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이민아 폭행 | [충격] 김한길 전부인 이민아 아들 엄청난 비밀 밝혀! 이민아 결혼 반대 진짜 이유! 김한길 \”전부인과 이혼후 항상 후회하며 살다\” – 충격적인 진실 상위 158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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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전처 이민아 이혼이유 – 설레임

김한길 전처 이민아 이혼이유 김한길 재혼 최명길 러브스토리 두 번의 이혼, 아들 잃고, 끈질긴 암과의 사투… 세상을 울린 파란만장했던 삶 이어령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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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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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폐암·신약? 전처 이민아 이혼사유? – 하늘아래

김한길 폐암소식에 김한길 전처 이민아 목사(검사․변호사)의 위암 투병 사연도 화제가 되고 있다. 김한길과 전처 이민아 목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만에 조기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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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ast8254.tistory.com

Date Published: 3/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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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나이 최명길 전처 전부인 이민아 이혼 재혼 결혼 가족 …

다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 김한길 최명길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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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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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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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전부인 이민아 아들 사망과 최명길 러브스토리

google_language = “ko”. 2018년 10월 28일 tvN ‘따로 또 같이’에서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김한길 대표와 배우 최명길 부부의 일상이 방송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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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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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김한길 전부인]의 한많은 삶 – 자유게시판

요즘 TV 에 자주 등장하는 민주당 대표 김한길 전 부인의 한 많은 삶 김한길 전 부인 이어령의 딸, 이민아의 한 많은 삶 < 요약 > 부모의 반대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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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이민아 이혼사유 이민아 장례식장 김한길 – 팔색가십

김한길 이민아 이혼사유 이민아 장례식장 김한길 … 기독교 지성인 이어령의 암 투병 근황이 전해졌습니다. 죽음과 생명이 한데 얽혀 있다는 자각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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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 ‘김한길 전 부인’ 고 이민아 秘스토리 – 일요시사

[일요시사=정치팀] 고(故) 이민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의 딸이자 새정치민주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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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lyosisa.co.kr

Date Published: 1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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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김한길 이민아 폭행

  • Author: 스피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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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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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전처 이민아 이혼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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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전처 이민아 이혼이유

김한길 재혼 최명길 러브스토리

두 번의 이혼, 아들 잃고, 끈질긴 암과의 사투… 세상을 울린 파란만장했던 삶

이어령 전 장관 딸 이민아 변호사(목사), 목숨건 사랑도 끝이 있었다.

2014년 3월 15일 이민아 목사(53)가 세상을 떠났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장관을 무릎굻게 만든 딸. 큰아들의 죽음, 작은 아들의 자폐를 겪으면서 청소년 사역에 헌신한 이민아. 갑상선암, 망막 박리에 이어 위암 판정을 받고도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소망의 빛을 전하고 싶다”며 죽기 직전까지 사역자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보는 데 사용하며 ‘땅에서 하늘처럼’ 살던 그가, 땅의 일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갔다. 이민아 변호사(목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죽을 만큼 사랑한 남자, 김한길 전 국회의원과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저는 참 말을 잘 듣던 아이였어요. 마음이 약해서 반항을 못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의 진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기가 힘들 만큼 마음이 약해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문제였던 거죠. 제가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했던 것이 바로 남편을 선택하는 일이었죠.”

가진 것 없는 학생 부부의 생활은 빠듯했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던 때라 남들이 다 꺼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고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첫째 아들 유진이가 태어났고, 이민아는 아이를 키우며 헤이팅스 로스쿨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제가 한 선택이 잘한 것이라는 걸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들다는 사실조차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밀쳐내신 게 아니라 제가 아버지를 밀쳐내고 떠나왔던 거더라고요.”

<이민아 김한길 이혼, 아들의 죽음, 암…이민아 변호사 다시 태어나다 >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 할때까지 아버지에게 투정 한 번 안 하던 이민아는 이혼하자마자 아버지 앞에서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때 이민아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년간 쌓여왔던 오해와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혼 후 이민아 변호사는 학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이를 헤이팅스 로스쿨에 부속된 탁아소 겸 학교에 맡겨놓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민아 변호사는 본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보니 편두통, 위궤양, 요통, 불면증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16세가 됐을 무렵 아이도, 이민아 자신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 1년간 요란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외에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아이.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이는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코마 상태에 빠진 뒤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재혼한 후 낳은 둘째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고 한다. 열 두살이 되도록 아이는 엄마의 지시를 이해하거나 따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건너가 특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미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고 중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쫓겨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던 하와이 크리스찬 스쿨은 개인적인 관리가 필요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가 상근 보조교사로 일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엄마의 정성이 통했는지 1년이 흐르자 둘째의 자폐 증세가 기적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불치병에 가까워 회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둘째 아이는 이제 운전도 하고 일반적인 생활도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민아에게는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망막박리’ 현상이 일어나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민아는 물론 이어령 교수 부부도 절망에 빠졌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자 무신론자, 이성주의자임을 자처하던 70대 학자, 이어령은 2007년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어령은 자신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민아 변호사는 망막박리 7개월 만에 찢어진 망막이 다시 붙는 기적을 경험했으나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찾아갔을 때 백내장 진단을 받고 현재는 수술한 후 양쪽 눈 시력을 모두 회복했다.

하지만, 2004년 두 번의 이혼, 아들 잃고, 끈질긴 암과의 사투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한길 재혼 최명길 “러브스토리”

1995년 3월 22일 소설가이자 당시 연예정보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김한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래서, 각종 정당 및 정치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이 때문에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가끔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최명길 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며 정치에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참고로 최명길은 김한길보다 10살 연하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어마어마한 미인이었다. 보면 심장이 멎을 정도로 거의 김태희급이었다. 그래서 김한길 도둑놈이란 말이 유행이 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첫 데이트에는 김한길이 뽀뽀나 하자 등등 강하게 어필하여 최명길의 맘을 잡았고 그렇게 적극적인 대시로 결혼까지 성공을 하였다고 한다. 황신혜는 언니 최명길이 김한길과 전화만 하면 목소리가 완전 바뀌어 좀 웃겼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렇게 두사람은 결혼 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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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폐암·신약? 전처 이민아 이혼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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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폐암·신약? 전처 이민아 이혼사유?

김한길 폐암 신약, 과연 김한길 폐암, 신약으로 회복가능할까?

김한길 폐암 투병소식이 전해졌다. 김한길 폐암4기, 최명길의 24시간 내조

김한길 폐암 신약, 김한길 폐암 4기, 신약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한다. 김한길 폐암 극복하고 밝은 모습으로 뵐길…

김한길 전처 이민아도 위암 투병중 사망

김한길 전처 이민아 위암 사망 인생이란?

김한길 폐암소식에 김한길 전처 이민아 목사(검사․변호사)의 위암 투병 사연도 화제가 되고 있다. 김한길과 전처 이민아 목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만에 조기졸업하고 김한길가 결혼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쿨을 거쳐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지역 검사를 역임했고 이후 변호사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한길 전처 이민아씨아 김한길 전 국회의원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고 한다. 김한길과 이민아는 결혼 5년만에 이혼했다고 한다. 이민아는 아들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는 슬픔은 종교로 극복했고, 이후 2009년 이민아는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했으며 위암 투병중에도‘땅끝의 아이들’이란 책을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김한길 전처 이민아 목사)

김한길 폐암 투병, 최명길 내조

김한길 폐암 말기 진단사연이 공개되었다.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65)가 폐암투병 중임에도 여행 예능프로그램에 아내이자 배우인 최명길(57)과 동반 출연하고 있다. 김한길의 폐암으로 환자가 무리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지만, 김 전 대표는 아내의 내조 덕분에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고 말한다.

김한길 폐암 투병 소식은 지난 22일 채널A ‘정치데스크’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이날 방송에서는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지난해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다”며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항암제가 독하고 방사선 치료가 어려움이 있어 체중이 20kg 가량 빠졌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김한길은 여의도를 떠나있던 작년 10월 폐암을 우연히 발견해 수술을 했지만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획기적인 신약으로 치료했는데 다행히 암세포가 제어 되었고 이대로 가면 완치도 가능하다며 아프게 지내는 동안 최명길이 애들 챙기듯이 잘 챙겨줬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김한길 예능출연에 환자로써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는 누리꾼들의 의견이 이어졌는데, 김한길은 최명길의 간호로 자신의 건강이 회복됐다고 강조했다. 김한길 폐암투병에 최명길은 24시간 그의 옆을 지켜주기도 했으며 이제는 많이 건강이 회복돼서 출연을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한길과 최명길은 1995년 결혼해 23년차 잉꼬부부로 지내고 있다. 결혼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 전 대표와 톱스타 최명길은 폭발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었다. 특히 최명길은 김 전 대표가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후 선거 유세 현장에서 남편을 살뜰히 내조했다.

김한길 전처 이민아 위암 투병․사망

김한길 이민아 이혼이유

(김한길 전처 이민아)

김한길과 이민아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민아의 아버지는 이어령씨로 문체부 장관, 유명 소설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등 문학계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분이었다. 김한길가 이민아의 결혼은 이민아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김한길과 이민아의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5년만에 파경에 이른 이유는 성격의 차이와 이민아 집안의 반대가 이혼사유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민아 아버지 이어령 전 문화체육부 장관)

(이민아 아버지 이어령 전 문화체육부 장관)

어쨌든, 이민아는 2011년 5월 위암 판정을 받은 고인은 희망을 잃지 않고 투병생활을 해 왔지만 결국 숨을 거둬 안타까움을 주고 말았다.이민아 목사가 투병생활 과정에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정말 경의스럽기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그 당시 이민아씨는 향년 53세였다. 특히 사망전 이민아는 한 아침 방송에 출연해 투병기를 공개하며 밝은 모습을 보인 바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다.

(김한길 전처 이민아)

당시 고인은 “병원에서는 지금 거의 가망이 없다고 했다. 주위에서도 자꾸 쉬라고 한다”며 “그런데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치유의 가장 빠른 길이라고 믿는다”며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 “일을 하면 힘이 들다가도 기운이 난다”며 “자기가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일, 자기 인생을 다 바쳐도 되는 일이 있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밝혀 지켜보던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이어 “7~8월에는 건강이 안 좋았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현재는 오히려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며 “감사할 뿐이다”고 말하며 웃기도 했다. 이 방송이 전파를 탄지 불과 20여일만에 별세한 것이다.

(김한길 전처 이민아)

<최명길 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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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나이 최명길 전처 전부인 이민아 이혼 재혼 결혼 가족 자녀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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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영화 배우 최명길 프로필

최명길 나이 학력 키 고향 몸무게 혈액형 가족관계 데뷔 종교

출생

1962년 11월 11일 (57세)

서울특별시

거주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현 광진구 광장동)

국적

대한민국

신체

162cm, 50kg, AB형

가족

조카 권율

배우자

김한길

자녀

아들 김어진, 아들 김무진

학력

수도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연예 / 전문학사)

데뷔

1981년 MBC 13기 공채 탤런트

출생: 1962년 10월 15일 (58세), 서울특별시

키: 160cm

배우자: 김한길 (1995년–)

자녀: 김어진, 김무진

학력: 서울예술대학교, 고려대학교, 수도여자고등학교

최명길 탤런트, 영화배우

신체

165cm, 48kg

가족

배우자 김한길, 아들 김어진, 아들 김무진

학력

서울예술전문대학

데뷔

1981년 MBC 13기 공채 탤런트

수상

2015년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1994년 프랑스 낭트 영화제 최우수여우주연상

사이트

공식홈페이지,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미니홈피

종교 개신교

최명길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신문방송학과를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재수를 하던 중 1981년 MBC 13기 공채 탤런트에 응시하여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1994년 영화 《장미빛 인생》으로 프랑스 낭트 영화제 여우주연상 및 청룡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998년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로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90년대 《태양초 고추장 CF》를 촬영하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2002년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배우 이미연의 중도하차로 인해 명성황후 역을 맡게 되었다. 최명길은 해당 작품을 통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최명길 드라마 영화 라디오 방송 광고 출연작 작품활동

출연작

드라마

1981년 MBC 주말연속극 《성난 눈동자》 … 넷째딸 은숙 역

1982년 MBC 일일연속극 《친구야 친구》

1982년 MBC 주말연속극 《미련》

1982년 MBC 대하드라마 《여인열전 – 황진이》 … 부용 역

1983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추동궁 마마》 … 고려 왕족 딸 역

1983년 MBC 수목드라마 《겨울 해바라기》

1984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셀러극장 – 여자를 찾습니다》 … 미연 역

1984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 … 정현왕후 역

1985년 MBC 주말연속극 《남자의 계절》 … 박미란 역

1985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풍란》 … 정현왕후 역

1986년 KBS2 단막극 《드라마게임》

1987년 MBC 수목드라마 《도시의 얼굴》 … 이정화 역

1988년 MBC 주말연속극 《세 여인》 … 이민자 역

1988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한중록》 … 헌경왕후 역

1990년 MBC 수목드라마 《그 여자》 … 한재숙 역

1991년 MBC 아침드라마 《또 하나의 행복》 … 차문영 역

1991년 SBS 일요아침드라마 《사랑의 풍차》

1992년 SBS 수목드라마 《궁합이 맞습니다》 … 서현자 역

1992년 SBS 월화드라마 《재회》 … 지혜 역

1993년 SBS 월화드라마 《결혼》 … 지영 역

1993년 SBS 월화드라마 《테마 시리즈 – 아버지》

1993년 KBS2 미스테리 멜로 《금요일의 여인 – 제1화 박근형의 벼랑 끝에 선 남자》

1994년 SBS 수목 미니시리즈 《사랑은 없다》 … 한소진 역

1996년 KBS1 단막극 《TV문학관 –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다》 … 김선영 역

1996년 KBS1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 원경왕후 민씨 역

2000년 MBC 일일연속극 《온달 왕자들》 … 김영숙 역

2000년 MBC 주간시트콤 《깁스가족》 … 조아라 역

2002년 KBS2 대하드라마 《명성황후》 … 명성황후 민씨 역

2003년 SBS 주말극장 《태양의 남쪽》 … 정연희 역

2005년 SBS 금요드라마 《꽃보다 여자》 … 김정아 역

2007년 MBC 아침드라마 《내 곁에 있어》 … 장선희 역

2008년 KBS1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 … 원경왕후 민씨 역

2009년 KBS2 미니시리즈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 … 한명인 역

2009년 KBS2 월화드라마 《천하무적 이평강》 … 제왕후 역

2010년 KBS1 대하드라마 《근초고왕》 … 해비 해소술 역

2010년 MBC 일일연속극 《폭풍의 연인》 … 서윤희 역

2011년 MBC 미니시리즈 《미스 리플리》 … 이화 역

2011년 KBS2 수목드라마 《영광의 재인》 … 박군자 역

2013년 MBC 주말연속극 《금 나와라, 뚝딱!》 … 윤심덕 역

2013년 KBS2 월화드라마 《미래의 선택》 … 큰미래 역

2014년 SBS 월화드라마 《펀치》 … 윤지숙 역

2015년 KBS2 주말연속극 《파랑새의 집》 … 한선희 역

2015년 KBS2 단막극 《KBS 드라마 스페셜 – 계약의 사내》 … 성수영 역

2015년 ~ 2016년 KBS1 일일연속극 《우리집 꿀단지》 … 배국희 역

2016년 SBS 일일연속극 《당신은 선물》 … 은영애 역

2016년 tvN 불금불토스페셜 《안투라지》 … 강옥자 역

2018년 KBS2 일일드라마 《인형의 집》 … 금영숙 역

2019년 KBS2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 전인숙 역

2019년 KBS2 일일연속극 《우아한 모녀》… 캐리정 / 정미애 / 차미연 역

2020년 KBS2 월화드라마 《그놈이 그놈이다》… 김선희 / 김수정 역

영화

1983년 《연인들의 이야기》

1986년 《푸른 하늘 은하수》

1986년 《안개 기둥》

1986년 《눈짓에서 몸짓까지》 … 양진희 역

1986년 《밤의 요정》

1989년 《밀월》 … 서유진 역

1990년 《우묵배미의 사랑》 … 민공례 역

1994년 《장미빛 인생》 … 마담 역

2011년 《써니》 … 과거 사진 역(특별출연)

라디오

2003년 ~ 2005년 MBC FM4U 《가요응접실》

TV프로그램

1996년 KBS1 《TV는 사랑을 싣고》

CF

1976년 해태제과 부라보콘

1981년 쌍방울 기비

1982년 삼성물산 까샤렐

1985년 아모레퍼시픽 산호푸로틴 샴푸, 리도푸로틴 샴푸, 리도비누 등

1986년 LG전자 빨래판세탁기, 마이콤팬히터, 금성기업PR, 안전가스렌지, 프로그램에어컨 등

1987년 LG전자 싱싱냉장고, 금성기업PR

1989년 라미화장품 라피네 셀라미 엘로그램 세라미선

1990년 JW중외제약 화콜

1990년 현대약품 오일라툼

1991년 삼풍백화점

1991년 삼성종합건설 삼성아파트

1991년 ~ 1993년 롯데푸드 후라이드치킨, 정통 알뜰돈까스, 소프트비엔나, 롯데햄 선물세트, 세븐햄, 에센뽀득, 양념불갈비, 햄터치 등

1993년 크라운베이커리

1993년 남양유업 남양분유 점프

1993년 애경산업 써프

1993년 동진보니타 수퍼매직사우나복

1995년 진도 우바

1995년 현대종합목재산업 리바트 부엌가구

1996년 LG생활건강 세이프

1997년 코오롱하이필정수기

1998년 ~ 2006년 CJ제일제당 해찬들 태양초 고추장

1998년 ~ 2005년 동아제약 비겐크림톤

1999년 나드리화장품 네츄럴상황버섯5000

1999년 ~ 2000년 삼성전자 지펠

1999년 ~ 2006년 동일토건설 동일하이빌

2000년 대교 한글땅재미땅

2007년 CJ제일제당 한술에

2012년 한국화이자제약 센트룸 실버

최명길 직업 대한민국의 배우이다.냉철하고 고급스런 이미지가 강하며, 이 때문에 작품에선 주로 상류 계층의 배역을 맡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극의 경우에도 왕비 역을 맡는 경우1가 대다수.

최명길 결혼 신랑 남편 직업 김한길 결혼 나이 차이

최명길 결혼 1995년 3월 22일 어떤 소설가 겸 당시 연예정보 프로그램 진행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사람이 바로 4선 의원을 지내는 김한길이다.(최명길 남편 신랑 직업 김한길) 그래서 각종 정당 및 정치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이 때문에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가끔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최명길 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이며 정치에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최명길 김한길 나이 차이 최명길은 김한길보다 9살 연하.(최명길 남편 신랑 나이 차이 김한길)

최명길 리즈 과사 과거사진 최명길 젊은시절

전 장관 국회의원 김한길 프로필

김한길 나이 학력 키 고향 가족관계 소속정당

이름

김한길 (Kim Han Gil1)

출생일

1952년 9월 17일 (68세)

출생지

일본 도쿄도

본관

김녕 김씨

학력

대광중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정당

민생당

의원 선수

4

신체

168cm

의원 대수

15, 16, 17, 19

배우자

최명길

자녀

장남 김유진 (1981~2007)2

차남 김어진 (1998년생)

삼남 김무진 (2002년생)

형제

아버지 김철 , 어머니 윤초옥

형 김밝힘 (1948~2016)

남동생 김누리3

별명

피닉길, 망길이4, 원 웨이5

경력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장

제15대 국회의원(전국구 6번)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새천년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제16대 국회의원(전국구 13번)

제37대 문화관광부 장관

제17대 국회의원(서울 구로구 을)

제17대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제17대 국회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제19대 국회의원(서울 광진구 갑)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국민의당 전임고문

출생: 1953년 9월 17일 (67세), 일본 도쿄도

배우자: 최명길 (1995년–)

학력: 건국대학교

자녀: 김어진, 김무진

부모: 김철, 윤초옥

김한길 (Han Gil Kim) 전 장관

출생

1953년 9월 17일

가족

배우자 최명길, 아들 어진, 아들 무진

경력

2014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2013 민주당 당대표

2000 제37대 문화관광부 장관

1999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사이트

공식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김한길 직업 대한민국의 제15대~17대, 19대 국회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소설가. 소속 정당은 민생당.2대 째 정치인이지만 진보인 아버지와 달리 리버럴 성향을 가졌다. 정치원서도 보수 쪽에 냈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고 중도좌파 정당에 몸담는다. 그러나 안맞는 옷을 입은 탓인지 당내 주류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이인제와 함께 역대 가장 많은 정당을 거쳐 간 정치인, 정당 브레이커란 불명예 역시 갖고 있다. 2016년을 끝으로 잠정 정계은퇴 상태다.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이름을 건 방송 프로그램도 있었고 톱스타 최명길의 남편이기도 하다. 일본 태생으로 지연이 없고, 학연도 딱히 없는 약점을 부부가 함께 극복해냈다. 술은 거의 못하는 반면 담배는 하루 4갑까지 피워본 적이 있을 정도로 헤비 스모커다.

김한길 최명길 결혼식 사진

김한길 집안 아버지 어머니 직업 김한길 아빠 엄마

한국사회당, 통일사회당 당수를 지낸 혁신계8 정치인 김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부친의 옥바라지, 야당 탄압 등을 온몸으로 받아냈지만, 세 아들이 같은 고생을 하지 않길 바라는 평범한 어머니였다고.

김한길 전처 첫번째 전부인 아내 와이프 이민아 결혼 이혼 재혼(김한길 첫번째 결혼)(이민아 첫번째 결혼)(이민아 전남편 신랑 김한길)

이민아 프로필 집안 직업 1959~2012.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장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김한길과 결혼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로스쿨을 다니며 장남을 낳는다. 이혼 후 미국에서 검사, 변호사로 활동했고 백인과 재혼도 해 2남 진성, 3남 진영을 본다. 또 한 번의 이혼(04년), 김한길과 낳은 장남의 돌연사(07년)와 뼈다른 둘째 아이의 장애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고 2009년 목사가 되었다. 갑상선 암과 망막분리증 등 중병을 앓은 끝에 2012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무교 내지 불가지론자였던 이어령 씨가 딸의 투병과 죽음으로 종교에 귀의한다. 이어령의 신앙고백 때 꼭 얘기하는 부분.(이민아 김한길 자녀 1남)(이민아 재혼 남편 신랑)(이민아 자녀)(이민아 두번째 이혼)

김한길 이민아 아들 사망

이 목사는 재혼 후 2남 1녀를 낳았다. 그런 이 목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김 대표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아들 유진의 죽음이었다. 버클리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은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이 목사는 유진이가 떠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했다. 이 목사의 장례식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던 청년들은 대부분 이 목사의 영적인 자녀들이었다.

김한길 전처 전부인 아내 직업 이민아 결혼 이혼

이민아(1959년 ~ 201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 출신의 미국 변호사, 검사, 목사이다. 제19대 대한민국 문화부 장관 이어령의 딸이다.이어령과 강인숙 사이에 2남 1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어령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어머니 강인숙은 건국대학교 교수, 첫째 남동생 이승무는 영화감독(영화 《워리어스 웨이》연출), 둘째 남동생 이강무는 백석대학교 교수이다.1978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하여 영문학과 불문학을 복수전공하였고 이후 3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1981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작가 김한길과 결혼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첫째 아들 김유진을 낳았고 1986년 이혼했다. 1989년 재혼했고 둘째 아들 장진성, 셋째 아들 장진영, 딸 장재연을 두었다. 1992년 갑상선암 투병과 장진성의 자폐 판정을 겪었다. 2006년 망막박리 증세로 실명위기를 겪기도 했다. 실명 위기를 겪은 후 개신교 목사의 세례를 받았다. 2007년 김유진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 뒤 19일 만에 사망했다.

미국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로스쿨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1986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89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 지역 부장검사까지 역임했다. 검사직 퇴임 후에는 변호사로서 청소년 범죄 예방과 선도에 역점을 두고 활동했다. 청소년 사역에 집중하면서 변호사 생활도 그만두었고 이를 반대한 남편과 이혼했다.2009년 정식으로 안수를 받으면서 목사가 되었다. 목회자로서 각지에서 신앙 간증 활동을 전개했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활동에 전념했다. 2011년 위암 말기를 선고 받고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2012년 3월 15일 사망했다.저서로는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2011년), 영성고백서 《땅에서 하늘처럼》(2012년), 《하늘의 신부》(2012년)이 있다.

김한길 최명길 가족 사진 김한길 최명길 자녀 자식 아이 아기 최명길 김한길 아들 사진

김한길 폐암 말기 김한길 전처 전부인 와이프 아내 이민아 사망 이유 사유 원인

김한길은 지난 2017년 10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또한, 발견 당시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4기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획기적인 신약 치료로 완치도 가능하다는 얘길 들었다고 밝혔다.

김한길 전처 이민아 목사는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이민아 목사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투병 생활을 지속하다가 지난 2012년 3월 강북 삼성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민아 책 저서

저서

《땅끝의 아이들 (이민아 간증집)》 (시냇가에심은나무, 2011년)

《땅에서 하늘처럼 (이민아 영성고백)》 (시냇가에심은나무, 2012년)

《하늘의 신부 (이민아 생명나눔)》 (두란노, 2012년)

김한길 이민아 이혼 사유 이유(김한길 전처 전부인 아내 와이프 이민아)(이민아 전남편 신랑 배우자 김한길)

한때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회고했던 남자인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대표와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당시 이 목사의 나이는 불과 22살이었다.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두 사람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언제나 말을 잘 듣는 딸이었기에 이어령 교수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이 목사는 시간이 흐른 후 당시 선택에 대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했던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어 있었다. 가진 것 없는 유학생 신분이었던 두 사람은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살면서 남들이 다 꺼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 목사는 밤에는 주유소 일, 낮에는 햄버거가게 일을 하며 공부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기에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국땅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공부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5년 만에 헤어졌다.두 사람은 한때 교포사회에서 젊은 부부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미국생활 5년 만에 이 목사는 변호사가 됐고, 김 대표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만 몰두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 대표는 이 목사와 헤어진 후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라고 회고하기도 했다.이 목사는 이혼 당시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이어령 교수는 단지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김한길 이민아 자녀 자식 아이 아기 아들

이 목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 대표에 대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다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한길 최명길 폭행

김한길 최명길 부부는 24년차 부부임에도 여전히 애틋하지만 실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루머로 오해받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난 2011년 KBS ‘승승장구’에 출연해 루머를 적극해명하기도 했다. 최명길은 폭행설에 대해 먼저 언급하며 “‘남편이 신문을 안 읽는다고 폭행했다’는데 맞냐”고 SNS에서 질문을 받은 사실을 공개했다. 이에 최명길은 “너무 재밌어서 혼자 깔깔거리며 폭소했다. 남편에게도 보여주고 같이 웃었다”며 심각할 수 있는 오해도 오히려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김한길 최명길 첫만남

김한길 재혼 결혼 최명길 1993년 MBC <김한길과 사람들>이라는 토크쇼의 진행자로 인기를 끌었고 1995년에 톱스타 최명길과 재혼에도 성공했다.김한길은 “아내와 나는 동시간대 라디오 DJ였다. 복도에서 만나면 아내가 내게 인사를 했다. 예뻐 보였다”고 입을 열었다. 옆에 있던 최명길은 “어르신인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자아냈다.김한길은 이어 “과거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아내를 게스트로 초대했다”며 “그때 나이를 얘기했다. 내가 당시 43세였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김숙은 최명길에게 김한길의 첫인상에 대해 물었고, 최명길은 “43세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이가 정말 많은 줄 알았다”고 답했다.최명길 김한길 나이 차이 최명길은 김한길보다 9살 연하.(김한길 현부인 아내 와이프 배우자 나이 차이 최명길)

김한길 최명길 근황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에 합류하였으나, 정치활동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2018년 10월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동안 폐암17 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담배를 하루에 서너갑씩 태우는 골초였다고. 다행히 항암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11월 25일 채널A ‘어바웃 해피&길길이 다시 산다’에 부인 최명길과 함께 출연하였다. 폐 한 쪽을 절제해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컸다는 사실과 수술 당시 2주 간 의식 불명 상태였음을 고백했다. 치료도 잘되고 운신도 할 수 있게된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렸다. 입원 기간 동안 간병인 침대에서 간호했음은 물론, 퇴원 후에도 아내 덕분에 투병 생활을 할 수 견딜 수 있었다고.

김한길 폐암 4기

“최명길이 날 살렸다”며 폐암 4기를 극복해낸 소감을 전한다.20일 방송되는 KBS 2TV 예능 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100회를 기념해 특별 게스트 김한길, 최명길 부부가 출연해 험난했던 폐암 투병기와 함께 감동의 내조 스토리를 공개할 예정이다.이날 건강해진 모습으로 등장한 김한길은 “불과 1년 전 의식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었다”고 밝혀 놀라움을 안긴다. 그는 지난 2017년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뒤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해왔다.

김한길은 누워만 있으니 온몸의 근육이 굳어 “갓난아기가 된 것 같았다”며 투병 생활을 전하며 “내가 의식이 없을 때도 아내는 항상 내 곁을 지켰다“고 최명길이 간병인도 거부한 채 헌신적으로 내조한 사실을 공개한다.이에 더해 김한길은 당시 최명길의 보살핌은 “아내니까 이 정도는 해주겠지”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며 기적 같은 폐암 극복의 비결은 바로 최명길의 특급 내조였음을 고백한다.

최명길 인스타그램 주소

https://www.instagram.com/myungchoi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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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st 29 김한길 이민아 폭행

김한길 전처 이민아 이혼이유 설레임 … | 394×281 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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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전부인 이민아 아들 사망과 최명길 러브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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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8일 tvN ‘따로 또 같이’에서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김한길 대표와 배우 최명길 부부의 일상이 방송 사상 최초로 직접 공개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날 방송에서는 식사 장면 등에서 둘째 아들 무진 군이 등장해서 화제가 컸는데요. 지난 1995년 결혼식을 올린 김한길, 최명길 부부는 슬하에 두 아들, 이름은 어진과 무진을 두고 있거든요. 김한길, 최명길 부부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먼저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와 배우 최명길의 기본 프로필부터 알아볼게요. 김한길은 1952년 생으로 2018년 기준 올해 나이가 67세입니다. 배우 이덕화, 안성기, 미키 루크, 리암 니슨과 같은 분들이 1952년생으로 김한길과 나이가 같습니다.

그리고 배우 최명길은 1962년생으로 김한길과는 10살 차이로, 배우 이혜영, 가수 민해경, 할리우드 배우 데미 무어, 조디 포스터와 같은 분들이 최명길과 동갑내기 유명 연예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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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최명길 결혼 사진>

<김한길 최명길 두 아들 김어진, 김무진>

최명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게요. 배우 최명길은 리즈 시절에는 엄청난 미녀 배우로 유명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김태희급으로 고급스런 이미지의 대명사 배우였죠.

‘용의 눈물’, ‘대왕 세종’과 같은 사극에서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 역을 맡았고, ‘근초고왕’에서 비류왕의 비였다가 계왕의 비가 되는 역할 등 왕의 아내를 많이 맡았던 고급스런 이미지로 유명한 배우였습니다다.

1984년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서 정현왕후, 이듬해 조선왕조 오백년 풍란에서 자순대비, 1988년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 1989년 조선왕조 오백년 파문에서 혜경궁 홍씨, 용의 눈물에서 원경왕후,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 등등등 황후 역할만도 상당하죠.

아울러 그 외에도 MBC FM에서 최명길의 음악살롱을 진행하며 특유의 고급스럽고 따뜻한 음색의 라디오 DJ로도 유명했는데, 남편 김한길과의 첫만남 역시 라디오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남편 김한길이 MBC FM의 ‘김한길 초대석’을 진행중이었고, 최명길이 초대손님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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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DJ 시절 최명길>

김한길, 최명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지난 1995년 3월 22일에 이뤄졌습니다. 그 전에 김한길은 소설가 이어령의 딸로 유명했던 이민아 변호사와 결혼식을 올렸다가 이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민아 변호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 졸업하고 22살의 나이에 김한길과 결혼식을 올렸고, 5년 정도 결혼 생활 끝에 갈라선 두 사람이었죠. 1986년이었습니다.

김한길과 이민아 두 사람은 이국땅에서의 결혼생활 동안 성공을 위해서 밤을 세워 공부하며 둘 만의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도 이혼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한길과 이민아는 성공을 위해서 무던히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렇게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보이는 3층짜리 새집을 지어 이사를 하기도 했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가정의 소중함이나 작은 일상의 기쁨을 놓쳤던 것이죠.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한길은 라디오 생방송에서 최명길을 만나서 운명적인 느낌이 왔다고 합니다. 첫 만남에서 최명길은 김한길의 유명한 흰머리 때문에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젊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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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때도 흰머리가 많았던 김한길>

그렇게 첫 만남 이후 김한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놀랍게도 부의금 명단에 배우 최명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한길의 어머니 역시 최명길이 다녀간 것을 알고 최명길과의 만남과 결혼을 적극 추천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1995년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지금가지 20년 이상의 결혼생활을 이어옵니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최명길은 어려운 시절도 많이 있었지만, 김어진, 김무진 두 아들을 낳고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참고로 김한길의 전처였던 이민아는 재혼 이후 김한길과의 사이에서 낳았던 아들의 사망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민아의 두 번째 남편은 미국인이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 재혼을 했죠.

그런데 너무 안타깝게도 김한길과의 사이에서 낳았던 아들이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혼수상태에 빠져 불과 19일 만에 사망에 이르렀던 원인 불명 사망 사고였습니다. 그런 아들의 충격도 있었는지 이민아 역시 54살의 나이로 지난 2012년 사망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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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전 부인 이민아, 오른쪽은 아버지 이어령>

2020/03/13 – [연예 이슈] – 공지영 세번의 결혼. 각각의 이혼사유

2020/03/13 – [연예 이슈] – 김미화 재혼 이유와 남편 윤승호

2020/03/13 – [연예 이슈] – 고승덕 변호사 가족사 이혼과 재혼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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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김한길 전부인]의 한많은 삶

김한길 전 부인

이어령의 딸, 이민아의 한 많은 삶

< 요약 >

부모의 반대에도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 (김한길)과 이혼을 했고 .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에 돌연 사 하고….

암(癌) 선고를 받고…., 다섯 살 아이는 특수 자폐 판정을 받고,

이민아 는 실명(失明)을 당하며……

이토록 이민아 (52)에게 시련은 일상이었다.

첫 결혼 후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웃은 날보다 가슴 치며 운 날이 많았다.

이민아 검사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를 만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어령 박사는 딸의 눈이 볼수만 있다면 보인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이민아 검사는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되고 ….

목사가되어 ..고통받는 청소년 구제 사업을 하고

이어령박사는 80 이 가까운 노장이 불신하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고난 속에서 살아난 이민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련과 고난이 내게는 축복이었다.”고.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이민아는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李御寧) 초대 문화부 장관의 딸이다.

‘저항의 문학’ 이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 160권이 넘는 책을 펴내며

평생을 합리적 이성에 입각한 사유, 지적 작업에 매달려온 이어령 ‘교수’를

신(神) 앞에 무릎 꿇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무신론자, 이성주의자임을 자처하던 80 바라보는 노장이

2007년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딸의 실명이었다.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이어령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 중에서).

자식의 고난 앞에서는 지성도, 과학도 힘을 잃는 걸까. 기적은 과연 있는 걸까.

4 년 전 버클리 대학에 다니던 맏아들 유진을 잃은 이민아는

2009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건강이 나빠져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그를 지난 4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검은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고(故) 하용조 목사의 영결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민아가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땅끝의 아이들'(시냇가에 심은 나무). “고난의 시절에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사랑의 기적, 그 여정”이라고 말했다.

“내 안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6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이민아 변호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딸의 건강상태를 걱정한 어머니 강인숙 교수가 “제발 그만 끝내라”고 말리자

“난 괜찮아요. 하고 있던 말을 중간에 멈출 순 없잖아요” 했다.

맏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그녀의 모습은 평안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사랑해주세요.

그 사랑을 아이가 강렬히 느끼게 해주세요.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 만 있어도 아이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기적

―왜 ‘땅끝의 아이들’인가.

” 술, 마약,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잃은 아이들,

그 아이들을 살려낼 방법을 몰라 절망에 빠진 부모들의 이야기다. 내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혼, 갑상선암, 아이의 자폐, 맏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나 역시 땅끝의 아이였다.

그들이 참사랑,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다.”

―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와의 인연이 깊다. 부친 이어령 교수도 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내가 갑상선 암이 재발됐던 1996년, 하 목사님이 LA의 한 교회에 오셨다.

하나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해서 믿었는데 암이 재발되니 내가 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웃음)

그런데 설교 중에 하 목사님이 자기도 아프다고 하시더라.

얼마나 아프면 강대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설교를 하셨다.

그렇게 아픈 지 30년이라더라.

‘ 목사도 아픈가?’ 하면서 쳐다봤다. 그런데 그 얼굴에 평안과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이 갖고 있던 사랑의 에너지,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세상에 쏟아 붓고 가신 분이다.”

―장례식 때 많이 울었겠다.

“4 년 전 내 아들 유진이를 하늘나라에 보내던 날 마지막으로 울었고,

그 이후로는 어떤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는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었을 뿐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 건데 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 아들 유진이의 묘비명도 ‘Resting in His Father’s house’ (아버지의 집에서 쉬다) 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어떻게 울지 않나.

“‘나니아 연대기’를 쓴 영국 작가 C.S 루이스는

‘바다의 파도 끝에 물이 잠깐 멈추는 순간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맏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 위안으로 들린다.

“지금도 내 아들이 죽은 원인을 모른다.

감기 걸린 것 같다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1 년 동안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유진이 또래의 비행청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게 됐다. 떠밀리듯 그 아이들을 만났다.

신기한 것은 그 아이들을 유진이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 상담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마음에 있었다. 유진이가 죽은 뒤 그 벽이 사라진 거다.

아이들을 엄마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더니 변하기 시작하더라.

술과 마약을 끊고 부모에게 돌아가더라.

서른 명의 아이들이 나를 ‘마마미아’로 불렀다.

유진이가 그리워 내가 울면 아이들이 나를 안고 기도해줬다. 유진이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로 내 가슴에 떨어져 이기적이었던 나를 세상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유진이는 죽지 않았다. 아이들을 통해 나는 매일 유진이를 만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비밀이 그 속에 있다.”

◆ 이어령의 딸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이어령 교수,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의 1녀2남 중 맏이로 태어난 이민아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수재였다 .

그런 그가 1981년 졸업하자마자

무명의 청년작가 김한길 (전 문화부 장관, 현 민주당 대표) 와 미국으로 떠났다 .

걱정하는 부모의 눈길도 뿌리친 채 정말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와 새로운 삶을 꿈꿨다 .

이 민아는 자신의 청소년기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오늘 눈을 감고 아침에 안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은 어딘가 딴 곳에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에 맞춰가면서 가상의 인간으로 살고 있는 듯한 회의에 빠졌다….’

―‘이어령의 딸’로 사느라 진짜 이민아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썼더라.

집안 망신 안 시키려고 공부했다고 썼다.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버지 서재에 숨어들어가 술을 마셨던 얘기도 나온다. 이어령, 강인숙 교수로서는 꽤 당황스러울 것 같다.

“아버지가 이 책의 원고를 가장 먼저 봐주셨다. ‘괜찮다’고 하시더라.(웃음)

잘 읽어보면 부모님을 원망하는 내용이 아니다. 10대의 굴절된 렌즈를 통해 부모를 바라봤던 나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 시기 아이들의 눈에 어른들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은 한국 부모로서 거의 완벽한 분들이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어른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지고 살며 늘 바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나는 그 팔에 매달려 사랑 받고 싶은 딸이었는데,

배고프고 피곤한 아버지는‘밥 좀 먹자’ 하면서 나를 밀쳐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밥 굶지 않고 자란 아이의 배부른 푸념으로 들릴 수 있다.

“사소한 어긋남에서 부모와 자녀의 단절이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 방식을 알지 못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또한 부모와 엄청난 단절과 갈등을 겪는다.”

―‘아버지’ 이어령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아는 사람 중 자기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좋았다. 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었고, 돈을 많이 벌려고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창조, 새로운 지식을 알고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아버지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둘 다 완벽주의자다. 아버지처럼 문학을 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책도 엄청나게 읽는다.

토씨 하나 잘못된 문장을 견뎌내지 못했다.(웃음)”

―어머니 강인숙 교수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영인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한다.

“엄마의 집은 언제나 질서가 있고 안전했다. 뭐든지 잘하셨고 빈틈이 없었다.

속옷은 한국 면(棉)이 최고라며 지금까지도 직접 딸의 속옷을 사서 부치는 분이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아버지의 서재에 몰래 숨어 들어와 위스키를 훔쳐 마신 적이 있다”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

◆첫 결혼의 실패

― 김한길과의 첫 결혼에 실패했다.

책에는‘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고 썼다.

“아버지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첫사랑에서 찾았다고 착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딴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믿고 미국으로 왔는데 그 남자의 세계 또한 나와는 단절돼 있더라. 스물두 살,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 5 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이 낳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흑인들도 마다하는 일자리, 밤을 새우는 주유소 일을 최소 일당을 받으며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은 자존심에 더욱 이를 악물었을 테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지쳐갔다.”

―책에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에 대해 썼다.

“부부가 있다. 남편은 주말에 차고를 깨끗이 청소하며 부인의 가사를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부인은 주말만이라도 남편과 손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어긋남이 쌓여 파경으로 치닫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그걸 몰라서 남편과 힘들었다.

‘여보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하면 ‘ 나 지금 밥 먹을 기운 없어’ 하고,

‘ 나랑 얘기 좀 해, 나 안 좋아 ?’ 하면 ‘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면서

아내를 무시 하고 음성이 높아졌다 . 그러면 어릴 때 아버지가 ‘원고 마감시간이야, 얘 좀 데려가!’ 하고 소리질렀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졌다.”

―원망은 없으신가.

“전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나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연애지상주의에 젖어 있는데, 나 또한 그랬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문화적인 거짓말에 속았고 자기애도 강했다.”

―지금의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종교와 사교

―재혼해서 얻은 둘째 아들은 특수 자폐 판정을 받았다.

“아이를 받아주지 않아 초등학교를 다섯 번 옮겼고, 중학교도 1 년 다니다 쫓겨났다.

하루도 내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이가 밉고, 가족도 싫더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내 아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

그래서 회개하고 하와이에 있다는 크리스천 스쿨을 찾아갔다. 그 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돌봤다. 아이를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기도했다.

그렇게 1 년이 흐르자 아이의 자폐증상들이 봄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칵테일’이라고 부를 만큼 한꺼번에 7~9개의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자폐가 그렇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

― 최고의 지성인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계기가 당신의 실명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딸의 불행 앞에서 신에게 무릎 꿇고,

‘딸의 눈을 뜨게 해주면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서언한다.

그리고 7 개월 만에 딸의 망막 박리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나더러 간곡히 부탁하셨다.

절대로 밖에 나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이 널 비웃고 우리를 박해할 거라고. 기적은 구제의 사인이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지 않으냐고 하셨다.

― 2 년 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자인 당신에게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

“나는 우리 한국 교회가 예수가 세웠던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형화, 세속화되어 일어나는 온갖 잡음과 분란은 지금 이 순간이

한국 교회가 새롭게 변해야 할 시점임을 암시하고 있다.

대형교회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에는 너무나 커버린 조직에서

가족 단위의 교제, 사랑과 돌봄이 일어나기 어렵다.”

― 성장일로, 자본주의식 복음주의의 폐단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피켓 구호에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낀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위로 받지 못한다.

교회에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적어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병자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10대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끌어안고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 땅끝의 아이들

―최근에는 미국,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면서 청소년 선교에 열심이라고 들었다.

원래 전공은 영문학 아니었나?

“문학이 적성에 안 맞았다. 추상적인 사고가 내겐 너무나 어려웠다.”

―해스팅스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처음엔 LA 지방 법원 검사로 일했다.

“아이 넷 수월하게 키워보려고 공무원인 검사를 10 년 했는데, 남을 정죄하는 직업이 점점 힘들어지더라.

그 무렵 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 같은데 나더러 그 아이 변호 좀 해달라는 거다.

나는 검사라서 맡을 수 없다고 했더니 사직을 해서라도 맡아달란다.

아이를 한 번만 보고 오자고 했다가 코가 꿰인 셈이다.”

나를 변호사로 이직(移職)하게 한 K 라는 아이만 해도 부모에게서 상처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뛰쳐나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받아야 사랑 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사랑 받는다고 느낀다. 사랑은 이렇듯 구체적인 거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해주면

폭력과 어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울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 아프리카 케냐에도 갔다

“나이로비에서도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웨브예라는 마을은 그야말로 땅끝이었다.

샘물이 없고, 오물이 흘러 들어온 강물로 밥을 해서 먹는다.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 배가 다 맹꽁이 배처럼 튀어나왔고, 목욕을 태어나 한 번도 안 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거기서 내 사랑의 위선을 보았다.”

― 무슨 얘긴가.

“아이들이 나를 끌어안는데 역한 냄새가 진동하니 참을 수가 없더라.

그날 밤 꿈을 꿨다.

온몸에서 피고름이 흐르는 남자가 자기 좀 도와달라고 외치는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고 곁에 가질 못한다.

그때 누가 저 멀리서 뛰어오더니 단숨에 병자를 끌어안는다.

그의 눈물이 닿는 곳마다 병자의 상처가 나았고 피와 고름이 멈추었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 우리의 갈 길은 이렇게 멀다.”

― 이혼, 암, 실명, 아들의 죽음 등 당신에게 닥쳤던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첫 아이를 낳아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 불 사이를 지나지 않으면 금(金)이 정련되지 않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건강이 다시 나빠져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들었다. 숱한 고비를 넘겨왔는데 두렵지 않은가.

“오늘 죽는다면 오늘이 세상을 떠날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를 그날까지 땅끝에 선 아이들 가슴에 사랑을 심어주고 싶다.”

― 요즘 당신의 기도는 무엇인가.

“ 내 마음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모든 죽은 것들을 살린다.” 요즘 TV 에 자주 등장하는 민주당 대표 김한길 전 부인의 한 많은 삶

김한길 전 부인

이어령의 딸, 이민아의 한 많은 삶

< 요약 >

부모의 반대에도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남자 (김한길)과 이혼을 했고 .

가장 사랑했던 맏아들은 스물다섯 꽃 같은 나이에 돌연 사 하고….

암(癌) 선고를 받고…., 다섯 살 아이는 특수 자폐 판정을 받고,

이민아 는 실명(失明)을 당하며……

이토록 이민아 (52)에게 시련은 일상이었다.

첫 결혼 후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웃은 날보다 가슴 치며 운 날이 많았다.

이민아 검사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를 만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어령 박사는 딸의 눈이 볼수만 있다면 보인다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이민아 검사는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되고 ….

목사가되어 ..고통받는 청소년 구제 사업을 하고

이어령박사는 80 이 가까운 노장이 불신하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고난 속에서 살아난 이민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련과 고난이 내게는 축복이었다.”고.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이민아는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李御寧) 초대 문화부 장관의 딸이다.

‘저항의 문학’ 이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 160권이 넘는 책을 펴내며

평생을 합리적 이성에 입각한 사유, 지적 작업에 매달려온 이어령 ‘교수’를

신(神) 앞에 무릎 꿇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무신론자, 이성주의자임을 자처하던 80 바라보는 노장이

2007년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딸의 실명이었다.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이어령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 중에서).

자식의 고난 앞에서는 지성도, 과학도 힘을 잃는 걸까. 기적은 과연 있는 걸까.

4 년 전 버클리 대학에 다니던 맏아들 유진을 잃은 이민아는

2009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건강이 나빠져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그를 지난 4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검은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는 고(故) 하용조 목사의 영결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민아가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땅끝의 아이들'(시냇가에 심은 나무). “고난의 시절에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사랑의 기적, 그 여정”이라고 말했다.

“내 안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6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이민아 변호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딸의 건강상태를 걱정한 어머니 강인숙 교수가 “제발 그만 끝내라”고 말리자

“난 괜찮아요. 하고 있던 말을 중간에 멈출 순 없잖아요” 했다.

맏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그녀의 모습은 평안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사랑해주세요.

그 사랑을 아이가 강렬히 느끼게 해주세요.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 만 있어도 아이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기적

―왜 ‘땅끝의 아이들’인가.

” 술, 마약,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을 잃은 아이들,

그 아이들을 살려낼 방법을 몰라 절망에 빠진 부모들의 이야기다. 내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혼, 갑상선암, 아이의 자폐, 맏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나 역시 땅끝의 아이였다.

그들이 참사랑,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다.”

―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와의 인연이 깊다. 부친 이어령 교수도 하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내가 갑상선 암이 재발됐던 1996년, 하 목사님이 LA의 한 교회에 오셨다.

하나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해서 믿었는데 암이 재발되니 내가 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웃음)

그런데 설교 중에 하 목사님이 자기도 아프다고 하시더라.

얼마나 아프면 강대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설교를 하셨다.

그렇게 아픈 지 30년이라더라.

‘ 목사도 아픈가?’ 하면서 쳐다봤다. 그런데 그 얼굴에 평안과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이 갖고 있던 사랑의 에너지,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세상에 쏟아 붓고 가신 분이다.”

―장례식 때 많이 울었겠다.

“4 년 전 내 아들 유진이를 하늘나라에 보내던 날 마지막으로 울었고,

그 이후로는 어떤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는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었을 뿐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 건데 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 아들 유진이의 묘비명도 ‘Resting in His Father’s house’ (아버지의 집에서 쉬다) 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어떻게 울지 않나.

“‘나니아 연대기’를 쓴 영국 작가 C.S 루이스는

‘바다의 파도 끝에 물이 잠깐 멈추는 순간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맏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 위안으로 들린다.

“지금도 내 아들이 죽은 원인을 모른다.

감기 걸린 것 같다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1 년 동안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유진이 또래의 비행청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게 됐다. 떠밀리듯 그 아이들을 만났다.

신기한 것은 그 아이들을 유진이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 상담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마음에 있었다. 유진이가 죽은 뒤 그 벽이 사라진 거다.

아이들을 엄마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더니 변하기 시작하더라.

술과 마약을 끊고 부모에게 돌아가더라.

서른 명의 아이들이 나를 ‘마마미아’로 불렀다.

유진이가 그리워 내가 울면 아이들이 나를 안고 기도해줬다. 유진이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로 내 가슴에 떨어져 이기적이었던 나를 세상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유진이는 죽지 않았다. 아이들을 통해 나는 매일 유진이를 만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의 비밀이 그 속에 있다.”

◆ 이어령의 딸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이어령 교수,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의 1녀2남 중 맏이로 태어난 이민아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수재였다 .

그런 그가 1981년 졸업하자마자

무명의 청년작가 김한길 (전 문화부 장관, 현 민주당 대표) 와 미국으로 떠났다 .

걱정하는 부모의 눈길도 뿌리친 채 정말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와 새로운 삶을 꿈꿨다 .

이 민아는 자신의 청소년기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오늘 눈을 감고 아침에 안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은 어딘가 딴 곳에 있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에 맞춰가면서 가상의 인간으로 살고 있는 듯한 회의에 빠졌다….’

―‘이어령의 딸’로 사느라 진짜 이민아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썼더라.

집안 망신 안 시키려고 공부했다고 썼다.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버지 서재에 숨어들어가 술을 마셨던 얘기도 나온다. 이어령, 강인숙 교수로서는 꽤 당황스러울 것 같다.

“아버지가 이 책의 원고를 가장 먼저 봐주셨다. ‘괜찮다’고 하시더라.(웃음)

잘 읽어보면 부모님을 원망하는 내용이 아니다. 10대의 굴절된 렌즈를 통해 부모를 바라봤던 나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 시기 아이들의 눈에 어른들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은 한국 부모로서 거의 완벽한 분들이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어른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지고 살며 늘 바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나는 그 팔에 매달려 사랑 받고 싶은 딸이었는데,

배고프고 피곤한 아버지는‘밥 좀 먹자’ 하면서 나를 밀쳐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밥 굶지 않고 자란 아이의 배부른 푸념으로 들릴 수 있다.

“사소한 어긋남에서 부모와 자녀의 단절이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 방식을 알지 못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또한 부모와 엄청난 단절과 갈등을 겪는다.”

―‘아버지’ 이어령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아는 사람 중 자기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좋았다. 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었고, 돈을 많이 벌려고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창조, 새로운 지식을 알고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아버지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

“둘 다 완벽주의자다. 아버지처럼 문학을 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책도 엄청나게 읽는다.

토씨 하나 잘못된 문장을 견뎌내지 못했다.(웃음)”

―어머니 강인숙 교수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영인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한다.

“엄마의 집은 언제나 질서가 있고 안전했다. 뭐든지 잘하셨고 빈틈이 없었다.

속옷은 한국 면(棉)이 최고라며 지금까지도 직접 딸의 속옷을 사서 부치는 분이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아버지의 서재에 몰래 숨어 들어와 위스키를 훔쳐 마신 적이 있다”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

◆첫 결혼의 실패

― 김한길과의 첫 결혼에 실패했다.

책에는‘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고 썼다.

“아버지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첫사랑에서 찾았다고 착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딴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믿고 미국으로 왔는데 그 남자의 세계 또한 나와는 단절돼 있더라. 스물두 살,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 5 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이 낳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흑인들도 마다하는 일자리, 밤을 새우는 주유소 일을 최소 일당을 받으며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은 자존심에 더욱 이를 악물었을 테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지쳐갔다.”

―책에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에 대해 썼다.

“부부가 있다. 남편은 주말에 차고를 깨끗이 청소하며 부인의 가사를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부인은 주말만이라도 남편과 손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어긋남이 쌓여 파경으로 치닫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그걸 몰라서 남편과 힘들었다.

‘여보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하면 ‘ 나 지금 밥 먹을 기운 없어’ 하고,

‘ 나랑 얘기 좀 해, 나 안 좋아 ?’ 하면 ‘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면서

아내를 무시 하고 음성이 높아졌다 . 그러면 어릴 때 아버지가 ‘원고 마감시간이야, 얘 좀 데려가!’ 하고 소리질렀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졌다.”

―원망은 없으신가.

“전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나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지금 많은 젊은 사람들이 연애지상주의에 젖어 있는데, 나 또한 그랬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문화적인 거짓말에 속았고 자기애도 강했다.”

―지금의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보다 더 크게 느껴지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종교와 사교

―재혼해서 얻은 둘째 아들은 특수 자폐 판정을 받았다.

“아이를 받아주지 않아 초등학교를 다섯 번 옮겼고, 중학교도 1 년 다니다 쫓겨났다.

하루도 내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이가 밉고, 가족도 싫더라.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내 아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

그래서 회개하고 하와이에 있다는 크리스천 스쿨을 찾아갔다. 그 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를 돌봤다. 아이를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기도했다.

그렇게 1 년이 흐르자 아이의 자폐증상들이 봄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칵테일’이라고 부를 만큼 한꺼번에 7~9개의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자폐가 그렇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

― 최고의 지성인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계기가 당신의 실명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딸의 불행 앞에서 신에게 무릎 꿇고,

‘딸의 눈을 뜨게 해주면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서언한다.

그리고 7 개월 만에 딸의 망막 박리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나더러 간곡히 부탁하셨다.

절대로 밖에 나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이 널 비웃고 우리를 박해할 거라고. 기적은 구제의 사인이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지 않으냐고 하셨다.

― 2 년 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자인 당신에게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

“나는 우리 한국 교회가 예수가 세웠던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형화, 세속화되어 일어나는 온갖 잡음과 분란은 지금 이 순간이

한국 교회가 새롭게 변해야 할 시점임을 암시하고 있다.

대형교회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에는 너무나 커버린 조직에서

가족 단위의 교제, 사랑과 돌봄이 일어나기 어렵다.”

― 성장일로, 자본주의식 복음주의의 폐단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피켓 구호에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낀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위로 받지 못한다.

교회에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적어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병자들, 갈 곳 없어 방황하는 10대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끌어안고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 땅끝의 아이들

―최근에는 미국,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면서 청소년 선교에 열심이라고 들었다.

원래 전공은 영문학 아니었나?

“문학이 적성에 안 맞았다. 추상적인 사고가 내겐 너무나 어려웠다.”

―해스팅스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처음엔 LA 지방 법원 검사로 일했다.

“아이 넷 수월하게 키워보려고 공무원인 검사를 10 년 했는데, 남을 정죄하는 직업이 점점 힘들어지더라.

그 무렵 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 같은데 나더러 그 아이 변호 좀 해달라는 거다.

나는 검사라서 맡을 수 없다고 했더니 사직을 해서라도 맡아달란다.

아이를 한 번만 보고 오자고 했다가 코가 꿰인 셈이다.”

나를 변호사로 이직(移職)하게 한 K 라는 아이만 해도 부모에게서 상처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뛰쳐나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받아야 사랑 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사랑 받는다고 느낀다. 사랑은 이렇듯 구체적인 거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해주면

폭력과 어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울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 아프리카 케냐에도 갔다

“나이로비에서도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웨브예라는 마을은 그야말로 땅끝이었다.

샘물이 없고, 오물이 흘러 들어온 강물로 밥을 해서 먹는다.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 배가 다 맹꽁이 배처럼 튀어나왔고, 목욕을 태어나 한 번도 안 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거기서 내 사랑의 위선을 보았다.”

― 무슨 얘긴가.

“아이들이 나를 끌어안는데 역한 냄새가 진동하니 참을 수가 없더라.

그날 밤 꿈을 꿨다.

온몸에서 피고름이 흐르는 남자가 자기 좀 도와달라고 외치는데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고 곁에 가질 못한다.

그때 누가 저 멀리서 뛰어오더니 단숨에 병자를 끌어안는다.

그의 눈물이 닿는 곳마다 병자의 상처가 나았고 피와 고름이 멈추었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기에 우리의 갈 길은 이렇게 멀다.”

― 이혼, 암, 실명, 아들의 죽음 등 당신에게 닥쳤던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첫 아이를 낳아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 불 사이를 지나지 않으면 금(金)이 정련되지 않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건강이 다시 나빠져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들었다. 숱한 고비를 넘겨왔는데 두렵지 않은가.

“오늘 죽는다면 오늘이 세상을 떠날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를 그날까지 땅끝에 선 아이들 가슴에 사랑을 심어주고 싶다.”

― 요즘 당신의 기도는 무엇인가.

“ 내 마음에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모든 죽은 것들을 살린다.”

‘김한길 전 부인’ 고 이민아 秘스토리

[일요시사=정치팀] 고(故) 이민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의 딸이자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공동대표의 첫 번째 부인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진정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고인의 2주기를 맞아 그녀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인생. 너무나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그녀의 인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없다. 고 이민아 목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시련의 연속

세 번의 결혼과 두 차례의 이혼, 큰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과 둘째 아들의 자폐 판정, 본인은 실명위기를 겪었고 위암 투병 끝에 불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던 인생이었지만 이 목사는 마지막까지도 “모든 시련과 고난이 내게는 축복이었다”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 목사는 잘 알려진 대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의 딸이다. 어머니는 건국대 강인숙 명예교수다. 이 목사는 1녀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이 목사는 공부를 잘했고, 글을 잘 썼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목사는 난생 처음 아버지를 거역한다.

한때 ‘죽을 만큼 사랑했다’고 회고했던 남자인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대표와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당시 이 목사의 나이는 불과 22살이었다.

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두 사람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언제나 말을 잘 듣는 딸이었기에 이어령 교수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이 목사는 시간이 흐른 후 당시 선택에 대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했던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어 있었다. 가진 것 없는 유학생 신분이었던 두 사람은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살면서 남들이 다 꺼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 목사는 밤에는 주유소 일, 낮에는 햄버거가게 일을 하며 공부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기에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국땅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공부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5년 만에 헤어졌다.

두 사람은 한때 교포사회에서 젊은 부부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미국생활 5년 만에 이 목사는 변호사가 됐고, 김 대표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만 몰두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 대표는 이 목사와 헤어진 후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 목사는 이혼 당시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이어령 교수는 단지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모든 시련·고난이 내겐 축복이었다”

파경·재혼, 아들 사망까지 파란만장 삶

이 목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 대표에 대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다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재혼 후 2남 1녀를 낳았다. 그런 이 목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김 대표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아들 유진의 죽음이었다. 버클리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은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이 목사는 유진이가 떠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했다. 이 목사의 장례식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던 청년들은 대부분 이 목사의 영적인 자녀들이었다.

이 목사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아버지 이어령 교수를 기독교의 길로 인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대의 지성으로 불려온 이어령 교수는 젊은 시절 성경을 분석하며 “6·25전쟁 당시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며 비판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망막 박리로 이 목사의 눈이 멀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 교수는 처음으로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이 목사는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결국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지난 2012년 3월15일 오후 1시44분 세상을 떠났다. 이 목사는 죽기 직전까지도 간증집을 내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소망의 빛을 전하는 데 전력하기도 했다.

<일요시사>는 이 목사가 남긴 흔적을 좇기 위해 어렵게 부친인 이어령 교수와 모친인 강인숙 교수가 함께 살고 있는 자택의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기자가 전화를 걸자 받은 것은 강인숙 교수였다. 강 교수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딸을 잃은 슬픔을 떨쳐내지 못한 듯했다.

취재기자가 조심스럽게 이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강 교수는 그저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더 이상 강 교수를 괴롭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해 묻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1년 가까이 치료를 받았던 병원 관계자들은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이 목사를 유난히 밝게 웃던 환자로 기억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둔 말기암환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밝은 미소는 더더욱 인상 깊었다. 또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정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의욕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 목사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꺼렸다.

땅 끝에서 찾은 행복

이 목사는 마지막 순간 항암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그저 남은 삶을 충실히 살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선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면 3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지만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도 1년을 살았다. 그녀가 쓰러지고 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권했을 때 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우리 민아를 편하게 보내주고 싶다”며 반대했다.

이 목사는 예고된 죽음 앞에서도 어린아이 같이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 목사의 간증집 제목처럼 <땅에서 하늘처럼> 살다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그녀의 삶에 대해 박복한 인생이었다며 안타까워했지만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쪽은 누구일까?

김명일 기자

<기사 속 기사> 이민아 목사의 동생은?

<워리어스 웨이>의 이승무 감독

고 이민아 목사의 동생 역시 유명한 인물이다. 배우 장동건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화제를 모은 <워리어스 웨이>의 이승무 감독이 이 목사의 동생이다. 지난 2010년 개봉한 <워리어스 웨이>는 웨스턴이라는 공간에 동양 전사를 등장시켜 큰 주목을 받았다.

쾌감이 극대화된 액션장면과 동화적이고 만화적인 스토리로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 감독의 아버지인 이어령 교수는 아들과 인연이 있는 배우 장동건-고소영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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