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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r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한국에 온 지 9개월, 꽃다운 나이 25세에 숨을 거둔 루비 켄드릭 선교사.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드리기 원했던 켄드릭 선교사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한국 선교 촉진의 중요한 모멘텀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값진 희생을 통해 예수의 생명을 받게 된 우리.
복음의 빚진 자로서의 우리가 감당해야 할 거룩한 몫이 남아있다.
자료 제공: 한국기독교사연구소 KICH – Korea Institute of Church History
더빛교회 웹사이트: www.thevi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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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켄드릭 선교사님의 편지” – 옥수교회

지난 수요예배 때 선교사님의 말씀 중 끝날 때 즈음 언급하셨던 루비 켄드릭(Miss Ruby Rachael Kendrick, 1883-1908) 선교사님의 편지에 큰 감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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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k-su.org

Date Published: 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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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마지막 편지 – 다음블로그

[스크랩]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마지막 편지 · 이 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 하루 종일 집 생각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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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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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켄드릭 선교사 이야기 – CTS기독교TV

루비 켄드릭 선교사 이야기.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그녀의 묘비 상단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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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ts.tv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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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의 생애와 사역 – DBpia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 1883-1908)은 1907년 9월 남감리교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해서 불과 9개월도 되지 않은 1908년 6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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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bpia.co.kr

Date Published: 7/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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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을 기억하며] 한국 선교의 소중한 밀알, 루비 켄드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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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루비 켄드릭 선교사

  • Author: 더빛교회 Thevi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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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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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캔드릭 선교사(Lubye Rachael Kendrick, 1883. 01. 28 – 1908. 08. 15)

루비 캔드릭(Lubye Rachael Kendrick, 1883. 01. 28 – 1908. 08. 15)



 루비 캔드릭

양화진의 루비 캔드릭 비문



 루비 캔드릭의 무덤

24 세 처녀의 몸으로 먼 이국땅을 찾아온 그녀는 이 땅에 온지 9 개월 만에 순교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면 루비 켄드릭의 묘가 있다. 1908 년 급성맹장염으로 25 세의 청춘을 조선 땅에 묻은 여선교사다 .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를 파송한 텍사스 청년단체에 편지를 보냈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아침저녁으로 조선에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만약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의 있다면 나는 천 개의 생명을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그녀가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 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아요.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조선은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다들 철수하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도 집에 가고 싶어요….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 바로 이것은 조선에 대한 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아빠, 엄마∼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진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욱 더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루비 켄드릭 선교사님은

처녀 선교사님으로 오셔서 9개월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병에 걸려 순교하신 선교사님이십니다 .

그러나, 선교사님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은 것은,

그 선교사님의 순교의 소식을 듣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사님의 뒤를 이어

한국 땅에 오셔서 그들도 이민족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병으로 치료 받을 때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저녁으로 한국으로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

라고 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수십 배의 선교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그녀가 죽기 전에 텍사스 웹윗청년회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한국에 주렵니다 ”

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편지는 바로 텍사스 웹윗청년회의 연합대회 기간 중에 배달되었다. 멀리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 캔드릭을 보내 놓고 기도하던 이들은 이 편지를 읽고 그녀의 뜨거운 선교열정에 감격해 하면서 그녀의 선교사역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한국으로부터

다시 한 통의 전보가 배달되었다. 그 내용은 캔드릭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함께 모여 있던 웹윗청년회 회원들의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슬픈 소식을 듣고 그들의 선교 열정이 더욱 불타올랐다. 자신들도 친구처럼 이방 땅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죽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녀가 죽은 뒤 3 년 동안 텍사스 웹윗청년회에서는 20 명이 선교사로 자원했고 , 이들 중에서는 한국으로 파송된 이들도 많이 있었다 . 이들은 매년 헌금을 하여 한국 선교사 한 사람의 선교비를 담당하였다. 또 텍사스 웹윗청년회에서는 돈을 보내어 아름다운 친구의 묘비를 세워주었는데 묘비에는 그녀가 남긴 글을 새겨 그녀의 뜨거운 예수사랑과 한국 사랑의 신앙을 기념하도록 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죽기 전에 이 땅에 예수에 대해 증거 하러 온 사람들과 함께 쉬게 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한국감리교회 초대 감독이 된 양주삼 목사는 이 당시 캔드릭을 파송한 같은 남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테내시주 벤더빌트 대학에 재학하고 있었다. 자신의 조국에서 순직한 캔드릭과 고향 텍사스 웹윗청년회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1911년 <그리스도인 회보>에 편지를 써서 이들의 선교열정을 조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루비 켄드릭

켄드릭 (Ruby R. Kendrick, 1883-1908)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비범한: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의 생애와 사역”

글을 시작하면서

“저는 여기서 너무도 행복합니다. 심지어 나의 간절한 숙원이 실현되었습니다. 나의 숙원이 점점 더 날마다 아름답게 점증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1907년 루비 켄드릭이 한국에 도착해서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그녀는 1907년 8월 29일 24세에 한국에 도착해 불과 9개월도 되지 않은 1908년 6월 19일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짧은 생애를 살다갔으면서도 그토록 깊고 그토록 넓고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동료선교사들과 한국인들에게 남긴 선교사도 그리 많지 않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묘비에는 자신의 평소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간절한 염원, “만약 제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한국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루비 켄드릭은 지금은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명성에 비해 그녀에 대한 연구논문이 전무하고 학적인 뒷받침이 담겨진 무게 있는 논문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본 논고는 그런 상황에서 충실한 자료를 통해 그녀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그녀의 순결한 죽음이 가져다 준 그녀의 고향 텍사스를 중심으로 한 미국남감리교회의 선교적 결실을 종합적으로 조명한 첫 논고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 인물을 지나치게 미화시키거나 영웅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사역을 폄하하는 행위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녀는 한국선교를 자원했고, 한국에 와서 최선을 다해 사역을 감당했고, 그녀가 못다 한 한국사역이 중단되지 않기를 마지막 순간에도 간절히 염려했고, 본국에 한국선교를 간절히 호소했고,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녀는 지금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루비 켄드릭의 고향에서는 그녀의 한국선교를 향한 진실된 사랑과 간절한 호소에 응답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선교를 자원했고, 루비 켄드릭선교회가 조직되어 대대적으로 한국선교를 지원하여 한국선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본고는 비록 그녀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서론적인 논고이지만 그녀의 생애와 노고 그리고 미친 영향을 역사사료에 근거하여 개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하였다.

루비 켄드릭의 재조명, 재평가

살았을 때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인물이 후대에 재조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로 루비 켄드릭이 그런 여인이었다. 그녀는 “만약 제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라는 묘비에 새겨진 인상 깊은 문구로 인해 양화진에 묻힌 외국 선교사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곳을 방문하거나 그녀의 삶을 전해들은 이들의 심령에 살아 역사하고 있다.

1908년 6월 19일 금요일 세상을 떠난 루비 켄드릭의 장례예배가 이틀 후 6월 21일 주일 아침 8시 30분 의료선교사 허스트(J. W. Hirst) 박사 집에서 드려졌다. 켄드릭의 사랑하는 친구 코들리어 어윈(Cordelia Erwin)은 이렇게 추모의 글을 시작했다.

“우리 뒤에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사는 것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닙니다(To live in hearts we leave behind is not to die). 그렇습니다. 그녀는 진실로 그녀 뒤에 남겨진 저들의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이날 장례식에서는 그녀가 한국에 도착해 죽는 순간까지 혼신을 다해 섬기던 송도 남감리교회의 담임목사 왓슨(A. W. Wasson)이 예배를 집례했다. 그는 그날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그렇게 젊은 생명, 그렇게 잘 준비되고, 그렇게 성결하고, 그렇게 무르익어 추수를 기다리는, 선교지에 와서 낟을 들고 막 추수를 시작하려고 하는 바로 그 때 하나님 나라로 불러가시다니 오 신비할 뿐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암울한 미스테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인간의 눈 그 이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그 신비를 밝혀줄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는 그를 통해서 손실은 그분의 것이 아닌 모두가 우리의 것입니다.”

루비 켄드릭의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왓슨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죽음을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셨다. 그녀의 죽음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고귀한 희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의 성장과 선교사로서의 준비

루비 켄드릭은 1883년 1월 28일 텍사스 콜린스 카운티 플래노(Plano)에서 아버지 존 타일러 켄드릭(John Tyler Kendrick, 1841-1935)과 어머니 케이트 엠마 바넷 켄드릭(Kate Emma Barnett Kendrick, 1853-1886)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켄드릭의 아버지 존 켄드릭은 1841년 7월 27일 버지니아 스캇 카운티의 아빙돈에서 출생했고, 32살 때 1873년 12월에 케이트 바넷과 결혼하여 조지(George Barnett), 미노나(Mynona), 루비(Ruby Rachel), 메리(Mary) 등 1남 3녀를 두었다. 루비는 딸로는 둘째였고, 전체 자녀 중에는 셋째였다. 아버지 존 켄드릭이 텍사스 콜린스 카운티 플래노로 이사 온 것은 1871년이었다. 그는 플래노에 거주한 가장 오래된 주민 중의 한 명으로 다년간 플래노의 모든 공공문제에 적극적으로 연관을 맺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플래노의 발전사 이면에 그의 노고와 공헌은 컸다. 그리고 주변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루비에게는 두 명의 고모 라헬 클레퍼(Rachel W. Klepper, 1838-1916)와 엘렌 켄드릭(Ellen Kendrick)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루비 켄드릭이 3살 때인 1886년 11월 12일 사랑하는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정확히 몇 살 때부터 고모 집에서 양육을 받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엄마 케이트가 세상을 떠나고 켄드릭은 고모 라헬 클레퍼 가정에서 양육을 받았다. 고모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고모는 자신의 두 딸만 아니라 루비 켄드릭을 반듯하게 잘 양육했다. 마치 모라비안 공동체의 창시자 진젠도르프가 일찍 어머니를 여위고 경건한 조모 밑에서 훌륭하게 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루비는 8살 때 회심하고 플래노 시의 남감리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인상적인 사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힘들었음에도 루비 켄드릭이 어릴 때부터 사회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켄드릭의 가정을 잘 알고 켄드릭이 다니는 교회 신실한 여자 성도였던 바우만 여사(Mrs. J. H. Bowman)에 따르면 “루비 켄드릭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종류의 사회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단지 10살 때 가족들에게 전혀 말도 하지 않고 도시의 술집을 없애 달라고 그녀의 고향 플라노 시 당국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호소의 편지를 보냈다. 이 호소의 편지는 그 도시 신문에 보도되어 그녀의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주님을 너무도 사랑했고, 조숙할 정도로 경건한 삶을 실천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아름다운 경건이 한 나라를 위한 경건도 선교를 위한 경건도 아니었고, 그녀가 평생 축복 속에 자신의 전 생애를 드리기를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경건이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켄드릭은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903년 미주리(Missouri)주 캔사스 시(Kansas City)에 있는 3년 과정의 스카릿성경훈련학교(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했다. 스카릿성경훈련학교는 남감리교선교사 훈련을 위한 학교로 루시 마이어(Lucy Rider Meyer)가 설립한 시카고 선교훈련학교(the Chicago Training School for Home and Foreign Missions)와 성격이 유사한 선교사훈련학교였다.

켄드릭이 해외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데는 감리교 목사 마운트캐슬(W. D. Mountcastle)과 바톤(L. S. Barton) 목사의 목양과 설교의 영향이 컸다. 바우만 여사는 켄드릭이 스카릿성경훈련학교에 재학하던 1904년 해외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지만 다른 자료에 의하면 선교사로서의 그녀의 결심은 그보다 2년 앞선 1902년 그녀의 나이 19살 때였다. 이것은 플라노교회 역사 기록과도 일치한다. 1902년 플라노감리교회 안에는 슈멜페닉 여사(Mrs. Schimelpfenig)와 브라운 여사(Mrs. Bowman)의 지원 속에 여자청년선교회가 결성되었는데 창립회원은 메이 다이(May Dye)와 루비 켄드릭 두 명이었다. 그해 여름에 있었던 부흥회 동안에 이 두 사람은 큰 은혜를 받고 해외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그 이듬해 1903년 남감리교 선교사 훈련학교인 스카릿성경훈련학교에 입학하였다. 필자의 연구로는 그녀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1902년보다 몇 년 더 앞선다. 파커(F. S. Parker)가 증언한 것처럼 사실 루비 켄드릭은 중학교 시절부터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2007년 텍사스 코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에서 개최된 엡웻 청소년 캠프대회에서 그녀가 한 고별인사에서 읽을 수 있다.

“저는 주니어 엡웻 청소년회의 소녀 시절 해외선교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은 점점 더 깊어졌고 점점 더 강해졌으며, 이제 저는 곧 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오를 예정입니다. 저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루비 켄드릭은 작은 소녀(a little girl) 시절부터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강해져 1902년 여름 부흥회 기간 동안 해외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루비 켄드릭은 스카릿성경훈련학교 시절 메이 다이와 함께 당시 미국 전역에서 강하게 일고 있던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학생자원운동에 대한 관심은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고, 실제로 그 운동에 앞장섰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 1년 동안 수학했던 사우스웨스턴대학교에서도 그녀는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26명으로 구성된 학생자원운동 밴드의 회원으로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 학생자원운동대회 보고서에 수록된 1907년 학생자원운동 출신 해외선교사 파송명단에 루비와 메이도 포함되어 있다.

켄드릭은 1905년 스카릿성경훈련학교를 졸업하고 텍사스 테릴에 위치한 노스텍사스대학교스쿨(North Texas University School) 교수진에 합류했다. 해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루비 켄드릭이 바로 선교사로 나가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교사 준비를 위한 일종의 훈련과정이라고 여겨진다. 그녀가 맡은 과목은 구약성경연구(Old Testament Studies)와 신약성경연구(New Testament Studies)를 비롯한 성경과목이었다. 몰간(L. M. Morgan) 목사가 야심차게 새로 시작하는 북텍사스대학교스쿨의 교수진이 엄선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녀의 교수진 발탁은 참으로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이전에 학교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고 얼마나 성실하게 학창시절을 보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들 11명의 교수들 중에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선생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루비 켄드릭이었다. 이 학교의 역사를 기술한 한 논고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북텍사스대학교스쿨(웨슬리대학전신) 첫 교수진 가운데 몇몇 선생은 그들의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교장 몰간(L. M. Morgan)은 학생들에게 멋진 옛 신사, 아주 핸섬한 사람, 그리고 놀라운 선생으로 기억되었다. 마가렛 클리치범(Margaret Kreichbaum), 밴(J. B. Vann), 그리고 워커(H. P. Walker)도 또한 탁월한 선생으로 인용되었지만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는 젊은 여자 선생은 특별히 그 학교와 감리교에 강력한 공헌을 하였다. ‘미스 켄드릭’(Miss Kendrick)으로 알려진 텍사스 플래노 출신의, 단신의 어두운 색채의 여인, 루비 켄드릭이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가 상급반만 가르쳤는데 이전의 한 학생은 그녀가 ‘아주 명석했다!’고 회고했다. 그녀가 담당한 과목은 구약과 신약이었지만 그녀는 선교사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노스텍사스대학교와 지역 감리교 목사의 부사역자(assistant)로 아주 품위 있게 섬긴 후 1907년 8월 한국에 선교사로 나갔다.”

이 학교는 1909년 웨슬리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어 정식 대학교로서 자리 잡았다. 비록 정식 대학으로 채비를 갖추기 전이었지만 루비 켄드릭은 텍사스 테릴(Terrell)에 위치한 노스텍사스대학교스쿨 교수진의 한 명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노스텍사스대학교스쿨에서 1년을 가르친 후 1906년부터 1907년까지 1년간은 선교사 준비를 하며 사우스웨스턴대학교(Southwestern University)에서 공부했다. 고등교육기관에서 그녀의 1년간의 가르치는 사역과 1년간의 추가적인 학문 연마는 그녀를 더욱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더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사우스웨스턴대학교에서의 학생자원운동 활동과 그 학교 여학생 모임 ‘시그마 시그마 시그마’의 활동은 해외선교와 교사의 비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스카릿성경훈련학교를 졸업한 후 2년간은 그녀가 선교지에서 자신의 이상과 철학을 흔들리지 않고 견지할 수 있도록 그녀의 지성과 영성과 사회성을 아름답게 다듬어 주는 너무도 좋은 훈련의 기간이었다. 촉망 받는 젊은 여자 교수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비전을 심어줄 수 있는 너무도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녀는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선교의 열정으로 불타는 그녀에게 선교의 비전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였다.

1907년 남감리교 여자해외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는 켄드릭을 한국에서 5년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할 선교사로 임명했다. 여자해외선교부는 스카릿성경훈련학교 졸업생 중에서 9명을 해외여자선교사로 임명했고, 노스 텍사스의 루비 켄드릭, 테네시의 마르다 베티(Martha Ivy Batey), 사우스 조지아의 루비 릴리(Reubie Lilly) 등 3명을 한국에 파송했다. 1907년에 파송된 12명의 여자 선교사 중에서 9명이 스카릿성경훈련학교 출신이었다. 스카릿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캐롤(Miss A. Carroll)과 코들리어 어윈을 포함한 대부분의 남감리교 여자선교사들은 스카릿출신이었다. 루비 켄드릭은 그해 1907년 텍사스 남감리교 여자선교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고별연설을 맺었다.

“복음의 이야기를 전하는 즐거움은 그 어떤 희생도 삼켜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해외 선교사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분명히 엄청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겠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그 즐거움은 그 어떤 희생과 헌신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놀랍다는 고백이다. 그녀가 얼마나 복음을 전하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사도행전이 증언하듯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복음전파의 즐거움이 너무도 강하고 크고 놀랍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역경도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루비 켄드릭을 파송한 교회는 그녀가 8살 때부터 출석하며 회심을 경험한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플래노감리교회였다. 1848년 11월 설립된 이 교회는 밀러( F. O. Miller) 목사가 부임한 후 신실하게 목양하며 교회를 발전시켜 1894년 교회당을 건축했다. 이 교회는 선교열이 대단해 1914년까지 선교사 세 가정을 단독으로 파송했다. 1914년 기록된 간단한 이 교회 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교회[플래노 남감리교회]는 수년 동안 블랙번(Revs. M. C. Blackburn)과 라일스(J. V. Lyles), 루이스(Barney Lewis) 등 감리교회 목회자들의 순회 목회 덕분과 교인 밴스(W. H. Vance)와 그녀의 신실한 기도를 통해서 메이스 박사 부부(Dr. &. Mrs. W. C. Mayes), 루비 켄드릭(Ruby Kendrick), 그리고 메이 다시 스미스(May Dye Smith)를 해외선교사로 파송했다.”

루비와 메이는 텍사스 프래노에서 출생해 그곳에서 함께 자라 플래노 감리교회를 같이 다니며 그 교회 청년선교회를 창립하고 스카릿성경훈련학교를 다녔고 둘 다 1907년에 남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로부터 파송 받았다. 다만 그들이 택한 선교지는 서로 달랐다. 루비는 한국을 선교지로 택했고, 메이는 브라질을 선교지로 택했다. 이 교회 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스카릿성경훈련학교를 졸업하고 그들은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그들이 택한 선교지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루비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서 그녀가 택한 선교지 한국으로 배정을 받았다.”

1907년 8월 25일 주일 저녁 그녀의 모교회 플라노감리교회에서 메이와 루비 두 사람의 송별예배가 드려졌다. 이 두 사람을 위해 열리는 송별예배에 친구들이 너무나 많이 참석해 교회가 이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07년 9월 6일 자 남감리교선교기관지 크리스천 어드보케이트(Christian Advocate)에 기록된 것처럼 그 송별예배는 플라노 사람들에게는 좀체 잊혀질 수 없는 예배였다. 이날 내쉬 목사가 고별메시지를 전했고, 주일학교를 대표해서 쉬멜페닉(Mr. F. Schimelpfenig)이, 엡웻청년회를 대표해서 브라운(Mr. M. D. Brown)이 그리고 여성해외선교부를 대신해서 제 3대 부회장인 바눔 여사(Mrs. W. F. Barnum)가 청중들과 두 명의 파송선교사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하였으며, 두 “젊은 숙녀들이 인상 깊은 답사를 했다.”

그로부터 4일 후 1907년 8월 29일 목요일 메이는 블라질 Rio de Janeiro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고, 루비는 그 다음날 8월 30일 한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캔사스 시 그녀의 모교 스카릿성경훈련학교를 며칠 동안 방문하기 위해 캔사스로 떠났다. 남감리교여자해외선교회 회원 여러 명과 루비가 한 달 전에 조직한 작은 해외선교사역자들 모임인 ‘켄드릭 사역자들’ 회원들과 선교사역 책임자 허드 여사(Mrs. C. P. Heard)를 비롯한 여러 명이 기차역에 나와 그녀를 배웅했다. 스카릿성경훈련학교에서 며칠을 보낸 루비는 9월 10일 시애틀 항에서 한국으로 출항하는 배를 타기 위해 시애틀로 떠났다. 루비 켄드릭은 이렇게 해서 사랑하는 고향교회의 재정후원과 북텍사스 엡웻청년회 지원을 받으며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루비 켄드릭이 향하고 있는 한국, 그녀를 기다리는 한국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간절히 추수꾼을 기다리는 너무도 무르익은 황금벌판이었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에 일어나 한국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세계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의 계절을 맞고 있었다. 1907년 7월 18일 원산주재 남감리교선교사 저다인(J. L. Gerdine)은 미국으로 오는 몽골리아 선상(船上)에서 미국 선교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자녀들을 교육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열렬한 한국인 기독교 지역주민들이 있습니다. 우선, 나는 우리가 그러한 경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같은 호소에 우리가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녀들을 위한 여자기숙학교는 인원이 가득차 더 확장해야 할 상황입니다. 송도의 남자학교는 118명이 등록하여 대단히 성공적인 첫해를 보냈습니다.… 원산에서 남자고등학교를 계획하고 있는데 당장 이 사역을 담당할 남자 사역자가 한명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의 동부에는 초등학교 1 학년 이상의 학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사로 부르신 분이 오셔서 이 학교를 개설해주십시요! 처녀지에다 열렬한 지지자! 전국의 교회들이 가능한 속히 주간학교 사역을 추진해야합니다.… 현재의 한국의 상황은 한국의 신속한 복음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열렬한 환영은 몇 지방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한국의 전역이 기독교 사역자들에게 열려 있다. 한국인교회는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현재의 선교사의 두 배 미만으로도 전국이 10년 안에 복음화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흑암의 동양 국가들 중의 한 나라에서 우리 주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이 실현되도록 교회의 신앙과 열심을 어떻게 자극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이 이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신속하게 준비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세계복음화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이제 짧은 시간 안에 한 국가를 복음화함으로써 이 가능성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복음화된 최초의 이방국가! -이것이 우리의 모토인 것은 단지 우리가 다른 국가들보다 앞서가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열방이 더 신속하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알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1907년 8월 16일 금요일 크리스천 어드보케이드(Christian Advocate)에 저다인의 보고서 전문이 실렸다. 크리스천 어드보케이드는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는 미국 남감리교회 교인들이라면 반드시 구독했던 상황이라 루비 켄드릭이 이 보고서를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는 아니다. 사역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와 같은 한국의 상황이 기왕의 켄드릭의 선교적 열정을 더욱 불타게 만들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에 입국 후 루비 켄드릭의 선교사역

1907년 9월 10일 예정대로 시애틀 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루비 켄드릭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07년 9월 말이었다. 24년간의 미국에서의 그녀의 아름다운 신앙의 삶은 한국에서 더욱 고귀한 결실로 이어졌다. 그녀가 한국을 자신의 선교지로 택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감리교해외선교부가 한국을 자신들의 중요한 선교전략국으로 삼고 유능한 남자 선교사들과 여러 명의 스카릿성경훈련학교 출신들을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한 때문이다. 루비 켄드릭이 한국으로 향하기 전 이미 캐롤, 하운셀, 와그너, 어윈, 아이비, 니콜스, 다이, 마이어를 비롯하여 8명이나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에서 코들리어 어윈(Cordelia Erwin, 1880-1976)과는 남다른 사이였다. 코들리어와 루비는 캔사스 시 스카릿성경훈련학교를 같이 다녔고, 그 학교 시절 룸메이트였으며, 송도에 와서 8개월을 지나는 동안에도 룸메이트였다.

루비 켄드릭은 1908년 남감리교선교회 영문 연회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도착 후 남감리교 서울선교회 소속으로 발령을 받았다. 1907년 한국의 남감리교회에는 의료 선교사 리드(J. W. Reed. M.D.), 베티(Miss M. Ivie Batey), 루베 켄드릭(Miss Ruby Kendrick), 루비 릴리(Miss Rubie Lilly) 등 4명의 선교사가 새로 임명을 받았는데 이 중에서 리드를 제외하고 3명이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첫 1개월을 서울에서 보낸 켄드릭은 11월부터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선교구역인 송도로 옮겼다. 송도에서 어학을 공부하면서 그곳의 남감리교 선교사 왓슨이 담임으로 있는 송도 남감리교회(West Ward Church)를 섬겼다. 켄드릭은 그녀의 오랜 친구 코들리어와 함께 탈룰라 여성의 집에 거주하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하였다. 코들리어는 이렇게 루비의 초기 한국의 송도 정착을 기록했다.

“그녀[루비 켄드릭]는 지난해[1907년] 11월 송도에 있는 우리의 ‘탈룰라 여성의 집’(Tallulah Ladies Home)에 있는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녀로 인해 우리는 행복하였고 같이 있는 멤버 구성도 완전해졌습니다. 오! 한국인들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너무 젊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루비 켄드릭을 가장 잘 아는 그녀의 선생은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였고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너무도 깊은 슬픔에 처해 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짧은 기간 우리와 함께 있었음으로 그녀는 이곳 송도의 학교 사역을 더 많이 착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침 기도회, 영어클라스, 병든 어린아이들 간호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해 첫 달은 서울에서 보내고 그 나머지는 송도에서 보냈습니다.”

루비 켄드릭에게 주어진 첫 선교 사역은 그녀가 출석하는 교회 주일학교의 초등부를 책임 맡아 섬기는 사역이었다. 그녀는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며 기쁨으로 그들을 섬겼다. 경건하고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송도에 오면서 동료 선교사들도 기뻤고, 송도의 부모들은 그 같은 천사의 마음을 가진 사랑으로 넘치는 젊은 여자 선교사를 보내주신 것에 감사했다.

“루비 켄드릭이 한국어를 배우는 동안 한국의 상황도 있는 그대로 배웠다. 그러면서 그녀가 너무도 종종 그들을 부른 것처럼 ‘나의 한국인 자매들’을 그녀가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우리가 송도에 있는 남감리교회(South Ward Church)를 함께 섬길 때 그녀는 주일학교의 초등부 책임을 맡기로 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영아들과 어린아이들은 루비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루비는 그들의 언어, 한국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무척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은 통역이 필요 없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통 사탕과 견과류를 가지고 다녔는데 교회에서 영아들에게 그것들을 주고 [예배가 방해받지 않게] 그들을 조용하게 해주었다. 이들 작은 어린 아이들 가운데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녀의 진심어린 친구들이 많았다. 한국여인들은 루비가 오고 나서 정말 행복해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간절히 바랬던 바로 그런 ‘부인’ 선교사가 이렇게 지금 와서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루비 켄드릭은 한국에 도착해 집안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부지런히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너무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루비 켄드릭은 내게 그녀의 눈으로 말했다. 우리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말이 아닌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어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었다. 루비 켄드릭은 한국에 도착해서 언어공부와 싸우면서 집안일을 도와야 하고 주일학교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자신을 한국에 파송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추수를 기다리는 이 위대한 흰 황금 뜰과 같은 선교지 한국에서 생애의 일부를 보내야하는데 이를 거절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어떤 한국인보다도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 양주삼의 표현을 빌린다면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the lover of Korea)이었다. 그녀의 한국사랑은 그녀가 사랑하는 고향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바우만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루비 켄드릭이 한국에 도착해서 그녀의 고향에 쓴 편지들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저는 여기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심지어 나의 간절한 숙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숙원이 점점 더 날마다 아름답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루비 켄드릭의 마지막 임종과 그가 이 땅에 남긴 깊은 영향과 감동

켄드릭은 송도에 도착한지 8개월이 조금 지난 1908년 6월 9일 갑자기 병에 걸렸고,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10일 후 6월 29일 그만 세상을 떠났다. 병 상태가 심각한 것을 발견하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 그곳 의료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도저히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이 사랑하시고, 동료 선교사들이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너무도 사랑했던 루비 켄드릭은 한국 도착 불과 9개월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왜 젊은 그녀가 급성 맹장염에 걸렸고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바우만 여사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우만 여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직접 선교사들에게 문의를 하고 그녀의 가족들로부터 얻은 믿을만한 정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그녀[켄드릭]는 자신이 돌보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서 그녀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중병에 걸렸는데도 학교에서 아픈 한국인 여학생들 병간호를 도와주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힘을 다 소진하고 그녀의 쇠잔한 육신이 병으로 쓰러져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들만 생각했던 것이다.”

루비 켄드릭이 죽는 순간까지 그녀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했다는 말 외에 달리 마지막 그녀의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없다. 사실 ‘죽도록 충성하라’( faithful unto death)는 그녀가 대학시절 회원(sorority)으로 열심히 활동했던 ‘시그마 시그마 시그마’(Sigma Sigma Sigma)의 모토였다. 그녀는 죽음 앞에 선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루비 켄드릭은 자신이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 그녀와 동행한 전체 사람들에게 너무도 용맹스런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우만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켄드릭은 수술대에 오르기 전 조용히 그녀의 고향 집에 편지를 써서 그녀의 가정 각 가족들에게 만약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천국에서 만나자며 사랑의 메시지를 써 보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국에 살면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만약 제가 한국을 위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는 기꺼이 하나님 나라에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직접 펜을 가지고 편지를 썼는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편지를 써달라며 구두로 전달을 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루비 켄드릭은 죽는 순간 텍사스 엡웻청년회 회원들에게 전해 달라며 이런 말도 부탁했다. “만약 제가 죽거든 텍사스 엡웻청년회원들에게 열 명씩, 이십 명씩, 그리고 오십 명씩 한국에 오라고 말씀해주세요.” 그리고는 수술대에 올라 수술에 들어갔지만 그녀는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루비 켄드릭은 한국에 도착한지 불과 9개월 만인 1908년 6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우만 여사는 이렇게 적었다.

“수백 명에게 영감이 되어 온 영혼의 소유자 루비 켄드릭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그녀는 죽었지만 오늘날 그녀는 이 나라 기독교 국가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호소하고 있다. 그녀의 희생적인 삶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녀의 희생적 부르심(her dying call)에 응답하여 자신들의 생애를 해외선교를 위해 주님께 바치고 있다.”

“누가 루비 켄드릭의 생애가 짧다고 말할수 있을까? 그녀는 아직도 살아서 육체적으로 그녀를 알고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가 장차 잠들게 되었을 때에도, 이리로 와서 일손이 너무도 모자라 시들어져만 가는 선교사역을 감당해 달라고 호소하는 그녀의 음성이 여전히 메아리치며 이 땅 미국의 젊은이들, 특별히 텍사스 북부 젊은이들(North Texas Leaguers, 엡웻청년회원들)을 소리쳐 부를 것이다.”

“그녀는 2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70년을 산 수천 명의 우리보다 더 긴 생애를 산 것이다. 생은 년 수와 날의 길이로 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상한 행함과 위대한 사상,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이타적인 섬김으로 계수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번의 짧은 생애 속에서 일천년을 살 수도 있다. 이 젊은 여인 루비 켄드릭이 그런 생애를 살았다.”

확실히 루비 켄드릭은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비범한’ 삶의 너무도 훌륭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루비 켄드릭의 이야기는 필자를 포함하여 지금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우리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타적인 사랑의 소유자, 주님을 자기보다 더 사랑했던 그녀가 더욱 그리워지는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그녀의 용기 있는 모습은 흐트러진 우리 모두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루비 켄드릭을 추모하는 시

켄드릭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한국인들은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 앞에 너무도 슬퍼했다.” 켄드릭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 코들리어 어윈과 남감리교 동료들은 그녀의 희생적 사역과 죽음을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그녀에게 바쳤다.

“한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그녀의 동료들이 그녀에게 기쁨으로 영예를 돌리면서

루비 켄드릭 양에게 바치는 추모시(追慕詩)

[Cordelia Erwin]

우리의 자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녀의 웃음소리 우리가 더 이상 들을 수 있을까?

한줄기의 기쁨의 광선처럼

모든 슬픔이 분산되었다

고통당하는 한국의 자매들에게로 그녀가 달려왔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이 그녀와 함께 하였다,

그녀의 눈길 축복이 가득하고 그녀의 말 격려로 충만하였다.

아침처럼 순결하고

저녁처럼 온당하고

이 세상에 그녀처럼 하이얀 백합화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녀의 신앙의 눈이

심령을 깊이 파고드는 예리한 침투력으로

그녀는 온종일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자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가 우리를 떠났다

그녀의 웃음소리-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들을 수 있을까?

섬광처럼 빠르게

죽음이 그녀를 덮쳤으니

그녀가 견뎌야 할 고통이 너무도 날카롭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녀의 몫이 되셨고

그분의 뜻이 그녀의 기쁨이 되어서

그녀는 한 순간도 위축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느낀 것을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녀를 그분에게로 부르셨다면

그것이 한국을 위한 것이라면 그녀는 기쁨으로 순종하리라.

비록 그녀의 삶이 참으로 고귀한 삶이었지만

그녀의 죽음이 그녀의 삶보다 더 크게 울려 퍼져

트럼펫처럼 그녀의 친구들을 선교지로 오라고 소리쳐 부른다

우리의 자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가 우리를 떠나갔다

그녀의 웃음소리-우리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슬퍼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여기 감옥 같은 이 세상으로 그녀가 돌아오길 바랄 것인가?

찬란하게 빛나고

환희에 차서,

그녀가 영화롭게 되었으니

우리가 그녀를 슬퍼하고

그녀를 갈망하고 그리워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이 광야 같은 황야에 다시 오라 부를 것인가

진심으로

신실한 노력으로,

천국에서 기꺼이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우리는 분투해야 하리.

그녀가 우리의 곁을 떠났도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가 우리를 떠나갔으니,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 이상 우리를 격려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하리

의무가 우리를 부르기 때문이니,

그녀가 너무도 소중히 여겼던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서

그녀의 추억이 너무도 강렬하여

우리의 가슴에 생생히 새겨졌으니

우리가 해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리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는 잠들지 않았다.

아니라, 그녀는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우리의 사랑하는 이가 여전히 우리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구세주 곁에서

그녀는 우리의 섬김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불쌍한 한국을 구원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분투해야 하리라.

우리의 자매가 우리를 떠났다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천국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한 번 더 우리를 맞을 것이라.”

이 시는 긴 제목과 해설이 붙은 것으로 볼 때 남감리교 동료 선교사들 중 한명이 초안을 하고 돌려가며 윤필하거나 아니면 그 중의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코들리어 어윈이 이 시를 쓰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루비 켄드릭의 시신은 그녀의 요청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조용한 한강 양화진 양지 바른 곳에 새로 조성된 무덤은 비록 그녀의 고국에 있지 않지만 그녀가 택한 제 2의 고국 한국 땅에 가지런히 자라잡고 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불신 한국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젊은 생명을 바쳤다.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을 택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제가 이곳에 와서 예수를 전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한국인들 곁에 제가 여기 잠들어 있습니다.’” 켄드릭이 세상을 떠나고 그를 아는 송도의 동료 남감리교선교사들은 물론 한국인들과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 모두가 너무도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렇지만 신앙 안에서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슬픔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였다. 루비 켄드릭을 너무도 사랑했던 송도의 한 여인은 루비의 친구 코들리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녀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얻었지요. 천국도, 예수님도,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도 얻었으니까요.’

코들리어는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 앞에 슬퍼할 루비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지들을 염려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의 슬픔 속에서 우리는 미국에 있는 그녀의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사랑과 함께 태평양 바다를 건너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루비는 그녀가 너무도 자상히 사랑했던 그녀의 일가친지들과 함께 마지막 임종 순간을 함께 맞지 못했지만 켄드릭은 그녀를 친 자매처럼 사랑했던 이들 가운데 있었다고요.”

그토록 사랑했던 이 땅에 와서 이 나라를 자신의 제 2의 조국으로 삼고 이 민족을 ‘내 백성’처럼 사랑했던 루비 켄드릭이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마지막 임종을 맞았다. 어쩌면 그녀는 행복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세상을 떠나면서도 자신의 한국선교사역이 중단되지 않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그녀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같이 했던 코들리어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녀가 병들어 서울로 이송되던 그날 저녁 송도에 남겨진 이들에게 그녀가 한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여기 제 사역이 그렇게 짧게 끝난다면 저는 제 고향에 있는 젊은이들(Young People)에게 여기 와서 제 사역을 대신 맡아달라고 편지를 쓰겠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이 편지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같은 그녀의 생각은 그녀와 함께 계속해서 살아 역사하고 있다. 그녀의 가장 간절한 열망 가운데 하나는 그녀의 사역이 비록 짧게 끝났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생명을 터치해주시는 데 그녀의 죽음을 사용하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미국과 한국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 단지 시간과 영원만이 계수할 수 있는 영향을 줄 시동을 이미 걸었다고 믿는다.… 우리가 단지 아는 것은 이것이다. 오늘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한국을 위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을 기록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정말 그녀는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 코들리어 어윈이 증언한 대로 ‘오직 시간과 영원만이 계수할 수 있는 그런 영향에 대한 시동’을 걸은 것이 분명한다.

한국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바로 1908년 한국의 남감리교선교회는 그녀의 생애와 사역을 기념하기 위하여 4가지를 결정했다. 첫째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깊은 슬픔을 느끼지만 죽음을 넘어 그리스도의 권세가 현시되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사실, 둘째, 그녀의 사랑하는 미국의 가족과 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위로를 받으며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들이 한 셋째와 네 번째 결정은 다음과 같다.

“셋째, 그녀가 서울의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음으로 한국의 남감리교선교회 선교사들은 그녀의 생애와 한국에서의 사역을 추모하기 위해 그녀의 무덤에 기념비를 세운다.

넷째, 우리가 그녀의 고향 텍사스 주 남감리교대회에 한국에서 2명의 여자 선교사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념 기금을 모금하여 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의하였다.”

한국의 남감리교선교회의 기념사업 결정이 어떻게 실현되어 나갔는가를 추적하는 것도 상당히 감동적이다. 루비 켄드릭의 갑작스런 소천 소식은 곧 고향 텍사스, 특별히 그녀가 속했던 북텍사스 남감리교대회 엡웻청년회, 고향교회, 그녀가 졸업한 스카릿성경훈련학교와 그녀가 가르쳤던 노스텍사스대학교스쿨에까지 알려졌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선교사역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라며 텍사스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스텍사스 젊은이들, 특히 엡웻청년회 회원들이 강렬한 도전을 받았다. 당시 밴더빌드대학 신학부에 재학중이던 양주삼은 1911년 7월 남감리교 해외선교부 공식 기관지 미셔너니 보이스(The Missionary Voice)에 그녀에 관한 글, “한국을 사랑한 사람, 루비 켄드릭을 추모하며”를 기고했다. 양주삼은 자신이 루비 켄드릭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910년 그녀의 고향 텍사스를 여행하면서 그녀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2년이 지난 뒤였고 그녀의 고향을 직접 방문했고 그리고 그 글을 쓰는 당시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밴더빌드대학 신학부에 재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기록한 1911년의 글은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양주삼에 따르면 루비 켄드릭이 고향에 보낸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편지가 1908년 6월 18일 텍사스 연합모임 때 텍사스엡웻청년회원들 앞에서 읽혀졌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회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바로 다음날 한국으로부터 엡웻청년회원들에게 ‘켄드릭이 죽었다’는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슬픈 소식으로 온 엡웻청년회 회중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의 영웅적인 행동과 거룩한 삶은 텍사스 엡웻청년회원들에게 강력한 해외선교열을 불어넣으며 깊은 도전을 주었다. 쥴리엣 하몬(Juliet Howe Harmon)은 루비 켄드릭이 세상을 떠난지 채 2달도 되지 않은 1908년 8월 15일 이렇게 호소했다.

루비 켄드릭(Ruby Kendrick)

쥴리엣 하몬(Juliet Howe Harmon)

그녀가 해외 선교지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전,

그녀는 엡웻청년회 단에 섰다.

그녀는 강렬한 손을 활짝 펼치며

열렬히 호소했다.

우리는 진실되고 달콤한 그녀의 메시지를 들었다,

마게도냐 외침이 반복되었다:

엄숙하고 기쁨이 충만한 채

그녀는 바다를 건넜다.

지금 이국땅에서 하루하루

천국의 찬란한 황금 가닥 위

우리는 단에 선 동일한 상냥한 처녀를 본다

너와 나를 부른다

축복 속에 그녀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순종하여

매일매일 오직 그만 섬기리라

그녀가 바다를 건넜던 것처럼!

켄드릭이 세상을 떠나고 약 6개월이 지난 1909년 1월에 그녀의 고향 플래노에서는 3주간의 부흥회가 열렸다. 이 부흥회 기간 동안에 200명 이상이 회심했고 부흥회 마지막 날 37명의 젊은 남녀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주의 종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세상 어느 곳으로 자신들을 보내셔도 순종하겠다는 결심은 해외선교사로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1909년 1월 12일자 Christian Advocate에 기록된 것처럼 이와 같은 젊은이들의 각성은 루비 켄드릭의 희생적인 죽음에서 모종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다.

켄드릭이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 1909년에는 여섯 명의 여자선교사들이 켄드릭의 뒤를 이어 그녀가 못다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한국선교를 자원했다. 켄드릭의 영향으로 1911년 7월까지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외선교를 헌신했고,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달려와 그녀의 사역을 계승했다. 양주삼의 말대로 “그리하여 비록 그녀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지 못했지만 그녀의 신앙, 목적, 사랑, 그리고 희생을 통하여 사역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사역도 발전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진실된 한국사랑과 거룩한 선교비전은 그녀가 살아서 이 땅에서 감당했었을 그 이상,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선교 결실로 이어졌다. 한국선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에 입국한 한 선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가 속한 본국의 교단을 움직여 대대적으로 한국선교를 착수하게 만든 신비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종종 있었다. 호주 출신 선교사 조셉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 1856-1890)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한 호주장로교의 대대적인 한국선교 착수, 윌리엄 매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의 죽음을 통한 캐나다장로교의 한국선교 착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고향 텍사스의 한 젊은 여성이 루비 켄드릭기념 기금 모금운동을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추진했다. 그 움직임은 노스텍사스대회엡웻청년회(the North Texas Conference League)의 ‘루비 켄드릭 선교회’(Ruby Kendrick Council of Missions) 결성과 ‘루비 켄드릭 기념기금’(the Ruby Kendrick Memorial Fund) 조성의 결실로 이어졌다. 엡웻청년회의 모든 선교비 지원은 이 선교회를 통해서 모아졌다. 그녀를 잘 알고 있는 텍사스의 감리교 교인들과 특별히 엡웻청년들이 그녀의 죽음과 헌신이 헛되지 않기를 열망하고 마음을 모으고 한국선교를 후원했다. 1912년 3월 30일 남감리교엡웻청년회 서기 파커는 그 기관지(The Epworth Herald)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루비 켄드릭은 동료 엡웻청년들에게 누군가가 와서 그녀의 사역을 대신 맡아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한국도착 6[9]개월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 무덤에 잠들었다. 루비 켄드릭을 그렇게 빨리 쓰러트린 위험을 격퇴하기가 너무도 힘든 상황인데도 적어도 20명이 루비 켄드릭 사역을 대신하겠다고 자원하였다. 루비 켄드릭이 회원이었던 노스 텍사스 대회 엡웟청년회는 ‘루비 켄드릭 기념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금은 지금 두 결혼부부 선교사 가정을 후원하고 있다. 한 가정은 의사 부부이고, 다른 가정은 안수 받은 목사 부부이다.”

의료 선교사는 앤더슨(E. W. Anderson) 부부이고, 안수 받은 목사는 콜리어(C. T. Collyer) 선교사 부부이다. 계속해서 한국선교를 후원하는 선교운동이 그녀의 고향 텍사스에서 강하게 일어났고, 루비 켄드릭 기념 선교기금은 7년이 지나 수천달러가 모아져 그녀가 속한 텍사스 남감리교 해외선교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해외선교운동으로 발전했다. 루비의 고향 텍사스에서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촉발된 해외선교 움직임을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메리 퍼거슨(Mary Hay Ferguson) 양이었다.

토마슨이 증언한 것처럼 “기금운동만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여기 텍사스에서는 우리의 가장 탁월하고 최고 수준의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루비 켄드릭과 그녀의 사역의 영웅적인 이야기에 감동과 영감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그들의 모든 것을 주님을 섬기는데 바치고 있다. 이 일은 그녀의 고향 노스텍사스 남감리교대회의 전역에 걸쳐 심지어 텍사스 전역을 통해 퍼져가고 있다.” 테일러(O. J. Taylor)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녀[루비 켄드릭]가 죽은 후 그 이름은 승리를 가져다주는 이름이 되었다. 텍사스는 그녀의 돈과 그녀의 생명을 모두 봉사[해외선교사역]에 쏟아부었고, ‘루비 켄드릭’은 이러한 선물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이름이 되었다.” 하빈(E. O. Harbin)은 1919년 9월 엡웻 에라(The Epworth Era)에 그해 열린 노스 텍사스 엡웻청년대회를 보고하면서 루비 켄드릭선교회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루비 켄드릭선교회(the Ruby Kendrick Missions Council)는 놀라운 조직이며, 노스 텍사스 엡웻청년회의 놀라운 선교기록을 가능케 만든 역동적인 힘을 제공했다. 그 성취는 말 그대로 기념비적이다.”

1919년 10월 4, 5일에는 노스텍사스대회 엡웻청년회 임원단과 루비켄드릭 선교회가 하반기 정기모임을 텍사스 화머스빌(Farmersville)에서 공동으로 가질 만큼 루비 켄드릭선교회는 노스텍사스대회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엡웻 에라(The Epworth Era)에 보도된 대로 선교회 결성 약 10여년이 조금 더 지난 1921년 3월 루비 켄드릭선교회는 서든 메소디스트 대학(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의 선교학교(the School of Missions)에 1,000달러의 루비켄드릭 장학금(the Ruby Kendrick scholarship)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켄드릭 기념선교기금모금운동도 이후에도 활발하게 추진되어 노스텍사스대회 엡웻청년회의 루비 켄드릭 기념 선교기금은 12만 달러에 육박했다. 노스 텍사스 남감리교대회 코푸스 크리스티의 엡워드 청년회(the Junior Epworth League of the North Texas Conference)는 그녀가 선교사로 파송받기 전까지 활발하게 참여했던 그녀의 고향 엡웻청년회가 위치한 캠퍼스 대지를 더 늘리고 추가적으로 건물 몇 동을 건축해 ‘루비 켄드릭 기념관’(Ruby Kendrick Memorial Hall)으로 명명했다. 또한 송도에 루비 켄드릭기념학교를 건축하였고, 600달러를 지원해 루비 켄드릭 기념교회를 세웠다. 그녀의 고향 텍사스 헨리이터 감리교회(the Methodist of Henrietta) 크러취필드(F. A. Crutchfield) 목사는 교회를 새로 건축하면서 그 교회 엡웻청년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회 창문 중의 하나를 루비 켄드릭 기념 창문으로 조성했다. 그녀의 영웅적인 신앙과 사역에 대한 기념활동과 더불어 선교열이 더욱더 강하게 일어나 그 같은 소식은 더 널리 텍사스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교기금 모금이나 그를 기념하는 다양한 기념사역이 노스 텍사스에서 강하게 일어난 근본 이유는 그들 자신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루비 켄드릭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아름다운 신앙 때문이었다. 루비 켄드릭은 한국선교를 본격적으로 착수하기도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녀의 사랑과 헌신과 희생이 한국의 동료 선교사들을 감동시키고 그녀의 고향의 교회, 청년회, 교인들, 선교부를 움직여 해외선교운동이 강하게 일어나 한국선교를 더욱 더 촉진시킨 중요한 모멘텀이 된 것이다.

맺는 말

켄드릭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100년이 훨씬 넘게 흘렀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미국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바우만 여사가 말한 대로 이 땅에서 산 년 수와 날 수로 우리의 인생을 계수할 수 없다. 그녀는 비록 2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녀가 남긴 교훈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살아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글을 맺으면서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 그녀에게도 그녀의 삶에 아주 깊이 영향을 미친 롤 모델, 그녀의 가슴을 벅차게 한 그녀 가슴에 살아 역사한 신앙의 선배가 있었을 것이라는 필자의 확신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의 가장 완벽한 롤 모델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 그녀가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인물이 있었다면 아마도 데이빗 브레이너드 아니면 중국 근대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가 아닐까 여겨진다. 켄드릭이 한 “만약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다 한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는 말은 그녀가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인디언 선교의 아버지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처음 한 말이다.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1747년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자신의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제게 천개의 영혼이 있다면 또 그것들이 어떤 가치가 있다면 저는 그것들 모두를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19세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도 ‘만약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주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말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부르는 허드슨 테일러(1832-1905)도 중국선교사로 활동하던 1860년 28살 때 그의 누이 아메리아 테일러(Amelia Taylor)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제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들을 중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다만 이들에게서 차이가 있다면 브레이너드와 스펄전이 만약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주님께 바치고 싶다고 고백한 반면 허드슨 테일러는 그 모두를 자신의 선교지 중국에 바치고 싶다고 고백한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 역사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했던 이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고 싶었던 루비 켄드릭은 인디언 선교의 아버지 데이빗 브레이너드, 찰스 스펄전, 무엇보다도 허드슨 테일러의 말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선교지 한국에 와서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민족을 사랑하고 자신을 한국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 이 땅 한국에 바치고 싶다는 감사의 고백을 매일매일 드리며 선교적 각오를 다졌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돌이켜 볼 때 한국선교를 위한 너무도 소중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그녀의 삶과 사역은 한국 땅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것이 자라고 삼십배 백배 아니 그 이상으로 많은 결실을 맺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 이민교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분명히 해외 이민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는 그녀와 같은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맺어진 열매이다. 이제 그 복음의 빚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그 거룩한 책무는 복음을 전해 받고 그 혜택을 누린 우리 모두의 몫이다.

주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아주 빼어 닮았던 그녀의 희생과 헌신의 삶이 그녀의 고향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깨워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선교지 한국으로 달려왔고, 112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한국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리며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아름다운 사랑,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겨진 한국선교사역이 중단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루비 켄드릭의 복음의 빚진 자의 심장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요원의 불길처럼 강하게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출처: 박용규,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비범한: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의 생애와 사역,” 「신학지남」제87권 1집 (2020. 봄호), 145-194.

*** 출처: 박용규, 남서울은혜교회 겨울방학 전교인 특강(2021.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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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 Advocate 1907-1922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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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from page 156 of "Sou'wester Yearbook" (1907)

Ruby

< 관련 사진 자료 >

어머니 케이트(Kate Emma Barnett Kendrick)의 묘비

켄드릭이 출석했던 플라노감리교회

고모 라헬 클레퍼(Rachel W. Klepper, 1838-1916)의 묘비

루비 켄드릭 기념교회(한국 송도) 건립을 지켜보는 C.T. 콜리어 선교사와 오화영 목사

1919년 10월 4-5일 텍사스 Farmersville에서 열린 노스텍사스대회 엡웻청년회 임원단과 루비켄드릭 선교회 공동 정기모임

내한 전 켄드릭이 1년 간 수학한 사우스웨스턴대학교 학생자원운동밴드 회원 단체사진(앞에서 2번째 줄 좌측1번째 루비 켄드릭)

사우스웨스턴대학 여학생 모임 Sigma Sigma Sigma의 회원들

루비 켄드릭

루비 켄드릭 사진

출처: https://archive.org/details/souwesteryearboo1907sout/page/140/mode/2up?view=theater&q=kendrick

https://archive.org/details/souwesteryearboo1907sout/page/116/mode/2up?view=theater&q=kendrick

‘천의 심장’ 루비 켄드릭 선교사에 대한 거짓 신화(뉴스 엔조이에서 펌)

▲ 한국 송도의 루비 켄드릭. 1907년 파송, 1908년 사망. (July 1908) 표지에 실렸다.

1905년 캔자스 여자성경학교를 졸업한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 1883~1908)은 북텍사스엡윗청년회(North Texas Conference Epworth League)의 후원으로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됐다. 그녀는 1907년 8월 29일 미국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 때가 9월이었고, 11월에 송도(개성)에 도착했다. 대부흥 운동이 지나간 한국교회는 급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부흥 운동의 중심지 송도는 성령 충만한 기독교인이 많아 전도열과 교육열이 높았다.

켄드릭은 개성에서 여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6월 9일 병에 걸려 급히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고 수술했으나, 내한한 지 9개월만인 1908년 6월 1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남감리회 선교사 중 첫 사망자였다. 그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올 때, 마지막 유언처럼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대신할 청년을 텍사스엡윗청년회에서 보내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전에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드리겠습니다(If I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고 썼다. 이 말은 양화진 묘지의 묘비명이 되었다.

▲ 양화진 묘비명, “나에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드리겠습니다.” 루비 켄드릭.

이 문구를 담은 편지는 태평양을 건너 1908년 여름 텍사스엡윗청년회 연회 모임 때 전달되었고, 회원들은 켄드릭의 헌신적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그 자리에는 서울에서 보낸 “켄드릭 사망”이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그녀의 모범과 유언을 따라 청년 20여 명이 외국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중 서너 명이 한국 남감리회 선교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다음은 켄드릭과 관련하여 현재 온라인에 유포되고 있는 세 가지 오류 사항이다.

1. 그녀는 1908년 8월 15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6월 19일에 사망했다. (자료 1: Cordelia Erwin, “In Memory: Ruby Rachel Kendrick”, (August 15, 1908) 118쪽.) 여러 곳에 8월 15일로 기록한 것은 아마 이 자료를 인용하다가 이 잡지 발행일을 사망일로 착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떤 자료에는 6월 20일로 나오는데, 이는 미국에서 잘못 알았거나 착오한 날짜이다.

▲자료 1: (August 15, 1908) 118쪽.

1911년 당시 미국 벤더빌트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양주삼 목사가 쓴 글에도 6월 19일 사망으로 나온다. (J. S. Ryang, “In Memory of Ruby Kendrick, the Lover of Korea”, (January 1911) 19쪽.) 이 글은 원래 에 실렸다고 한다. 양 목사는 켄드릭을 만난 적은 없으나, 1910년 텍사스를 방문했을 때, 그녀가 한국에 오기 전 활동과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의 사정을 들었다. 뒷날 양 목사가 편찬한 남감리회 30주년 역사 영문에도 6월 19일로 기록했다. (J. S. Ryang ed., (1929) 25쪽.)

2. 텍사스엡윗청년회에서 20명이 한국 선교사로 오지 않았다. 다만 양 목사가 쓴 글에 의하면,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20명 이상이 켄드릭의 모범을 따라 외국 선교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자원했으며, 그중 많은 사람이 한국에 갔다”고 한다. 자원했다고 해서 모두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텍사스엡웟청년회는 켄드릭을 기념하여 한국 주재 남감리회 선교사 1명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썼다.

▲ 자료 2: 양주삼 엮음, (1929) 부록. 1909~13년에 텍사스에서 3명의 선교사가 내한했다.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30년사의 선교사 연대별 파송 목록(자료 2)과 (1914, 자료 3)에 의하면 1909~1913년 파송한 해외 선교사 중 텍사스 연회 소속 선교사는 15명이었으며, 그중 한국에 파송된 자는 3명(로라 에드워즈, 뉴톤 바우만 의사, 아그네스 그레이엄)이었다. 다음 표는 당시 내한한 남감리회 선교사들로 붉은 선 앞에 T자가 있는 사람이 텍사스 출신이다. 따라서 켄드릭 사후 1909~13년에 3명 혹은 4명의 텍사스 출신 남감리회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었다. 텍사스엡웟청년회가 그중 누구를 후원했는지, 얼마 동안 후원했는지는 더 조사가 필요하다.

▲ 자료 3: (1914) 50~51쪽. 1909-11년에 두 명의 텍사스 출신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됐다.

다음 기사(Gus. W. Thomasson, “The Moving Spirit Ruby Kendrick Memorial,” (August 1917) 248, 자료 4)에 의하면, 그녀가 사망한 후 텍사스엡웟리그에 켄드릭기념선교기금위원회가 조성되었다. 7년 후인 1915년에 수천 달러의 기금이 조성되었을 때 루비켄드릭선교공의회(Ruby Kendrick Council of Missions)로 재조직되었는데, 퍼거슨(Mary Hay Ferguson)이 책임자였다. 1920년에는 North Texas Conference Epworth League at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가 1만 달러 기금으로 루비 켄드릭 선교 장학금(The Ruby Kendrick Missionary Endowed Scholarship Fund)을 조성했다. 퍼키스신학교(Perkins School of Theology)는 지금도 이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기금으로 선교사를 직접 파송했다기보다는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야 하겠다.

▲ 자료 4: (August 1917) 248쪽.

3. 그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쓰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편지의 내용이 어떤 분이 지어낸 창작물이라는 사실이다. 신호철의 <양화진 선교사의 삶>(2005)에 이어 재생산된 이 신화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와 양화진대책위원회가 기획하고,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가 공동으로 편찬한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2012)에 그대로 재록됐다. 이어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박 장로 등이 이를 여과 없이 온라인에 옮겨 실었다. (http://www.km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2) 신호철 장로가 작문한 글은 페이스북으로 수천 번 공유되고 설교에 인용되었다. 1907년 루비 켄드릭이 미국 부모님께 보냈다는 편지 중간에 있는 다음 내용을 보자.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주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 본부에서는 철수하라고 지시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순교할 작정인가 봅니다.”

1907년, 한국 교인들이 순교를 하고 선교사들도 순교를 했다. 선교 본부에서도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은 지하 교회에서 숨어서 예배드리며 순교를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질병으로 죽은 한 여자 선교사가 순교자로 소개되고 있다. 소설도 사실에 바탕하고 있는 허구라야 실감이 난다. 그런데 1907년 부흥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어찌 지하 교회가 있고 순교자가 나올 수 있겠는가? 자료 1에서 보았듯이 그녀의 유언은 자신을 대신할 청년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신호철의 작문은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왜곡된 역사 서술 중 하나다. 그것은 ‘언더우드의 기도문’과 더불어 소설가가 쓴 허구적 작품이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작문하고 올린 <양화진 선교사의 삶> 140~141쪽과 이를 그대로 표절한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1: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선교>, 두 책은 회수해야 한다. 사과 성명서를 발표해야 하며,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온라인에 퍼서 나른 이들은 삭제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후자는 수정판을 출판했으나, 아직 초판에 대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결자해지의 가을이다. 가라지 씨를 뿌린 자가 무성한 가라지를 뽑아 타작마당에서 불사를 때이다. 그 회개의 연기를 주께서 흠향하실 것이다. 타고 남은 재는 한국교회사 연구를 위한 거름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루비처럼 빛나는 신앙고백의 선교사, 루비 켄드릭. “나에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 한국을 위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한마디가 이 어두운 밤 같은 한국 개신교회에 별처럼 빛난다. 다시 살아도 한국에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 10명만 있어도 교회가 달라질 것이다.

낭만, 시계나라

이 곳 조선 땅에 오기 전 집 뜰에 심었던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루 종일 집 생각만 했습니다. 욕심쟁이 수지가 그 씨앗을 받아 동네 사람에게 나누어

주다니, 너무나 대견스럽군요..

아버지, 어머니! 이 곳 조선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 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 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철수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아직도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순교를 할 작정인가 봅니다. 오는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 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해 가지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

26세 나이로 순교한 Ruby Kendrick 선교사님의 비석에 적힌 글입니다.

이 소식이 미국에 있는 그녀의 교회에 전해지자 눈물 바다를 이뤘고, 이후 그녀의 희생을

전해들은 많은 젊은이들이 낯선 땅 한국을 위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 입니다. 서울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거의 1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심장을 묻었습니다. 그 중에는 대부분이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이었고, 부활을 소망하는 글 귀들을 비석에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소망한 그들을 진정 이 한국을 예수께서 명령하신 땅 끝으로 알고 나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방문하면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묘비가 하나 있다.

24세 젊은 나이로 조선에 와서 불과 9개월도 지나지 않아 순교한 루비 켄드릭

(Miss Ruby Rachael Kendrick, 1883~1908)양의 묘비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조선에 주겠노라.”

미국 텍사스 남감리교회의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난 루비 캔드릭은 꿈 많은 소녀 시절부터

불신자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텍사스 여자고등성경학교에 진학했다.

1905년 6월에 졸업한 그녀는 선교사 파송 연령 제한에 걸리자 교사로 1년, 대학 학부 과정

1년을 수학하면서 해외 선교를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그녀는 이 기간에 텍사스 엡윗 청년회

대표가 되었고,1907년 9월에 남감리 교회 여자 외국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으로 달려왔다.

텍사스에서 엡윗 청년회 컨퍼런스가 열리고 있던 중 조선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가득 담긴

그녀의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조선에 주겠노라.”

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그곳의 수많은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켰다.

그런데 엡윗 청년회 컨퍼런스 이튿날에 조선으로부터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루비 캔드릭이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녀는 1908년6월9일에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았지만 열흘 후인 그 달 19일 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 선교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가서 열 명씩,스무 명씩, 오십 명씩

조선으로 오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녀의 말은 텍사스 엡위 청년회 컨퍼런스에 전달 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 많은

젊은이의 가슴에 선교의 불씨를 지폈다. 그들 중 20여명이 은둔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텍사스 엡윗 청년회는 해마다 헌금을 모아 조선에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사례비를

지원했다.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교회의 기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과 순교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제 우리 차례다.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 그것은 값싼 구호로 끝나지 않고 대가를 수반한

실천적 행동이어야 한다.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박용규

http://m.cafe.daum.net/eunsung5006/V9s0/90?listURI=%2Feunsung5006%2FV9s0%3FboardType%3D

에서 펌

출처 : 유석산의 시계나라

글쓴이 : 융제 원글보기 : 융제

메모 :

루비 켄드릭 선교사 이야기

루비 켄드릭 선교사 이야기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그녀의 묘비 상단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면, 그 모든 생명을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그는 한국어를 배우던 중 급성 맹장염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죽어가는 순간 자신이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이 20명을 조선으로 오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부분 …

“오늘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조선인들이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인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 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지요?”

가장 평범한 그러나 가장 비범한: 루비 켄드릭(Ruby Rachel Kendrick)의 생애와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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