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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의 작품 속에 왕관이 많은 이유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 해골, 장기, 왕관 등 상징과 기호가 많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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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바스키아 – 나무위키
우리가 흔히 아는 이 뾰족뾰족한 왕관이 바스키아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은 훗날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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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바스키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미셸 바스키아(프랑스어: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 1988년 8월 12일)는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그라피티 예술가이다. 아버지가 아이티계,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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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 네이버 블로그
사모 SAMO (1980) · 무제, 해골 (1981) · 무제 (1982) · 융통성 있는 (1982) · 무제, 흑인의 역사 (1983) · 암 앤드 해머, 팔과 망치 II (1985) · 최후의 만찬,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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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 – 그림닷컴
앤디 워홀. Campbell’s Soup I: Tomato, 1968. 23,000 원. 워홀의 작품이 욕심이 나지만 무리할 형편은 되지 …
Source: gurim.com
Date Published: 1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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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아트] 1980년대 예술계를 뒤흔든 진짜 힙스터 <장 미쉘 ...
자동차와 비행기, 심플한 얼굴로 가득한 바스키아의 작품은 아이들 그림처럼 유치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질서하게 …
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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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장 미쉘 바스키아 작품
- Author: 예술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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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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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 해독하기 – 오픈에디션
Q. 작품보다 작가의 삶을 향한 관심과 영향력이 꾸준히 지속되는 아티스트는?
수년간 예술계와 패션계, 미술 애호가들의 한결같던 ‘앤디워홀’ 이란 대답은 어느새 과거의 것이 되고 바통을 이어 받은 아티스트가 있다. 그 중 몇 가지 사실 만으로도 더 흥미가 유발되는 팩트들.
세상을 떠난지 30년. 20대 후반에 작고했으며 활동한 8년여 기간 중 총 2500여개 작품을 남긴, 최고로 인기 있고 비싼 작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다.
패션아이템과의 협업은 물론 올해 초 천억원대에 원작이 팔리며 사망 후 몸값을 최고로 경신한 그이기에, 그의 작품이 왜 좋은 것인지 구구히 설명하는 일은 다소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수십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그에 관한 글과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웹페이지, 현학적 미술용어들로 나열된 글들도 영 읽히질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바스키아를 향한 분석도 뒤로 하고 내 취향에 잘 맞는지 아닌지도 걷어내고 사심 없이 그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 상징으로 채워진듯 보이는 그것들. 난해한 암호처럼 보이는 바로 그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나의 이 단순한 호기심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작품 속 몇 가지 기호와 텍스트에 접근해 보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1. 왕관
그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왕관 Crown 모양이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 모형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 대신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 과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 주관적으로 바라본 시선에선 야망 ambition 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존중보다 조금 더 나간 느낌의 야심과 자신감.
2. 사람 이름
바스키아는 특정 아티스트를 향한 존경과 친애를 직접적으로 담았다. 아티스트의 이름을 명시하거나 그 아티스트의 창작물 제목을 적기도 하며, 왕관을 씌워주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위 이미지 상 왼쪽부터 차례로, 색소폰 연주자 찰리파커 Charlie Parker, 권투선수 무하마디 알리 Muhammad Ali, 복싱선수 슈거 레이 로빈슨 sugar ray robinson 가 바로 그 대상이다. (첫번째 이미지 상 ‘Now’s the time’ 은 찰리파커의 곡 제목, PRKR은 찰리파커의 약어이며, 무하마디 알리의 본명이 Cassius Clay다.) 이들과 바스키아의 공통점이자 연결고리가 또 하나 있다. 바로 ‘흑인’ 이라는 것.
– 바스키아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냥 아티스트다.’ 라고 말한게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감이나 동시대 혹은 과거를 살았던 흑인 아티스트에 대한 연대의식과 존경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알파벳 A, 그리고 해골 형태
그의 그림 속 ‘AAAAA’ 형태로 등장하는 반복적인 이니셜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장 흔히 들리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와 바스키아의 첫 번째 흑인 영웅인 야구선수 행크 아론 Hank Aaron의 성 첫 글자의 의미도 포함된다. 해골 형태의 인물과 신체 부위들은 그가 여덟 살 때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당시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교과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의 영향을 받은 것.
– 어린시절에 머물러 있는듯한 순수함, 강박적이면서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강렬히 호소하는 듯한 감정이 느껴진다.
4. 바스키아의 언어들
그의 작품을 ‘낙서’ 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빼곡히 혹은 헐겁게 적어내려간 단어들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을 적어봤다.
alchemy, an evil cat, black soap, corpus, cotton, crime, crimée, crown, famous, hotel, king, left paw, liberty, loin, milk, pure, negro, cigar, nothing to be gained here, Olympics, Parker, police, PRKR, sangre, soap, sugar, teeth.
신비한 힘, 사악한 고양이, 검은 비누, 코퍼스, 면, 범죄, 왕관, 유명한, 호텔, 왕, 왼쪽 발, 자유, 둔부, 우유, 순수함, 흑인, 담배, 여기선 얻지 못할 것, 올림픽, 파커, 경찰, 피, 비누, 설탕, 치아.
– 단어들의 나열에서 오는 공통적인 감수성은 그의 유년기와 활동시기의 미국 상황 등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거나 그의 영혼 어딘가를 빙빙 돌며 그를 ‘놓아주지 않는’ 어떤 것들이다. 그는 어떠한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을 그대로 캔버스에 담았다.
작품 속 은유와 상징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일차원적으로 해독한 위 내용은 생전 작가의 인터뷰, 각종 문헌과 글을 종합한 후 주관적 감상을 덧붙인 것이다. 이런 특성들을 알아가는동안 나 역시 전보다는 바스키아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라는 시인의 어구가 때론 그림에도 통한다. 작가가 분방한 태도로 작업한 그림을 해독하고자 노력하는 사이 자연스레 그의 영혼이 감상자의 마음에 스미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소위 말하는 예술의 힘 power라는게 있다면 이런 것일까.
이런식으로 작가의 그림 속 기호들을 ‘해독’을 하는 방법과 과정은 작가에게 다가가는 일종의 노하우다.
물론 바스키아의 그림 속 몇 가지 기호와 문자들의 의미를 안 후에도 여전히 장님 코끼리 말하듯 막연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니, 이런 해독 없이도 바스키아의 세계관에 흠뻑 매료된 사람들은 이미 많다. 혹자는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특유의 거친 터치감과 저항정신이 느껴지는 무드가 취향저격이라고도 한다. 거기에 바스키아는 살아 생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의 표현방식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역사로 빛나는 인물이다. 당시 바스키아의 센세이셔널함이 여기에 있다면 오늘날 바스키아가 받는 사랑은 거듭 반복되는 그의 그림에 대한 해독과 접근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게 만드는 것, 한번 더 되돌아보게 만드는 마력. 바스키아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그가 펼쳐놓은 영혼의 모습, 즉 빨갛고 노랗고 네모지고 세모난 것들은 이런식으로도 사랑받고 재해석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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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일생을 담다, 장 미쉘 바스키아
그래피티(Graffiti)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벽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이다.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Graffito 가 어원이다. 그래피티는 고대 동굴 벽화나 이집트의 유적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거리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인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2011)는 휘갈겨 쓴 낙서처럼 보이는 캘리그래픽적 양식을 선보였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도 낙서의 표현법에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장 뒤뷔페(Jean Dubuffet) 또한 아웃사이더 아트로서 낙서 에 주목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관심과 더불어 현대의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탄생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콘브레드(Cornb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을 남긴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활동했고,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서도 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속도감 있게 그려진 문자와 그림들은 유쾌하고 상상력 넘쳤지만, 도시 미관의 입장에서 보면 골칫거리였다.
그래피티가 도시 문제에서 현대미술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1988)의 공이었다. 바스키아의 그래피티는 기존의 것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자전적 이야기를 시로 쓰거나 다양한 기호를 덧붙여 그래피티를 그린 뒤 SAMOⓒ(세이모) 라는 문구를 남겼다. 당시 뉴욕 예술계에서는 세이모 가 누구인지에 관한 관심이 뜨거워졌고, 바스키아는 등장과 동시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27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201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그의 <무제(Untitled)>(1982) 작품이 1억 1천50만 달러(약 1천 2백억 원)에 팔리는 등 미국 작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바스키아의 생애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어와 스페인을 구사한 어머니는 바스키아에게 두 언어를 가르치고, 바스키아와 함께 뉴욕의 여러 미술관을 다녔다. 1968년 바스키아는 차 사고로 비장을 심하게 다쳤는데, 입원 당시 어머니는 그에게 해부학의 고전인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을 선물했고, 바스키아는 책을 통해 인체의 구조에 매료되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뼈와 해골, 인체 그림은 이때 해부학책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장 미쉘 바스키아
[Photo : 작가 홈페이지]바스키아가 7살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아버지와 충돌이 잦아졌고, 그는 가출을 반복한다. 당시 친구인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뉴욕 소호 거리를 누비며 곳곳에 스프레이로 흔해 빠진 낡은 것 이라는 뜻의 세이모(SAMO, Same Old Shit)에 저작권 기호를 붙인 SAMOⓒ라는 문구를 남긴다. 세이모라는 문구와 그래피티로 표현된 그들의 철학적 시가 주목을 받으면서 1980년 그룹 전시인 <타임 스퀘어 쇼(Times Square Show)>를 통해 호평을 받고, 바스키아는 1981년
라는 이름으로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이후 PS1,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다양한 공간에서 전시를 개최했으며, 이외에도 카셀 도큐멘타 7, 휘트니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거리, 영웅, 예술
바스키아의 대표작으로는 <기도하는 사람>(1984), <흑인>(1986), <피렌체>(1983), <천국>(1985), <재즈>(1986) 등을 꼽는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미국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2021. 2. 7.) 전시에서도 그의 원화 150점을 살펴볼 수 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8.3×226.1cm, 1981
[Photo : 롯데뮤지엄]전시작 중 1981년에 그려진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은 바스키아 초기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텍스트와 드로잉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스키아가 문자를 쓰고 지운 흔적이 보이는데, 그 자체가 작품을 구성한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은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의 글씨를 쓰고, 지우고, 재배열하는 컷 업(Cut-up) 기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텍스트와 드로잉의 조합을 통해 뉴욕 풍경을 묘사하고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
“나는 더 잘 볼 수 있게 하려고 단어들에 선을 그어 지워버린다.”
– 장 미쉘 바스키아
장 미쉘 바스키아, <잡 애널리시스(Job Analysis)>, acrylic and oilstick on canvas, 141.5×187.5cm, 1983
[Photo : 크리스티]바스키아의 <잡 애널리시스(Job Analysis)>는 만화적 요소가 들어있는 작품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를 끌고 텔레비전이 각 가정에 보급되었으며, 영화와 만화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된 시기였다.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길 원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만화를 숭배하며 자신의 작품에 만화적 요소를 다양하게 등장시켰다. <잡 애널리시스>에서는 워너 브라더스의 <루니툰>에 나오는 포키(Porky) 캐릭터를 그렸으며, 이처럼 바스키아는 만화와 대중매체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문화적 기호로써 표현했다. 그는 또한 이 작품에서 만화 제작사인 UPA 프로덕션 로고를 작품 하단에 배치하고, 작품 곳곳에 만화와 관련된 텍스트를 넣기도 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1982
[Photo : 롯데뮤지엄]<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는 바스키아가 LA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법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기법적 측면으로, 바스키아는 이 작품에서 제록스, 콜라주, 아상블라주 등의 기법을 사용한다. 다른 작품에 붙여 재사용하는 제록스 기법은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를 무한 반복할 수 있는 방식이자 반복된 도상들을 각인시키는 바스키아만의 독특한 전략이다. 또 이미지들을 오려 붙이는 콜라주, 냉장고, 문짝, 창문틀 등 일상용품이나 폐품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아상블라주 기법은 2차원 평면의 캔버스를 3차원 공간으로 확장한다.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는 내용으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바스키아 재단의 이사로 재직 중인 큐레이터 리처드 마샬(Richard Marshall)은 바스키아의 작품 주제를 여덟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자전적 이야기, 흑인 영웅, 만화책, 해부학, 낙서, 금전적 가치, 인종주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흑인 영웅과 인종주의의 주제가 드러난다. 여러 패널을 이어붙인 이 작품은 크게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누어진다. 먼저 작품의 상단부에서는 검은색 왕관을 쓴 젊은 유색 인종 영웅이 등장하고, 정의의 저울을 들고 있는 사람과 천사의 모습도 눈에 띈다. 작품의 하단부에는 붉은색의 강렬한 터치가 눈에 띄는데, 새의 공격을 당한 잔인한 모습을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바스키아는 작품을 통해 인종차별을 당하는 유색인종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진정한 영웅이 된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 acrylic, enamel spray paint, oilstick, metallic paint and ink on canvas, 220.9×401.3 cm, 1981
바스키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는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인간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그렸다. 앙상한 인간과 끌려가는 소가 대비적으로 표현돼 있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바스키아는 인간이 동물을 점유하고 독점하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구가 인류세로 접어들며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현재 시점에서 다시금 곱씹어 볼 만한 작품이다.
앤디 워홀과의 만남과 죽음
바스키아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바스키아는 1982년 처음으로 워홀을 만났고, 그와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다양한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업을 하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드로잉과 텍스트를 덧입혀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이었다. 바스키아가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워홀과의 공동 작업에 나선 것도 있었겠지만, 미국 회화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화유산을 중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 회화의 유산에 그의 정통성을 덧입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낸 것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앤디 워홀, <무제, 두 마리의 개(Untitled, Two dogs)>, acrylic and silkscreen ink on canvas, 203.2×269.2 cm, 1984
[Photo : 롯데뮤지엄]하지만 바스키아에게 예술적 동지이자 아버지와 같은 버팀목이었던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1987~1988년 사이 그의 작품을 보면 붕대를 두르고 눈을 지워 버린 두상이나, 뼈대와 내장기관이 보이지 않는 인물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환멸과 패배의 메시지가 드러나며, 자기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그는 마약 남용으로 27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바스키아의 삶과 예술
1980년대 서구 미술에서는 기존의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경향과 해체주의, 절충주의, 다원주의 등이 나타났다. 당시 신표현주의나 트랜스 아방가르드로 분류되는 예술가들은 개인적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뉴 페인팅(New Painting)으로 나아갔다. 뉴 페인팅은 거대한 캔버스에 거친 붓질과 원색의 색채를 사용하고, 폭력, 죽음, 성(性), 꿈, 신화 등의 도상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비주류의 흑인 화가 바스키아는 뉴 페인팅의 방식으로 인종주의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했다.
“나는 작업 중에 예술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 관해 생각할 뿐이다.”
– 장 미쉘 바스키아
바스키아의 작품은 자신의 일생을 그대로 담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드러난다. 사회적 편견과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에너지를 담아 거리 예술을 현대미술로 확장한 바스키아. 비록 그의 생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한 여운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바스키아의 삶은 작품 그 자체가 되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미셸 바스키아(프랑스어: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 1988년 8월 12일)는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그라피티 예술가이다. 아버지가 아이티계, 어머니가 푸에르토리코계다. 그는 1970년대 뉴욕에서 그라피티 그룹 SAMO의 일원으로 처음 이름을 날렸다. 이후 사이 톰블리, 장 뒤뷔페 등의 영향을 받은 1980년대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1988년 8월 27세에 요절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암시적인 이분법'(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1] 그는 시와 그림의 전유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 비평을 긴밀히 결합시켰다.[2] 또한 바스키아는 작품에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음으로써 “개인에 대한 진실을 더욱 심오하게”[1] 하면서 사회에 뿌리박힌 권력 구조와 인종차별주의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계급 투쟁에 대한 지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냈다.[2]
생애 [ 편집 ]
장미셸 바스키아는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사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밑으로 여동생 리잔(Lisane, 1964년생)와 자닌(Jeanine, 1967년생)이 있었다.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 1930 – 2013.7.7)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출신이었고, 어머니 마틸데 안드라데스(Matilda Andrades, 1934.7.28 – 2008.11.17)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으로 브루클린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바스키아에게 맨해튼의 미술관에 같이 가고 브루클린의 미술관의 어린이 회원으로 등록시킴으로써 예술에 관한 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바스키아는 4살 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조숙한 아이였고 천부적인 재능의 예술가였다. 그의 선생님이자 예술가였던 호세 마차도(Jose Machado)는 그의 예술적 능력을 알아보았고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더욱 격려하였다. 11살 때, 바스키아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었다. 1968년 9월, 바스키아가 8살이 되던 해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차에 치어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비장절제술을 받았다. 회복될 동안 어머니는 가져다 준 그레이 해부학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미래에 예술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증명하였다. 부모님은 그 해에 이혼하였고 자신과 동생들은 아버지 밑에서 키워졌다. 가족은 브루클린 보럼 힐에서 5년 동안 살았고 1974년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이사하였지만 2년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가 13살이 되던 해 어머니 마틸데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병원을 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15살이 되던 해, 바스키아는 집을 나와 톰프킨스 스퀘어 공원의 벤치에서 잠을 잤고, 한 주 만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0학년 때, 에드워드 머로 고등학교(Edward R. Murrow High School)에서 중퇴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제라르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고 바스키아는 브루클린에서 친구와 함께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티셔츠와 손수 만든 우표로 자급자족하였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삶의 시작이었다.
미디어 [ 편집 ]
1996년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스키아가 만들어졌다. 바스키아 역은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했다.
각주 [ 편집 ]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바스키아의 작품은 1980 년대 도시 문화 환경을 배경으로 태어납니다.
농담, 허튼소리, 불량배, 애송이들과 동성연애자의 펑크 punk, 빈민가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의 ‘거리낙서’와 힙합문화의 상징 그라피티 graffiti, 느릿느릿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와 똥 싼 바지 Saggy Pants, 그 힙합 hip-hop이 발생한 곳이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 지구였고, 그곳에는 스트리트 컬처(거리문화)와 비보이와 브레이크 댄스, 랩뮤직과 비트박스, DJ, MC 등과 그라피티 등 힙합이 얽히고설킨 문화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 중심, 그 장소 중심에 바스키아가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을까? 그런 반 문화적 실천들의 중심에 바스키아의 스타 탄생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장 미쉘 바스키아, 제임스 딘이거나 피카소이거나
New York, New York, 1981,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8.3×226.1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장 미쉘 바스키아, 제임스 딘이거나 피카소이거나
천재, 낙서 그림, 요절로 상징되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이 한국에 온다. 국내 최초의 대규모 기획 전시다. 이보다 더 많은 바스키아의 작품을 볼 기회는 당분간 없을 것이다.
“작업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왕족(특권), 영웅주의 그리고 거리입니다.”
바스키아와 미술비평가 헨리 겔트잘러의 인터뷰 중에서
2017년 소더비 경매에 바스키아의 1982년 작품 ‘무제(Untitled)’가 출품됐다. 경매 참가자들은 미친 듯이 번호표를 들어 올리며 가격을 불러댔다. 최종 낙찰가는 1억1,050만 달러. 우리 돈 1,3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첫 문장부터 경매가를 들먹이니 속물로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미술 분야에서 작품 가격은 작가를 규정하는 숙명이자 포장지니까.
그런 점에서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란 이름은 그 자체로 최고의 상징이자 브랜드다. 그는 가장 비싼 그림을 파는 작가이고, 그의 전시는 여전히 많은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 Dmitri Kasterine. All Rights Reserved
누구라고? 바스키아?
바스키아에 대해 흔히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그가 불우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을 거라는 것이다. 아마 그가 흑인인 데다 ‘거리의 미술’이라 부르는 그라피티를 주로 작업했기 때문일 텐데, 사실 그는 회계사 아버지와 미술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중산층 가정의 소년이었다.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를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며 예술에 대한 경험을 탄탄하게 쌓도록 교육했다. 바스키아에게 어머니와 그림은 강한 연결 고리였다. 어머니와 함께 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처음 보고 화가를 결심했을 때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Old Cars, 1981, Acrylic, oil stick,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1.9×120.3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Untitled (Bracco di Ferro), 1983,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 supports, 182.9×182.9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그림을 외부에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시티 애즈 스쿨’에서 알 디아즈를 만나면서다. 그는 디아즈와 함께 그 유명한 낙서 크루 ‘세이모 ©( SAMO ©) ’를 결성했다. 이는 ‘Same Old Shit’의 약자로, ‘흔해 빠진 개똥 같다’는 의미다.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 그리고 몇몇 친구는 뉴욕 소호 거리를 캔버스 삼아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그린 낙서들은 단숨에 유명해졌다.
어려서부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던 바스키아는 이를 이용해 더 저명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에겐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같은 유명인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알 디아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명세 때문에 작업에 제약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었다. 결국 세이모는 해체했다.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라는 유명한 낙서가 당시 뉴욕 곳곳에 새겨진 이유도 그래서다.
이후 바스키아는 자퇴를 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가 굳이 거리로 나앉아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노숙을 한다.
뉴욕 브루클린 거리에 그려진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벽화 © shutterstock
바스키아가 워홀을 만났을 때
잘 알려진 것처럼, 바스키아 연대기를 쓸 때 앤디 워홀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마케팅의 천재인 워홀은 어린 바스키아의 천재성과 대중성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이상으로 바스키아에게 투자했다. 덕분에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은 껑충 뛰어올랐다. 원하던 대로 스타가 된 것이다.
동시에 두 사람을 둘러싼 여러 소문도 함께 입방아에 오르며 바스키아를 괴롭힌다. 1985년에 바스키아와 워홀이 함께 기획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과 함께 처참히 실패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는 커다란 금이 간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 없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형 전시도 개최한다. 그러던 중 워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이로 인해 약물중독에 빠진 바스키아는 워홀의 사망 1년 후인 1988년 8월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만다. 코트디부아르의 최대 도시 아비장으로 이주하기 엿새 전이었다.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나이인 만 27세였다.
“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마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당신의 악기는 어떻게 소리가 나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장 미쉘 바스키아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Victor 25448, 1987, Acrylic, oil stick, wax, and crayon on paper laid on canvas, 182.9×332.7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해골과 왕관이 가득한 그림
1980년 초 뉴욕 화단에 데뷔했으니 바스키아가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은 8년 남짓,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는 3,000여 점이라는 적지 않은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다.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 해골이나 인체의 구조, 왕관, 그리고 단어의 조합으로 된 메시지 같은 것들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8세가 되던 해, 바스키아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이란 책을 선물한다. 인체의 장기와 뼈 그림이 가득하던 해부학 교과서다. 이 책에 매료된 바스키아는 자신의 작품에 해골과 인체 구조, 다양한 기호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또 인종과 계급 간 불평등이 만연하던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성공한 유색인종을 캐릭터로 만들고 머리 위에는 존경과 권위의 의미를 담아 왕관도 함께 그려넣었다. 그런 해골과 왕관이 가득한 바스키아의 작품들을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바스키아 전시장 전경 ©롯데뮤지엄
바스키아 전시장 전경 ©롯데뮤지엄
서울에서 만나는 150여 점의 그림
10월 8일부터 롯데뮤지엄에서 <장 미쉘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전이 열리고 있다. 2021년 2월 7일까지 진행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있었던 바스키아의 전시 규모를 뛰어넘는 최대 규모인 15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는 바스키아 개인과 작품을 대변할 수 있는 세 가지 키워드 ‘거리’, ‘영웅’, ‘예술’로 구성했다. 뉴욕 거리에서 시작한 SAMO 시기부터 작가의 예술 세계에 드러나는 대중문화와 산업화의 방식, 영웅을 모티브로 작가가 창조한 다양한 아이콘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식과 시선으로 작업한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작품 등이 전시된다. 인생 파트너인 앤디 워홀과 함께 작업한 대형 작품도 볼 수 있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흐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그의 작품은 미술과 음악, 패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 재생산되며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비록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바스키아는 여전히 신화이자 거리의 영웅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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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티스트 장 미쉘 바스키아의 에너지와 열정, 섬세함과 고독까지
컬쳐 | 리뷰
2020-10-08
거리의 예술가, 반항기 가득한 천재 아티스트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바스키아만큼 천재성으로 똘똘 뭉친 아티스트가 또 있을까. 한 번도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어떤 아티스트보다 재능이 있었고 뛰어났던 장 미쉘 바스키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이 열린다.
장 미쉘 바스키아 Photo ⓒ Dmitri Kasterine. All Rights Reserved. Artwork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장 미쉘 바스키아는 자유분방한 붓질로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이미지를 그리며 그 안에서 뛰어난 조형감각과 색채감각을 선보였다. ‘바스키아’하면 ‘반항아’ 이미지에, 대부분 붓으로 무심하게 그린 듯한 왕관 이미지와 공룡 이미지가 떠올릴 테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훨씬 넓었고 그 의미는 깊었다. 1980년대 초, 작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 그가 27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남긴 작품은 3,000여 점 이상. 이번 전시는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하며, 150여 점의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사진 작품 등을 선보인다.
전시는 바스키아의 초기 작품을 선보이며 시작된다. 그는 친구인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SAMOⓒ를 결성, 뉴욕 거리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세이모(SAMO)는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으로 저작권 기호 ‘ⓒ’를 붙여 하나의 로고처럼 사용했다. 주류 미술계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세이모 작업으로 바스키아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1981,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collage on canvas, 128.3×226.1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 1981, Acrylic, oil stick,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1.9×120.3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세이모 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과 함께 전시된 바스키아의 초기 작품을 지나면 어린아이가 그린 것과 같은 이미지, 반복적으로 적힌 텍스트, 그것들을 다시 지우고 덮은 흔적 등 그의 특징들이 담긴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시된다. 그림을 그리고 텍스트를 적은 후 다시 지우는 그의 작업은 관람객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림과 텍스트를 조합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의 작업 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텍스트를 자르고 다시 재배열하는 것을 통해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컷 업(Cut-up) 기법처럼 바스키아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통해 내면을 표현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는 줄곧 영웅의 모습이 나타하는데, 바스키아의 대표적 이미지로 꼽히는 왕관과 공용 역시 영웅을 나타낸 것이다. 바스키아의 어린 시절의 꿈은 만화가로, 만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에선 만화적인 이미지와 함께 배트맨, 슈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의 이미지도 볼 수 있다.
, 1982,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을 다니며 보았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아프리카계 인물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아프리카계 인물을 대부분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가 가장 존경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야구 선수 행크 에런, 아프리카계 미국인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 등이 영웅의 모습으로 작품에 표현됐고, 그는 고난을 견디고 세상의 변화를 일으킨 다양한 영웅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가 창조한 영웅의 도상과 초상화에는 삶과 죽음, 폭력과 공포, 빛과 어둠이 투영된 시대상을 담겨 있다. 바스키아는 동물의 모습을 통해 자연을 파괴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다루기도 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클럽에서 디제잉을 하고 밴드를 만들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비밥(Bebob) 재즈를 가장 좋아했는데, 비밥의 선구자인 찰리 파커의 이름으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무엇을 그리든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나가는 바스키아와 즉흥적으로 연주가 이루어지는 비밥 재즈의 감성이 잘 어우러진다. 자유로움 안에서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색감과 형태는 그를 천재화가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 1983,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supports, 182.9×182.9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바스키아의 작품에선 인체의 뼈 구조도 자주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를 당하고 크게 다친 바스키아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있는 동안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해부학 책 <그레이의 해부학(Gray's Anatomy)>이 큰 영향을 미쳤고, 그는 뼈 구조와 장기의 형태들로 폭력, 죽음, 공포 등을 그렸다.
가장 왕성했던 활동을 했던 중기 시절을 보여주는 메인 전시실엔 더욱 과감하고 화려한 느낌의 대형 작품들이 전시된다. 캔버스뿐 아니라 나무 패널, 문짝 등, 거리로 나가 직접 수집한 재료에 그림을 그린 그는 새의 깃털을 이용해 노예 고문 사건을 기록하며 폭력과 편견을 이겨낸 아프리카인들의 모습을 영웅화하기도 하고, 이슬람 신화를 통해 영웅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전시장 곳곳에서 발견되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은 노숙자들이 사용했던 호보 사인(hobo sign)으로, 17세에 가출을 해 거리 생활을 하기도 했던 바스키아의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메인 전시 공간. 아래 사진 맨 우측에 있는 작품이
다. 이 메인 룸에서는 2000억에 달하는 작품
가 전시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로 알려진 제프 쿤스와 데이비드 호크니를 뛰어넘는 최고 낙찰가다. 해당 작품을 비롯해 이번 전시 작품들은 모두 호세 무그라비 컬렉션의 소장품들로, 바스키아의 작품은 2017년부터 더 높은 가격으로 오르고 있다고 한다. 인쇄, 대중매체의 증가는 문화뿐 아니라 예술에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바스키아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볼 수 있다. 바로 제록스와 콜라주, 아상블라주 기법으로 이루어진 작업들이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그림이나 텍스트를 복사하고 이를 오려 붙이는 제록스 기법을 선보였고, 그림이나 텍스트를 그리고 지웠듯이 복사한 이미지를 오려 붙이고 찢어내며 또 다른 매체들을 조합시켜 작업을 했다.
바스키아는 거리에서 주운 패널, 문짝 등 다양한 재료에 그림을 그렸다.
여러 예술가들을 상징하는 초상화가 그려진 접시 작품들도 전시된다. 레스토랑에서 즉석으로 지인들의 얼굴을 그려주었던 작품들과 그와 친분을 쌓았던 주변 예술가들의 초상화, 피카소, 달리, 백남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접시 작품 등이다.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은 특별한 관계로,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을 잘 따르며 의지했고, 앤디 워홀은 바스키아로 인해 드로잉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바스키아가 작업 초기 거장 앤디 워홀에게 엽서를 판매한 이야기부터 마음을 터놓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앤디 워홀의 기록을 통해 공개하며, 이들이 함께 공동작업한 작품들 5점을 선보이기도 한다. 키스 해링, 케니 샤프 등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아티스트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이 공동작업한 작품도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는 바스키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작품만큼 중요한 자료다. 바스키아의 삶과 작품 세계 모두를 담은 이 영상의 상영시간은 1시간 30분으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하다. 17세의 나이에 가출을 했고, 거리 생활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회계사 아버지와 예술가적 소질이 있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바스키아가 3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내용부터, 거리의 예술가로 시작해 시작과 동시에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된 그가 강박적일 만큼 끊임없이 그림을 그린 모습, 두려울 것 없어 보이지만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느꼈을 부담과 압박, 워홀과의 공동작업 전시에 대한 혹평, 앤디 워홀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후 그가 죽음을 맞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그와 함께 했던 친구, 동료, 아티스트들을 통해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스타가 되길 원했고 자신을 반항아로 생각하는 것을 즐기며, 스스로를 ‘전설’이라 말한 그는 자유와 사회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로 가득 찬 작품을 통해 20세기 시각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스키아는 사회적인 편견, 억압에 대해 자신만의 언어로 대항했고, 그의 자유와 저항정신, 그리고 감각적인 이미지는 장르를 불문하고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다 보면 그의 섬세한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바스키아를 천재라 부르는 이유를 알게 할 이번 전시는 10월 8일부터 2021년 2월 7일까지 롯데뮤지엄에서 개최되며, 입장료는 성인 15,000원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시간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는 사전예약제로 운영되며, 언택트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에디터_ 최유진([email protected])
사진제공_ 롯데뮤지엄
[모두의 아트] 1980년대 예술계를 뒤흔든 진짜 힙스터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
장 미쉘 바스키아의 회화와 드로잉, 조각, 세라믹, 사진 등 150점의 작품을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본 회고전이 열렸다. 지하철 벽에 스프레이로 그래피티를 휘갈기던 10대 소년에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천재 화가가 되기까지.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며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그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 보자.
2021년 2월 7일(일)까지
10시 30분부터 20시까지(마지막 예약 회차 오후 18시 30분, 입장 마감 19시)
롯데뮤지엄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000원
New York, New York, 1981,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collage on canvas, 128.3×226.1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자동차와 비행기, 심플한 얼굴로 가득한 바스키아의 작품은 아이들 그림처럼 유치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질서하게 휘갈긴 단어가 뒤섞이며 긴장감이 높아지고,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구성에 미술계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바스키아의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텍스트와 자유로운 드로잉은 뉴욕의 번잡한 거리를 묘사한 이 작품에서도 에너지를 뿜어낸다.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바스키아가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로 여행을 갔을 때 그린 그림이다. LA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여러 개 나무판자를 이어 붙이고 이등분한 화면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담았다. 검은색 왕관을 쓴 유색 인종 영웅, 저울을 든 사람, 천사의 모습이 위 화면을 메웠고, 아래 화면에는 타르와 깃털로 붉게 물들인 잔인한 공격성을 표현했다. 이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Untitled (Bracco di Ferro), 1983,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supports, 182.9×182.9cm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거대한 팔로 악당을 무찌르는 만화 캐릭터 ‘뽀빠이’의 ‘무쇠 팔(Bracco di Ferro)’의 골격과 근육, 힘줄의 움직임을 거칠고 자유롭게 표현한 작품.
바스키아의 가장 어린 시절 기억은 만 7세에 차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던 장면이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 팔과 다리의 형태는 그 교통사고와도 연관이 있는데, 큰 수술로 장기간 병원에 입원하며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입문서로 뼈와 장기, 근육 등 해부학 지식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보면서 인체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뼈와 해골, 신체기관으로 풀어냈다.
Victor 25448, 1987, Acrylic, oil stick, wax, and crayon on paper laid on canvas, 182.9×332.7cm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1982년 바스키아는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과 만난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 작업을 할 정도로 친밀해진다. 하지만 1987년, 수술 합병증으로 워홀이 죽자 바스키아는 큰 상실감을 느끼며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1988년 약물 과다로 죽음에 이른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말기 작품으로, 1988년 마지막 개인전에 전시된 것이다. 바스키아 작품 속 특징인 유색 인종, 로고, 실험적인 단어, 비유와 상징이 한 번에 나타난다. 작품의 제목인 ‘Victor 25448’은 승리를 의미하지만 대조적으로 작품 속 인물은 패배한 듯하다. 유색 인종이 겪는 잔혹한 현실, 앤디 워홀의 죽음에 슬픔에 빠진 바스키아 자신을 나타낸다. 마치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하다.
Photo © Dmitri Kasterine. All Rights Reserved. Artwork ©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 York
: What is the subject matter of your work?
: Royalty, Heroism, and the Streets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장 미쉘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을 다니며 수많은 명화를 감상하고, 미술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아왔다.
1977년부터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을 담은 그래피티 그룹 ‘SAMO©(세이모)’를 결성해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후 대규모 그룹전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대외적으로 선보였다.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한 그의 작품은 개인전에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을 팔았을 정도.
바스키아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간 약 3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린아이처럼 자유분방한 화법, 이질적이고 거친 이미지를 혼합한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의 사랑을 받아온 그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를 뛰어넘는 최고 낙찰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 롯데뮤지엄
사진 제공 롯데뮤지엄
전시장에서는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협업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미술관 방문이 어려운 관람객을 위한 언택트 교육 프로그램도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으며, ‘엑소’ 찬열과 세훈의 목소리로 듣는 전시 가이드는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예술을 27세로 압축해 살다간 바스키아 1조원대 작품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
롯데뮤지엄 바스키아 회고전
회화·조각·드로잉 등 150점
‘거리’‘영웅’‘예술’로 조명
“30년 흘러도 신선하고 세련”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늘 스타가 되기를 꿈꿨다. 찰리 파커, 지미 핸드릭스 같은 우상들을 떠올리며 이들이 스타가 된 과정을 꿈꿨다.”
미국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1960~ 1988)가 남긴 말들이다. 바스키아는 1980년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8년이라는 짧은 기간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고작 27세에. 미술계에 등장할 때부터 사망한 순간까지 “유명한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스타성은 30여 년이 흐른 지금 더 굳건해졌다.
지난 2017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 작 회화 ‘무제(Untitled)’가 1억1050만 달러(당시 약 1248억원)에 낙찰됐다. 미술품 경매 최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의 기록 1억794만 달러(2025억원)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1980년대 이후 작품 중 1억 달러를 넘은 첫 작품이자, 미국 작가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장 미셸 바스키아·거리, 영웅, 예술’ 전이 8일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개막했다.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바스키아의 회화와 드로잉 등 150여 점을 소개한다. 국내에서 바스키아 전시는 2006년, 2013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렸지만, 이번 전시는 초창기 시절부터 전성기와 유작을 모두 아우르는 국내 최대 규모다.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이티공화국 출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이다. 그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다닌 덕에 바스키아는 다빈치부터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그림을 가까이서 접하며 자랐다.
예술가 바스키아에게 그의 어머니가 끼친 영향은 미술관 관람에 그치지 않는다. 1968년 만 7세 때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을 때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를 선물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이때의 경험과 연관됐다고 본다. 이후에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봤고 인체에 대한 탐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세이모(SAMO©)’. 바스키아를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키워드다. ‘흔해 빠진 낡은 것’이란 뜻으로, 1977년부터 바스키아가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만든 가상 인물이다. 두 사람은 ‘SAMO©’라는 이름으로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낙서하며 권위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뉴욕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익명’으로 남고자 했던 알 디아즈와 ‘스타’가 꿈이었던 바스키아는 세이모 활동에 대한 이견으로 결별했다. 이후 우편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1982년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미술가에서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했다. 1985년 앤디 워홀과도 협업 전시를 열었고, 이후 1988년 코트디부아르 이주를 준비하던 중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아이가 거칠게 낙서한 듯이 자유분방한 화법이 도드라지는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제작된 지 30여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여전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텍스트와 드로잉을 조합하며 스프레이, 오일, 파스텔, 크레용, 유화와 아크릴 물감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화면에 즉흥성과 리듬감을 더했다.
1981년 작 ‘뉴욕 뉴욕’도 그중 하나다. 뉴욕의 번잡한 거리를 묘사한 이 작품엔 왕관 형태와 얼굴, 암호 같은 글자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당시 비평가들은 “유치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했지만, 지금 평단에선 “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으로 추앙받는다.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도 눈여겨볼 만하다. 1981년 첫 유럽(이탈리아)개인전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거대한 화면에는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형상의 인간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으로, 동물의 죽음을 통해 자본주의 소비 사회를 비판해온 바스키아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현재 이 작품 가격은 약 2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이번 전시 작품은 대부분 뉴욕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호세 무그라비의 소장품이다. 작품가만 1조원에 달한다. 전시를 기획한 구혜진 롯데뮤지엄 큐레이터는 “바스키아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를 즉흥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조합했다”며 “함축적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이미지와 탁월한 색채 감각은 지금 보아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세련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7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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