 당당히 행동하도록 하고,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도록. 이 편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보여주도록 해요.
라며 부하의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격식을 갖춘 편지로 답해준다.
주군 노부나가 또한 히데요시의 심한 바람기를 알고 있었다 보다.
바람기 많은 히데요시,
그렇지만 역시 조강지처가 좋았던가? 길거리 시정잡배 히데요시이건, 일본의 1인자 히데요시이건,
히데요시는 언제나 네네의 남편이었다
히데요시가 원정으로 성을 비워 성주 대행이 필요할 때에 믿고 맡기는 사람이 언제나 네네였고,
천하 통일한 이후에 히데요시는 조강지처인 네네에게 가장 높은 벼슬 중 하나인 종 1위를 수여했고,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사투리 써가며 대화했고,
전국 다이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네가 히데요시에게 사투리 써가며 말싸움을 걸면,
히데요시도 그냥 편하게 사투리 쓰면서 말싸움에 응해주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미노 국 공략 시기의 히데요시의 스노마타 성 전설의 진실
오와리 북쪽 지방 미노 국을 지배하는 가문은 사이토 가문이었다.
본래 사이토 가문의 다이묘 사이토 도산은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으로서
오다 가문과 사이토 가문은 결혼 동맹으로 맺어진 동맹 가문인데,
사이토 도산이 아들, 사이토 요시타츠에게 죽자 두 가문은 대립 상태로 들어간다.
1561년, 사이토 가문의 다이묘 사이토 요시타츠가 죽고,
그의 장자 사이토 다츠오키가 다이묘 자리에 오르자,
노부나가는 6년에 걸친 미노 국 공략에 들어간다.
노부나가의 미노 정벌 당시 히데요시의 활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하룻밤에 축성했다는 스노마타 성 이야기이다.
스노마타 성, 혹은 스노마타 일야성 이야기란
노부나가가 미노 국을 점령하기 위해 오와리 국과 미노 국 사이의 스노마타 지역에 성을 세우려고 했지만,
미노 국 사이토 가문의 군대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에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자신이 축성하겠다고 나섰고,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고로쿠와 같은 호족들의 도움으로, 강 상류에서 성 자재를 보내고,
강 하류에서 조립해서 하룻밤에 성을 완성시켰고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바로 스노마타 일야성 일화이다.
이 이야기도 에도시대 후대에 쓰인 회본태합기라는 소설책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농민인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1567년, 6년에 걸친 공략 끝에 미노 국을 점령한 오다 노부나가,
이는 단순히 2국의 다이묘가 아니라 오와리 국 석고 57만 +미노 국 석고 54만으로
100만 석을 가진 거대 다이묘로 성장했다는 것이고,
이는 보통 5국을 지배한 다이묘의 경제력과 맞먹는다.
석고 1개 은 쌀 1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말하는데,
쌀 1석은 성인 1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생산량으로서,
석고 1 만석당 병력 250명 정도를 징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적극적으로 개혁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 형태의 경제체제를 도입하고, 다른 다이묘들과 다르게 중앙집권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로서 다른 다이묘들 눈치 보지 않고 능력위주의 인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무리 능력위주의 인재 등용을 하고 싶어도 경제력이 딸리면 군사력이 딸려지고,
결국 이해관계의 인재 등용이 되어, 농민 출신 히데요시가 제대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나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노부나가 +
오다 노부나가의 생각을 실현시켜 줄 있는 경제력 +
히데요시의 노력과 재능,
이 세 가지가 기가 막히게 히데요시에게 존재했었고,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신분 차별 없이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하는 다이묘였고,
오다 가문은 풍부한 경제력으로 아무런 눈치를 보지 않고 정책을 펼치는 강대한 가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능력 있는 인재 히데요시,
이 세 가지 시너지를 일으켜 결국 히데요시는 천한 농민임에도 오다 가문에 출세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 온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이마가와 가문에 그대로 있었으면 뒷일을 생각해 볼 때 무조건 잡부 1로 죽었음)
(다른 가문이었으면 국물도 없었다.
진짜 예외적으로 다케다 신겐의 4 천왕이라 불리는 코사카 마사노부가 있는데, 이 사람도 히데요시처럼 농부 출신이지만, 특별 케이스였다. 왜냐하면 그는 신겐의 남성 애인으로, 능력+ 사랑의 힘 ㅡㅡ 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밀당 고수였는지 신겐이 마사노부한테 신에게 맹세하건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사랑 고백하는 러브레터가 사료로 남아있음 ㅡㅡ)
미노 국을 지배하던 사이토 가문이 멸망하고, 히데요시는 사이토 가문 항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이때 인연을 쌓은 인물이 히데요시의 참모로 유명하며,
금공명( 삼국지 제갈공명의 그 공명)이라는 별명을 가진 다케나카 한베에(다케나카 시계 나루)이다.
사이토 가문이 멸망한 후,
히데요시가 사이토 가문의 가신인 한베에를 등용하기 위해,
삼국지의 나오는 유비처럼 삼고초려하였다.
이때 시계 나루는 히데요시의 재능을 파악하고,
노부나가의 가신이 아닌 히데요시의 직속가신이라 면 섬기겠다고 제안했고,
시계 나루는 히데요시의 직속가신이 된다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당연히 후대의 창작이고,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의 직속가신으로 등용되었으며,
요리키(파견 무장)로서 히데요시에게 파견되어 히데요시의 참모로 일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는
키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에서 키노시타 히데요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
미요시 가문의 다이묘, 미요시 나가요시.
그는 1553년, 일본의 최고 지도자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쫓아내고,
수도 교토를 점령하여 상경에 성공한다.
그러나 몇 백 년 동안 일본을 지배하던 쇼군을 쫓아낸 대가는 너무나 컸다.
그래서 미요시 나가요시는 쫓아낸 쇼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와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린다.
그렇게 수도 교토를 지배하던 미요시 가문과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둘은 싸움과 협력을 반복하며 주도권 싸움을 반복했다.
그러나 몇 년뒤 미요시 나가요시가 병사하고 미요시 가문은 혼란에 빠진다.
이에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다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미요시 가문이 상황을 뒤집기 위한 한방을 준비하는데,
1565년, 미요시 가문은 쇼군의 처소로 침입,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한다.
이것이 훗날 에이로쿠의 변이라 불리는 쇼군 암살 사건이다.
에이로쿠의 변을 피해, 쇼군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가문으로 피난해 왔다가
다시 오다 가문으로 와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교토로의 상경을 요청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을 받들고, 1568년, 교토 상경 전에 들어간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상경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는 교토를 점령하고 있는 미요시 가문을 물리치고
두 번째로는 교토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첫 번째, 교토를 점령하고 있는 미요시 가문,
노부나가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요시 가문 다이묘 미요시 나가요시는 이미 죽고 없으며,
미요시 가문의 유력 장수들 죄다 단명했고,
미요시 가문은 당시 두 파벌로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두 번째, 교토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
교토로 상경하기 위해 교토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 영토를 지나가야 했다.
사이에 있는 다이묘 세력은 롯카쿠 가문, 키타바타케 가문.
하지만 이들은 군사력이 약한 약소 가문이었고,
노부나가는 상경하면서 겸사겸사 군사력으로 점령하기로 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상경하면서 군사력은 한 방향으로 집중하기 위해
오다가 문 동쪽에 붙어있는 다케다 가문의 다이묘 다케다 신겐과의 결혼 동맹,
남쪽으로 마츠다이라 가문(훗날 도쿠가와)의 다이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결혼 동맹,
북서쪽으로는 아자가 가문과 결혼 동맹을 했고
이로서 오다 가문의 모든 병력을 서쪽 방향인 교토 상경 전으로 쏟아부을 수 있었다.
히데요시 또한 노부나가의 상경 전에 참여하는데,
롯가쿠 가문 본성 공략전인 간논지성 전투 참여하여 활약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당시 아직까지 그는 하급 장교로서,
많고 많은 오다 가문의 이름 없는 무사 중에 한 명에 불과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부나가는 1568년 음력 9월에 상경 전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3개월 만에 수도 교토를 점령 하여 상경에 성공한다.
거기다가 상경하면서 주변 국도 같은 점령하여
기나이 국, 야마시로 국, 야마토 국, 카와치 국, 이즈마 국 셋츠 국, 이세 국이 노부나가의 영토가 되었다.
노부나가가 천하포무를 선언한 지 3개월 만에 일본의 천하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교토를 점령하자마자 미요시 가문을 쫓아내고,
아시가카 요시아키를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으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약 250년간 일본의 지배자로 존속해 온 무로마치 막부 마지막 쇼군이었다.
노부나가 인생 최대의 위기와 히데요시 인생 최대의 기회
일본 수도 교토에 입성한 오다 노부나가, 그 뒤 교토가 위치한 지역인 기나이 국 평정에 들어가는데,
그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교토에서 행정업무를 맡고 있었다.
1570년, 천하인이 된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요시아키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노부나가와
그것을 용납 못하는 요시아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기선제압하기 위해,
요시아키의 정치적 지지 세력인 에치젠 국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쇼군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상경을 요청한다.
에치젠 국, 와카사 국 2국의 지배자,
아사쿠라 가문의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노부나가의 속셈을 파악하고 당연히 거절한다.
이를 계기로 노부나가는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에치젠 침공을 침공하고 여기에 히데요시도 종군한다.
노부나가는 수도 교토를 출발하여, 동맹 가문 아자이 가문 영토를 통과하여,
1.노치세야마성을 점령하여 와카사 국을 평정한 뒤,
2.가네가사키 성을 점령한다.
순식간에 진격하여 아사쿠라 가문의 영토를 하나 둘 점령하는 노부나가.
그러나 이때 노부나가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여진다.
바로 오다 가문의 동맹인 아자이 가문이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뒤통수 치기 위해,
가네가사키성을 포위하러 온 것이다.
사실 이 배신에는 노부나가 잘못도 한 몫한다.
본래 아자이 가문, 아사쿠라 가문은 전통적으로 동맹 가문,
그래서 오다 노부나가와 아자이 가문과의 동맹 체결을 맺을 때 조건을 내밀었다.
바로 만일 오다 가문이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할 시에 아자이 가문에게 통보해 줄 것,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약속을 어기고 쳐들어 갔다.
노부나가 생각에는 자신이 천하인이 되었고 새로 서열정리를 들어가야 되니 아자이 가문을 길들이기 위해 약속을 어긴 걸까?
아무튼 아자이 가문으로서는 아사쿠라 가문인가 오다 가문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아자이 가문은 아사쿠라 가문을 선택했고, 곧 오다 노부나가를 포위에 나선다.
처음에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내로 있는 여동생 오이치의 재치로 노부나가는 아자이 가문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부나가는 기껏 가네가사키 성을 점령했지만,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쳐해 지자,
빨리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훗날 가네가사키 전투 혹은 가네가사키 퇴각전이라고 불리는 회전이 일어난다
말이 전투지 사실상 목숨을 건 줄행랑이었다.
매복이 있을지 모르는 골짜기를 확인도 못하고 지나가야 했고,
보급이 끊겼으니 각자 흩어져서 퇴각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 상황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기회라고 판단,
노부나가에게 자청하여 퇴각하는 군대의 지키기 위한 후발대를 자처한다.
퇴각하는 군대를 후발대로 자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에 가까운 임무,
하지만 천한 출신의 그는 도박을 하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일까?
앞으로 오지 않을 기회는 왔고
여기에 그는 목숨을 배팅했다.
거의 확실하게 죽겠지만, 살아남는다면 노부나가의 주목을 받으리라.
그리고 히데요시는 수일에 걸친 기만전술을 통해 살아남는 데 성공하고,
거기에다가 노부나가를 퇴각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때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는지 노부나가가 교토로 도착했을 때 주위에 10명의 병사밖에 없었고,
노부나가가 훗날 회상하면서 가네가사키 전투가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눈에 띄는 데 성공하고,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가네가사키 퇴각 전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지휘관으로서 노부나가의 주요한 전투마다 기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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