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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인 선조 102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것으로 미국 이민을 시작한 지 119주년을 맞은 해입니다. 지난 1월 13일에는 이를 기념하는 ‘한인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현재 미국 내 한인 인구는 한국 외교부 통계로는 254만 7천 여 명, 2019년 기준 미국 연방 센서스의 공식 통계로는 190만 8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공식 통계로 봤을 때 2000년(122만 8천 명)에 비해 55.4% 2010년(170만 7천 명)에 비해서는 11.8% 늘어난 겁니다.
이 통계를 보면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LA로 32만 6,000명으로 나타났고 2위는 뉴욕 22만 명,
3위는 9만 6천 명을 기록한 워싱턴으로 조사됐습니다. 그 뒤로는 시애틀 6만 7천 명, 시카고 6만 2천 명,
샌프란시스코 6만 명, 애틀랜타 5만 천 명, 필라델피아 4만 2천 명, 달라스 4만 천 명 등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들 가운데 80%는 10년 이상, 57%는 21년 넘게 미국에서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한인 사회의 중심은 이민 1세대를 넘어 2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LA 한인회의 경우 지난해 처음으로 이민 2세인 ‘제임스 안’씨가 한인회장으로 선출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안 회장을 통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과 한인사회의 현 주소를 짚어봤습니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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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한인회 #미국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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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뉴욕 한인 커뮤니티 보고 느낀 대로 (1) – 브런치
한국에서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사회 계층을 표현하지만 … 미국 전체 인구 3억이 약간 넘고 한인 인구가 유에스 센서스 통계에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5/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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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풍경] 미주 한인사회, 한국의 새 정부에 바란다
매주 금요일 북한 관련 화제성 소식을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입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미주 한인사회가 재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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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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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의 역사 > 아메리카 > 미국의 재미한인 > 구한말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일단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 … 그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의 지적・정치적 지도자로서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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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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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미주한인사회 어떻게 변할 것인가 – 재외동포신문
현재 미국 한인사회는 과거 1세대 중심에서 1.5세대, 2세대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LA 현지에서 YTN News FM100.3을 운영하고 있는 유대식 대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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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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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회총연합회(美州韓人會總聯合會)
1903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한인친목회를 계승하여 1977년 창립된 미주한인사회의 대표단체이다. 설립 이래 현재까지 미국 내 지역별 한인들의 연대를 도모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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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고] 총구의 끝, 미국 한인사회 겨누다 – 월드코리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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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배우고 더 잘사는 2세대’… 美 코리안 드림 세대교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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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맨티카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정체성(1916∼1925)
둘째 맨티카 거주 한인들이 만든 민족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와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 주목하여 이들의 정치·사회·경제적 활동을 검토하였다. 셋째 미국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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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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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미국 한인 사회
- Author: KBS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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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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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화 뉴욕 한인 커뮤니티 보고 느낀 대로 (1)
한인 이민자들 많이 거주하는 플러싱
우연히 블로그 댓글에서 얘기를 나누다 한국 젊은 층의 우울한 얘기를 듣고 한국 기사를 읽었다. ‘헬조선’ ‘망한민국’, ‘조선불반도’,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 등 요즘 세태를 풍자한 표현에 놀라 잠들지 못한 밤이 되었다. 헬조선 탈출은 ‘이민’이 정답인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이민을 가면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거라 단정한 듯 보인다.
과연 이민은 그런가. 이민에 대해 얼마나 깊게 알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개 이민은 ‘ 더 좋은 삶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해’, ‘직장에서 해고된 경우’나 ‘개인적으로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경우’ 고국을 떠나온다. 우리 가족 역시 이민이 뭔지 모르고 뉴욕에 왔다. 무에서 시작해 벼랑 끝으로 몰린 게 어디 한 두 번 뿐인가.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을 풀어야 한 단계 앞으로 나간다. 다른 나라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가기는 왜 그리 어려운지.
부자 나라에 가면 더 멋진 삶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냥 얻어지는가. 부자 나라에 가면 더 좋다는 것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예외는 있다. 귀족들은 지구촌 어디에서나 멋진 삶을 펼쳐간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뉴욕에서 자주 파티를 열고, 자주 명품 쇼핑을 하고, 레스토랑 순례를 하며 지낸 분도 있다.
뉴욕은 어떤 도시인가.
거대한 자본이 춤을 추는 도시가 바로 뉴욕 맨해튼이다. 빈부 차이가 뉴욕만큼 큰 도시가 얼마나 될까. 한국에서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사회 계층을 표현하지만 과연 뉴욕은 빈부 차이가 없을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자의 삶을 볼 수 있는 곳이 뉴욕이다. 매일 맨해튼에 가면 뉴욕 홈리스를 보게 된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프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불행하고 등 양극의 상황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뉴욕 빈부 차이가 엄청 크다. 우리 가정이 롱아일랜드 부촌 딕스 힐 이나 제리코에서 살면서 본 미국 가정의 부잣집 이야기는 한국에서 보고 들은 적이 없었다.
뉴욕은 ‘잠들지 않은 도시’ 라 한다. 지하철 24시간 운행한다. 편리하다. 밤늦도록 파티가 열리고 밤늦게 일한 직업이 있다. 늦은 밤 맨해튼에서 일하고 지하철 타고 귀가할 수 있다. 이른 아침 지하철 타려고 플러싱 메인 스트릿에 가면 맨해튼에서 플러싱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밤새 잠 안 자고 일한 자들이 많을 거라 짐작한다.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밤에 일하는 급여가 낮에 일하는 급여보다 더 높아서 낮과 밤을 바꿔 지낸 분이 있다. 간호조무사는 막노동에 가깝다. 엄청 힘든 직업에 속한다. 침대 정리와 환자 목욕 등 다 혼자 맡아서 한다. 체중 엄청난 환자를 맡은 경우 간호조무사 허리가 다칠 수 있다.
뉴욕은 다인종이 거주한 도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된 도시다. 다시 말하면 경쟁력이 엄청나다. 능력 없이 살아남기 힘들다. 예를 들어 줄리어드 스쿨은 세계적으로 명성 높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한데 모여 오디션을 치른다. 소수 학생들만 입학 허가를 받는다. 경쟁률이 높다. 이민자가 많이 모여든 노동 현장도 치열하다. 예를 들어 한인 H 마트 경우 임금이 더 저렴한 조선족이나 다른 인종을 채용한다. 물론 한인들도 많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조선족이 한인보다 임금이 더 저렴하므로 식당에서 일한 조선족이 많다고 한다. 비즈니스는 영리 목적이므로 임금이 더 저렴한 직원을 채용한다. 다인종이 거주하므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미국은 능력제 사회다. 언제든 고용주가 직원 해고할 수 있다. 풀타임 직원이라도 고용주가 해고 가능하다는 말이다. 취업 비자받은 경우 해고당하면 당장 미국을 떠나야 한다. 직원이 상사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엄청 심하다. 월가 경우 초기 신입 직원이라도 연봉이 많지만 1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을 하고 몇 년 이내에 그곳을 떠난 자가 더 많다. 극소수만 살아남은 무서운 사회다.
그럼 이제 한인 사회를 보자.
여기 이민자들의 도시 뉴욕에서 내가 10년 동안 지내면서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려고 한다. 먼저 한인들이 많이 종사하는 직업군과 자녀 교육 문제를 말해보자. 70년대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분 상당수는 델리 가게, 청과상, 생선가게, 세탁소 등을 운영했다. 특히 델리 가게 경우 거의 24시간 오픈. 거의 쉬지 않고 죽음 같은 노동을 하며 지내며 성공한 분도 있다고 들었다.
한인 이민자들 가운데 성공한 소수도 있다. 이민 1세 경우라도 월가에서 일한 경우도 있고, 메트에서 활동한 세계적인 성악가도 있고, 대학 교수로 지낸 분도 있고,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분도 있고, 자녀가 줄리어드 학교에 다닌 경우도 있다. 성공한 한인들은 소수에 해당한다. 성공한 그들은 그냥 장밋빛 생을 이뤘을까.
이민을 오면 언어 장벽도 높고 쉽게 직장 구하기 힘드니 아무 일이나 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했던 경우라도 한인 마트에서 짐 나르는 일도 하고 주차장에서 발레 파킹도 하고 종일 세탁소에서 일한 분도 있다.
처음으로 플러싱에 방문했을 때 세상에 여기가 뉴욕이야 하면서 믿을 수 없었다. 맨해튼과 퀸즈 플러싱은 지하철 타면 1시간 이내 거리이지만 색채가 너무 다른 도시다. 플러싱은 힘든 이민자 삶이 그대로 노출된다. 수 십 년 전 한국 시골 같은 풍경이다. ‘시간이 멈춘 도시’ 란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삶을 어떻게 숨길 수 있을까. 삶이 그토록 어렵고 무겁다는 말이다. 실제 플러싱을 보면 이민 사회에 대해 통감한다.
한편 이민 1세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부모와 자녀 문제가 있다. 부모가 죽도록 일한 경우 자녀와 거리가 멀게 된다. 미처 자녀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된다. 이민 1세는 언어 문제가 큰 장벽이고, 자녀와 문화가 다르고, 자녀는 자녀대로 미국 문화에 바로 적응하지 못해 문제가 많으나 부모는 자녀 고충을 들어줄 시간이 없고, 자녀는 대화를 나눌 대상이 없어 탈선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설사 들어준다고 해도 서로를 이해할 끈을 놓치는 경우도 많다. *< 이민 가정 부모와 자녀 소통 문제>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다.
롱아일랜드에 아주 명성 높은 한인 미장원이 있었다. 자주 이용했던 곳이고 그곳에서 원장은 롱아일랜드 한인 가정 자녀 문제가 심각하다고 자주 말씀했다. 마약 등 여러 문제가 너무 심각하나 부모와 자녀 대화 단절로 고등학교 학생 비행으로 이어진다고. 어디서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했다. 교회에 가면 그런 얘기가 많이 들린다고 했다. 뉴욕에서 오랫동안 미장원을 경영한 분이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놀라서 전화를 하니 비즈니스가 안되어 문을 닫았다고 했다.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잘되도 너무 잘된 미장원이었기에.
한인들 손재주는 잘 알려져 있고 미장원을 하는 한인들도 많다. 또한 네일 가게 역시 한인들 손재주가 유명하다. 한동안 네일 가게 사업이 아주 잘 되었다고 하나 점점 더 다른 민족이 네일 산업에 뛰어들고 결국 경쟁률이 높아져 네일 사업도 운영하기 어렵다는 말도 들린다.
자녀 교육을 위해 이민을 왔는데 탈선으로 이어진 경우 실망스럽고 삶의 의미 조차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울증을 경험하는 분도 많다. 수년 전 연구소에 근무할 적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혼인구가 의외로 많아 놀란 적도 있다. 자녀 친구들의 가정을 보면 역시 이혼 가정이 많다. 그럼 이토록 힘든 이민의 어려움과 고통을 어디서 해결할까.
아주 많은 이민자들은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찾는 곳이 종교단체다. 미국 전체 인구 3억이 약간 넘고 한인 인구가 유에스 센서스 통계에 의하면 170만 정도( 외교통상부 통계와 약간 다르고). 뉴욕 뉴저지 한인 인구는 약 25만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뉴욕 뉴저지 한인 교회가 오래전 560 개 정도? 다(오래전 한인 사회학 교수가 발표한 책에 의하면). 이민 정착 과정도 힘들어 교회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고 교회를 통해서 이민 온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한인 교회 인구가 정말 많다.
이민을 오면 경제적인 문제도 크지만 또 다른 문제가 고독이라고 한다. 서로 대화를 나눌 친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다들 바쁘니 만날 시간이 없다. 늘 교회 일에 바쁜 목사는 자신 가정 돌보는 일에 시간이 부족하니 목사 부인은 어려움에 처하고, 목사 자녀들 마찬가지로 아버지랑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는 말도 들린다.
재외한인의 역사 > 아메리카 > 미국의 재미한인 > 구한말~일제강점기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일단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한인이민에서 한인들을 하와이로 끌어들인 흡인요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값싼 노동력에 대한 필요였다.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모집되었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제법령(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그들의 이민이 중지된 후에는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990년경에는 전체 하와이 노동자들의 80%를 차지하면서 보다 높은 임금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백인 농장주들은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에서 이민자들을 대용 노동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결국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한편으로는 값싼 노동력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의 파업 파괴자(strike breakers)로서 유입된 것이다. 101명의 한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 가량이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결혼 연령의 여성들이 태부족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910년부터 한국에서 신부들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사진만을 보고 결혼한다하여 ‘사진신부’라고 불렸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한인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그리고 115명의 신부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총각들만 있던 한인 사회가 신부들의 유입으로 가정을 이루게 되자 2세들이 태어나고 가족 중심의 사회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인들은 사탕수수 노동자 또는 도시 주변 일용 노동자로부터 벗어나 보다 장기적인 사업 분야(예를 들어 자영업, 쌀농사, 고구마 농사 등)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 본토의 철도 건설 현장이나 과수원들에서 일하면 하와이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903년부터 1915년까지 총 1,087명의 한인들이 본토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사진신부는 한인사회에 반드시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아내의 연령차가 평균 14년이 되기 때문에 한인 부부간에 높은 이혼율을 유발하였으며 부인들이 일찍 과부가 되는 문제점 등을 낳기도 하였다.
초기한인이민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미국으로 건너 간 정치 망명자들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가량의 학생들이 신분으로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사회의 지적・정치적 지도자로서 부상하였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 한인 이민 사회는 1945년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하와이에는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특별히 캘리포니아)에 3,000명가량이 미국 주류 사회와는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였다.
향후 미주한인사회 어떻게 변할 것인가
LA YTN News FM100.3 유대식 대표
현재 미국 한인사회는 과거 1세대 중심에서 1.5세대, 2세대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LA 현지에서 YTN News FM100.3을 운영하고 있는 유대식 대표를 만나 향후 100년 미주 한인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들어보기로 한다.
“한국인의 미국 이주는 IMF사태 전까지만해도 상승세였는데 그 이후는 보합세에요. 한국 경제력이 성장한데다 90일 무비자 정책이 시작되면서 필요할 때 얼마든지 올 수 있게 된 영향이 큽니다. 조기유학 또한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주가 줄어든 반면 한인사회의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인사회 상권도 1세 위주에서 1.5세~2세 위주로 변하면서 상권의 성격도 크게 변하고 있다고 유 대표는 말한다.
“식당을 예로 들면 과거 1세들을 대상으로 하다가 현재는 2세와 그 친구들인 현지인을 대상으로 변하고 있어요. 뉴욕 지역에서는 이미 그런 변화가 있었는데 이제 LA 한인사회도 점차 현지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분위기가 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향후 한인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일본처럼 주류사회에 동화가 되어 굳이 모국 커뮤니티가 필요없는 상황으로 변할 수도 있을까? 유 대표는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전망한다.
“이민 현상이 증가하지는 않겠지만 이민자는 계속 있을 것입니다. 과거처럼 생계형 이민자는 없어지고 전문직 위주의 계획이민이 늘어날텐데 이들을 중심으로 한인사회는 계속 유지될 것으로 봅니다. 현재 미국 경기가 안 좋다보니 주류사회에 진입했다가 다시 한인사회로 돌아오는 젊은 층들도 많이 있고요.”
거칠게 비교하면, 미국사회에 거의 동화된 일본과 투자이민자들이 대거 증가하면서 차이나타운 중심으로 발전하는 중국의 중간 형태로 한인사회가 발전할 것이라고 유 대표는 내다 본다. 그러나 한인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커뮤니티는 이미 사라졌다고 말한다.
“90년대 초만해도 LA 한인회장 뽑는 투표소에 사람이 모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투표에 관심도 없고 안 합니다. 그래서 무투표 당선자들이 많아요. 물론 지역사회에 봉사활동 하는 한인회들도 있지만 그게 과연 교포사회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교포들은 한인회가 있는지, 한인회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요.”
교민들의 투표가 저조한 것은 현지 정치인들도 똑같이 겪고 있는 고민이다. “현지 정치에 몸 담고 있는 한인들은 동포들이 한인회나 한국 선거에 투표하는 것보다 현지 유권자등록을 해서 미국 현지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어요. 그런데 유권자 등록률 자체가 저조해요. 한인들의 정치 참여율이 높으면 동포들에게 관련되는 예산도 커지고 권익 신장에도 도움이 많이 될텐데 그에 대해 일반 동포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한인정치인들과 관계자들이 꾸준히 노력하고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정치의식이 확산된다면 지금보다 주류사회에서 목소리를 강화하는 쪽으로 발전하리라고 유 대표는 전망한다.
“그렇게 되면 친목 및 취업, 비즈니스까지 다 한인사회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많은 동포들이 주류사회에 진입해서 현지인들과 폭넓게 소통하고 자연스럽게 한인사회의 지위도 향상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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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회총연합회(美州韓人會總聯合會)
1903년 안창호가 설립한 한인친목회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안창호는 1905년 ‘공립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친목과 정치력 신장을 목표로 하며 ‘공립신보’라는 신문을 발행했고, 1909년에는 하와이 한인친목회와 통합 발족하여 ‘대한인국민회’라는 명칭 하에 친목과 정치력 신장을 도모하였다. 이후에 국민회는 전 미주 10개 단체를 병합하고, 1919년 박용만 대표 하의 ‘대한독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국의 3·1운동 이후 흥사단, 독립협회 동지회(1921년 이승만 대표)가 국민회로 기능이 흡수되어 독립군 군자금 30만 불을 모금하여 전달하였다.
1941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를 기반으로 9개 한인 연합회가 통합돼 ‘해외한인연합회’로 개칭되었고, 1942년에 다시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10개 연합 한인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위원회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워싱턴 DC등 지역별 한인회를 창립하였다.
1977년 이도영 초대 대표 하의 미주지역한인회협의회가 창립되었다. 뉴욕, 펜실베니아, 뉴저지, 코네티컷, 인디애나, 워싱턴 DC 등 각 지역의 대표가 있었고 회장 임기는 1년이었다.
1978년에는 시카고한인회 출신의 박해달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LA한인회 출신의 3대 회장 구한모 임기 시에는 ‘미주한인회총연합회’로 명칭을 개편하고, 대의원 제도를 채택했으며 전 미주 교포 단합대회를 개최하였다.
현재 워싱턴,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필라델피아, 아틀랜틱 시티, 달라스, 덴버, 휴스턴 등지에서 총회를 개최하며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해외기고] 총구의 끝, 미국 한인사회 겨누다
최윤주 달라스 코리아타임즈미디어 발행인
고요한 평일 오후, 즐거운 TV 소리 사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졌을 공간에 검은 그림자가 닥쳤다. 갑자기 열린 문, 검게 들이닥친 그림자,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그리고 울려 퍼진 귀를 찢는 총성. 1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에 평화는 재앙이 되어 무너졌다.
2022년 5월 11일(수) 오후 2시경 달라스 한인타운 심장인 로얄레인 중심부에서 벌어진 ‘헤어월드’ 총격 사건은 상상조차 끔찍한 재앙이다.
범인이 사용한 총은 주머니에 숨길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총기 종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개된 사진만 봐도 ‘권총’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경찰은 ‘대형 라이플’과 같은 무기의 일종이라고 밝혔다.
범인의 타겟은 명확해 보인다. 사건이 벌어진 상가 전면에는 5개의 업소가 있다. 미용실은 왼쪽 끝에 위치한다. 범인은 상가 끝 미용실 문을 열고 입구에서 총을 쏜 후 곧바로 달아났다.
범인의 인상착의는 이번 사건이 우발적 행동이 아님을 증명한다. 상하의는 물론 머리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감쌌다. 누가 봐도 무기인 장총을 들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헤어월드로 직진했다. 총을 쏜 후에는 다른 움직임 없이 다시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를 타고 도주했다.
이유가 있든 없든, 목적 유무에 상관없이, 한인타운 한복판에 위치한 헤어월드를 타겟으로 삼은 것만은 분명하다. 다행히 총알은 모두 비켜 갔다. 현장에 있던 3명의 한인 여성이 부상을 입었지만 모두 손이나 발에 맞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불행 중 맞이한 다행이다.
사건을 접하며 끔찍한 상상이 이어진다. 헤어월드에서 몇 발걸음만 옮기면 달라스 한인타운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식품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상에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미국에서 총기사건은 그야말로 일상다반사다. 해마다 3만 명이 총 때문에 죽고, 30만 건의 총기 관련 사건이 일어난다. 총기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큰 사건이 아니면 신문에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도 지금껏 달라스 한인사회에서 총기 사고는 언론에서나 접하는 ‘남의 일’이었다. 금품을 노린 권총 강도를 겪은 한인 사업주들의 사례는 간혹 있었지만,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대낮 총격 사건은 달라스 포트워스 한인사회 역사상 유례없는 전대미문의 일이다.
달라스 경찰국은 FBI와 공조를 이루며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했지만, 경찰이 공개한 용의자 인상착의 자료로는 범인색출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한인사회 결속이다. 현상금을 올려 범인 검거에 추진력을 더해야 한다. 한인 업소를 범죄 대상으로 삼을 경우 한인사회 전체가 ‘내 일 같이’ 하나된 힘으로 대응한다는 본보기를 만들어야 한다.
“총기 소지는 헌법으로 보장되는 미국인 개인의 고유권한이다. 연방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주정부와 지방정부도 이 권한을 침해할 수 없다.” 2010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내린 판결문이다. 미국인의 총기 소유는 헌법이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주정부도 지방정부도 개인의 총기 소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국가와 법의 완벽한 보호 아래 미국의 총기 비극은 멈출 기미가 없다. 개인의 총기 휴대를 법제화한 수정헌법 2조가 비준된 후 200년을 훌쩍 넘는 긴 시간 동안 총기 논란이 지속하는 가운데, 오늘도 평균 95명이 총기 관련 사고로 죽고 그중 24명이 총격 때문에 사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달라스 한인들은 오금 저리는 총구의 끝이 우리를 향해 있는 오늘을 경험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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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배우고 더 잘사는 2세대’… 美 코리안 드림 세대교체 중
지난해 10월 5일 ‘세계 한인의 날’을 기념해 뉴욕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 근처에서 진행된 ‘코리안 퍼레이드’에서 취타대가 행렬을 이끌고 지나가고 있다. 뉴욕한인회 제공
박용 뉴욕 특파원
지난달 1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제60주년 ‘뉴욕 한인의 밤’ 행사. 뉴욕한인회 제공
지난달 13일(현지 시간)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연회장. 입구에 ‘뉴욕한인회’란 한글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다. 이날 뉴욕주와 코네티컷주, 뉴저지주에 거주하는 한인 500여 명이 미주 한인 이주 117주년을 기념해 ‘제60주년 뉴욕 한인의 밤’ 행사를 열었다. 머리가 희끗한 이민 1세대부터 날렵한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 입은 젊은 한인 2세들이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찰스 윤 뉴욕한인회장(57·변호사)은 개회사에서 “오늘 참석자의 60% 이상이 이민 1세대의 자녀인 1.5세대(16세 이전 미국 이민)와 2세대(미국 출생)다. 1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하는 한인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신영주 뉴욕한인회 본부장은 “올해 행사의 참석자와 모금액이 한 해 전보다 50%씩 늘었다. 한 참석자는 회사 이름으로 무려 2만5000달러(약 3000만 원)를 기부했다”고 말했다. 노·장년층이 주도했던 뉴욕한인회에 대대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윤 회장은 10대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민 1.5세대다. 그는 60년 역사를 지닌 뉴욕한인회의 첫 1.5세대 회장이다. 임원진도 젊어졌다. 현재 집행부 임원 12명 중 9명이 1.5세대와 2세대다.이 중 20대 여성 부회장도 있다. 한인회 홍보를 맡고 있는 애리 김 뉴욕한인회 부회장(24)은 “한인회가 아직 ‘어른들의 단체’란 인식이 강하다. 더 포용적이고 더 많은 다양성을 지닌 단체로 만들고 싶어 참여했다”고 설명했다.뉴욕대 대학원생인 김 부회장은 한인회 소셜미디어를 운영한다. 한인회 영문 뉴스레터를 만들고 한국어에 서툰 청년 한인들을 껴안기 위해 2세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한인회 스마트폰 앱을 영어로 쓸 수 있게 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지난해 말 뉴욕 퀸스의 퀸스한인회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열 살에 이민을 온 존 안 씨(41)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도 취임사에서 “1.5세와 2세들의 참여를 더 늘려 ‘젊은 한인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뉴욕 한인 사회는 젊어진 한인회에 거는 기대가 크다. 2015년 4월 뉴욕타임스(NYT)는 1개 면을 털어 당시 가치가 약 1500만 달러였던 첼시 소재 뉴욕한인회관의 처리 문제로 빚어진 한인회 내분과 한인회장 탄핵 사태를 조명했다. NYT는 “뉴욕 지역 한인회장들은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가 뉴욕을 방문할 때 그들을 호스트하는 역할을 한다. 또 자신의 직위를 한국에서 국회의원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고 꼬집었다. 이민 1세대인 K 씨(62)는 “한인회 내분과 갈등이 NYT에 대서특필된 후 한인 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다. 젊은 세대들이 한인회를 ‘꼰대 단체’로 여기고 멀어진 결정적 계기”라고 했다.한때 젊은 세대가 외면했던 한인회에 왜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로 미주 한인 사회 인구 구성 변화가 꼽힌다.미국 정부는 1965년 국적에 상관없이 평등한 이민 기회를 부여하는 새 이민법을 시행했다. 이후 한인들의 대규모 이민이 시작됐다. 1980년대에는 한 해 약 3만 명씩 이주하면서 미주 한인 사회가 급격히 팽창했다.이후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연간 이민자 수는 2만 명대로 떨어졌다. 이민자 수가 줄고 한인 사회의 고령화가 시작되면서 1세대 비중이 줄고 1.5세대와 2세대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재외한인사회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한국계 이민자 중 이민 1세대 비중은 약 48%다.이들의 직업 및 소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세대는 음식점, 건강관리, 교육, 세탁업 등에 주로 종사했다. 이들의 자녀인 2세대는 미국식 교육을 받고 컨설턴트, 의사, 변호사 등으로 일한다. 퓨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에서 태어난 25세 이상 한인의 대학 졸업자 비중은 85%로 1세대(72%)보다 높다. 2세대의 빈곤율은 10.5%로 1세대(14.2%)보다 낮다. 2세대의 가구당 소득 중간값은 6만8900달러로 1세대(5만7000달러)를 훨씬 웃돌고 있다.언어 장벽이 없고 미국 문화에 익숙한 젊은 한인들은 한인 사회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예전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입신양명을 추구하지도 않는다.2018년 미슐랭가이드에서 별 1개를 받은 맨해튼의 유명 식당 ‘꽃(COTE)’의 대표는 한인 1.5세 사이먼 김(김시준·37)이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호텔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돌아와 ‘코리안 스테이크’란 새 장르를 개척했다. 과거 그의 부모도 뉴욕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김 사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난 음식을 날랐다. 일식당 ‘노부’처럼 세계에서 알아주는 한식 브랜드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올가을 남부 플로리다에도 매장을 열 계획이다.특히 한인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자)는 과거 세대보다 한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크다. 민병갑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 석좌교수는 “1960, 1970년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에 비해 1980, 1990년대 태어난 한인들이 한국 문화에 애착이 크고 한국계란 정체성도 뚜렷하다. 한국의 경제력과 영향력이 커지고 미국 사회의 인종적 거부감이 줄어든 영향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젊은 한인들은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 및 한류 전파의 첨병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동욱 KOTRA 뉴욕 부관장은 “젊은 한인이 세운 스타트업들은 한국의 5세대(5G) 이동통신, 정보기술(IT) 산업의 기술력을 미국 현지 콘텐츠와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고종 황제의 손녀이자 의친왕의 딸인 이혜경 여사는 “한인회가 1960년대 초창기에 비해 점점 탄탄해지고 커지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한인 사회에 관심을 갖는 게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아쉬운 점은 아직 미국 사회에서 한국계의 정치적 위상이 약한 편이라는 사실이다. 미 의회 아시아계 의원은 2016년 15명에서 2018년 12명으로 줄었다. 그중 일본계와 인도계가 각각 3명으로 가장 많다. 한국계는 앤디 김 하원의원(38·민주·뉴저지) 단 1명에 불과하다. 그는 지난해 1월 1993∼1999년 3선(選)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 전 의원(81·공화·캘리포니아)에 이어 20년 만에 워싱턴 의회에 입성했다.한국계 이민자보다 이민 역사가 수십 년 앞선 일본계 이민자들은 2, 3세대 인구 비중이 높다. 또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아시아계 인구가 많은 주에 주로 거주해 오래전부터 의회에 진출했다. 김 의원은 “더 많은 한국계가 미 정계에 진출해야 한다”며 “정치와 외교에 관심이 있는 한인 청년들의 멘토가 되고 싶다”고 강조한다.한미 관계 증진을 위한 비영리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캐슬린 스티븐스 이사장 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미 관계에서도 한국계 이민 2세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정보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젊은 한인들이 미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비중이 늘면서 타인종과의 결혼도 잦아지고 있다. 이에 따른 민족성 소멸 및 쇠퇴 우려도 제기된다. 민병갑 교수는 “이민자 수가 줄고 타 인종 간 결혼이 늘고 있는 한국계는 미국에서 민족성 소멸 위험이 높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배척받는 이민자에서 미국 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유대계는 대대적인 투자 및 자체 통계 작성 등을 통해 자신들의 박해 역사를 널리 알렸다. 특히 출신국에 상관없이 유대계 핏줄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이들을 적극 포용해 민족성을 유지해왔다”며 한인 사회가 이를 참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이를 바탕으로 최근 미국에서 자란 약 12만 명의 한인 입양인 등 다양한 한국계 미국인을 껴안으려는 노력도 뒤따르고 있다. 입양 후 부모의 이혼, 신청 누락 등으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한인 입양인은 약 1만8000명.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한인 사회가 이들 입양인을 포용해야 한다. 미 의회에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 문제는 인권 문제’라는 점을 적극 알리고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박용 뉴욕 특파원 [email protected]
미국 맨티카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정체성(1916∼1925)
이 글은 1910∼20년대 캘리포니아 북동부의 맨티카에 거주한 한인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글이다. 첫째 1916년 맨티카에 한인이 이주한 배경을 사탕무 경작과 관련하여 살폈다. 둘째 맨티카 거주 한인들이 만든 민족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와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 주목하여 이들의 정치·사회·경제적 활동을 검토하였다. 셋째 미국의 1920·1923년 토지법으로 인한 맨티카 한인이 재이주와 한인사회의 약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캘리포니아 북동부에 위치한 맨티카에 60여명의 한인이 이주한 것은 1916년 초였다. 스프렉클 슈거(Spreckels Sugar) 회사가 맨티카에 설탕 공장을 짓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탕무를 재배를 위한 토지를 제공하면서 캘리포니아의 각지에서 농업과 노동을 하던 한인이 맨티카로 몰려들었다. 맨티카의 한인들은 맨티카에서 1∼2, 5∼6 마일 떨어진 농촌에 정착하여 1916년 1,265에이커, 1917년 1,320에이커, 1918년 821에이커에 사탕무를 재배하였다. 사탕무 재배 자 중에서 이익을 본 사람의 경우 1916년의 경우 인당 150∼200달러의 이익을 보았다. 특히 김원택은 600에이커에 말 60여 필과 농구를 갖추고 100여 명의 일꾼을 고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4월 20일 미주 한인의 자치기관 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맨티카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그 소속 한인들은 1916년 11월 자치규정을 만들어 한인의 언어·행동·생활 태도를 바로게 함으로써 미국인의 무시와 멸시를 없애고, 경무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고 순찰구역 지정을 통해 확보하고,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국어학교인 한흥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소속 한인들은 국치기념일, 대한인국민회 창립일, 추도식 등에 참석하여 망국민의 슬픔을 달래는 것과 아울러 애국가, 독립군가를 함께 부르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미군에 지원한 후 참전하여 향후 미국의 지원을 얻어 독립전쟁 참여를 꿈꾸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는 스탁톤, 트레이시 거주 한인들과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자금의 제공과 대한여자애국단의 조직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윌로우즈 항공학교의 비행사 양성 지원, 일제의 식민통치 비판, 국어학교의 교재인 『초등독습』의 편찬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2월 12일 지방교회인 맨티카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목회는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와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와 선교를 한 황사용과 임정구가 담당하였다. 특히 임정구는 1917년 9월부터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무를 담임하면서, 오클랜드·스탁톤·트레이시 지역의 교회 일도 처리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는 1917년에 교인 51명, 예비교인 11명, 주일학교 교사 40명, 엡웟청년회원 26명이 있었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인들은 미국 감리교 본부와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 교인들의 도움을 얻어 1918년 9월 독립교회를 세웠다. 맨티카의 교인들은 신앙 활동과 아울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여성교인들은 1918년 맨티카한인여자전도회를 창립하고 전도와 아울러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여성의 권위를 신장하려 하였고, 어린 아동과 학생을 위해 주일학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은 1920년과 192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으로 인해 토지의 임차가 금지되어 도시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등지에 재이주하여 여관업 등 장사를 하였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맨티카 한인의 재이주로 맨티카 거주 한인이 격감하자,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는 1921년 해체되었다. 그리고 교인의 수도 줄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는 스탁톤·트레이시의 교인들과 함께 통합관리되었다. 그리고 국어학교도 1920년대 초 폐교되었으며, 1924년 교회에 의해 부활되었으나 존속이 어려웠다.
This article is about the ethnic lives and national movements of Koreans in Manteca, northeastern California, from 1916 to 1925. First, I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Koreans’ migration to Manteca in 1916 and their economic lives. Second, I reviewed their political activities putting emphasis on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Manteca. Third, I reviewed their religious activities in connection with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Fourth, I contemplated about the Manteca Koreans’ re-migration and weakening of the Korean community, due to the Land Acts of 1920 and 1923, and the Immigration Law of 1924. It was in early 1916 that about 60 Koreans moved to Manteca of northeastern California. As Spreckels Sugar Company built a sugar factory in Manteca and provided land for the cultivation of sugar beet to secure raw materials, Koreans who were working and farming in all parts of California flocked to Manteca. The Koreans of Manteca grew sugar beet at 1,265 acres in 1916, 1,320 acres in 1917, and 821 acres in 1918. Those who benefited from the sugar beet growers saw profits of $150-200 per person in 1916. Especially, Kim Won-taek did beet farming in 600 making use of 60 horses, and hired 100 workers. The Koreans of Manteca established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April, 1916. They made a self-governing rules for mutual friendship, and established and operated the ‘Hanheung School’, a Korean language school. The Koreans of Manteca, who generally participated in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did a lot of national activities. They attended at the founding day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and other memorial services. By them, they promoted national awareness and anti-Japanese spirit by singing the national anthem and the independent military song together. They applied the U.S. military in 1917 at the end of World War I, In mid-March 1919, they held a meeting for celebrating the decl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The Koreans living in Manteca founded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a local church. The ministry of it was headed by Hwang Sa-Yong and Im Chung-gu, who had pastoral and missionary work in San Francisco and Oakland.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had 51 members of the church, 11 pre-schools, 40 teachers of Sunday school, and 26 members of the Ebworth Youth Association in 1917. Members of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established the Independence Church in September 1918 with the help of the American Methodist Headquarters and Korean-Americans living in California. In addition to religious activities, the Manteca believers prayed for the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In 1918, women Christians founded the Manteca Korean Women Exhibition Association. And they tried to increase women’s authority by doing national movements along with evangelism, and also operated Sunday School for young children and students. By the way Koreans of Manteca had to travel to cities because of the Alien Land Acts of 1920 and 1923, and the Immigration Law. Rich people did business such as inns in cities. However, poor people earned their living by working in rural or urban areas. The re-immigration of Manteca Koreans resulted in a drastic decrease in the number of Koreans living in Manteca. In consequence,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as disbanded in 1921. And the number of church members decreased, so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was integrated with the church members of Stockton and Tracy. And the Korean language school was closed in the early 1920s, and was revived by the church in 1924, but it was difficult to surv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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