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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by 오세광 (feat 박희봉)
[악보] https://blog.naver.com/beltmission/222640705567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를 구하시려고 친히 버림 당했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의 크신 사랑 보이셨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를 구하시려고 친히 버림 당했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의 크신 사랑 보이셨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난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 고백은 위대한 왕 다윗도 했던 기도였습니다.
시편22편 1절을 보시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한탄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극심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과연 나를 버리셨는가? 의심이 생기고 마음이
힘들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은 잘 모르지만,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버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진짜로 버림 당하셨습니다. 죽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완벽히 단절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처절한 고백을 아버지께 드린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처절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의 시즌에 우리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맛보아 알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CCM ,찬송가 최다 컨텐츠, 감동의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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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무위키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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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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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를 아십니까? < 신학 < 기사본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를 아십니까? 예수의 마지막 말에 대한 탐구. 기자명 이석희; 승인 2009.03.25 18:09. 바로가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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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njoy.or.kr

Date Published: 4/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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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3월 31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친 이유

찬송 : ‘만왕의 왕 내 주께서’ 151장(통 138) ·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본문 : 마태복음 27장 45~50절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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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4/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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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27:46 ·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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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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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기독일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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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4/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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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브런치

마태복음 27:46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독일의 신학자 슈미델(P. W. Schmiedel, 1851~1935)은 예수님의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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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8/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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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히브리어 마태복음강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뜻(마 27 …

‘라마’는 같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의문사 ‘라마’에 대한 역어이다. ‘사박다니’ 역시 아람어이며 ‘당신이 나를 버리셨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본문은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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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kh123.tistory.com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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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리폼드 투데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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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formedtoday.net

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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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by 오세광 (feat 박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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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 다니

  • Author: Beecompany 비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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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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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를 아십니까?

버림 당한 예수 이야기, 마지막 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바크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는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를 인용해 말했다. 그는 시편 22편 1절 다윗의 기도를 자신이 죽기 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인용하며 숨을 거둔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음역 때문에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만이 쓰고 있다. 즉 ‘다윗의 시’로 나타난 히브리어 문장 중 예수는 시편 22편 1절을 히브리어 그대로 발음했던 것이다. 윗 문장은 히브리어를 읽는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Father’를 한국식으로 말하면 ‘파더’라고 하듯 ‘Father’를 한국식 발음 ‘파더’라고 복음서 기자는 발음 그대로 적은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책을 편집하다 한 전화를 받았다. 저를 위해 늘 기도해주시는 안양에서 부동산을 하시는 한 아주머님이었다. 나는 늘 그분을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그 어머님은 늘 나의 신앙 상태를 체크하고 “기도를 더 해보세요!”, “하루에 세 번씩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맑은 목소리로 충고했고 그때 마다 나는 그 말을 실천하려 고군분투한다.

그분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 의예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학과에서 톱이 되었다. 연일 주목 받는 마른 체격의 꼬마 아이에게 뿜어져 나오는 맑은 두뇌와 영혼은 그 어머님과 무척 닮았다. 교만이라고는 전혀 없이 늘 겸손함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삶을 즐기는 그녀에게는 딸을 대하듯 나를 아들처럼 좋아해주시고 전화한다. 그래서 늘 고맙다.

미국에서 늘 통화하던 그 작은 딸이 엄마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엄마! 혹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묻자 어머님은 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고 한다. 보스턴에 있는 딸아이는 “예수가 한 말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인지 혹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이랑 전도사님도 그 의미를 진정 알지 못해요”라고 말했다고 그 어머님은 내게 전했다. 난 불현듯 그 꼬마 숙녀의 안타깝고 가냘픈 목소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혹시 그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려 줄 수 있어요?”라고 어머님은 내게 물었다. 나도 그러한 과제로 과거 10대, 20대에 끊임없이 고민했으나 늘 제자리였고 헛수고했다. 누구 하나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스턴에 있는 그 꼬마 숙녀 역시 나와 같은 번민에 쌓여 있던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어머님에게 “시편 22편에 대해 읽어 보시면 대답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전화 한 결과, 시편 22편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했고 미국에 있는 꼬마 숙녀에게 편지를 다시 보냈다고 했다.

사실 그에 대한 정확한 해설을 하는 곳은 전무했다고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 나 역시 그 문제로 성경 복음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주석과 다양한 경로로 그 의미를 추적하기도 했다. 보다 정확한 주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문이 많았던 대학교 시절에는 주석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고 그만큼 정보가 부족했다.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곳은 없었다.

이러한 대학생 시절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전화를 끊은 후 난 과거를 생각하며 해답을 다시 찾았다. 과거의 의문점을 시작으로 단서를 찾는 탐정처럼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었다. 적어도 내게 있는 단지 몇몇 주석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호크마 주석의 ‘마 27:46’ 일부분 –

“마가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는 일곱 마디 말씀 중 오직 한 마디 말씀만 기록해 놓았다. 이 외침은 예수가 단순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 것도 아니다. 예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법적인 의미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호크마 주석의 ‘막 15: 34’ 일부분-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모든 조롱과 멸시와 침 뱉음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시편 22:6절은 조롱 받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 그레이스 종합 주석의 ‘마가복음 제 28강’ 일부분 –

마가는 이 장면을 써 넣으면서 다음 구절에 넣을 다양한 자들의 반응을 생각한 듯하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를 부른다”(막 15:35)고 말하고 다른 자는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 끝에 꿰어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만큼 십자가의 높이는 갈대를 올려야 할 정도로, 땅에서 2~3피트 위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들의 행위를 막고 제동을 걸며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는지 보자”라고 예수의 구원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고 돌아가셨다. 마태복음 저자는 “그의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가 죽자 바로 예루살렘의 거룩한 장소인 ‘성소’가 둘로 쪼개지는 이적이 나타나고 백부장 역시 이러한 기이한 일을 지켜보다가 예수의 사건에 심히 두려워하여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말이다. 성소뿐만 아니라 당시 무덤들이 열렸고 잔다고 표현하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니 두려울 수밖에.

이렇게 당시 예수의 죽음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 복음서의 저자처럼 오늘날 예수의 말 한마디에 다양한 의미와 목마름이 존재한다. 그의 마지막 말을 놓고 그를 ‘실패했다는 인간 중에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반대로 그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오히려 칭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진정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마음속에 그가 진정 구약에서 말한 ‘메시아’이며 ‘인자’임은 부인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외침은 예수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신음 소리를 마치 하나님이 그를 버린 듯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응답이 없다는 것은 곧 기도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고, 오히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점은 버림을 받았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 앞 십자가의 예수는 죽었다. 이 사건을 바라본 유대인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했다.

예수를 본 자들은 다 그를 비웃었으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건져주실 것 아닌가?”(시 22:8)라는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예수가 죽어가면서 그렇게 말하는 대목은 자신의 전 ‘삶’과 ‘여생’을 시편 22편의 문장들 속에 담아 두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참된 의미를 전달하고자 예수의 버림에 대한 문장이 시편 22편에 담겨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어났다.

예수를 미워하는 자들이 피를 빼버리는 드라큘라처럼 혹은 입을 벌려 달려드는 사자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무언가를 노리기 시작한다. 결국 그의 피와 물은 땅 아래로 흡수되었고 예수의 마음이 밀랍 인형 같이 녹아버리며 혀가 입천장에 떡하니 붙어 말 한마디 못하는 그의 심정을 표현한 문장이 시편 22편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5) 혹은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9)라고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과 동일하게 여기기에, 그 시편 22장 1절을 인용하였다고 확신한다. 시편 기자와 예수 모두 하나님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철저히 말이다. 사실은 예수가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올바른 바이다.

그래야만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우리가 그를 찬송할 수 있다. 십자가 죽음을 회피하여 그가 버림받지 않았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결코 성취되지 못 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지 못할 뻔 했다. 그가 죽었기에 우리는 살았고 그가 자신의 길을 피해갔다면 우리는 진정 죽은 목숨이다.

다른 주석들처럼 만약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예수가 우리 안에 결코 존재하지 못할 근거가 제공되는 셈이다. 시편 22편 저자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하나님께 하소연 한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품에서 자랐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미 조상들의 구원의 은총을 힘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버리기 시작한다.

구약의 유대인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예언자들처럼, 예수도 철저히 버림을 받았다. 그것이 하나님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 두어야 했다. 그 하나님은 얼마나 아파하였을까? 버리고 싶은 자식 하나 없듯이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데가 없다. 세상을 임대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령하였거늘 이들은 자기 잇속만 채우며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인 자신의 아들을 땅 아래로 보내는 것을 허락해야 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아들을 버리지 않으면 세상을 자신의 품으로 돌이키지 못함을 아시고 자신의 아들까지 버려야 했다.

이는 가슴 아픈 일이다. 부모의 심정처럼 버리고 싶지 않은데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 가슴을 저민다.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모두 이루었고 성취하였기에 우리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버리는 대신 연약하고 두 마음을 품은 우리를 받아 들였다. 또한 그로 인해 역할을 완수하고 돌아온 예수 자신의 아들도 다시 얻는다.

역사가 시작되면서 하나님도 우리를 받아들이기 싫은 적이 많았다. 구약을 보면 늘 방탕한 나그네처럼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어 이방신을 섬기고 본래의 아버지를 잊어버린다. 그렇다고 본래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이방신과 여호와 하나님 두 신을 동시에 섬기는 교활한 자로 전락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땅 위에 살고 있기에 잠시 발을 담그는 것은 용납할 수도 있다는 두 마음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둘로 쪼개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고 이내 우리를 향해 화를 버럭 내신다 해도 별로 나쁠 것 없다. 그런 적도 한두 번 아니다.

그럼에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선사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는 구약의 ‘예언과 언약’과 ‘저주와 핍박’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였다. 그 결과 시편 22편을 지은 저자의 마지막 구절에 도달하면서 그러한 ‘저주와 버림’에 관련한 사실들은 뒤엎고 반전을 거듭한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 22:27~28) 이 말이 참 내게 가슴으로 와 닿는다. 시편 저자는 버림받았던 과거의 씻을 수 없는 기억의 상처를 덮어 이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나라 백성들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상상으로 이제 시편의 저자는 세상이 풍요롭고, 걱정과 근심 없이 살아가는 최고의 모습을 본 듯하다. 이 마음을 예수는 보았을 것이다. 그는 미래를 볼 줄 알았다. 자신이 이룩하고자 했던 목표도 알고 있었다. 예수가 이룩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라는 시편의 마음과 동일하다. 그가 이룩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 마음이었기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땅에서의 이룩함’이 동일시되어 기도 제목이 이루어진다.

시편 저자는 그의 나라를 이룩하고자 야곱의 모든 자손들에게 “하나님께 찬송하고 그를 경외하자”고 부탁한다.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고 격려한다. 그 이룩하려는 목표의 희생양이 바로 시편의 저자가 언급한 여호와를 향한 마음이다. 그는 희생양으로 세상을 이길 한 인자를 지목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는 고백처럼 예수는 이제 울부짖었고, 자신의 일을 마치자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신 결과,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을 따를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시편 22편 마지막 대목에서는 이제 완성을 나타낸다. 저자는 누군가가 이 땅 위에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하였고, 이윽고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라며 십자가의 완성을 이룩하였다는 것을 ‘예수의 삶과 부활’에서 엿볼 수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는 무엇인가? * 처음부터 힘든 나날들을 지내며 인정받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다.

* 허물이 없다는 예수께서 우리 모두의 고통과 아픔을 멀리 던지셨다.

*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나 죽음의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셨다.

* 피조물에게 비난과 모욕을 인내하면서 목표를 이루고자 참아냈다.

* 모든 것을 이루고 백성들이 자신을 위해 예배하게 된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 (실수 하는 것은 인간이고, 용서 하는 것은 신이다)

– Alexander Pope (알렉산더 퍼프, 1688~1744, 영국 시인이자 비평가 )

[가정예배 365-3월 31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친 이유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이들은 육체적 고통이 너무 커서 이렇게 외쳤다고 해석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의 단절이 너무 고통스러워 외쳤다고 해석합니다. 여러 가지 해석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많은 이들이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절망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시편 22편을 알면 이런 오해가 풀립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8절) 등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욕적인 사건을 미리 예언하듯이 너무나 정확하게 똑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듣는 순간 구약에 정통한 이스라엘 사람은 자연스럽게 시편 22편 전체를 떠올립니다. 반면 시편 22편 후반부는 전반부의 절망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반대 내용이 나옵니다. 27~29절 말씀은 “온 세상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에게 돌아올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그를 경배하리라. 여호와는 왕이시므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 세상의 모든 교만한 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며 자기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인류가 그에게 경배하리라”고 합니다.예수님은 절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친 것이 아닙니다. 시편 22편 후반부의 밝은 미래, 앞으로 올 소망을 보여주기 위해 이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 사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노래하다 절명하셨습니다.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소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전파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낙망을 노래하고 절망을 전파하는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조용한 성격을 넘어 천성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문제를 잘 집어내고, 부족한 부분을 잘 보는 날카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유전적 기질을 가졌든 하나님께선 우리가 절망 가운데 희망을, 낙담 가운데 소망을 선포하는 삶을 살길 소망하십니다.기도 : 십자가 위에서조차 희망을 선포하신 예수님, 우리도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낙담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선포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주기도문박현욱 목사(수원창대교회)

예수님의 기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신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아람어 육성 구절들을 다양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상7언 중 하나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역시 예수님이 아람어로 발언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마태, 마가의 본문을 살펴보면 헬라어 문장으로는 세부사항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원문인 헬라어 본문으로 직접 살펴 보겠습니다.

[권혁승 칼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시간대별로 구성된 가상칠언의 구조적 특징은 첫 세 말씀과 마지막 세 말씀이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앞부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면, 뒷부분은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 말씀이다.

첫 번째 말씀인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보라 네 어머니라”는 가족인 어머니와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지막 세 말씀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다. 다섯 번째인 “내가 목마르다”는 육체과 관련된 것이고, 여섯 번째인 “다 이루었다”는 삶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이며, 마지막 일곱 번째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이들 두 종류의 말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네 번째 가상칠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대칭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네 번째 가상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중심단어, 곧 ‘버렸다’와 ‘어찌하여’의 정확한 의미 파악이 필요하다.

첫째로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용어 대신 ‘하나님’을 사용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면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예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둘째로, ‘어찌하여’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어찌하여’는 예수께서 사실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강조되었던 것이라 매우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도 잘 알고 계셨다. 매년 대속죄일마다 한 마리 양을 아사셀 양으로 삼아 사막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다. 지금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 일을 직접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어찌하여’라고 물으신 것일까? 히브리어에는 두 종류의 의문문이 있다. 하나는 몰라서 묻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의문사는 ‘왜’라고 번역되는 ‘마두아’이다. ‘안다’라는 뜻의 ‘야다아’에서 파생된 ‘마두아’는, 사실을 알고 싶어서 물을 때 사용한다. 또 다른 의문문은 내용은 잘 알면서도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알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사용되는 의문사는 ‘라마’이다. ‘라마’는 ‘라’와 ‘마’의 결합인데, 히브리어 ‘라’는 ‘for’로 번역되는 전치사이고 ‘마’는 ‘what’으로 번역되는 의문사이다. 그러므로 ‘라마’는 ‘for what?’이란 뜻이다.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하여’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현재의 그 일에 대한 동의와 인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시적인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일로 인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죄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내다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평생 동안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외친 ‘어찌하여’ 속에는 인간 구원과 그 결과로 주어질 복에 대한 선언과 찬양이 함께 담겨 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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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독일의 신학자 슈미델(P. W. Schmiedel, 1851~1935)은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점검하고 합리적으로 볼 때 이 말씀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마틴 루터는 고난 주간 중에 이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음식도 먹지 않고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하늘의 빛을 본 것처럼 깨우침을 얻은 후 일어나 소리쳤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셨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플로센부르크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처형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외친 이 말씀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버림받으셨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죄 많은 이 땅에 오셨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셨다. 주님은 죽음 앞에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으셨다. 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권세와 능력과 자리를 다 내려놓으셨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 짐을 지고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셨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주님이 다 짊어지셨다.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영혼의 고통은 더욱 심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척, 아픈 척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난받으셨다. 사람에게 외면당해도 마음이 찢어지거늘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면 그 고통은 감당할 자가 없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의 고통을 맛보셨다. 어느 사람이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말 주님께서 버림받은 이유를 모르셔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물으셨을까? 아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 질문은 고통 가운데 절망하여 외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기에 울부짖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둘러선 모든 사람에게 증인 되어 달라고 소리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이 말씀은 시편 22편 1절 을 인용한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삶이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언급한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계셨다. 이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정점에서 주님은 고통가운데 말씀에 집중하였다. 주님은 시편으로 기도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성경 저자들도 이 말씀을 중요시하였기에 원문과 해석을 동시에 기록하였다.

주님은 버림받는 그 순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찾으셨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부여잡았다. 설령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시고, 버리신다 할지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리라. 바로 그 믿음이 버림받음을 극복하는 열쇠다. 절대 어둠, 음부의 고통, 영적 단절, 아무런 소망 없는 자리, 더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곳 없는 나락에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을 외쳤다. 주님은 구원의 길이 무엇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고 쓰러진다. 환난과 시험이 다가오면 우리는 의심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셨는가?”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설령 지옥의 음부에 떨어져도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은 누가 뭐래도 나의 하나님이시다.

참고도서

1. 존 칼빈,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엄성옥 옮김, (서울 : 은성, 1993)

2. F.F. 브루스, 예수의 난해한 말씀들, 정명섭 역, (서울 : 요단출판사, 1986)

3. 헬무트 틸리케, 그리스도와 삶의 의미, 이계준 옮김,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3)

4. F.W. 크룸마허, 고난받는 그리스도, 서문강 옮김, (서울 : 지평서원, 1987)

5. 찰스 스펄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정정숙 옮김, (서울 : 예수전도단, 2001)

6. 하비 콕스, 예수 하버드에 오다, 오강남 옮김, (서울 : 문예출판사, 2005)

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독립개신교회 교육위원회, (서울 : 성약출판사, 2006)

[신약히브리어 마태복음강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뜻(마 27: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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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신약 히브리어 마태복음 강해 중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뜻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제물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전적인 나의 죄 때문입니다. 이 죄를 해결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나를 위해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정오에는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후 3시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칩니다. 이 부르짖음은 바로 나를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나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이 버림을 받지 않으면 내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나를 위한 고통의 소리였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 때문에 내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뜻(마 27:45-50)

마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 시까지 계속되더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한 대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비로소 운명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헬라어로는 ‘헤크테스 호라스’는 그 당시 로마 표준시로 ‘제 육시’이며 오늘날의 시각으로 정오를 가리킨다. ‘호라스 에나테스’는 ‘제 구시’로 오늘날의 오후 3시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유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다. 사실 이 시간대는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대이므로 이 시간 동안에 일어난 어두움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 삼시 즉 오전 9시이다(막 15 :25).

어둠이 임하였다고 했는데 ‘땅’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 ‘겐’의 기본형 ‘게’는 어떤 특정한 한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며,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단어이다. 본문에서 ‘온 땅에’ 란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기보다 유대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땅에 임한 어두움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로서 그 옛날 애굽 땅 위에만 3일간 흑암이 뒤덮였던 것처럼(출 10:22) 그 진노의 대상인 유대 지역만 국지적으로 내렸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두움은 일식 현상으로도 볼 수 있고 두터운 구름층이나 사막의 모래 바람 등의 영향으로 햇빛이 일시적으로 차단되어 일어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는 메시아를 저버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표시(암 8:9), 그리고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저버림의 표시로서 하나님의 직접적 간섭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가는 여기에 ‘해가 빛을 잃고’라는 기록을 덧붙였다(눅 23:44).

히브리어는 하야 1961 동사를 사용하였다. 문법은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이다. 온 땅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는 말이다. 와우접속사는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는 히브리어 문법이다. 미완료이니 완료로 해석하면 온 땅에 어둠이 정오에 시작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해서 어두워졌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한다.

땅이 어두워진 것에 대해서 다른 학자가 말하기를 (1)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시는 것”을 나타낸다. 이 세상의 통치자와 그의 권세들, 즉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은 내어 던짐을 당하였으며, 못쓰게 되고 추방을 당하였다. 그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의 터전에서 그들과 더불어 싸우고 계신다. 즉 그들에게 이 흑암으로써 대적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며 또한 그들에게 “바람”과 “태양”을 취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그것들을 꺾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승리자보다 더 영광스러운 분이 되고 계신다.

(2) 그가 지금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어두움은 우리 주 예수님이 영혼이 지금 처해 있는 어두운 구름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양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빛나도록 하신다. 그러나 태양 빛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을 때 그에게서 물러나고 있다. “눈을 가지고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영혼은 극도의 슬픔에 차 있으며 하나님의 불쾌함의 잔은 완전히 그에게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태양빛도 무색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땅이 그에게 냉수 한 방울을 거절하였을 때 하늘도 그에게 한 줄기의 빛을 거절하였다.

우리를 “완전한 흑암”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그는 최하의 고난 가운데 계셨으며, 어두움 가운데 행하였으며 빛을 가지지 못하셨다(사 50:10). 이 어두움이 계속되었던 “세 시간” 동안 그는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시간을 지금은 고통 가운데 있는 그 자신의 영혼에 고요히 은거하시면서,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시면서, 그 자신 때문이 아닌 사람의 죄(지금 그는 “그의 영혼”을 죄에 대한 번제물로 드리셨다)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싫어버림을 당하시면서 이 시간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로 이와 같이 어둡고 무서운 장면이 세 시간이나 계속된 일이 결코 없었다. 즉 그것은 사람의 구속과 구원의 위대한 사건의 “고비”(crisis)였다.

마 27:46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은 아람어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문에서 ‘엘리 엘리’ 부분은 히브리어로 표현하였고 ‘레마 사박다니’ 부분은 아람어 그대로 표현하였다. ‘엘리’는 히브리어 ‘엘리의 역어인데 ‘엘리’는 ‘하나님’을 뜻하는 ‘엘’에 1 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 ‘나의 하나님’을 뜻한다. 이에 대한 아람어는 ‘엘로이’이다(막 15: 34).

마가는 예수님의 본래 말씀대로 기록했지만 마태가 아람어 ‘엘로이’를 굳이 같은 뜻의 히브리어 ‘엘리’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본문을 시 22:1의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시킴으로 유대인 독자들을 고려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며 또한 47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이를 듣고 오해하였던 ‘엘리야’라는 표현과 더 유사한 발음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본문에서 ‘라마’는 아람어로서 ‘왜?’라는 의문사인데 표준 원문 에는 ‘라마’로 나와 있다. ‘라마’는 같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의문사 ‘라마’에 대한 역어이다. ‘사박다니’ 역시 아람어이며 ‘당신이 나를 버리셨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본문은 시 22:1 예언의 성취로서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 인해 일시적이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맛보셨음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가시 면류관에 머리가 찔리고 십자가상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못 박히는 육체적 고난과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불신하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고난까지 당하셨다.

제2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죄 범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고난을 맛보셨던 것이다. 본문에는 그중에서도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예수의 영적인 고통스러움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개의 말씀 중에 오직 네 번째에 해당하는 이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이 부르짖음은 사실에 입각한 절규였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 빠진 인간들을 건지시기 위해 죄 없는 대속 제물이신 예수를 십자가상에서 버리셔야 했던 것이다. 마치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제사장이 흠 없는 어린양을 번제단에 불태워 버린 것처럼 말이다.

마 27: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의 원수들이 이 불평에 대하여 야비하게 비웃고 조롱하였는가를 살펴보라(47절). “그들은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로마 군병들의 무식한 오해였다는 것이다. 로마 군병들은 엘리야와 또한 유대인들이 엘리야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들었으나 “엘리, 엘리”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하여 이와 같이 창피스러운 해석을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백성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그가 하신 말씀의 후반부를 듣지 못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많은 비난들은 큰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신적인 진리들은 성경 말씀의 언어와 문제에 대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종종 왜곡되어진다.

불완전하게 들은 자는 그들이 들은 것에 대하여 왜곡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어떤 유대인들이 고의적으로 범한 오해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에 대해 잘 알았지만 이를 왜곡함으로써 그들 자신과 동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였으며 또한 그를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자 피조물을 의지하려고 하는 자로 생각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메시아로 자처하던 그가 이제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기대되었던 엘리야의 신세를 기꺼이 지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훌륭한 사람들의 최상의 경건한 기도가 참람한 조롱자에 의해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당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만일 기도나 설교 가운데서 좋게 말해진 것이 왜곡되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비난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삶이 말한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와 같이 왜곡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실 때 옆에 서 있던 자들이 있다. 아마드 5975 동사이다. 문법은 정관사 동사 칼 분사능동 남성 복수이다. 정관사를 사용한 것은 거기 서 있는 사람을 정확하게 지칭한 것을 말한다.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야유를 보내면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조롱하는 자들이다. 칼형은 많은 사람이 그곳에 직접 있다는 것이고 분사능동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구경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남성 복수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조롱하는데 동참했으며 주님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방관자로서 결국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마 27: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그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48절). 이러한 힘든 고통을 당하는 그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고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감로주를 주는 대신에 그들은 그를 비난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께서 “그의 손에 들려주셨던” 공포의 쓴잔을 고의적으로 내어 줌으로써 그를 더욱 괴롭게 하였다.

“그중에 한 사람”이 그것을 가지려고 “달려간 것”은 그에게 친절을 보이려고 한 것같이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를 모욕하고 비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기뻐하였고 또한 그 누군가가 그것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헬라어 ‘스퐁고스’는 바다에 떠다니는 ‘해면(海 縮)’ 또는 해면과 같이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스펀지와 같은 특성을 지닌 물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많은 양의 액체를 빨아들일 수 있어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는 예수께 신 포도주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를 ‘갈대 (칼라모스)’에 꿰어 마시우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병행 구절인 요 19:29에서는 이 해면을 ‘우슬초 (휫소포스)’에 매어 전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둘 모두 동일한 뜻으로 여긴다.

히브리어로 해면을 적시었다고 했는데 말레(동사) 4390은 기본 어근이며, ‘채우다, 가득 차다(채우다), 충만하다’를 의미한다. 문법은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이다. 피엘형을 사용했다는 것은 해면에 포도주가 완전 충만하게 채워지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한 것은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금방 죽지 않고 더 고통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하려는 악한 의도가 숨어 있다. 신 포도주는 마취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줄일 수가 있었다.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다른 사람들도 그를 비방하고 조롱할 목적으로 엘리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49절).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오라. 그를 홀로 내버려 두어라. 그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하늘이나 땅도 그를 도울 수는 없다. 그의 죽음을 서두르거나 그것을 지체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자. 그는 엘리야에게 호소하였으니 엘리야가 저를 구원하나 보자.”라고 말한다.

당시 유대교의 관념에는 죽지 않고 살아 승천한 엘리야(왕하 2:1-12)가 고통 중에 있는 의인들을 도와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참을 수 없는 고통 중에 ‘엘리(나의 하나님)’라고 절규한 것이 그들의 귀에는 ‘엘리야로 들렸고 따라서 그들은 고통 중에 있는 예수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엘리야가 실제로 와서 구원하는지 구경하려고 했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가로 안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아내셨음을 알 수 있다. 찔렸다는 단어가 다카르(동사) 1856은 기본 어근이며, ‘꿰뚫다, 관통하다, 꿰찌르다, 헤치고 나아가다, 돌진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회 나오며, 칼형, 니팔형,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문법은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이다.

와우접속사는 창에 완전히 예수님이 찔리셨음을 말한다. 남성 3인칭 단수는 예수님을 말한다. 이렇게 예수님이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모두 쏟아내주셨다. 나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다. 주님을 조롱하던 자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 피와 물을 쏟아내주셨다.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신 “모습”(50절). 제 삼시와 제 육시 사이에, 즉 우리의 계산 대로는 9시에서 12시까지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또한 제 구시 후에, 즉 3시에서 4시 사이에 그는 “운명하셨다.” 그때는 저녁의 희생 제사가 드려진 시간이었으며 또한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셨으며 또한 저녁에 하나님께 향내 나는 제물로써 드려졌다.

그 날은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에게 메시아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예언을 한 바로 그날 그때였다(단 9:21, 24 등).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천사가 그것을 말했던 바로 그 날부터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 시간까지는 꼭 70주간이 되는데, 하루를 일 년이라고 한다면 490년이 된다고 한다. 이는 430년 말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날과 “비슷한 날”(출 12:41)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모습에 대하여 두 가지 특이한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1) 이것은 그가 모든 고통과 고역을 치른 후에도 그의 생명은 “온전”하였으며 또한 그의 본성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힘이 없어 가느다란 소리를 낸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더듬는 말소리로 가까스로 몇 마디의 말을 하며 더욱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에 “온전한 힘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생명이 억지에 의해서가 아닌, “그 자신의 행동과 행위”로써 아버지의 손에 자발적으로 “맡기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죽으실 때 이와 같이 소리를 지를 수 있는 힘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자신이 처해 있던 속박에서부터 해방하실 수 있으며 또한 죽음의 권세들을 대항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희생 제물이시며 제사장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영으로써 자신을 드리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2)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 “큰 소리”는 불굴의 용기와 또한 그의 근거가 확실하고 싸움에서 용감한 것을 나타내는 담대한 각오로써 우리의 영적인 적들을 공격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는 이제 “정사와 권세들을 타파”하셨으며 또한 “구원하기에 능한”자가 “정복하기 위해 크게 외치는 것”처럼 이러한 큰 소리를 지르셨다(시 63:1; 사 42:11, 14 비교).

이제 그는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라고 말했을 때(삿 16:30)처럼 온 힘을 다하여 자신을 굽히셨다. 즉 그리고 그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가 운명하실 때 크게 소리를 지른 것은 그의 죽음이 모든 세상에 선포되고 알려져야만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인류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큰 소리는 희생 제물에 대해 불어진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떠나시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페켄’의 기본형 ‘아피에미’는 분리, 이탈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와 ‘보내다’

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에미’가 결합된 동사로서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보내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3인칭 단수 부정 과거 능동태로 쓰였으며 주체는 ‘영혼’이 아니라 ‘예수’이다.

한편 ‘영혼이’라는 주어로 번역된 ‘토 프뉴마’는 목적격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가 그 영혼을 자기에게서부터 보냈다’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예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영혼이 주체적으로 떠난 것으로 번역했으나 원어 성경은 예수께서 자기의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영혼을 포기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원어 성경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죄로 인하여 반드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죽는 죽음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자기의 영혼을 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본문에 표현된 이러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그의 죽음이 단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 주신 희생적 죽음임을 보여 준다.

히브리어는 야차(동사) 3318은 기본 어근이며, ‘나가다, 나오다, 떠나다, 앞으로 가다’, 히필형에서 사역적 의미, ‘나가게 하다, 나타나게 하다, 이끌어내게 하다’를 의미한다. 문법은 와우접속사 칼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이다. 와우접속사는 예수님의 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1차적 죽음이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단계이다. 여성 3인칭 단수는 예수님의 영혼이 예수님의 몸에서 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1차적 죽음이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고백할 때 구원의 역사가 있다.

[출애굽기 2장 히브리어 강해] 르우엘 딸 십보라와 모세 결혼(출2:16-22)

[종려주일 설교말씀] 호산나! 골고다에서 십자가 승리(마 27: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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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가상칠언(架上七言, Seven Words from the Cross) 중 네 번째 말씀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당시에 듣던 유태인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가상칠언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있을까? 공관복음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제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직접 증언할 제자는 없을 것 같은데,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십자가 밑에서 있었던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요 19, 26-27, 28, 30, 셋째 말씀, 다섯째 말씀, 여섯째 말씀).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는 년도는 AD 30년(33세) 4월로 추정하고 있으며,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을 때에, 십자가 주변에 있던 유태인들은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마 27:47, 막 15:35) 하였다. 즉 당시 유태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사도 요한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에 그 해석을 알았기 때문에, 바로 그 말씀 뒤에 해석을 부가하였다. 그러나 그 해석을 듣지 못한 유태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먼저 역사적 예수의 발언을 들은 당시 유태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면 결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관용을 외쳤는데, 관용의 시대가 된 우리시대에는 이해가 되지 않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관용이 전혀 없다.

“인간 언어는 해석될 수 있다(language universality)”는 기본 전제가 성립될 수 있을까? 신비 언어, 계시 언어는 인간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 이성으로 계시 언어는 해석할 수 없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는 성경해석에 특수 해석학을 제언하였다. 인간이 계시로 습득된 언어를 전달할 때에 계시를 받은 자 외에 자연 이성으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1세기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언어학이나 기술이 발달해도 계시 언어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사실과 진술(주장)이 일치하지 않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실을 진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인간은 사실을 진술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인간이 사실을 습득하여, 그것을 전달할 때에는 그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론에서는 사실과 진술의 일치를 결정할 때가 있는데, 그러한 해석이 문자 계승이다. 문자를 그대로 습득하는 방식을 성경 해석에서는 많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진술하셨다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접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우리가 얻은 임마누엘도 결코 떨어지지 않은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실(아버지께서 버리지 않으심)과 다른 진술(버리셨나이까?=버리셨음)을 하셨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신 것인가? 인간 언어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이 아니라, 진리와 감동을 전달하는 기능이다. 예수께서 자기가 버림받으심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이 속죄제물이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음으로 주해하였다. 예수께서 속죄제물이 되시는 단독의 형태는 구주는 오직 주 예수라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수를 AD 1-30년까지로 제정하였다. AD 1-30년은 쉬운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30년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AD 30년으로 십자가를 규정하지만, 탄생년도는 BC 4년이기 때문이다. AD 1-30년으로 신학을 할 때에는 복음서의 90%는 해당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가 진짜 예수 탐구를 위해서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선언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예수의 유기를 위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인용하는데(막 15:34, 『교회 교의학』 IV/1(화해론), §. 57)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성경(마가복음 15:34) 진술을 사실로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진술을 사실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증거하는 진리로 수용한다.

사실에 근거한 진술이 진리를 증거할 수 있다. 허구를 근거한 진리 전달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 진술을 사실 묘사로 보지 않고 계시로 평가한다.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체계에는 가변성을 두지만, 진리에 근거한 진리에는 불변성을 둔다. 즉 우리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거하지 않고, 계시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거한다. 사실에 근거해서 전달한다는 주장은 선한 양심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전달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우리가 사실,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타인을 해칠 목적이나 자기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뜻은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을 외치는 시편 22편의 말씀의 성취를 선언하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심을 신원하는 것을 위로하시며, 결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신 복음이다. 그 일을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직접 죽음에 직면하셔서 유태인에게 외치셨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잘못 이해하였다. 지금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고 오해한다. 속죄제물이신 어린양께서 처참하게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죄를 향해서 진노하심의 엄중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며, 그 죄인인 당사자를 구원한 구주의 이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선언하는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읽고 들은 사람은 자기 구주의 이름을 알며,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제물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오직 주의 십자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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