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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piano by 허스키쌤
[ 가사 ]새롭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늘 새롭게 하소서 (*2 )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이 죄인 살리신 주
보라 새롭게 된 이 피조물
주의 놀라운 권능
찬양하세 우리 주
오 주여 영광 받으소서
새롭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늘 새롭게 하소서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 : 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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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 기독교포털뉴스
성경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전 1:9)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예전에 있었던 것이 지금 다시 있는 것이고, 이미 했던 일들이 다시 반복된다.
Source: www.kportalnews.co.kr
Date Published: 3/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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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순 – 다국어 성경 Holy-Bible
…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2/28/2022
View: 3979
전도서 1:9-14 /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 네이버 블로그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해 아래서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6/13/2021
View: 4895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 알라딘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전도서설교. 김성수 (지은이) 마음샘 2013-03-02. 정가. 12,000원. 판매가. 10,800원 (10% 할인) + 마일리지 120원 …
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5/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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휄로쉽 악보 자료 –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 존귀하신 여호와 · 예수 알렐루야 구주 · 아버지 주 나의 기업 · 예수 샤론의 꽃 ·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은 · 모든 감사와 찬양을.
Source: www.fellowshipusa.com
Date Published: 4/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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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강해(1)-해아래 새것이 없나니(1:1-11) – 다음블로그
이것은 탄식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해 아래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아래서’라는 의미로 보면 쉬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로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6/15/2022
View: 1817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 song and lyrics by 옥탑방 천사들
Listen to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on Spotify. 옥탑방 천사들 · Song · 2008.
Source: open.spotify.com
Date Published: 10/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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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해 아래 새것 이 없나 니
- Author: 허스키쌤 healing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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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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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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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성경은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전 1:9)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예전에 있었던 것이 지금 다시 있는 것이고, 이미 했던 일들이 다시 반복된다.
요즘 소위 성령의 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기자 생활 초년병이던 1997년부터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지금은 더욱 심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으면 시대의 흐름을 못 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된다. 나만 뒤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정말 하나님이 시대를 따라 새롭게 역사하시는 변화의 물결은 아닌지 잠깐씩 고민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에 인생을 바쳤던 칼빈은 <기독교강요>(성문 刊, 1996) 177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광신자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성령에 호소한다.
성경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이르는 특별한 길이 있다고 공상하는 자들이 있는데 저들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기보다 광포로 날뛰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최근 경솔한 자들이 출현하여 주제넘는 자부심을 가지고 성령의 교사로서의 역할을 높임으로써 성경읽는 것을 무시하고 그들이 표현하는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만을 따르는 경건된 자들의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러나 그 영을 받고 저들이 그렇게 높임을 받아서 성경의 교리를 유치하고 단순한 것으로 감히 멸시하고 있는 이 영은 도대체 어떠한 영인가를 그들에게 묻고 싶다. ··· 바울은 삼층천까지 올라갔다 왔지만(고후 12:2)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의한 혜택을 여전히 받았다. 그는 뛰어난 교사 디모데에게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데 유의하라고 권면하였다(딤전 4:13). ···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표로 인도하는 성경의 유익을 무상하거나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어찌 악마적인 광란이 아니겠는가?”
500년전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시도에 대해 추상같다. 그것은 오류라기 보다 광포다. 악마적인 광란이다. 성경의 교리를 유치하고 단순한 것으로 멸시하는, 너희들이 받았다는 영은 도대체 어떤 영인가? 삼층천까지 올라갔다 온 바울도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었는데!
칼빈의 <기독교강요>에는 말씀에 죽고, 말씀에 살았던 한 위대한 신앙인의 깊은 사색이 숨쉰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사랑이 뜨겁다.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서릿발같은 비판이 날카롭다. 이단사설에 대한 분노가 이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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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9-14 /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전도서 1:9-14
요즘 보면 쓸 만해 보이는 멀쩡한 물건들이 계속 버려지고 있습니다. 간혹 망가져서 버리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증이 나서 내버리는 물건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시간이 가면 실증을 느낍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사랑하던 연인들도 결혼 후 1, 2년이 되면 시들해지고 10년이 되면 권태에 빠져듭니다. 직장도 한 곳에서 끝까지 있지를 못합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현대인들은 무엇을 기쁨으로 삼고 사는가를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 다음에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기 원하면, 이발을 하세요. 일주일을 기쁘게 살기 원하면, 양복을 사 입으세요. 한 달을 기쁘게 살기 원하면, 차를 구입하세요.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나면 자동차 할부금 때문에 원망스러울 거예요. 6개월을 기쁘게 살려면, 집을 구입하세요. 일 년을 기쁘게 살기 원하면, 새 배우자를 구하세요.”
이 세상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인생이 기쁘고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그것을 가지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을 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가난할 때는 먹고살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는데 이제 살만 해지니까 삶이 권태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태를 이기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왜 여자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남편 몰래 춤추러 다닐까요? 권태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합니다. 새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해 아래서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전제 하에 권태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자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고 보았습니다. 새 것이 없다는 말은 인간은 이미 주어진 것을 가공해서 쓰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어떤 요리사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있는 재료를 잘 배합해서 요리를 만든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새 것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창조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이미 주어진 것을 응용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라는 말은 인간이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자는 인간의 삶이 한 세대로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후 세대의 사람들이 전 세대 사람들을 거의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의 명성은 당대로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전성기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무언가 영원한 유산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죽은 후에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두고두고 자기의 업적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가 세운 기록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 명성도 사라지고, 공로도 잊혀지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되는 것입니다.
노벨상이나 퓰리처상을 받은 사람들,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 여우주연상을 받은 사람들, 월드 시리즈 우승팀 MVP, 이들은 그들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그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세월이 가면 박수갈채는 사라지고, 상은 변색되고, 업적은 잊혀 집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로 남고 싶어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우지만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침 안개와 같고, 꽃과 같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헛된 명예와 권력, 세상의 영광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전도자는 자신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1장 1절에 이어 다시금 자신의 높은 직함을 거듭 소개한 것은 자신의 명예를 과시하기보다는 인생의 허무가 지위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도자가 해 아래 사는 인생을 보니 너무나도 의미 없는 일에 많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모든 일을 살핀 후 얻은 결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수고로운 일을 주시어 고생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의 노력 대부분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일들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또 직장에 가서 죽도록 일하는 이유도 결국은 먹고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는 다시 고파오고, 그러면 다시 먹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시간이 남아돌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수고하는 것입니다. 나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어른도 아이도, 알고 보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한 짐씩 지고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종류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삽니다. 경제적인 스트레스, 자녀교육의 스트레스, 직장의 업무 스트레스,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각종 스트레스가 짐이 되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고등학교 동창회에 다녀왔는데 표정이 시무룩하고 아주 어두웠습니다. 할아버지가 “왜 그려”라고 물어봅니다. “별일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할머니 눈치를 보던 할아버지가 “별일 아니긴 뭔 일 있구먼”이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빽 소리치며 “아니라니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옛날 젊은 시절에 할머니에게 무관심하게 대한 것이 생각나서 “당신만 밍크코트가 없었어?” “당신만 다이아 반지가 없었어?”라고 묻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깊은 한숨만 쉬고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럼 뭐여∼?”라고 할머니를 다그치자 할머니가 하는 말씀이 “에휴∼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라고 했답니다. 요즘은 남편이 오래 사는 것도 아내에게 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무거운 짐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한 결과로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의 짐을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짐 지고 수고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 11:28).
우리 짐을 맡아 주시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짐을 주님께 맡기면 우리 짐은 주님의 짐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그것은 짐이 아닙니다. 간단히 해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대신 담당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맡기라고 반복해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37편 5-6절을 보면 “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55편 22절을 보면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6장 3절을 보면 “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면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맡기면 간단한 짐을 굳이 지고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길, 우리의 짐, 우리의 행사, 우리의 염려를 모두 주님께 맡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미국 역사 중에 미국인들의 경종을 울렸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1923년 어느 날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 호텔에서 그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라고 불리는 7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의 부는 그들의 전 재산을 합칠 때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 모였던 그 날로 시작해서 정확히 25년이 지난 후의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해서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었던 강철회사 사장, 찰스 슈업은 25년 후 무일품의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인 알써 카튼은 밀농사로 거부가 된 사업가였는데 그 역시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혼자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인 리처드 위트니는 뉴욕 은행의 총재였지만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정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인 엘버트 홀은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지만 감옥에서 막 풀려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인 웰스프트의 회장이었던 J. C. 리버모아는 인생의 끝을 자살로 마쳤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인 국제은행 총재였던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사람인 이반 크루컬은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지만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 7명의 인생은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부의 허무를 알려주었고, 교훈이 되었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행위를 ‘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의미 있어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거시적으로 볼 때 모든 일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211년 로마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장면이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제 11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 황제 세베투스는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비롯한 가족과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구나.”
솔로몬과 세베투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1100여년 정도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생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며 내린 결론은 똑같습니다.
그 결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영혼과 마음에는 이 세상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신비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나 교회에서 붙여주는 호칭만으로는 진정 만족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 영혼과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이단과 육체의 쾌락에 빠져 탕자의 삶을 살았던 어거스틴은 그의『참회록』 첫 페이지에서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품안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참된 안식이 없었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천재 수학자인 파스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공허가 있습니다. 그 공허는 주님께서 찾아오시기 전에는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2-30년 전보다 재산도 많아지고, 훨씬 더 좋은 것을 먹고, 훨씬 더 좋은 옷을 입고 살면서도, 여전히 외로워하며 목말라 하며 삽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여전히 공허함이나 고독감을 느끼며 삽니다.
이처럼 마음의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물질이나 지위나 호칭에 의존하는 인생살이에는 언제나 불만족과 불안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 아래 있는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기들은 수족관에서 매일 똑같이 움직입니다. 돌고 또 도는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한 물고기가 너무 권태로워서 수족관을 탈출하기로 했습니다. 점프를 해서 수족관 밖으로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운명도 수족관의 물고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아침이 되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되면 또 다시 아침이 옵니다. 봄이 되면 여름이 오고, 다름에 가을과 겨울이 반복됩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후에는 죽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아주 단순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사느냐, 아니면 한번 신나게 탈선하고 죄에 빠져 죽느냐 중 양자택일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어떻게 보면 가혹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재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의 권태 문제는 어디에서도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것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http://book.naver.com/bookdb/review.nhn?bid=11055484
전도서 강해(1)-해아래 새것이 없나니(1:1-11)
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본문: 전1:1-11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전도서를 공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도서는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 혹은 구도자들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진리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삶을 설계할 것인가 고민하는 청년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인생의 참된 만족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를 실험적으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알기를 갈망하는 존재들입니다. 왜 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의미가 있는 삶인지 끊임없이 묻는 존재들입니다. 전도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뿐입니다. 사람이 아닌 그 어떤 동물도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진 않습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서 만족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먹고 마시고 배부르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더 깊은 차원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참된 만족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행복과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으면 참으로 행복하겠거니 하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그것을 얻으면 또 다시 허탈해집니다. 그리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또 다시 돌진합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거인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수고하다가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솔로몬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는 일=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자가 살았던 예루살렘으로 순례하여 모여들었습니다. 스바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진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할은 단지 유대땅을 다스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온 열방과 온 땅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도자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제사장 나라를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많은 구도자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왕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히, 코헬렛)는 그러한 구도자들을 불러 모아서 인생의 참된 가치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이 전도서에서 압축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누구라도 인생의 가치와 방향을 바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청년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 전도서만큼 적절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와 만족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방향을 모르므로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도서에서 그러한 방황은 확실히 끝날 것입니다. 이 전도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증명해보이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전도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목적이 뚜렷한 비전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함께 배우도록 합시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해결하기 위해 전도자의 안내를 따라 가봅시다. 이 일에 지혜의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좋은 보상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도서 1장은 기본적으로 세상살이가 의미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만족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이런 가정에서 출발해봅시다.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만약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마치 집안에 늘 간섭하고 잔소리하던 부모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장난꾸러기 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지미 뉴트론]이란 영화의 초두에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모가 사라지자 아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데 세상은 금방 뒤죽박죽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고 아이들이 부모를 구하려고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철없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잠시 ‘행복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참된 의미와 만족과 행복과 목적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동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동원하여 무기를 만들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내면의 고통을 잊기 위해 쾌락이나 섹스에 중독되거나 의미 없이 생존을 위해 기계적으로 일하거나 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와 인생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나 개인이 진정으로 행복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그들에게 과연 새 것(참된 만족을 의미함)이 있는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참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찾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의미를 부여하시도록 하셔야 합니다. 전도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 만족, 행복, 그리고 참으로 ‘새로운 것’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치 공갈빵과 같이 겉은 크고 먹음직스럽지만 먹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여전히 배고픈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헛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된 말씀의 참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저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쓰임 받은 사람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코헬렛)”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이해하는 부분(정체성)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첫째, 다윗의 아들, 둘째, 예루살렘 왕, 셋째, 전도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째, 다윗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둘째, 예루살렘에 찾아오는 구도자들과 순례자들을 책임지고 가르쳐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하고 보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의 힘은 군대가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을 예루살렘 왕으로 소개한 것은 왕의 역할이 단지 정치 군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섬기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영향력을 주는 사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전도자가 구도자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은 제사장의 역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전도자가 했던 것처럼 세상 가운데서 구도자들을 진리 앞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 단지 병을 고치는 문제, 단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는 문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냉수를 떠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엔 신문을 쥐고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물어올 때 진리를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주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하벨 하발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씀은 전도서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아니, 전제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일이 헛되다는 것을 6장까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헛되다는 말은 ‘입김’이란 뜻으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실속, 알맹이,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구도자’가 됩니다. 사람은 “어?”라고 깨닫는 순간부터 “왜?”라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보고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을 언제 어떻게 깨닫게 될까요?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날 때입니다. 자신이 믿었던 것이 ‘헛됨’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되는 대로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찾기 위해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이 겪는 근본적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했고, 솔로몬왕은 순례자들과 구도자들을 모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전도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진리로 지도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다시 말해서 “무엇이 남는 장사인가?” 혹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탄식에 가까운 질문입니다. “해 아래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아래서’라는 의미로 보면 쉬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번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습니다. 사람은 원숭이에게서 나왔다고 믿습니다. 사실 진화론과 창조론은 과학과 종교의 대결이 아니라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결입니다. 진화론이 득세한 나라가 교육이 바로 서며,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고귀한 의미와 가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안달입니다.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기도 하고 우주에 전파를 쏘아 보내는데 수 십 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여서 유전자를 조작해서 생명을 복제하려고 시도합니다. 왜요? 모두 하나님을 부정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간섭받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가정을 비우면 아이들은 자기 세상을 만난 듯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 집은 금세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전부입니다. 즉, 얽매이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세상을 한번 보자고 전도자는 제안합니다. 4절에서 11절까지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잘 보여줍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은 무의미한 반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4절) 전도자는 이제 의미 없이 되풀이 되는 세상의 일에 대하여 하나씩 언급합니다. 땅은 그대로 있는 반면 사람은 그대로 있지 못하는 것을 서로 대조하면서 사람에게 영구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땅과 같이 지속적인 것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라고 질문합니다. 사람은 지속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가장 불안해하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유한한 자원 때문에 인간은 무척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일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오직 그것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공부합니다.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도 사실 남의 것을 착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섬기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인생의 참된 의미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한한 자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될 때 오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한번 봅시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고 연하여(=계속하여) 흐르느니라.”(5-7절)
여러분, 눈을 들어서 자연현상을 한번 보세요. 자연은 계속 순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순환하지 않습니다. 윤회는 사람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애는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단 한번뿐인 삶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사람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잘 살고자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전도자는 자연 속에 사람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후회함 없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야 합니다. 왜냐면 나의 삶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뿐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기회인 것입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생은 무의하며 피곤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8절)
사람이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희망이 없고,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을 한번 보세요. 희망이나 의미나 만족이나 가치를 추구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만이 만물의 피곤함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사람은 권태와 무의미와 치열하게 씨름합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무의함입니다. 무의미가 사람을 무료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합니다.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사람은 늘 신선한 것, 가치와 의미를 찾아 헤맵니다. 가난해서 힘들 때는 죽기 살기로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 정도 풍요해지니까 사람들은 이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어서 지루해집니다. 이 지루함, 권태, 무의미함, 무목적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레저와 스포츠나 섹스, 알코올, TV 드라마, 쇼핑, 인터넷 등에 빠져듭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입니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의미 없이 노력하거나 삶의 참된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일상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둘 중에 어느 하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탈출하게 되면 어항에서 나온 물고기의 운명처럼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와 삶은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것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9,10절) 사람들은 참으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이란 의미 있는 무엇, 참신한 것, 영구적인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굶주려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자신들에게 영구적인 기쁨과 희망과 만족과 의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새로운 것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울부짖으며 ‘새 것’을 찾아다닙니다. 보세요. 어디서 음식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가서 맛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것은 해 아래서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해 아래 사는 인생” 즉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는 삶은 참으로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세상에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것에서도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저 반복적으로 움직이지만 그러나 왜 그렇게 움직이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다가 죽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는지 아무도 밝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바이센테이셔널 맨’이란 영화를 보면 인간과 로봇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 영화에서 로봇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로봇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것이 바로 ‘늙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연이 왜 계속 반복되는 지에 대한 것과 인간이 성장하여 늙어 죽는 현상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인정할 때만이 비로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기 싫어서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결코 새로운 것(something new)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진정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람은 진짜 사람다운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것을 그저 혼합하여 만들 뿐이지 결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느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이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나 TV나 스포츠와 같은 매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영화배우나 T.V 탈랜트나 가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에게 영광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도자의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 병을 고치는 것,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에 취직하거나, 삶의 질을 높이거나, 안정된 삶의 환경을 확보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 아닙니다. 최근 살면서 이런 문제를 삶의 근본적인 것인양 생각하면서 연연해 한 적이 없었습니까? 최근 내가 몰두한 삶의 문제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세상에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한 전도자의 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희망이 없고, 의미가 없고,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들은 없지만 사람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사람은 권태와 무의미와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죽기 살기로 일하다가 삶이 풍요로워지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지루해지는데, 이 지루함(권태)을 극복하기 위해 레저와 스포츠와 성적 유희에 탐닉하게 됩니다. 당신은 삶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를 직면하기 싫어 다른 어떤 것에 도피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종종 탐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삶은 거대한 서바이벌 게임장과 같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야근을 자처하는 것도 사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여기 참된 삶의 의미와 목표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과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이 됩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싶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방황은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생이 찾는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 안에 삶의 방향을 발견하십시오. 그것은 삶의 방황을 끝내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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