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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2 예수께서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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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누가복음 11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6/22/2022
View: 3455
누가복음 11 KLB – 기도 – 하루는 예수님이 어떤 – Bible Gateway
누가복음 11. Korean Living Bible … 11 하루는 예수님이 어떤 곳에서 기도하셨다. … 11 너희 중에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며.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9/20/2022
View: 1486
2020/05/08(금) “누가복음 11:27-36” / 작성: 정한조
본문 누가복음 11:27-36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 …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2/3/2021
View: 1517
누가복음 11장 강해설교 – 네이버 블로그
성령은 우리를 변함이 없는 항구적인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내적인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힘을주시고 봉사와 전도의 힘을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6/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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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장 주석 – 다음카페
누가복음 제 11장 =====11:1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 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22/2021
View: 5056
매일말씀묵상. 2월 25일. 누가복음 11장. – 하늘품은교회
누가복음 11장. 기도는 신앙 수준을 반영한다. 1. 주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제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6/27/2021
View: 3015
이렇게 기도하라 누가복음 11장 1절-13절, 큐티자료 오늘의말씀 …
성경 : 누가복음 11장 1절-13절, 개역개정성경.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
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5/2/2022
View: 3963
20210206 겉과 속 (누가복음 11장 37-54절)
20210206 겉과 속 (누가복음 11장 37-54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기록된 명령 외에도 자기들이 임의로 추가적으로 지켜야하는 명령들을 만들었습니다 …
Source: cpcgl.org
Date Published: 6/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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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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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2.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pfTGTXOgvs
누가복음 11
기도를 가르치시다(마 6:9-15; 7:7-11)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1)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2)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와 바알세불(마 12:22-30, 43-45; 막 3:20-27)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3)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4)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5)재물을 나누느니라 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복이 있는 자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마 12:38-42; 막 8:12)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3)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3)표적 밖에는 보일 3)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3)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마 5:15; 6:22-23)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6)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2020/05/08(금) “누가복음 11:27-36” / 작성: 정한조
본문 누가복음 11:27-36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
복이 있는 자(27-28절)
오늘 본문은 3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 대해서, 몸의 등불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27-28절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14-26절의 ‘바알세불 논쟁’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귀신이 들려서 말을 하지 못했던 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건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를 힘입어 그 일을 하는 것이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정문일침을 가하는 말씀에 감격한 한 여인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이 여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까지 보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어머니를 축복하는 것을 통해서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어머니의 돌봄과 헌신이 없이는 바르게 자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메시아를 낳고 기른, 복이 있는 사람, 복의 사람의 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철저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 결과로 그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해서 남편을 통하지 않고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서 사는 동안 내내 사람들로부터 “글쎄, 남편도 없이 아기를 낳았데?”라는 말을 들어야 했을 것이고, 경멸의 눈초리, 곱지 않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성령님을 통한 잉태를 수용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은 평생 고난의 터널과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갈 것에 대한 결단과도 같았습니다.
또한 헤롯대왕의 ‘아기들을 찾아 죽이라’는 명령을 피하여, 마리아는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헤롯대왕이 죽을 때까지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었을 때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성전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다시 성전으로 되돌아가 아들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말씀을 간직하고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또 예수님의 공생애 중 첫 표적이었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도, 마리아는 철저하게 아들이자, 주님인 예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 잔치에서 흥을 돋게 하는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고,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그 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아들 예수님의 제자, 아니 구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때까지 고통을 깊이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에 자신의 온 생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복을 받은 사람, 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여인의 감격스러운 고백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도 마리아처럼 진정한 복을 받은 사람, 복의 사람의 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을 악한 세력과 세속적 가치관이 염탐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믿음을 채울 때, 우리는 날이 갈수록 복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악한 세대가 구한 표적(29-32절)
29-32절은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탄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시던 때를 ‘악한 세대’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 21세기를 살고 계신다면, 이 시대를 무엇이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쾌락이 최상의 가치관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대한민국 한복판에 서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그뿐만 아니라 신문의 정치면, 경제면, 사회면, 교육면, 문화면 등을 보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요? 무엇보다도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이 시대를 ‘인류 역사상 가장 악한 시대’라고 규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시를 ‘악한 세대’라고 규정하셨던 것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가창력이 좋은 가수에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신 노래 한번 해보시오.”라고 하면, 그 가수는 노래는커녕 몹시 언짢아할 것입니다. 그 가수가 백번 양보해서 노래했고, 아주 잘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한 곡 더 해보시오.”라고 말한다면, 더 나아가 잘 못 부르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요구하거나,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부르라고 하는 것은 그 가수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그 가수는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요구했던 것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요나 선지자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당신께서도 3일 동안 무덤 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30-32)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했고, 남방의 여왕은 솔로몬의 말을 듣고 그 지혜에 머리를 숙이고 돌아갔는데, 요나 선지자를 거기로 보내고, 솔로몬에게 지혜를 준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3일의 물고기 배 속과 3일의 무덤 속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요나 선지자에게는 소명, 즉 니느웨 사람들에게 들려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3일 만에 나온 것이 표적이 아니라, 바로 요나 자신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은 아무리 잔혹한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단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신 사건 자체만 표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 표적이 되셨는데,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 세속적 가치관을 이루기 위해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습니다. 또 표적을 구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지혜를 더 의존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33-36절)
33-36절은 눈을 등불에 비유하여 진리인 복음을 밝히 볼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고대에는 불을 켜는 도구가 아주 귀했습니다. 부싯돌을 이용하기도 하고, 두 나무를 서로 문지르기도 했습니다. 켠 불을 유지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고, 불을 꺼뜨리는 것을 수치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외출할 때도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씨를 최소한으로 하여 밀실 안이나, 됫박 속에 두곤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을 켜서 어쩔 수 없을 때 밀실이나 됫박 속에 두기도 하지만, 그것이 불을 켜는 목적이 아니라 켠 불은 등잔대 위에 두어서 집을 들어오는 사람이 그 불빛의 도움을 받아서 생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우리 신체 중에서 ‘눈’을 강조합니다. 우리 속담에 눈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씀에서 말하는 ‘눈’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진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르면 인생이 밝을 것이고, 나쁘면 인생이 어두움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성하다’는 ‘좋은’, ‘분명한’, ‘순전한’ 등의 뜻이 있는데, 본래 항해할 때 쓰던 용어였습니다. ‘한 목적지’, ‘한 방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향해 ‘한 목적지’, ‘한 방향’을 가지면,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삶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35-36)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평생 말씀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실재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애써 부인하고,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초점을 맞추며 보기를 원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실상은 조상 때부터 내려온 전통과 자신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며 살겠다고 고백하기에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혹시 우리의 삶은 어둡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주님의 빛으로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복되도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진정한 복의 사람, 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표적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삶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표적, 하나님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빛이 되게 하셔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삶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으로 누리게 된 복은 무엇이었습니까?
2. 사람들의 본성은 주님께 늘 표적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표적이 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졌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로 어떤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십니까?
3. 예수님께서는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가장 밝은 곳은 어디입니까? 반대로 가장 어두운 곳은 어디입니까? 그 어두운 곳을 어떻게 밝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4. 삶 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므로, 자신의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어 가며,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누가복음 11장 강해설교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눅11:1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기도하는 생활을 하셨고, 특별히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언제나 기도하신 모습을 우리는 그의 공생애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처럼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닮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 왜 기도하셨는가?
1) 기도하시는 예수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1절) 예수께서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본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하는 생활로 일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주님은 새벽에도 기도하시고(막1:35), 저녁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마14:23) 그리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눅6:12) (2) 주님의 기도생활은 산에서도 하셨지만 들에서도 하셨습니다. 집안에서도 하시고 무덤 앞에서도 하셨습니다. (3) 주님은 혼자서도 기도하셨지만 대중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4) 주님은 중대한 일을 앞에 놓으신 때에는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세례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려 하실 때 먼저 광야에 나가셔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고(막1:12,13),사도를 선택하시기 전에도 밤을 세워 기도하셨으며(눅9:28,29),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제자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셨으며(눅22:41-44),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주님의 생활의 일부였으며, 그 행동의 근거였습니다.
2) 예수께서 왜 기도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왜 기도하셨을까요? 과연 주님께서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인성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성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굶주리기도 하시고(마4:2;눅4:2), 피곤을 느끼기도 하셨고(요4:6), 밤이면 잠도 주무셔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인간들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므로 아들이신 예수께서 아버지와의 영적 교통을 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생활은 모든 믿는 자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한 목적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그런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들도 주님처럼 기도하시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간단한 기도 내용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세례요한도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며 영적 자원을 공급받습니다.
2.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긷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절).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외에 실제적 생활에 대한 간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달라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경외심의 표현 (2) 하나님의 통치적 은혜의 지상에서의 확산 (3) 일용할 양식의 공급 (4) 사죄 (5) 시험에서의 승리 등입니다. 마6:9-13의 주기도문에 있는 송영과 아멘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기도문은 공생애 초기에 산상보훈의 일부로 가르치신 것이지만 누가복음에서도의 기도문은 그보다 훨씬 후에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3.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그것은 구속의 은총에 대한 찬양과 감사이며 (2) 죄의 고백과 사유의 간구이며 (3) 사명에 대한 자각의 강화와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요청이고, (4) 신적 능력에 대한 욕구와 충족이며 (5) 필요에 대한 기대와 그의 충족으로 인한 감사일 뿐만 아니라 (6) 하나님과의 인격적 접근이며, 영적 결합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주기도문 눅11:2-4
예수님은 일생을 기도가운데 사셨습니다. 기도가 아니면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으며, 기도가 아니면 당신의 사역을 끝맺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른 어느 복음서 기자보다 누가는 이처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중 특별히 본문에서는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당신만의 독특한 기도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의 기도를 가리켜 흔히 ‘주기도문’이라 부릅니다.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에도 나타나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매우 간결한 것이 누가복음에 나타난 ‘주기도문’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세례요한등을 비롯한 수많은 랍비들의 기도문과 비교하면 그 간결함과 탁월함은 더욱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이제 이러한 ‘주기도문’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듯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주님은 기도는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듯이 구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라는 기존 구약의 사상인데 주님께서 다시 언급하시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 조문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이러한 사상을 약화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관계성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도 첫머리에서 기도의 본질을 규명하시는데,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기도의 목적 역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과 자비의 성품은 만족되어야 하며, 그 영역은 확장되어야 합니다. 궁긎거으로 그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아니하다면 그것은 기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만족되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의 관점으로 돌린 것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세상의 모든 불의가 척결되고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평등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종교적인 극단으로 흐르고 개인적인 극단으로 흐르는 기도는 성도에게서 마땅히 제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파수군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하여 충성스런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3. 물질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께서는 여기서 결코 많은 재물이 우리의 앞날을 보장하지 못함을 가르치십니다. 많은 재물이 행복을 보장할 것이며, 행복을 약속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가르치십니다. (눅12:20) 그리고 우리의 매일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일이 하나님의 세심한 보살핌과 돌보심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의탁하는 아침기도와 저녁의 감사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기도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러한 중요한 기도를 너무도 쉽게 빠트립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할 줄 압니다.
4.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성도의 바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이웃과의 관계개선 없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임을 말씀합니다. 물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화해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당당히 우리의 죄 용서를 청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 받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양심과 최소한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실리 만무합니다.
5. 인간의 연약함을 염려하시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시험을 능히 감당하고 이겨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리고 사탄의 세력은 끊임없이 우리를 쓰러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빠져들지 않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마태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6:13)라고 첨언함으로써 시험에 빠졌을 때를 대비하여 기도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구하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 눅11:5-8
이 비유는 사복음서 중 본서에서만 나오는 기도에 대한 비유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본문의 내용은 가난한 유대인 가정의 모습입니다. 여행중인 친구가 밤늦게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있는 친구집으로 밤중에 떡을 빌리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친구 역시 부요한 살림살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이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친구를 위해 일어나 문빗장을 열려고 하면 온 가족이 다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친구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간절한 청원에 못이겨 비록 가족의 안면을 방해하는 귀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그 친구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자비심도 없고 이기적인 인간의 경우에도 강청하면 마지못해서라도 요구를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는 진리가 담긴 내용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게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13절)
1.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은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언제나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인간도 친구의 강청함에 못이겨 잠자리에서도 일어나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데, 하늘에 계신 선한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열심히 구하라는 것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았더라'(창1장)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 자녀들에게도 좋은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은 모든 것이 좋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시103:3-5)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재물의 복을 주시며, 질병을 고치시고, 내 생명을 파멸에서 건지시는 것, 이 모두가 좋은 것이요, 찬송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하신 말씀에서 명백히 알수 있듯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므로'(롬8:16),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게 되어 그의 자녀가 되며, 또 후사가 되어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비참한 지경에서 헤어나오지 못햇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도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이므로(요15:26) 그가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진리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빈궁이나 질병이나 불명예나 비난의 말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3. 구하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9절).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아버지의 처분과 눈치만 살피는 아들은 못난 아들입니다. 당당하게 요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요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갈4:6,7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의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좋은 것을 요구할 권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들이 아닌 남이 무엇을 요구한다면 한두번은 도와줄 수 있어도 매번 그를 도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요청하는 도움을 아버지는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눅11:9,10
본문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연속되는 (1-13절) 교훈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주님은 이에 앞서 기도는 ‘강청’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8절) 그 요령을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9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강청하는 기도의 단계가 나타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하신 이 기도에 대한 교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기도의 단계
1) 구하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9절) 기도의 첫단계는 마음으로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먼저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게 됩니다. 이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는 (1)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마6:5,6) (2) 겸손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눅18:10-14) (3) 끈기있게 해야 하며(마7:7-12;눅22:44) (4) 열심으로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하며(마7:7-12) (5)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21:22) (6)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엡6:18) 기도는 주께서 하라고 명하셨으며, 또한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찾으라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9절). ‘찾는 기도’는 ‘구하는 기도’보다 행동적인 기도를 뜻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구하는 기도를 한 다음에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행동으로 하는 기도가 뒤따라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기도하고 행동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불성실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했다면 우리 자신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열심히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한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바를 노력으로 찾아야 합니다.
3) 문을 두드리라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9절). 구하고 찾은 다음의 마지막 단계는 문을 두드리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기도의 성취단계를 가리킵니다. 이 문은 응답의 문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문입니다. 기도는 3차원의 세계에서 하지만 기도의 상달과 응답은 4차원의 세계에서 이루어져 다시 그것은 3차원 세계 안에서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4차원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기도의 원리는 기도의 점진적인 열도와 단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응답의 문이 열릴 때까지 해야 하는 기도의 끈기를 으ㅟ미하기도 하며 기도의 점진적인 영적 차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 반드시 응답되는 기도
1)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10절) 이 말씀은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약속하셨고,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응답을 전제로 합니다. 응답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는 독백일 뿐 그것은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인류의 역사는 이 기도와 응답의 함수 관계에 의해서 전개되어왔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 인간에게 구속ㅇ늬 은총을 내리게 하시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게 하였습니다.
2) 기도는 영적인 교통이므로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는 그가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본질적으로 죄 아래 있는 영혼이므로 거룩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의 응답은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의 기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3) 아버지와 자녀간의 생명적 유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갖는 생명적인 유대이므로 그 기도의 응답은 확실한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절) 자녀들의 요구를 부모들이 들어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요15:16)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 눅11:11-13
본 장에서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치시고(1-4절), 적극적으로 간청하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신(5-10절) 주님께서는 본문에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교훈해 주십니다. 바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응답의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게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정하십니다. 아버지가 배고픔을 못이겨 간청하는 아들에게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수 없으며, 알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수 없듯이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에 대해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곧 배고픈 아들의 요청을 듣는 아버지의 심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같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도하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거절치 않으심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여기서 ‘아버지’의 일반적인 속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라면 모두가 그러한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악한 품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은 해악을 끼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 만큼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배고파 우는 아이의 간청을 돈을 아끼고 절약하기 위해 거절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우리 아버지는 사랑과 인자가 뛰어나신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선하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아버지이십니다ㅏ. (요3:16) 그러한 아버지께서 우리의 청을 거절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우리의 청을 거절하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2. 속이지 않으심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이 말씀은 두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배고픈 자들의 모습입니다. ‘생선’이나 ‘알’은 모두 식량입니다. 즉 아들은 지금 배고픈 상태에 놓여 있으며, 자신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정당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지나침이 없고 욕심이 없는 기도에 대해 주님은 속이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이들의 간구를 아버지가 농으로 받아들이며 그와 비슷한 전갈이나 뱀을 주지 않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이 정당하고 필요한 간구를 귓전으로 흘려 듣지 않으십니다. 세상으ㅢ 군왕들은 약자들을 노리개로 여겨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농을 부리기도 하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법이 없습니다. 그분의 성품은 변함이 없으시고 늘 진실하십니다.
2. 죽이지 않으심
생선과 뱀, 알과 전갈은 비슷한 모양이면서도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지탱하고 유지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속에 들어가서 인간의 힘이 되어 줍니다. 그러나 뱀과 전갈은 그 반대입니다. 뱀과 전갈은 양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대신에 단절시킵니다. 뱀이나 전갈에는 동일하게 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체내에 들어가서 인간의 생명을 먹어버립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자의 생명은 죽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아들에게 뱀을 주어 죽게 만드는 아버지가 없다면 자비하신 하늘의 아버지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 주님께서 뱀과 전갈을 등장시킨 것은 역설적인 표현 방법으로 오히려 생명을 부여하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 좋은 것으로 주심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가 ‘성령’으로 기록한 것을 마태는 ‘좋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마7:11) 반대로 말하면 마태의 좋은 것은 구체적으로 성령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오늘날 우리는 응답되지 않는 기도로 인해 종종 고민에 빠집니다. 정당하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기도를 드렸음에도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는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을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간구가 정당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피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눈의 핵심을 바라보고 본질을 파악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피상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항상 중심과 본질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구하는 것 대신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함이 없는 항구적인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내적인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힘을주시고 봉사와 전도의 힘을 주십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근본적인 것을 주십니다.
예수와 교권주의자들 눅11:14-17
예수께서 귀신들려 벙어리된 사람을 고치신 일에 대하여 거기에 있던 일반 백성들은 그 일로 인하여 큰 감동을 받은데 반하여 그중에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고 비방하고, 또 한 부류는 예수께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을 베푸실 것을 원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질문은 모두 예수의 이적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과 시험하기 위한 대적자들의 간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논리적으로 그들의 비방의 부당성을 지적하셨습니다. (17-26절)
1.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14절) 예수께서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에게 귀신을 내어쫓으심으로 그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공생애 기간 중,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은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질병이 죄로부터 오고, 그 죄를 짓도록 하는 자는 사탄이며, 귀신들은 그 졸개들입니다.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신적 능력을 행사하신 것으로서 신앙인들에게 잇어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찬양할 일이었습니다.
2) 무리들이 이를 기이히 여김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14절) 귀신들렸던 벙어리가 고침을 받고 말하게 되자 순수한 백성들은 이를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만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예수와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으며, 벙어리가 말하게 된 그 기적의 결과에 대해서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대로 느낀대로 그들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경이’의 대상으로 받아들였고, 또 그것을 놀라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이해와 반응은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가까왔고 복음은 그들의 마음 속에 쉽게 전파되었습니다.
2. 교권주의자들이 예수의 이적을 모욕적으로 비방하고 시험함
1) 의도적으로 모욕적인 비방을 함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15절). 이 ‘더러’를 마태는 바리새인이라 했고,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밀파된 서기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눈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능력을 목격했으므로 그 이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그대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들의 교권의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게 한 것이라고 의도적인 비방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모욕적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세불’은 원래 블레셋 에그론의 신으로서 ‘바알’과 ‘세불'(왕하1:2)의 합성어인데 이는 ‘파리의 두목’, ‘파리의 주인’이란 뜻이며,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 ‘세붑'(파리)이 ‘세불’로 변한 것은 유대인들이 ‘세붑’과 비슷한 발음인 ‘똥’,’불결함’을 뜻하는 ‘세불’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이고 이렇게 한 데에는 경멸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바알세불’을 예수와 연관시킨 것은 주님을 모욕하고 경멸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사악한 교권주의에 물들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간교한 마음으로 시험함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6절)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께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어떤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간교한 시험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님에게 모세 때의 불기둥이나 구름기둥 같은 것, 혹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하는 그런 이적을 내려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의 이와같은 시험은 마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한 마귀의 시험과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하는 간교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시험은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마4:3-7),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서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셨으며(17-26절), 참된 표적은 ‘요나의 표적'(29절) 곧 부활의 이적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귀와 축귀 눅11:18-20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불쌍한 이웃들을 항상 측은히 여겼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로서 치료다운 치료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병이 낳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일생을 고통 가운데 지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병이 들거나 귀신이 들면 즉시 치료를 받음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는 병자는 거의 다 이처럼 가난하여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은 이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고 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본 예수의 적들이 주님을 중상 모략하는 내용과 이를 반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과 연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귀신의 왕에게 돌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억지를 예수님은 날카롭게 격파했습니다.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대응논리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19절). 예수님의 이 말은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 귀신을 쫓아내는 제마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너희 아들들 또는 동료들 중에도 약초의 비법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는데, 내가 귀신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이 스스로의 논리에 모순을 발견하여 다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17절) 만일 귀신의 왕이 자기 부하들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패배시키는 일에 자기의 능력을 빌려 준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자멸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귀신의 왕과 연합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논리에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주님은 반박하셨습니다.
2. 무당의 양귀와 예수님의 축귀
1) 무당의 능력으로는 귀신들린 자를 귀신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린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무당의 역할을 ‘양귀’라고 합니다. 여기서 ‘양귀’란 뜻은 ‘귀신을 달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귀신을 대적하여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활동을 인정하고 그를 임시로 달래 보내는 것입니다. 이같은 양귀에는 귀신는 방지하는 법과 귀신을 퇴치하는 법이 있는데, 그 방법은 각기 다르나 주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비는 방법, 즉 굿을 통하여 퇴치하는 것입니다. 귀신에 제사하는 법은 양귀의 한 방법입니다. 귀신은 음기의 응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어온 동양 사상에서는 더욱 이같은 양귀법이 발달하였습니다. 귀신은 정당한 조위를 받지 못할 때 사람에 붙어 온갖 해를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성황당이나 당산제, 또는 산신, 용왕, 목신, 선왕, 초신 등 제신에게 질병 쾌유를 빈다거나, 무당이 좋고 깨끗한 음식을 차려놓고 굿이나 비손을 하는 방법으로 귀신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그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다시 옛집으로 되돌아오게 됨'(24절)으로 오히려 나중 형편이 더욱 어렵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일시적 치유에 불과할 뿐 완전한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당의 힘을 빌어 귀신의 병을 고치는 행위는 결국 일생동안 귀신의 지배하에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2) 예수의 능력 앞에서 귀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에게 임하였느니라'(20절) 일반적으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축귀’라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아 물러나’고 명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축귀는 무당의 양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귀신은 더럽고 악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귀신의 요새는 무너지고 강한 귀신이 정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말씀에 의해 쫓겨난 귀신의 자리는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숨기를 구하되 찾지 못하고 돌아올 때 더 더러운 귀신을 데리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가득찬 심령, 성령의 충만이 있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가득 찬 심령, 성령 충만한 심령에는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므로 귀신이 거처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모시고 사는 생활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누구편에 설것인가? 눅11:21-23
자신의 능력이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내신 주님은 이제 그 능력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강한 자’로, 자신은 ‘더 강한 자’로 비교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사탄이 강하다는 것은 인간과 비교하여 강하다는 것이요, 주님이 더 강하다는 것은 사탄과 비교하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비교는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인 비교입니다. 사탄이 인간과 비교하여 절대적으로 강하듯이 주님이 사탄과 비교하여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전제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결단은 다시 한번 촉구하십니다. 즉 주님의 말씀은 주님을 직접 대적하지 않더라도, 주님을 구주로 영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조차 주님을 대적하는 자로 분류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사탄이 하는 일
1) 사탄은 죄인을 자기의 소유로 삼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기뻐합니다.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히고 즐거워하시는 그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이유와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의 고귀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며, 그들을 복되게 하시고 본래 창조하여 인간들이 죄를 범할 때는 때로 징계도 불사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이유는 그와 정반대로 인간들을 통하여 자기의 더러운 욕망,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쉽게 이루게 하시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때로 인간들에게 삶을 형통케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부추기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주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선하신 창조의도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2) 사탄은 강하고 무장하고 자기 소유를 지킵니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재물, 명예, 권세 등에 대한 집착이 강하듯 사탄 역시도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자기 백성을 돌보고 보살핍니다. 자기 백성임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살핌과 돌봄 역시도 하나님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목자없는 양떼를 보살피듯 세심한 주의와 관심, 그리고 적당한 양식과 내적인 힘을 공급하심으로 보살피시지만 사탄은 끊임없이 마음에 사악한 마음을 불어넣고 생겨난 악한 마음을 실행케 함으로써 돌보고 보살핍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죄를 범하는 것을 봄으로써 여전히 자기의 손 안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2. 주님이 하시는 일
1)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킵니다.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주님은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킵니다.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킴으로써 그들이 더 이상 인간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증표로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귀머거리와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아 늘 악한 마음만 품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선한 마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2) 당신의 백성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으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시고 그러한 사역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러한 권세를 제자들에게 다시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도 함께 위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20)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께서 위임하신 권세를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마귀의 권세 아래 눌려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세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되며, 오직 주님께서 위임하신 사명을 감당하는데만 사용해야 합니다.
3.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23절 말씀은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대적하지 않는 자, 즉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자, 혹은 결단의 기로에서 망설이는 자는 모두 결국 사탄의 편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능력이 사탄의 능력보다 절대저긍로 우월하고, 또한 그 권세와 능력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그래도 결단을 내리지 않고 우물쭈물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만 할 것인가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치명적 함정 눅11:24-26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한 것은 예수의 교훈에 감동을 했거나 아니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를 공격하고 그로부터 고소할 사유라고 찾기 위한 음모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53,54절) 어쨌든 주님은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고 음 을 잡수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팔레스틴은 먼지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발을 씻는 일과 식사전에 손을 씻는 일은 유대인의 일상생활 습관이며, 위생적으로도 좋은 일입니다. 특히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유대인들로서는 먹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일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장로들의 유전으로 만들어 종교적 규범으로 한 데 있습니다. 이에 대해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는 문제
1) 장로의 유전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함을 이 바리새인들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절).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시는 것을 보고 주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면 누구나가 하는 일을 예수께서는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랍비는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목말라 죽는 길을 택했다는 이야기가 탈무드에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만큼 이 손을 씻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장로의 유전으로서 전통적으로 계율화되어 모든 유대인들이 다 지키는 일을 예수께서는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러한 행동은 그 일을 가장 문제시 할 바리새인의 집에서 하셨다는 데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그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는 장로의 유전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일 수가 없었습니다.
2) 율법에는 없는 규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에만 있는 것으로서 율법에는 없는 규례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신 것은 결코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장로의 유전ㅇ르 의도적으로 무시하셨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의식화된 율법 종교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한 뜻이 들어 있었으며, 육체적인 더러움보다 심령적 더러움을 일깨우려고 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2. 마음을 씻지 않는 어리석음
1) 겉만 씻고 속을 씻지 않는 어리석음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39,40절). 손을 씻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고 이상히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손씻는 행위 자체를 탓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깨끗이 하면서 마음이 깨끗이 하지 않는 위선을 책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음으로써 전통적인 유전을 잘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그리고 자기를 거룩한 자로 보이려 하고 있으나, 그 속 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신 이유와 율법 종교의 위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2) 종교의 치명적 함정
종교의 가장 치명적 함정은 ‘위선’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고 하신 것은 모세 이후 히브리 민족을 지탱해 오던 율법 종교가 이제 소생 불능의 상태에까지 부패하고 타락해 있었기 때문이며,그것의 가장 현저한 예가 장로들의 유전은 철저히 지키면서 율법 자체의 기본 정신을 망각한 데(42절)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종교가 내적 생명력을 잃게 되었을 때 외식에 힘쓰는 것은 하나의 정석입니다. 마음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면서 손만 열심히 씻는 종교는 이미 죽은 종교입니다.
3.유일한 구제의 길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1절).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탐욕스러운 마음과 악독한 방법으로 끌어모은 것들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하여 구제하는 데 쓰면 너희도 깨끗해지고 구제받는 자들도 좋아지므로 ‘모든 것’이 깨끗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17)라고 묻는 청년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막10:21). 남을 구제하지 못하는 종교는 그 자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인의 찬양과 예수의 대답 눅11:27,28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내쫓는 사건으로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나서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찬양합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으 ㄹ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짧은 대화가 본문의 내용인데, 이러한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납니다. 누가는 이 여인의 찬양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은 억지이고 그릇된 것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이제 이러한 여인의 찬양과 예수님의 응답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인의 찬양
1) 돌발적이었습니다.
‘이 말씀 하실 때에’. 여인의 찬양은 돌발적이었습니다. 미처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외쳤습니다. 언제나 찰나적으로 생각없이 말을 내뱉는 것은 결코 좋은 행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예외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외쳤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때로, 필요한 경우에는 급작스럽게 역사하십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강림했던 성령도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행2:2)같이 급작스레 임하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받은대로 외쳤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의도된 무엇이나 꾸밈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찬양은 간접적이나마 예수니므이 말씀이 진리이고 옳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인 상황에서 외칩니다. 순간 느낀 그대로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은 그대로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찬양은 가장 정확한 은헤받음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2) 찬양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 뿐임
여인이 모든 사람이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을 말했다는 것은 그녀가 외치고 났을 때 반발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는 찬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찬양에서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그녀의 찬양이 핵심, 즉 찬양을 받아야 마땅한 분에게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찬양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비록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찬양이나 기도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우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인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외쳤음에도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에 가까운 말씀을 들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8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얻을 자는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대답
1) 원칙에 입각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답이 그분의 위대하고 거룩한 인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칙에 입각해서 답하셨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말을 한데 대해 감정적인 모습을 내비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약간의 책망이 섞인듯한 어조로 여인에게 원칙적인 대답을 하셨습니다. 비록 여인의 찬양이 사실일지라도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찬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인품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듣기에 달콤한 말이나 혹은 역겨운 말을 했다고 해서 거기에 감정의 동요를 보이고 대의와 정도를 흐려서는 안됩니다. 흔히 하는 말로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은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2) 소망의 문을 열어주는 대답이었습니다.
본문의 대답을 통하여 주님은 여인에게 다소의 책망과 함께 소망의 빛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답은 이렇습니다. 마리아는 확실히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입었습니다. (눅1:30) 예수를 열달 동안 배 안에 품고 그 입에 젖을 물려 키운 것은 복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리아의 양육에 의해서 예수님의 성장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영혼에 관한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고 결정지어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에 관한 일은 영적인 행위로써 결정됩니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이 영적인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지켜 행하는 일로 규정하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마리아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보기 위해 찾아왔을 때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8:21)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 여인에게도 소망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여인은 더 이상 마리아를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켜 행하기만 한다면 여인은 마리아나 예수님의 형제들보다 훨씬 가깝고 친밀한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 눅11:29,30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29절)라고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를 시험하는 자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한데 대한(16절) 대답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그들이 구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그것은 모세와 같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게 한다든지, 엘리야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표적’에 대한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그것만이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기사와 이적같은 것은 왜 표적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이에대해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
1) 유대인들의 신앙적 특징
‘무리가 모였을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29절). 유대인들의 신앙적 특징은 ‘표적’을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의 증명으로 이해한 데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 율법 종교의 교권이 인정하지 아니하는 영향력(능력)과 그 행사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관계(기사와 이적) 속에서 살아온 히브리 민족의 역사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으나, 주님에 대한 ‘표적’요구는 그들이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잡기 위해서이며, 이는 철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을 믿으려고 했다면 이미 너무도 많은 표적이 주님에게서 나타난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요4:48)
2) 표적을 구하는 신앙의 위험성
‘하늘로서 오는 표적'(16절)만을 구하는 신앙에는 커다란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①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 두고 있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②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③ 영적 종교를 보고 만질 수 있는 우상종교로 전락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사와 이적은 참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영적 실체에 기인해야 하며, 진리(계시)에 근거해야 합니다.(눅16:27-31)
2. 참된 표적
1) 요나의 표적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30절).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참된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예표적 사건이며, 요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멸망할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 이상의 표적이 없다는 뜻입니다.그 밖의 다른 표적들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서(막16:15-18), 구속사역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긴 부활을 통하여 죄인들이 회개하고 사유함을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이상의 큰 표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구속을 위한 계시의 정점이며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3. 참된 신앙
1) 보지 않고 믿는 신앙
신앙이란 표적을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소는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신앙의 궁극적인 기초는 표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모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그렇습니다. 보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실체이므로 보고 믿으려 하는 자는 실패합니다. 그분은 영이시므로 (요4:24) 영적으로만 인간과 접촉하기 때문이며, 그 말씀(계시) 또한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성령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전적인 신뢰로서의 신앙
신앙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어떤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그 신뢰에 변함이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분 앞에서 나의 의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 앞에서 나의 논리는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삶은 그 분에게 완전히 담보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의 생명이시며,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방패시며, 나의 반석이시며, 피난처이십니다. (시144:1,2)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 눅11:31,32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그 인격적이고도 자애로운 얼굴과 지혜로운 가르침,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이적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성경에 나타나는 이방 사람들은 예로 들면서 그들이 결코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방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길을 찾아왔던 스바 여왕과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그 즉시 회개하였던 니느웨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신앙인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스바여왕
1)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본문의 ‘남방 여왕’은 왕상 10장에서는 ‘스바 여왕’으로 나타나는데, 그가 어느 나라 여왕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아라비아 남부로 보는 견해도 있고, 이디오피아 혹은 아프리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 그녀가 그처럼 먼 곳에서 여자의 몸으로 이스라엘까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지혜와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입니다.만일 그녀에게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없었다면 그처럼 먼 길을 찾아올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과 같이 그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8:11)을 느꼈고 그것을 해소키 위해 찾아왔던 것입니다.
2) 말씀을 듣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습니다.
스바 여왕은 말씀을 듣기 위해 먼 이국 땅으로의 여행을 개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여행을 위해 많은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그녀는 수행원을 거느리고 심히 많은 향품과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싣고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왕상10:2)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는 말씀과 같이 그녀의 마음은 세상의 보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의 말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혜와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마음의 감동을 받고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마치 그들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도 취할 줄 모르는 무지한 진주장사라 하겠습니다. (마13:44-46)
3)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였습니다.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왕상10:6) 이는 스바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묻고 답을 들은 후, 그리고 솔로몬의 궁전과 성전을 돌아본 후 한 말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녀의 진실된 인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목격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본 그대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진실성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모자라, 또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29절)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타인을 액면 그대로 믿어줍니다.
4)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 즉…'(왕상10:7) 말씀을 듣기 전에는 스바여왕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고 솔로몬 왕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난 후 그녀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진리였고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하기에 이릅니다. (왕상10:9)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혜와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믿을 줄을 몰랐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할 줄을 몰랐습니다.
2. 니느웨 사람들
1) 죄를 아파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임에도 회개의 촉구에 대한 반응은 특이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실로 회개하였고, 그 증거는 전민족이 금식하였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같이 금식한 것을 보면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죄를 아파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받으셨던 아픔을 자신들의 아픔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데서 부터 비롯됩니다.
2) 소문만 듣고도 회개했습니다.
요나의 회개 촉구로 인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왕에게 전해졌습니다. 요나서를 읽어보면 니느웨의 왕은 이 소문만 듣고도 회개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 왕을 비롯한 니느웨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에 대해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를 회개하라는 요나의 음성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내면의 등불, 영혼의 눈 눅11:33-36
본문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표적을 무수히 행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표적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알지 못하고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소경이요 귀머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키 위해 주신 말씀을 믿고 깨달아 아는 자는 영안이 열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지만 말씀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소경으로 영적 무지 속에서 멸망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모든 인간은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벗은 몸이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육의 눈이 밝아지자 영의 눈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이것은 영맹이 된 인간 실존의 모습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이처럼 마음의 눈이 무명에 덮혀 진리의 빛이 도전해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그런 빛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여도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요1:9,10),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러한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원한 영맹을 개안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며 진리의 빛을 깨닫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눈을 가린 더러운 죄악의 뱀의 비늘을 벗겨 버리고,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영적 시력을 다시 회복시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의 근본된 사역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영적 맹인으로 태어났으나 주님을 만남으로 뱀의 비늘이 벗겨지고 생명의 참 실상을 보게 된 사람들의 모습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사도바울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행9:1-18)
2. 주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할 때 죽은 영이 눈을 뜹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3자들이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41) 신실한 사람은 여러 신체 기관 중 제일 먼저 눈을 뜹니다. 그런 후에는 공복을 느낍니다. 영적 깨달음도 이와 같습니다. 죽어 있는 영혼이 다시 소생할 때 제일 먼저 영적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영혼의 갈증을 느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영적 맹인이었으나 자신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의 더러운 뱀의 비늘로 덮여있는 육신의 시력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보려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화 있을진저 소경 된 인도자여, 우맹이요 소경들이여’.(마23:16,17),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그 시대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할 심안은 어둠속에 잠들어 있고, 진리의 빛을 보아야 할 영안은 혼미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3. 온전한 삶은 영혼의 눈을 뜰 때 가능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요, 포로된 자는 사탄의 지배하에서 영적 자유를 잃은 범죄한 인간들이며, 눈먼 자는 죄로 인하여 영적 눈이 어두워진 우리 자신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다시 보게 하고 자유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은 것 처럼, 영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빛 가운데, 진리 가운데 거하게 되므로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마음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위선자와 배교자로의 전락 눅11:37-41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후에 이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비방이 옳지 않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신 다음 주님은 본문의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게 될 때에는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서 전보다 더 악한 상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회개 생활에 대한 깊은 의미와 영적 중립 상태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주님의 교훈의 뜻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중생이후의 위험
1) 귀신이 추방된 심령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24절).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갈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이 회개하여 성령이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오실 때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지금까지 마귀의 지배하에 있던 사라 을 해방시키는 상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엡2:2-6) 인간이 성령으로 거듭난 직후의 심령상태는 순수한 것입니다. 깨끗이 청소된 집과 같이 (25절) 죄가 씻김받은 심령은 청결한 심령입니다. 이 심령은 성령을 통하여 새로이 탄생된 어린 생명으로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거룩한 생명으로 성장해가야 합니다. (살전5:23) 이 성장을 도모하지 않거나 중단할 경우에는 거기에 심령상의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그것은 다시 죄에 오염될 상황을 형성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성장하는 것이 원리이며, 성장하지 않을 때에는 병들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2) 성장하지 않는 심령의 취약점
중생 후 성장하지 못하는 심령은 연약한 생명이기 때문에 미혹당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심령은 주변의 악의 유혹에 대하여 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저가 뭏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로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5:2) 굳세지 못한 영혼은 욕심에 끌려 시험받게 되고(약1:14) 음식과 명예욕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되어 마음이 부패해집니다. (고후11:3) 그리하여 근심에 싸이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며,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게 됩ㅌ니다. 중생했으되 계속 은혜 안에서 성장하지 않는 심령은 항상 그 취약점이 세상의 미혹자들에게 노출되어 있고 그것을 방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2. 영적 중립 상태의 위험
1) 영적 중립상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으로 중생한 어린 생명이 계속하여 성장을 도모하는 영적 활동, 즉 성화에 대한 계속적인 노력이 없게 될 때 사람의 심령은 영적 중립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영적 중립 상태는 성령에 의하여 출생한 어린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인 영의 양식의 계속적인 공급과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할 때 나타나는, 국가로 말하면 무정부 상태와 같은 것으로서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청소되고 수리된'(25절) 주인이 없는 빈 집과 같기 때문에 마귀의 침입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 심령은 중생할 때 성령에 의하여 순간적으로 정결케 됨으로써 사탄의 지배에서 단절되기는 하나 완전한 성결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것은 중생하기 이전의 부패성의 찌꺼기가 계속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육성의 잔존은 성화의 계속적인 활동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한 다시 죄악의 유혹을 수용할 취약한 소지를 갖고 있으므로 마귀의 침입을 용이하게 합니다. 이와같이 중생 초기의 심령은 성령의 권고와 잔존한 육성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게 되는데 (롬7:15-25) 이때 성령의 뜻에 따라 육성을 극복하게 되면 영적 성장을 가져오게 되지만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육성에 따라 살게 되면 다시 마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혼은 성령의 도우심과 말씀에 의한 영양 공급의 계속으로 육성을 제어하고 소멸시켜가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2) 마귀의 재침입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24-26) 위에서 살펴본 대로 영적 중립상태는 그 자체의 잔존한 육성 때문에 마귀의 재침입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자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중생의 체험을 한 자가 타락할 때는 중생하기 이전보다 더 악한 심령이 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은 그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타락의 심도는 그가 중생 이후에 체험했던 성결의 정도와 반비례합니다.
3. 위선자와 배교자로의 전락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26절). 타락한 자의 두가지 유형은 ‘위선자’가 되는 것과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는 속 심령은 다시 마귀의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계속 중생한 자 처럼 행세하는 자이고, 배교자는 철저한 악의 도구가 되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성도와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 사악한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 교만, 부패 눅11:42-44
점심 초대를 받아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께서는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상히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질책하셨습니다. 초대받아 가신 바리새인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신다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격렬한 어조로 그들을 질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주님은 그들을 연속적으로 질타하셨습니다. 백화화가 썩으면 다른 꽃보다 더 냄새가 고약하듯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하면 그 사악함은 더 심합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하심
1) 철저하나 형식적인 십일조생활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라'(42절). 박하는 방향 식물로서 약이나 음식물의 조미료로 사용되는 향유가 들어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박하는 보통 3피트나 키가 큰 것인데 유월절에 먹는 ‘쓴나물’이 곧 이 박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박하를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을 십일조로 바쳤습니다. 운향은 냄새가 강한 사철 관목으로 약과 양념, 그리고 장식품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리새인들은 이것들을 채소와 함께 그들의 집에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쳤습니다. 그것은 율법에서 정한 규례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레27:30) 그들은 이런 숫자적이고 의식적인 일에는 정확성과 성실성을 철저히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이든 이런 외형적, 외식적인 일에 치중하게 되면 본질에 소홀하게 마련이며 그것이 종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질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습니다. 본질을 잃은 형식은 위선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 공의와 사랑의 결여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42절). 종교의 모든 의식은 본질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행위가 의식 자체에 사로잡히게 될 때 본질 자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공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성실하게 바치면서 가난한 이웃을 멸시하고 수탈하는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주님은 책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공의로운 사랑을 베풀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문에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신 주님의 교훈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종교는 내용과 형식이 겸전할 때 그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책하심
1)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문안받기를 기뻐하는 행위는 모두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을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자들이라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모임에서든지 그들의 우월의식에 합당한 처우를 당연시 했고, 그를 스스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도 똑같은 연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에게서 존경을 강요함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멸시를 당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 교만의 정체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행동은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주님의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바로 이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의 정체는 자기 우월과 자기 의에 근거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이웃에 대한 멸시와 지배의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뜻을 배반하는 것으로서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3. 바리새인들의 부패를 책하심
1) 평토장한 무덤같음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평토장한 무덤’
은 부패를 뜻하고 있습니다. 속은 부패하여 썩은 것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 더러움의 실상을 감추고 있음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2) 부패의 오염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위선과 부패성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으며, 습관화된 것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 스스로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까지도 그 위선과 부패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지는 위선과 부패 그 자체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의 죄 눅11:45-48
본문은 율법주의자들의 죄에 대하여 비난하는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이라고도 불리우는 유대교의 전문적인 율법해석자로서 율법교사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0. 예수님이 율법사들을 향하여 이러한 비난을 퍼붓게 된 배경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은 것을 보시고 전통을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바리새인과 교권주의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지배층의 종교인들이었으므로 소위 체면과 전통을 앞세워 성실하고 경건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류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교에는 바리새인과 율법사같은 비신앙적인 사람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비난을 받은 이들은 교권주의자로서 종교 지도자란 이유로 ‘남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 자기는 손가락도 까딱 않는 자들이었고, 성경의 지식은 많으나 영적 깨달음이 없으므로 그들의 지식이 행동화 되어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므로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를 분열하고, 명예욕과 권세욕, 또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지도자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하는 이웃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한 교권주의자들일수록 신앙과 봉사를 내세우고 예수와 십자가를 자주 들먹이며, 자신은 옳고 남은 잘못되었다고 매도하는 자들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이처럼 신앙과 생활이 다른 외식하는 자들에 의해서 자행되어지는 것입니다.
2. 복음의 진리를 왜곡함
그들은 그럴듯한 설교를 하고 미사여구로 천국을 약속하며 변설을 늘어놓지만, 저들 자신 중에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복음의 진정한 자유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직업적 종교인일뿐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사로잡힌 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훼방을 가져오고, 진리는 자유를 선포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종교적 궤휼로 얽매고 속박하며 노예로 삼고자 합니다. 그들은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기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가족을 섬기도록 교육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봉사하기는커녕 섬김받기만을 원하면서 신도들에게는 온갖 봉사를 강요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진리는 종교적 의무만을 엄격하게 준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율법과 복음의 근본 정신인 사랑과 공의를 시행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기독교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와도 같이 진정한 복음의 정신을 잃고 교권과 제도가 복음보다 우위에 위치하여 구원의 능력은 상실하고 기독교라는 문화만 발전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중세의 종교개혁은 바로 가리워진 복음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3. 성도들을 성경과 격리시킴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이 성경의 해석을 독차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과 격리시켰듯이 오늘날의 교권주의자들도 자신들만이 성경을 독차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초통을 내세운 자신들의 해석만이 옳고 영적 깨달음을 간구하는 다른 사람들의 해석은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개진하기 위한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손 안에서 하나의 옛 역샃액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오늘도 살아서 읽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려 하지도 않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러한 종교가들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어둠에 둘러싸인 신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 선 검과 같아 우리의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로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그 길이 밝히 열리고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 순수한 눈으로 말씀을 상고할 때 하나님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교권주의자들의 필요에 의한 해석에만 의존해서는 안될 귀중한 생명책입니다.
아벨에서 사가랴까지 눅11:49-51
본문에서는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불의를 보고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분노가 아니라 의로운 분노입니다. 이 의로운 분노가 없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의로 인해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종국에는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이웃을 편견없이 사랑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의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거합니다. 방법에 있어서가 아니라 성품에 있어서, 이해 관계에 있어서가 아니라 대의와 명분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의인과 선지자를 보내시는 하나님
1)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창세 이후로 그리고 아담의 범죄 이래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계속해서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벨, 에녹, 노아, 욥, 아브라함 등의 의인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먼저 보내심은 타락한 세상으로 하여금 그들의 의를 본받게 하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본받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핍박하였습니다. 불의가 의를 삼키고 악이 선을 누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죄를 직접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첫번째 의인을 보내심으로서 양심에 기대를 걸었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화인맞은 양심으로 인해 별다른 효과가 없자 이제는 직접 깨닫게 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시도 역시 사악한 인간들의 악행으로 인해 별다는 효과가 없자 직접 깨닫게 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도 역시 사악한 인간들의 악행으로 훼방을 받았습니다. 인간들은 더욱 완악해져서 선지자들마저 죽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와 함께 더욱 많은 선지자의 무덤을 갖게 되었습니다.
2) 절망의 벽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사랑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니라’.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많은 의인과 선지자를 보내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지라도 그들이 회개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성품에 대해 완전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의인과 선지자를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와같이 절망이 없습니다. 어떠한 절망의 벽도 하나님의 사랑의 벽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어떠한 경우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단념하지 않으십니다.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2. 핍박받는 의인과 선지자
지치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과 선지자의 피와 희생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핍박이 없고 희생이 없는 의인은 참된 의인이라 할 수 없으며, 선지자는 선지자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본문에서 그 예로 성경의 첫 의인격인 아벨과 마지막 선지자인 사가랴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1) 질투로 말미암은 아벨의 무고한 죽음
아벨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죽어야 했습니다. 불의가 그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그는 매우 애매하고 헛되고 비참하게 죽었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벧전2:20) 받았으므로 그의 죽음은 하나님 보실 때 참으로 가치있고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2) 불의를 고발함으로 말미암은 사가랴의 의로운 죽음
사가랴는 불의를 덮어 두지 않고 직접적으로 고발함으로써 죽은, 성경의 마지막이자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성도는 그와 같이 죽음이나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죽음과 희생이 두려워 세상의 불의에 대해 입을 다무는 성도는 더 이상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3. 선지자의 죽음을 담당해야 할 세대
1) 조상의 죄를 반복하기 때문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았습니다. 그들의 명예를 높이고 공적을 찬양하는 묘비를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 조상들의 불의와 죄를 인정하고 의인과 선지자들의 거룩함과 옳음을 승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바로 눈 앞에 있는 의인이요 선지자인 예수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2) 예수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
유대인의 조상들이 죽이고 핍박했던 선지자들은 모두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나님을 대적해도 간접적으로 대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가 핍박하고 죽이려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대가를 철저히 치러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의 죄를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선지자보다 더 크신 이인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진리의 열쇠 눅11:52-54
율법사들에 대한 예수의 질타는 계속되었습니다. 그중 본문은 세번째 질타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들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 특권이 어떻게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까지도 멸망케 하고 있다는 것을 통렬히 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진리의 열쇠
1) 계시만이 진리의 열쇠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52절) 주님께서 율법사들에게 ‘지식의 열쇠’를 가져갔다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과 예언에 대한 해석과 교육의 권한과 책임을 그들이독점하고 있는데 대한 비판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지식의 열쇠’는 천국의 문을 여는 ‘진리의 열쇠’를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말씀으로 표현된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므로 이 계시야말로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확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2) 계시를 믿는 것이 이 열쇠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진리의 열쇠라고 하면 그 계시를 믿는 것이 그 열쇠를 갖는 것이 됩니다. 계시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의 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열쇠로 열립니다. 진리의 열쇠는 곧 믿음으로 갖는 열쇠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여 마음에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9,10)고 하였습니다. 진리의 열쇠인 계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시고 그 열쇠를 인간이 갖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2. 진리를 왜곡한 독선적인 율법사들
1) 율법사들의 독선적 권위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52절) 율법사들은 성경(구약)을 필사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에 대한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자들로 랍비(선생)이라 불리우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은 그대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며, 유다 백성들의 재판관이었습니다. 율법사란 바리새파 중에서 가장 엄격한 분파로서 특히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어려운 문제와 분쟁을 해결하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특권을 가진 율법사들을 독선적으로 만들고 자기도취에 빠지도록 했습니다. (45절)
2) 진리에 대한 왜곡
율법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오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율법을 까다롭고 비현실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했습니다. (고후2:17) 그들은 율법 이외에 장로의 유전으로 613개의 규례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지키기를 강요하면서도 그들은 교묘한 논리로 그런 규례들을 회피했다고 합니다. (46절)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성문 율법, 즉 모세오경과 구전율법, 즉 장로의 유전을 다 같이 왜곡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야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백성들을 장로의 유전에 얽어매 놓음으로써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길을 차단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장로의 유전에 집착한 나머지 심령의 각성(회개) 운동이라든가 예언 활동 등을 무시하고 등한히 하여 메시야의 출현과 그 활동에 대하여 전혀 이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3. 진리에 대한 맹렬한 핍박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54절).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 대한 예수의 책망은 유대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세력에 대한 도전과 평가였으므로 그들은 즉각적으로 아주 맹렬한 핍박을 주님에게 가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맹렬히 달라붙어), 지적으로(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의지적으로(잡고자하여 목을 지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주석
누가복음 제 11장
=====11:1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
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
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
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3:21;6:12),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
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
없다.
요한이…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
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
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
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행
10:3,9).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
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11:2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
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
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
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
서도 잘 드러난다.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
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10:21 주석 참
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
준다(요 20:17;롬 8:14-17).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
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
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마 6:9). 성경
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
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
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
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레 22:32;시 79:9;사
8:13;29:23).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
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
(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
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
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9:1;10:17).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
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
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11:3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 , 에피우
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
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
석된다. (1)’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
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
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2)’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
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
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 16:4;신 8:9)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11:4
용서하오니…사하여 주옵시고 – 여기서 ‘죄'(* , 하마르티아)는 아
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
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
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
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 , 페이라스모스)
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
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
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
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
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11:5
밤중에…내게 빌리라 –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이다(11절;12:25;14:28;15:4;17:7). 한 친구가 찾아
온 시각은 ‘밤중’이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
이 모두 잠 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1:6
여행 중에…먹일 것이 없노라 –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된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
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마 2:9).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
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하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
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하다.
=====11:7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
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
을 하지 않는 것이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
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이다. 첫째 것이 문제
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Easton). 이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
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11:8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
한 것을 준다. 여기서 ‘강청함'(* , 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 )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 )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는 두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요
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둘
째,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살전 5:17).
=====11:9
구하라…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
)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 )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
(10:13;마 18:19;막 11:24;요 11:22;엡 3:20).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
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
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
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찾으라…찾을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
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
, 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버버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도 있다(신 4:29;삼하 21:1;호 5:15;행 17:27).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
침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다.
=====11:10
구하는…열릴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
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킨다(시 91:15;사 58:9;슥 13:9;
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이다.
=====11:11
생선을 달라하면…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
는 비유의 말씀이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
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
는 사실이다.
=====11:12
알을…전갈을 –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이
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계
9:3,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인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 , 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3:19;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
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 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
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
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천부께서…성령을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
문이다(요 16:7).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4-11). 실제
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에
로 확산되어갔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
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히 9:11;10:1)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
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11:14
한 벙어리 귀신 –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는 귀신 축출에 관한 기사가 없고(막
3:22), 마태복음(마 12:22)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을 뿐 아
니라 눈까지 멀게 했다. 귀신을 좇아내는 과정은 일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예
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고 그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기사(奇事)만 간략하게 서술함으로
써 이어지는 바알세불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고 묻는 모습이 나온다(마 12:23).
=====11:15
그 중에 더러는 –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단의 무리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고(마 12:24),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다(막 3:22). 서기관의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기원과 ‘바알세
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이 다만 여러가지 해
석들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왕하 1:2에 근거하여 ‘바
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
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공동 번역의 ‘베엘제불'(Beelzebull)에서 ‘Beel’은 ‘Baal’ 즉 ‘주’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뒷 부분인 ‘Zebull’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1)
‘집’, ‘높은 곳’을 뜻한다고 보면(왕상 8:13;사 63:15) ‘거주의 주’ 또는 ‘높은 곳의
주’가 된다(Foerster). (2)발음이 유사한 ‘똥’이라는 의미의 Zebel로 보면 ‘똥의 왕’
의 된다(Hendriksen). (3)이를 ‘파리’로 해석하여 ‘파리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Bengel, Tyndale). 이 가운데 비교적 많이 인용되는 것은 (1)의 설명이다. 아무튼 본
문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좁게는 교권자들)이, 예수가 귀신을 좇아낸 사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
이 아니라 자기들의 무능력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진리를 매도하려 했던 것이다.
=====11:16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마가는 여기서도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으
나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2:38). 이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담당할 자격
이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귀신 축출 사건을 신적 권위
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하여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
성이 농후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NIV)에 대
해서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류의 이적을 요구한 것이라
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1).
=====11:17
아시고(* , 디아노에마타) – 이는 ‘깊이 생각하다’, ‘구분하
다’의 의미를 갖는 ‘디아노에오'(* )에서 나온 말로 의도나 목적을 간파
하였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분쟁하는…무너지느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나라나 집은 없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비유 앞에 적대자들의 논리는 산산
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11:18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 앞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일반 놀리로 이끌어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 일반 논리를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나라와 집이 그러하듯이 사
단도 자기들 끼리 싸우면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
이며,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만 있을 뿐이다(고후 10:4).
=====11:19
너희 아들들은…재판관이 되리라 – 적대자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반대 논리는
매우 철저하며 집요하다. 이제는 적대자들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모순을 범하
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 행위(逐出行爲)를
사단의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그들의 추종자들의 귀신 축출 행위
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재판
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followers, NIV)로 번역된 ‘휘오스'(* )
는 ‘추종자’, ‘제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히 12:5;벧전 5:13), 예수 당
시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행 19:13).
=====11:20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다크튈로스'(* )
는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46절)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8:19;31:18;신 9:10). 그러나 더 흔하게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출 7:4,5;9:3,15). 한편 마 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기록되어 있
다. 예수의 삶의 초기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의미에서(3:22;4:1,18) 마태의 서술
도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영’
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였다고 할 때(대상 28:12,19) 누가와 마태는 같은 이야기를 하
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적대자들의 비
방은 완전하게 부정되며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었다는 사실이 선언되었
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임하였느니라 – 예수의 말씀은 단지 적대자들의 비방을 반
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
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함을 말
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
기서 “임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프다센'(* )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앞서 오다’의 뜻도 있고(살전 4:15), ‘방
금 도착했다’, ‘도달한다’는 뜻도 있다(Lenski). 이 동사의 의미를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되고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
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이 미래
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가 시
작되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보게 된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더 결정적인 단서는 ‘너희에게’
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분명히 지금 예수 앞에 있는 청중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미
래의 청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1:21
강한 자가…안전하되 – 전통적으로 본문의 ‘강한 자'(a strong man, NIV)는 사단
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리고 ‘집’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Lenski). 한편 사단이 지키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갖추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빼앗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는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
=====11:22
더 강한 자가…이길 때 – 일반적으로 ‘더 강한 자’는 예수를 지시한다. 여기서
‘이길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
긴 것을 뜻한다. (2)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켰던 귀신 축출 사건들을 가리킨다(14
절;4:1-13;8:26-39;9:37-45). (3)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
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옳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믿던 무장을 빼앗고…재물을 나누느니라 – ‘믿던'(* , 에페포이
데이)은 ‘설득시키다’, ‘믿게하다’는 의미의 ‘페이도'(* ) 제2과거완료 능동
태로 ‘매우 유용하다고 신뢰하던’의 뜻이다. 무장(* , 파노플리안)
은 방패, 검, 창, 투구, 무릅받이, 흉배 등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를 나타낸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는 사단을 궤멸시켜 그의 무장을 해
제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이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와 새생명을 누리게
됨을 뜻한다(요 5:24). 바야흐로 인간을 약탈하던(9:39) 사단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의해 도리어 약탈을 당하고 파멸의 종국을 맞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11:23
함께 아니하는…모으지 아니하는 – 이 말씀은 매우 급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즉
예수와 사단과의 전쟁은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중립적인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의 편에 서든지 사단의 편에 서든지 결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시험
하거나 비방하는 자는(15,16절) 반대하는 자요 사단의 편이요 성령의 훼방하는 자들인
것이다(마 12:31). 마찬가지로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어놓는 자이다. 이것은 양떼
를 모으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10:12), 위급한 상황에서 양떼를 모으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자는 양떼를 죽이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이 9:50
의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하나 그것은 문맥, 또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인 이
해에 얽매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마 12:30 주석 참조). 9:50의 상황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대해 중립적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고 또 하려고 하는 일을 그
가 행했던 것이고, 여기서는 선과 악, 진리와 반(反)진리가 싸우는 상황에서 중립지대
는 없으며 분명히 어느 한편에 서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11:24
더러운 귀신이…돌아가리라 –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긴 했지만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는 않는 경우이다. 다시말해서 귀신이 나간 이후 한동안 공백 상
태가 지속될 뿐 성령을 영접해 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탄에 빠
지게 된 경우인 것이다. 도덕적 파국의 심각성은 26절의 ‘거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고’가 ‘정착하다’, ‘영구히 거주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11:25
소제(掃除)되고 수리되었거늘 – 본문의 평행 구절(마 12:44)에는 그 집이 ‘비고’라
는 표현이 더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으로 결국 악령의 지배
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사단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틴데일(Tyndale)은 본문
의 의미를 도덕적인 청소가 되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헝클어졌던 마음이 정
리되고 그런 결과로 생활이 좋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1:26
더 악한 귀신 일곱을…거하니 – 집이 소제되고 수리됨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거했
던 한 악령이 들어가기에는 저항력(抵沆力)이 강했다고 본다면 이 악령이 다른 일곱
귀신을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된다. 여기 일곱 귀신은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힌 일곱 귀
신을 연상 시키는데(8:2), 그 숫자도 엄청나게 불었거니와 그 악함이 전에 있던 한 귀
신보다 더 심하다는 묘사는 이 사람이 일곱 귀신이 들었을 때의 상태가 얼마나 극심하
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악령이
나간 자리를 하나님의 선한 영으로 채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악령이 축출된 자리
는 빈 공간으로 두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샬(Marshall)은 이 이야기가 귀신만을 축출해 놓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킨 유대인 귀신 축출자들에(19
절)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가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평행 구절에서
이 귀신들린 자가 바로 ‘이 악한 세대’ 즉 ‘유대인’ 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유대 백성들이(마 3:1-6)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완악해져 예수를 거역(마 12:24)했던 상황과 연관될 것이다(Hendriksen,
Lenski).
=====11:27
당신을 밴 태와…복이 있도소이다 – 엘리사벱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서
찬양한 내용과(1:42) 유사하며, 렌스키는 여기서 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의 여인은 단순히 한 선생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
침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한 듯하다. 본절의 의미는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
님의 특별한 축복(bless, NIV)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로 보면 될 것이다(Marshall).
=====11:28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
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 , 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
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
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사실이 다
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는'(* , 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 )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있
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한
다.
=====11:29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 마태는 ‘음란한’을 첨가하고 있는데(마 12:39), 구약 시
대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할 때(호 1:2) 이스라엘의 완악함
과 우상 숭배는 곧 음란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의 표적(sign, NIV) 요구가 악한 것
으로 규정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
며(Marshall), 또한 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키신 여러 가지 이적적인 사건들(14,20
절;4:38-44;8:22-25;40-56)이 하나님의 권능을 밝히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
을 아예 인정치 않으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30
요나가…인자도…그러하리라 – 요나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구원받은 것이 곧 예수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예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평행 본문인 12:40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9:22에 이은 또 하나의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씀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을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해야함을 촉구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
한 심판을 알리신 것이기도 하다.
=====11:31
남방 여왕이…정죄하리니 – 여기에 언급된 ‘남방 여왕’은 왕상 10:1-13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queen of Sheba, NIV)을 말하는데 스바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오늘날의
예멘(Yemen)을 가리킨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찾아왔다. 이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땅 끝에서 온 것이다(마
12:42). 이 여왕의 열정에 비하면 유대인들의 태도는 너무도 완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솔로몬 보다 더 위대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을 솔로몬 보다 ‘더 큰 이’라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은 거리상 비교도 안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인격의 위대함에 있어서도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와 접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모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던 셈이다.
=====11:32
니느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같은 논리가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
의 대조에 적용되고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창 10:11)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심한 죄악을 범하였다(욘 1: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
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욘 3:5-10). 니느웨 사람들은 일개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
도 회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하신 예수의 선포를 듣고
도 회개하지 않았다. 31-32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
의 구원 받음’과 ‘유대인의 구원 받지 못함’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과 유
대인의 구원 관계에 관해서는 마 8:1-17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11:33
누구든지…보게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의 의미는 두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등
불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불이 등경 위에 위치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예수께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항시 생명의 빛을
비추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2)등불을 복음의 메시지로 간주
하는 견해.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는 말씀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도 비춰주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11:34
몸의 등불은 눈 – 여기서 몸은 전체적인 인격을 뜻하나 등불에 비유된 눈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통로에 해당한다.
눈이 성하면…나쁘면 – ‘성하면'(* , 하플루스)의 본래적 의미는 ‘주
름이 없는’, ‘단순한’, ‘진실한’으로 영적 안목이 단순하고도 진실되게 진리에만 고정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 단어에 ‘일편 단심’이라는 은유적 의미가 있다
고 보아 “온 몸이 밝을 것이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눈이 건강해서 빛을 받아들
인다면 즉 영적인 눈이 일편 단심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전 존재는 빛으
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나쁜'(* , 포네로스) 눈은 그 시선이 약한 것
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와 복음을 거부하는 눈이다.
=====11:35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 누가는 이 말씀을 하나의 권고 형식으
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마태는 경고의 형식으로 기술하였다(마 6:2). “속에 있는
빛”에 관해서는 (1)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는 내적 빛 곧 양심(Gilmore) 혹은 (2)청중
들이 스스로 빛이라고 여기는 것을 각각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중 어떤 견
해를 취하든 본절은 본성적으로 진리를 거스리기 쉬운 인간의 무지함과 완악함에 대한
경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
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
=====11:36
온몸이 밝아…온전히 밝으리라 –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만의 독
특한 결론이나,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베자 사본, 고대 라틴역, 수리아역 등에서는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 듯한 본절은 반복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면이나 주제면에서 볼 때 엡 5:13,14와 유사하다. 본절의 의미는 34,35절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해지는 바 믿음의 신령한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가 그 빛을 주위에까지 비추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엡 5:8).
=====11:37
한 바리새인이…앉으셨더니 – 여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모
종의 적대 의식 또는 반감을 가지고 책잡기 위해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점심 잡수시기’에 사용된 동사 ‘아리스테세'(* )는 ‘먹다’는 의미의
‘아리스타오'(* )의 과거형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이 말의 뜻은 하루의
첫번째 식사를 가리킨다. 보통의 상류층 유대인들도 평일에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한
다.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가볍게 하고(* , 아리스톤),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하는 데 이 것이 주식사이다(* , 데이프논). 안식일에는 세 차
례의 식사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을 가장 잘 차린다. 이렇게 볼 때 예
수께서 초대받은 식사는 첫 식사라는 의미에서 ‘아침’이며(요 21:12,15), 시간상 점심
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앉으셨더니'(* , 아나퓨토)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11:38
손 씻지 아니하심을…이상히 – 막 7:2에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
다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손을 씻지 않
고 식사에 임함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배티조'(*
)는 ‘담그다’, ‘적시다’의 의미로서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물 그릇에 손
을 담그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
례(潔禮)였다. 아무튼 이 제의적(祭儀的)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일반 유대
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다(막 7:3-4).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유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악습을 질책하기 위한 의
도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11:39
겉은 깨끗이…속인즉 탐욕과 악독 – 예수는 ‘주'(* , 호 퀴리오스)
로서 말씀하시며, 그 대상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넘어 전체 바리새인들
에게로 확대된다. 예수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태의 경우는 (마 23:25)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
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
자들이라는 것이다. 탐욕(* , 하르파게스)은 ‘채어가다’는 뜻의 ‘하르파
조'(* )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악독'(*
, 포네리아스)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 )에서
온 말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
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 질 수 있으리
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
는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눈에는 피조물들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마 10:26).
=====11:41
그 안에 있는 것 – 이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1)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 곧
호화 음식으로 봄. 그러면 그 의미는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식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잔 속에 있는 것을 구제물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
라”(NEB)가 된다. (2)이를 부사적 대격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라”의
뜻으로 본다(N.Turner). (3)”네가 모아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즉시 너의 소유물
이 깨끗해 질것이다”(J.Knox). (4)누가가 기록한 ‘구제하라’는 아람어 ‘깨끗이 하다’
(dakki)를 ‘자선을 베풀다'(zakki)로 오역한 것이라는 해석(Wellhausen). 이러한 세가
지 해석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39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2)의 견해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
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
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11:42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여기서부터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여섯
가지의 화(禍)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문구에는 ‘저주’ 또는 ‘복
수’의 의미라기보다는 ‘탄식’의 뜻이 들어 있다(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장(死藏)시킨 채 그 형식에만 집착함으로써 성스러운 하나님의
율법을 박재화시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바판하고 있다. 본래 구약의 율
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다
(레 27:30-33;신 14:22-29).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랍비적 규범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
분화하였는데,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한다(Mishna). 이런
것 자체가 벌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리새
인들이 바친 십일조의 세 항목이 열거되고 있는데, ‘박하'(* , 헤두오
스몬)는 정원에서 재배하는 식물로 그 향기가 좋으며, ‘운향'(* , 폐가
논)은 회록색의 잎과 노란 꽃을 가진 식물이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23) ‘회향’
(* , 아네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논드 향료(anethum graveolens)를
가리킨다. 마지막 항목인 ‘채소'(* , 라카논)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채소를 뜻한다. 마태는 누가와 달리 특정
한 종류인 ‘근채'(* , 퀴미논)로 기록하고 있다.
공의와…사랑은 버리는도다 – 형식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
성적이며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탈색시켜 버렸다.
여기서 ‘공의'(* , 크리시스)는 ‘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Easton),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
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랑'(* , 아가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에 근거하여 마음과 목숨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가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리킨다(10:2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 ‘버리다'(*
, 파레르케스데)는 ‘비켜나다’, ‘간과하다’의 의미로 이들의 행위가 중요한 핵
심을 비켜가면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 예수게서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는 만큼 그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전자만이 지켜질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정결법의 규절을 파기하신 예수께서(38절) 율법의
준수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맹목적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문제 제기이다. 왜냐하면 (1)예수께
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시지 않고(16:17), (2)결코 예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3)을 법이 규정하지도 않은 유전적(遺傳的)
규범을 거부하는 것과 정당한 목적을 가진 십일조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
기 때문이다.
=====11:43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명예
욕이 지적된다. 첫째로 지적되는 것은 교권적 교만으로, 그들은 공식적 예배 종교 교
육 담당 기관인 회당에서 늘상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23:6) 이들이 잔치에서도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높은
자리'(* , 프로토카데드리아)는 ‘가장 높은 자리'(the most
important seats, NIV)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바리새인들이 회
당의 상석에 앉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보다는 특권
적 우월 의식(優越意式)이나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점
이다. 둘째로 지적되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으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자신
들의 특별한 존재성을 확인받는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안 인사의 차원을 넘어 존경의 표시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
들로서 당연히 존경의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내면과 행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
에서 바른 것인지를 점검해 봤어야 했던 것이다.
=====11:44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 바리새인들에 대한 세번째 화(禍)는 그들의 본질적 모습
에 관한 것이다. 즉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억울한 부
정을 범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게 되는데 평토장한 무덤 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도 닿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본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썩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 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로 비
판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23:27)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고
있다. 즉 거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즉 속에는 죽음과 부패함이 있으나 겉은
아름답게 치장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들의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외부적인 치장에 비판의 초점이 맞
추어져 있는 것이다.
=====11:45
한 율법사가…모욕하심이니이다 – 여기서부터는 비판의 대상이 바리새인에서 율법
사로 바뀌어진다. 마태복음의 경우 이 두 그룹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함께 싸잡아 바
난하고 있다(마 23:13,27,29). 여기서 율법사는 일명 서기관(scribe)으로 불리기도 하
는데(막 12:28), 유대교의 전문적인 율법 해석자나 율법 교사들을 가리킨다. 본문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에 율법사도 함께 있었음을 말해주는데(37절) 이 율법사
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듣고 있던 중 마치 도둑이 제 발저린다는 격으로
찔림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율법사의 대부분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받
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율법사는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
다”는 불만을 드러냄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비판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
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그가 교만으로 가득차 예수의 비판을
‘모욕'(insult, NIV)으로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비판을 근거 없고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았음을 뜻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사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다.
=====11:46
지기 어려운 짐을…대지 않는도다 – 여기서 말하는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 자
체가 아니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사들의 해석을 말하는데, 이들은 사실
상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우월한 것으로까지 여겼다. 그런데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 되어 있고 복잡하여(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
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암기하여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저들은
이런 부담(burden)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
23:3).
=====11:47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 이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
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
지만(마 23:29,30)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
다. 이들은 죽은 선지자를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는 모순된 자들이며
(9:9;마 14:3-12), 앞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를 합한 것
보다도 더 위대한 한 선지자를 죽일 것이다(23:18,21,23).
=====11:48
너희는 쌓으니 – 47절과 마 23:29에서처럼 무덤을 장식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
나 그 보다는 역설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 의미는 (1)”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즉 조상들의 악행을 완성
한다”(Manson, Schweizer). (2)”너희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전하는 말씀을 거부한
너희 조상들 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너희들은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O.Michel, Schulz). 결국 여기서도
계속 지적되는 것은 외적인 경건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역이다.
=====11:49
하나님의 지혜 – 이 문구에 대한 용례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문구에 대
한 학자들의 해석도 각양 각색이다. 학자들의 제 해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핍박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유대 묵시문학서 중 하나
의 이름이라고 본다(Bultmann). 그러나 이런 제목의 책은 발견된 적은 없다. (2)하나
님의 ‘지혜'(God in his wisdon. NIV)는 예수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Tatian,
Geldenhuys).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wisdon from God, NIV)라고 말한 적은 있
으나(고전 1:30), 예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경우는 없다. (3)구약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Godet). (4)예수께서 과거에 하셨던 말씀들로 본다(Meyer). (5)예수의 지혜
속에 있는 하나님 즉 그의 예지와 신적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Lenski). (6)’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의 의미로 본다(Creed, Manson, Danker). (7)구
약과 유대교에서 지혜를 인격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적 지혜”로 이해한다
(U.Wilckens, Schulz). 지혜가 인격화되는 예를 보면 잠 1:20-33에서는 인간에게 말을
하며, 7:35에서는 그 자녀들에 관해 언급한다. 이러한 제 견해들 가운데 (6)과 (7)의
견해가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11:50
모든 선지자의 피 – 앞서간 세대들이 저지른 과오는 후대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고 은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
려 주어진 기회와 은총을 저버릴 때에는 전(前) 세대들로부터 누적된 심판을 받게된
다. 바로 예수 세대의 유대인들이 이런 상황을 자초하고 있었다(47-48). 전 세대들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을 더하는 세대들에게 가해질 형벌의 중함과 엄격함
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여러 차례 기록이 되어 있다(잠 29:1;렘 7:16;겔 14:14). 한편
본문의 ‘모든 선지자’에 대해서 마태는 ‘의인'(* , 디카이온)으로 표현
하고 있는데 이는 ‘아벧’을 언급함에 있어서 ‘선지자’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을 것
이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Marshall). 그러나 본문에서도 ‘선지자’라는 칭호에 초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그
의미는 동일하다.
=====11:51
아벧의 피…사가랴의 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법상 처음 책인 창세기로
부터 마지막 책인 역대기하에 이르기 까지의 의로운 첫번째 죽음과(창 4:8) 마지막 죽
음(대하 24:20-22)을 표현한 것이다. 아벧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았으나 그의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 죽임을 당한 의인이었다. 한편 마태는 사가랴가 바라갸의 아들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마 23:35),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스가랴)로
(대하 24:20) 기록하고 잇는 본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는 여호야다의 아들과 예언서 스가랴의 기록자인 ‘바라갸’
의 아들 스가랴를 혼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바라갸의 아들 스가
랴도 동일하게 살해당했다는 전승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 언급되는
스가랴는 A.D.67년 헤롯당에 의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바라이스의 아들 스가랴로 보
는 견해도 있는데 이럴 경우 선지자의 죽음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의 전(全) 유대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셈이며 예루살렘의 멸망도 피의 대가로 지불된 하나님의 심판으
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담당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매우 강한 결
의의 표현으로 그 속에는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A.D. 70년경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파멸됨으로써 과연 그 세대는 피의 대가를 담당하였
다.
=====11:52
지식의 열쇠 –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 행위 자체로도 악한 것이지만 더 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시켜 버리는 행위임을 밝혀지고 있다.
사실상 율법사(律法士)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어서 마치 천국
문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형식만을 남겨둔 채 정신을 사장시켜 버리는 행위나 인간적인 전통에 맹종하여 결과적
으로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집을 부과하는 그들의 행위는 말 그대로 진리의 문,
천국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
다. 이런 행위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 중에 부정을 범하게 만드
는 행위(44절) 이상의 것으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11:53
거기서 – ‘거기’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과 율법사들의 위선과 몽매함을 준엄하게 비판하신 후에 그 집에서 나오고 있다. 식사
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식사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맹렬히 달라붙어…힐문하고 – ‘맹렬히'(* , 데이노스)는 ‘두렵게’,
‘무섭게’의 의미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얼마나 결한 감정의 상태로 까지 흥분되어
있는가를 말해준다. ‘달라붙어'(* , 에네케인)는 ‘몹시 분노하다’ ‘누구
에게 분노를 품다’의 의미이다. 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의 비판을 겸허하
게 받아들여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기들의 잘못을 비판(批判)하는 선지자들을 죽
인 조상들처럼 예수를 해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1:54
잡고자 하여…지키더라 – 이 표현들은 사냥에서 사용되는 것들로 적대자들의 증오
의 정도가 얼마나 심하며 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잡고자 하여'(*
, 데류사이)는 ‘쫓다’, ‘사냥에서 잡다’의 의미를 가지며, ‘지키더라'(*
, 에네드류온테스)는 ‘-안에’를 뜻하는 ‘엔'(* )과 ‘자리’를 뜻하는
‘헤드라'(* )의 합성어로 사냥감을 포획(捕獲)하기 위해서 매복해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저들은 지금까지 행한(39-52절) 예수의 비판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
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의 비판이 정당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공격할
허점을 찾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명분도 없는 일을 위해 이성
을 잃고 광분하는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품위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며 짐승이
나 잡아먹고 사는 추한 모습인 것이다.
매일말씀묵상. 2월 25일. 누가복음 11장.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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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 장 . 기도는 신앙 수준을 반영한다 .
1. 주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제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 여기서도 주님은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1). 자기들도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듯이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구했습니다. 이에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 ( 나라 ) 가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최우선인 하나님 중심적 기도였습니다 (2) . 당신의 기도도 그렇습니까?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그 후에 주님은 우리의 일상적 필요와 영적 필요를 구하라 고 가르치셨습니다.
2. 주님은 계속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5~13) . 한 밤 중에 갑자기 손님을 맞게 된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가서 떡 세 덩이를 구했습니다. 모두가 한 방에서 잠을 자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난처하고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너무 당당하게 간청을 하니까,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 당당한 간청함 때문에 일어나서 떡을 주었다는 비유입니다. 당시 손대접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 그는 당당하게 이것을 요구했고 , 친구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주님은 기도할 때 그런 당당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9~10).
3. 악한 아버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주는데 ,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 성령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13) 핵심은 성령님 , 하나님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최고의 선물이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성령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을 구하는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을 구하는 대신에, 세상의 것 중에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이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4. 주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합니다 (14~15). 주님께서는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지 않으며, 설령 귀신이 쫓겨났다 해도 그 사람이 거듭나서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귀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와 이전보다 더 황폐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말씀 앞에서 잠시 반응하지만, 회심 없이 뒤로 돌아서면 그의 영혼은 이전보다 더 나빠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한 여인이 주님을 잉태하고 주님께 젖을 먹인 어머니를 찬양하는데, 주님은 그것을 비난하지는 않으셨지만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그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27~28).
5. 예수님은 여전히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악한 사람들에게 ,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심판의 날에 회개한 이방인들이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하십니다 (31~32). 누가복음이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라는 점에서 이런 묘사는 두드러집니다. 구원은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이방인에게 열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갑자기 등불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눈이 어둡다는 것을 비유하여 지적하신 것입니다 (33~36). 하나님은 빛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으나, 맹인들은 도무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빛 가운데로 오지 않았습니다.
6. 주님께서는 한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함께 점심을 드시는데, 주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시니(정결의식으로서) 바리새인이 그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37).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 겉과 형식에 집중하는 바리새인의 태도를 비난합니다 . 문제는 겉이 아니라 , 그 마음입니다 .
7. 이어서 주님께서는 그 식사 자리를 뒤엎는 무서운 상황을 만드십니다 .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을 향하여 ‘ 화 있을진저 ‘ 라는 반복적인 저주를 행하신 것입니다 (42~52) . 바리새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이런 저주를 받아야 했던 것은, 그들이 율법이 명하지도 않은 세세한 영역에서까지 십일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형식일 뿐 율법의 정신인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저버렸기 때문입니다(42). 주님은 형식을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그 형식이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율법교사가 자기들까지 모욕하심은 당치 않다고 항의하자(45) 주님은 율법교사까지도 저주하십니다. 과거에 선지자들을 죽인 책임과 지식의 열쇠를 갖고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책임을 율법 교사들에게 돌리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무슨 말 실수라도 하게 하려고 자리를 떠나시려는 주님께 거세게 따져 물었습니다(53~54). 인간의 죄성은 말씀의 책망을 달게 받지 않습니다.
8. 기도는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반영합니다 . 기도가 자신의 일상적 필요와 문제들을 중심으로 행해진다면 , 그는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 그 정도의 기도는 여느 종교에도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최우선순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가장 은밀한 행위인 기도에서 반영됩니다 .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문제는 이런 참된 신앙의 부재였습니다 .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자신이었습니다. 자기가 옳고 자기 의가 관심사였기에, 그들은 자기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예수님께 달려들어 비난거리만 찾은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는 참된 신앙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 성령님을 통해 은혜를 더욱 구하십시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겉과 형식이 아니라, 저희의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의 기도가 깊어지는 은혜를 주옵소서. 더욱 성령님을 구하며, 저희의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책망의 말씀을 달게 듣고, 깨닫고, 고치며, 행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기도하라 누가복음 11장 1절-13절, 큐티자료 오늘의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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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기도의 모범에 대한 예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과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큐티자료 본문을 통하여 오늘의말씀묵상을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대해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찬송 : 새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1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받게 하시네
2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내게는 가장 귀하다 저 광야 같은 세상을 끝없이 방황하면서
위태한 길로 나갈 때 주께서 나를 이끌어 그 보좌 앞에 나아가 큰 은혜 받게 하시네
3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때껏 지은 큰 죄로 내 마음 심히 아파도
참 마음으로 뉘우쳐 다 숨김없이 아뢰면 주 나를 위해 복 주사 새 은혜 부어 주시네
4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주 세상에서 일찍이 저 요란한 곳 피하여
빈들에서나 산에서 온 밤을 새워 지내사 주 예수 친히 기도로 큰 본을 보여 주셨네 아멘
성경 : 누가복음 11장 1절-13절, 개역개정성경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본문 이해를 위한 질문
1.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기도의 방법을 물은 것일까요, 기도의 내용을 물은 것일까요? (1)
오늘의 말씀묵상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고, 제자들은 기도를 배웁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지만, 기도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배워서 기도하라(1-4)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는 귀하지만, 특히나 기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배움 없이 운전대를 잡는 것도 위험하지만, 배움 없이 내 생각과 내 방식대로 기도하는 것도 위험하고 허망한 신앙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십니다. 모든 기도의 원천인 주기도문을 일러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를 먼저 구하고, 이어서 필요한 것을 구하며, 용서의 나눔과 시험에서 이길 힘을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나의 기도는 주기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2. 간절히 기도하라(5-8)
주님은 기도의 방식을 가르치시는데, 무엇보다 간절함입니다. 기도의 열심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은, 밤늦은 시간 친구 집의 문을 염치 불구 쾅쾅 두드리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어 난감해 하다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미안하지만, 친구의 문을 두드립니다.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 우리를 향한 약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친구도 간청하는 자에게 응답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랴. 아멘.
나는 기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나의 기도는 간절함으로 뜨거운 기도입니까?
3. 믿음으로 기도하라(9-13)
마지막으로 주님은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시는데, 믿음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주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 (9-10), 그것도 반드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품고 기도하라(11-12).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분을 믿기 때문입니 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능력의 하나님.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하나님이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기도 제목을 가르치시는데, 성령님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입니까? 주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까?
오늘의 기도
1.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제대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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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겉과 속 (누가복음 11장 37-54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기록된 명령 외에도 자기들이 임의로 추가적으로 지켜야하는 명령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행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식사 전 손 씻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이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데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식사 전 손을 씻는 일은 신앙 정체성과 관련 있다고 여겨질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오늘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서 자기와 함께 식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려고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식사하기 전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식사 전 손 씻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례들을 지키는 데는 열심인 것에 반해 속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는다. 그러나 그 속에는 욕심과 악한 것이 가득 차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속에 있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종교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모세오경은 거의 암송할 정도였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면 얼마나 대단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리새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안에는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진정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서 거룩한 모습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 은 열심히 했으나 사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 주변에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새벽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와 같은 교회 공예배에 절대로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아침 일찍부터 늦은 시간까지 봉사합니다. 기도 시간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크게 기도합니다. 무엇 하나 신앙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고 그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다고 평가하신다면 우리 고개가 갸우뚱거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거룩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거룩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행동은 가장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마음은 더럽고 추악한 죄악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남들 볼 때는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의 칭찬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가면을 쓰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실 때 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껍데기만 남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책망한 것이죠. 심지어 42절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이 형식적으로 십일조 한 것에 대해서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모든 소유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겉으로 율법의 의무만 지킬 것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거룩한 척 행동했고, 사람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 앞에 머리 숙이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43절에 예수님은 이런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율법에 따르면 시체와 접촉하면 7일간 부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무덤을 밟지 않습니다. 무덤과 주위 땅도 시체로 인해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마치 평평한 무덤 같아서 사람들이 무덤인지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니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바리새인들과 교제하면서도 그들의 속이 부정한 자들인줄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위선자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부정하고 더럽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계실 때,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말하기를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시는 것입니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잘못 적용하며 살아가던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은 율법을 연구해왔던 율법교사들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폄하하고 모욕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율법교사의 항의를 받으신 예수님은 율법교사들도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도 화가 있다!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이 당시 율법교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결한 삶과 부정한 삶에 대해서 세밀하게 설정해 두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몇 걸음까지 걸어갈 수 있는가? 어느 정도 무거운 것까지 들 수 있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율법교사들의 잘못된 성경의 가르침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율법교사들 본인들은 이런 무거운 규례를 지키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위선적인 종교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의 종들을 배척하고 제거하는 일들을 당대에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해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에서 가장 먼저 죽은 아벨의 피로부터 역대하에 나오는 스가랴의 피까지 이 세대가 억울하게 죽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핏값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역대하 24장에 나오는 스가랴가 가장 마지막으로 죽은 하나님의 종의 이름으로 나오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성경에는 말라기가 아니라 역대하가 가장 맨 마지막 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창세 이후 모든 주의 종들이 흘린 피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율법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가지고도 그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았고, 동시에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돕기는 커녕 그 길을 가로막았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부류,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이 당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도 충만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생활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께 가장 많이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으로 그 사람의 거룩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속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껍데기 신앙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주지 못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말씀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겉은 속과 같습니까? 종교생활의 활동들은 있으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자비의 정신은 사라지진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을 더 중요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의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본받지 말고, 겉과 속이 일치하여 마음과 정성을 담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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