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이씨 족보 | [스펀지 레전드 #180] 성주이씨 세계도, 족보까지 펼쳐보았다! 깊은 뜻이 담긴 이름들~! | Kbs 040731 방송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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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이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주 이씨의 종문.svg. 관향, 경상북도 성주군. 시조, 이순유(李純由). 중시조, 이장경(李長庚). 집성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성복리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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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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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이씨 – 나무위키

성씨는 경주 이씨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알평의 후손으로 신라 말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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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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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성주이씨(星州李氏) – 백세시대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등 5파로 나뉜다. 성주이씨 종친회는 이 5파별로 운영되고 대종회가 이 5파를 통합 관리한다. 또 16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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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100ssd.co.kr

Date Published: 1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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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성씨 이야기 19>, 성주이씨 – 네이버 블로그

[세계일보]성주(星州)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 때 이부상서를 지낸 명신(名臣)으로 경주(慶州)이씨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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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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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 @ 족보찾기, 족보도서관 (한국족보정보)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명신(名臣)으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 이알평(李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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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k.kr

Date Published: 5/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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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자료센터 – 인물관계정보

성주이씨(星州李氏). 족보기록. (子)仁任. 성명. 이인임(李仁任) – … 원문위치. 만가보 : 4 책 51 면 (우측) 3 단 1 행 성주이씨족보 : 3 단 2 행. 원문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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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stma.aks.ac.kr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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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 – 디지털고령문화대전

이순유(李純由)를 시조로 하고 이석견(李碩堅)과 이조년(李兆年)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고령군 세거 성씨. [연원]. 성주(星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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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ryeong.grandculture.net

Date Published: 8/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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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성주 이씨 족보

  • Author: KBS Entertain: 깔깔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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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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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경상북도 성주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 편집 ]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알평의 후손으로 신라 말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중 장남 밀직사사(密直司事) 이백년(李百年), 이남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천년(李千年), 삼남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만년(李萬年), 사남 개성유수(開城留守) 이억년(李億年), 오남 정당문학 문열공(政堂文學 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한편, 이장경의 손 이천년(李千年)의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농서 이씨라고도 하였다. 명나라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이 그의 후손이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 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후대 8世 이내에 문형(文衡 – 대제학)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相臣 – 정승)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이다

본관 [ 편집 ]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고대 육가야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인데, 신라때 본피현이라 하다가 757년에 신안현으로 개칭하여 성산군에 속하였다.

그 후 벽진군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로 개칭하였다가 경종 때 광평군이 되었으나, 그 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 때 성산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에 성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분파 [ 편집 ]

밀직공파(密直公派) – 이백년

참지공파(參知公派) – 이천년

시중공파(侍中公派) – 이만년

유수공파(留守公派) – 이억년

문열공파(文烈公派) – 이조년

인물 [ 편집 ]

이조년(李兆年 , 1269~1343) –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오남이다. 충혜왕 시기에 예문관대제학에 오르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이인복(李仁復 , 1308~1374) – 이조년의 손자이자 이포의 아들이다.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의 친형이다. 이재 백이정의 제자로 주자학에 밝았으며, 고려 공민왕 시절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에 올랐으며 성산군에 봉해졌다. 1365년 흥안부원군에 진봉되었고, 후에 판삼사사, 검교시중 등을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옳은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기뻐하였다 한다. 친아우 이인임의 탐욕을 경계한 인물로 그를 일컫어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였다.

이인기(李麟起) – 이장경(李長庚)의 손자이자 이백년의 아들, 이조년의 조카이다. 평양부윤(平壤尹)을 역임하였다.

이인임 (李仁任, ? ~ 1388년) : 고려 말기의 권신(權臣).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후에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佐副承宣)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 때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2등공신에 책록되고, 2차 침입 때는 개경을 탈환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62년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에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1364년 서북면순문사 겸 양윤(西北面巡問使兼平壤尹) 때 최유(崔濡) 등이 덕흥군(德興君)을 내세워 고려에 쳐들어오자 격퇴하였다. 다음 해 삼사우사(三司右使)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8년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고, 그 해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後嗣)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太后)·경복흥(慶復興)의 주장을 꺾고 우왕(禑王)을 추대했다.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취하여 친명파(親明派)를 추방, 지윤(池奫)·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의 충복들을 요직에 앉혔다.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1388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되었다.

(李仁任, ? ~ 1388년) : 고려 말기의 권신(權臣).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되고 후에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佐副承宣)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 때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2등공신에 책록되고, 2차 침입 때는 개경을 탈환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62년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에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1364년 서북면순문사 겸 양윤(西北面巡問使兼平壤尹) 때 최유(崔濡) 등이 덕흥군(德興君)을 내세워 고려에 쳐들어오자 격퇴하였다. 다음 해 삼사우사(三司右使)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8년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고, 그 해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後嗣)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太后)·경복흥(慶復興)의 주장을 꺾고 우왕(禑王)을 추대했다.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취하여 친명파(親明派)를 추방, 지윤(池奫)·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의 충복들을 요직에 앉혔다.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1388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되었다. 이숭인 – 이인기(李麟起)의 친손(親孫), 성산군(星山君) 이원구(李元具) 자(子), 이인임, 이인복 5촌 조카. 호는 도은으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말기의 삼은으로 유명하다. 목은 이색의 제자이다. 고려 말기에 지밀직사사를 지냈고 조선개국에 반대하여 정도전 일파인 황거정에게 피살당했다.

이광적(李光迪) (1628~1717) –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언충(李彦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이세미(李世美)이다. 조선 효종, 현종, 숙종 삼조에 걸쳐 60년 간이나 입사했던 명신으로 공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거쳤다. 숙종 43년 12월 13일 계사 지중추부사 이광적은 성품이 근후(謹厚)하여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으며 일찍이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삼조(三朝)를 두루 섬겼는데, 직무의 봉행을 근실하게 하였고 나이가 아주 노쇠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조알(朝謁)을 폐하지 않았기에 품계를 올려 주어 숭정 대부(崇政大夫)까지 이르렀는데, 이때에 와서 졸(卒)하니 나이 90세였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이충건 – 문하평리(門下評理) 이인민(李仁敏), 영의정 이직(李稷)의 현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이조정랑을 지냈고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종일 – 구한말에 제국신문사 사장을 지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손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가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이창민 (가수 백년설의 본명) – 1930년대에 데뷔, 가요계의 원로이며 [나그네 설움]과 [대지의 항구]등 불후의 명곡을 불러 기억되고 있으며,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집성촌 [ 편집 ]

항렬자 [ 편집 ]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중시조로 1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용(容)

화(火) 口교(敎)

口토(土) 종(鍾)

금(金) 口순(淳)

口수(洙) 상(相)

병(秉) 口희(熙)

口섭(燮) 재(在)

규(圭) 口현(鉉)

口석(錫) 택(澤)

영(永) 口식(植)

口근(根) 병(炳)

현(炫) 口기(基)

口배(培) 옥(鈺)

용(鎔) 口홍(洪)

口락(洛) 병(柄)

계(桂) 口형(炯)

口렬(烈)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 편집 ]

태종 후궁 신순궁주

양원군(성종의 서자) 사위 이완(李完)

경순공주(조선 태조의 삼녀) 부마 이제(李濟)

숙혜옹주(태종의 서녀) 부마 이정녕(李正寧)

인구 [ 편집 ]

2000년 186,188명

2015년 203,703명

[명문 종친회를 찾아가다] 성주이씨(星州李氏)

고려말 ‘벽상도형’ 명문세도 5파 자손번창

백세시대은 숭조(崇祖), 경로효친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명문가 종친회를 찾아가다’는 제하의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명문거족의 본향은 고유의 전통과 가풍을 이어가며 충효예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본관 시조와 유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그 성립과 발전, 인물배출 등에 대해 살펴보는 본 기획을 활용해 독자 여러분의 성과 본, 대종회 및 종친회 등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연재는 성씨·본관 대종회의 요청 순서에 따라 게재됩니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로 성주이씨 편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다음호는 성주 도씨 편입니다.)

고려말 ‘벽상도형’ 명문세도 5파 자손번창

고서에 따르면 신라 건국 이전 진한(辰韓)시대. 지금의 경주 부근에 6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于珍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이다.

오현재. 성주이씨 중시조(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1443년(세종 25년) 왕명에 따라 태실 자리로 양보하고, 지금의 오현으로 이장했다.

신라 건국 설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알 속에서 태어나 이들 6촌 사람들에 의해 양육되고, 양산촌 촌장인 알평의 도움으로 신라를 개국하게 된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탄생과 왕위등극도 대략 비슷하다.

신라 3대 유리왕에 의해 이들 6촌은 6부로 격상되고 각각 성(姓)을 하사받는다. 즉 양부 이(李), 사량부 최(崔), 본피부 정(鄭), 점량부 손(孫), 한기부 배(裵), 습비부 설(薛) 등 성(姓)씨가 그래서 생겨났다. 이씨의 시조는 혁거세를 신라 개국 시조로 옹립한 양부 양산촌장 알평이다.

그러나 현대 성씨연구자들은 각종 금석문 등을 근거로 7세기 이전(676년에 삼국통일이 됐다)에는 성씨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성씨는 신라 후기에 수입된 중국의 문화였으며 왕으로부터 귀족, 양민의 순으로 전파됐다는 것.

그리고 성씨와 본관 개념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태조가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시행한 ‘토성분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방의 호족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인질을 중앙에 진출하게 하여 관향을 삼도록 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서 깊은 명문 성씨들의 시조가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인물로 집중되고 있다.

성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조에서 이부상서를 지낸 재상공 이순유(李純由)다. 신라 말 경순왕이 고려태조에 항복한 뒤 신라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읍 경산리로 들어가 은둔했다.

안산서원.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에 역대 성주이씨 현조(顯祖) 22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이다. 영정 10현조 13폭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있고, 영당은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자료 제217호로 지정됐다.

그 뒤 고려 원종(1260~1274)조에 이르러 시조 이순유의 11대손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들이 크게 출사하게 된다. 장자인 밀직사사(密直司事) 백년(百年), 이남 참지정사(參知政事) 천년(千年), 삼남 문하시중(門下侍中) 만년(萬年), 사남 개성유수(開城留守) 억년(億年), 오남 정당문학 문열공(政堂文學 文烈公) 조년(兆年) 등이 그들이다.

아들 5명이 모두 나라에 크게 공헌하여 아버지 이장경은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흥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承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특히 손자(천년의 아들) 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요양성(遼陽省) 참지정사까지 오르게 되어 그 조부인 이장경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이장경으로부터 후손들이 명문 세도 가문으로 거듭나므로 성주이씨는 그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후대 8世 이내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이 15명, 또 식읍을 받은 이가 5명, 부마가 2명, 문과 급제자가 75명에 달할 정도로 후손들이 크게 일어난다. 성주이씨는 고려말에서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유서 깊은 가문답게 그중 현조(顯祖) 22위를 성주군 벽진면에 있는 안산서원에 모시고 지금까지도 배향하고 있다. 배향하는 인물은 중시조 이장경으로부터 조선 숙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은암 이광적(1628~1717)까지 모두 22위.

여기 모신 10위의 영정 13폭은 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높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또 영당(影堂)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217호로 지정되어 성주이씨가 1100여년이 넘는 유구한 가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관직에 나간 성주이씨 후손들 중에 전국 각지의 임지에서 정착하는 경우도 많아 성주 외에도 경기, 충청, 강원, 호남권까지 전국적으로 성주이씨 집성촌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임지에서 본관지로 돌아온 후손들이 상당수여서 중시조 이래 지금까지 명문가 본관지로서의 전통과 족보·서원·사당·묘소 등 사적들이 성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국 종친 800여명이 지난해 음력 10월 1일 오현제 시조공 제단비 앞에서 열린 시향제에서 참례하고 있다.

그런데 성주이씨 중에 뛰어난 인물이 많고 자손이 번성하여 본관지 성주에서 분파해 다르게 칭관하는 경우도 있다. 농서이씨가 그들이다.

그리고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성주이씨 인물검색을 해보면 본관이 성주인 이씨 인물들 사이에 본관을 벽진(성주군 벽진면)이라고 쓰는 인물들이 간혹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도 성주이씨의 후손이 살고 있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이승경의 증손자인 이영(李英)을 시조로 받들고 있는데 그 5대 후손이 이여송이다. 성주이씨 대종회에서 중국 라오닝성(遼寧省) 철령(鐵嶺)에 비를 세우기도 했으며 그들은 현재 철령이씨라 한다.

낱장 서문만 남은 국내 최초의 족보

권씨 성화보와 유씨 가정보에 이은 세번째 족보

1968년 종친회 창립, 1질 9권 을묘대동보 발간

성주이씨의 족보는 1464년(세조 10년)에 최초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꼽히는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12년이나 앞서 발간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윤손(李尹孫)의 농서이씨보에 서문만 전하고 있다.

그뒤 1613년(광해 5년)에 계축보(癸丑譜)를 간행했다. 단권 목각본이었으며, 안동권씨 성화보와 문화유씨 가정보(1562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족보다. 그리고 인쇄술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활자본을 속속 간행했다.

1751년(영조27년) 7권 6책의 활자본 신미보(辛未譜)을 비롯하여 1830년(순조 30년) 21권의 활자본 경인보(庚寅譜), 일제시대인 1924년의 활자본 27권 갑자보(甲子譜)까지 족보를 간행하여 성주이씨의 역사를 기록했다.

현대에 와서는 1968년 성주이씨 전국종친회(대종회 전신)가 창립되면서 1질 9권의 현대활자 인쇄본 을묘대동보(乙卯 大同譜)를 발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밀직공파 등 수많은 중간 지파종회별 족보는 생략)

성주이씨 인구분포

이씨 중 세번째 규모, 18만 6188명

영남 47.3%, 충청과 호남 14% 차지

국내 성주이씨의 분포도를 보면(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 성씨·본관별 인구통계) 전체 인구 18만 6188 중에서 영남권이 8만 8145명으로 47.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적 연고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충청과 호남권에도 성주이씨가 2만 6075명(14%)으로 구석구석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에도 고루 분포하고 있는데, 서울과 경기도의 인구는 이농현상 후에 전국의 성주이씨들이 모인 결과여서 인구분포 통계로서 큰 의미가 없다.

역사속의 성주이씨 인물

조선중기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 배출

李兆年·李崇仁·李 稷·李如松 등 다수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말 재상으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뒤 마의태자와 함께 구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로 숨어들었다.

이후 고려 초기까지 숨어 지내다가 중후기에 출사하면서 고려시대를 풍미하는 권문세족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려 말 조정에 출사한 친원(親元) 그룹에 속해 친명세력인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실각하여 성주로 대부분 안치되고 일부는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공신도 있으나 조정 출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에 다시 크게 일어나고 말기에 이르면서 그 기세가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조선중기(15세기부터 17세기)에 문과 급제자 20명 이상을 배출한 영남권의 30여 성·본의 하나로 꼽힐만큼 명문이다.

주요인물로는 ‘이화조’를 지은 이조년, 고려의 삼은으로 꼽히는 도은 이숭인, 영의정을 지낸 이직, 중국의 장군 이여송 등 다수가 있다.

성주이씨의 인물에 대한 세세한 사항은 세진록을 참고하면 알수 있다. 여기서는 이름만 소개한다.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이인기, 이여경, 이승경, 이태보, 이태성, 이포, 이원구, 이영, 이득방, 이인복, 이인임, 이인미, 이인립, 이인민, 이비, 이환, 이존성, 이숭인, 이제, 이발, 이직, 이수, 이사후, 이견기, 이사형, 이숭문, 이지원, 이영분, 이혼, 이문흥, 이정녕, 이지활, 이집, 이의, 이전, 이문재, 이자상, 이자견, 이자건, 이운거, 이지번, 이윤탁, 이자화, 이충건, 이성량, 이창, 이성, 이문건, 이항, 이언충, 이조, 이담, 이산우, 이여송, 이원배, 이일장, 이현배, 이구, 이덕응, 이휘, 이현배, 이준구, 이광적, 이지선, 이응협, 이택징, 이종일.

현대의 성주이씨 인물

국회의원·장차관·판검사·박사 등 많아

독립운동가·학자 등 비관직에서도 인물

조선후기부터 조정에 출사하는 인물이 감소하여 의사(義士), 독립운동가, 학자 등 비 관직에서 인물이 나온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정계, 군, 판검사, 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이 배출된다.

성주이씨의 현대인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 그 외에 국회의원 장차관, 군장성, 판검사,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인물이 배출된다.

<성씨총감>에 수록된 박사 수는 헬 수 없이 많다. 경제계에서는 신영그룹 이운일, 세방그룹 이의순등 준재벌급 인사도 포진하고 있고, 한국잡지협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주택신문과 현대주택 발행인 이심회장을 비롯한 언론·출판계 인사도 다수 있다.

이순자 전두환대통령 영부인 / 이병희 국회의원(15대까지 7선), 무임소 장관/ 이용택 국회의원(11,12대) / 이학봉 국회의원(13대) / 이종률 국회의원(10,12대) / 이대순 국회의원(11,12대), 체신부장관 / 이상용(강원도지사, 노동부장관) / 이동근 국회의원(13,14대) / 이해봉 대구종친회장 국회의원(15,16,17대) / 이재선 국회의원(15,16대) / 이문석 육군대장, 총무처장관 / 이기주 경남 도지사 / 이규동 육군준장(작고) / 이희근 공군대장 / 이소동 육군대장 / 이태섭 육군소장/ 이종학 육군준장 / 이규광 육군소장 / 이상태 육군중장 / 이해순 핀란드대사(작고) / 이산석 전주교육대학장 / 이정한 경상대학교총장 / 이상만 서울대학교수 / 이명섭 변호사, 농서장학회이사장 / 이중근 서울지검검사장, 청와대법무비서관 / 이재훈 성남지법원장, 변호사 / 이광열 청주지원장, 서부지원장 / 이만희 서울고검부장판사 / 이창민 국민가수(예명 백년설) / 이석용 대한손해보험협회장.

■ 인터뷰 / 성주이씨 대종회 이시욱 회장

鳳山齋(봉산재) 성역화 삼현소 중건 마무리 온 힘

화합행사 ‘선현들의 발자취’ 일깨워

검·판사 50여명 예비 재벌급 인물 많아

이시욱 대종회장은 1934년생으로 경북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에서 출생했다. 성주이씨 맏집인 백파(밀직공파)이며, 철강회사를 창립하여 경영하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대종회장과 국제라이온스클럽 등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신촌의 성주이씨 대종회 사옥에서 이시욱 회장을 만나 성주이씨 대종회에 대해 들어보았다. 성주이씨 대종회사무실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걸출한 분들이 사랑방처럼 이용하고 있어 이날도 대종회 고문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이소동장군이 인터뷰에 합석했다.

성주이씨 지파종회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한다면

▶중시조인 농서군공 할아버지께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등 다섯 분 자제가 있는데 모두 크게 출사하신 분들이다.

밀직공파, 참지공파, 시중공파, 유수공파, 문열공파 등 5파로 나뉜다. 성주이씨 종친회는 이 5파별로 운영되고 대종회가 이 5파를 통합 관리한다.

또 16개 광역시도별로 성주이씨 종친회도 대종회가 관리한다.

대종회가 수행하는 사업은

▶성주이씨의 구심점이 되는 이 삼현소를 유지 관리한다. 제례나 시향 행사를 관장하고 유물 유적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사업도 대종회가 맡고 있다.

특히 중시조 묘소가 있는 오현재와 안산서원에서는 해마다 정기총회, 한식재, 시향 등 대단위 종사를 거행한다. 사람도 많이 모인다. 큰 시향 같은 경우에는 오현재 주차장이 버스로 꽉 찬다. 1000~2000명 정도가 모인다. 대종회 전국 대의원 수는 400여 명에 이른다.

그래도 말이 많고 분란이 잦은 것이 종친회인데

▶그런 면이 있다. 우리도 내 전임 때 1년 이상 대종회가 마비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단합이 깨지고 지파종회에서 불만들이 표출됐다. 다행히 내가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지금과 같이 단합하는 전통을 복원했다.

대종회장님이 리더십이 있는 것 같다.

▶글쎄…. 원래 남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는 데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 그런 게 바탕이 돼 한국라이온스클럽은 물론 국제라이온스클럽 아시아지역 TOP에 오르기도 했다. 그것이 리더십이라면 리더십일 것이다. 어쨌든 대종회 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더십이라기 보다 대종회 임원들이 단합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성주이씨 대종회를 운영하는 철학이 있다면

▶종친회 성원은 전부 혈족이다. 그러다 보니 생산적인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연로한 분들이 이끌어가지만 현대적인 흐름에 맞게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중 행사할 때 재미있게, 예를 들어 야유회를 하듯이 가족소풍을 하듯이 참여할 수 있게 이벤트도 마련하고 선물도 들려주며 선현들의 자취를 알게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sungjulee.co.kr/)를 꾸민 것도 그 일환이다.

역사인물도 많고 현대에는 4성 장군도 많고, 집안으로 보면 대통령 사위도 보았는데…

▶격동기에는 많은 일이 있다. 누구든 공과가 있게 마련이다. 이순자 여사와 5공화국의 일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국가 중흥기에 큰 업적을 남기신 것으로 우리 문중에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순자 여사는 성주이씨 5파 중 맏집인 밀직공파의 후손이지만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살았다. 물론 그 부모대 삼형제(이규광, 이규동, 이규성)가 모두 군에서 높이 올랐다.

대종회 사무실에서 종친회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이문순 사무처 장, 이원섭 서울종친회장, 이시욱 대종회장, 이소동 고문, 이도필 대종보편집위원장.

성주이씨가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는가

▶고르게 분포한다. 4성장군이 5명이나 되고, 고급관료와 정치인도 있지만 검판사가 50여명에 이르고 경제계에도 예비재벌급 인물들이 많이 있다. 모두 애종심이 강해서 명망과 지위에 구애됨이 없이 종사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대종회와 지파종회, 지역종친회 임원들도 모두 훌륭한 분들이다.

앞으로 성주이씨 종사에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곧 이사회가 있다. 성주이씨 20년 현안사업인 봉산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확정지을 것이다. 이것을 하면 비로소 삼현소가 모두 중건된다. 금년에 착공을 해 놓으면 내년에 내 임기가 끝난 뒤에도 후임이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특집팀

박병로 편집국장

최종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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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성씨 이야기 19>, 성주이씨

성주이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성주이씨는 중시조 이장경 대에 중앙정치와 인연을 맺으면서 가문이 급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의 위세를 떨쳤으며, 그의 손자 이승경도 평장사가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고,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함으로써 이장경이 농서군공에 봉해지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성주이씨는 고려 말에 성세(成勢)를 보였으며,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이장경의 아들 이만년을 비롯하여 이포(李褒)와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발(李潑)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숭문(李崇文)을 비롯하여 이지활(李智活), 이지원(李智源), 이견기(李堅基) 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이직(李稷)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 등은 대사헌이 되었다.

그리고 이조년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났는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부모의 묘소에 처음으로 한글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 외에 이인복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검교시중 이포의 아들인데,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도 제과에 급제하여 금주판관의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 조일신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웠고, 수사공 상서 좌복야 어사대부에 올랐으며 단성좌리공신이 되었다. 그 후 왕에게 신돈을 멀리 하도록 간하다가 파직당했으며, 후에 흥안부원군에 진봉되고 목은 이색과 함께 금경록을 중수하였다. 우왕 때는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인임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이포의 아들이다. 공민왕 초기에 좌부승선이 되고, 홍건적의 1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벼슬이 좌시중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에 이르고, 서북면 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토벌, 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 이후 우왕을 추대했으며, 왕의 신임으로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을 견지하였다.

이숭인의 호는 도은(陶隱)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고려말 충신 오은(五隱)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문과에 급제한 후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 등과 함께 학관을 겸했다. 이색과 명나라에 정조사로 다녀와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당했다. 그 후 정도전이 보낸 황거정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관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을 정도로 문장에 조예가 깊었다.

이직은 이인민의 아들이다. 13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공양왕 때 예문 재학을 지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하여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1397년엔 대사헌을 지내고,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으며,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이 되었다. 이듬해 대제학을 거쳐 왕명을 받아 주자소를 설치하였으며,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성산부원군으로 지봉되고, 우의정에 승진했다. 하지만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성주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 영의정에 올랐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은 이천년의 8세손으로 여원백 이성량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서자 출신이었는데 조선 사회의 서자에 대한 심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명나라로 귀화하여 요동총병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 이여송은 명나라에서 출생하여 제독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황제의 명을 받아 원군 4만3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이여송은 일본군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유성룡 등의 재촉을 받고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평양성 탈환의 여세를 몰아 한성으로 남진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기세가 꺾인 이여송은 평양성을 거점으로 화의 교섭 위주로 소극적인 활동을 하다가 그 해 말 철군했다. 1598년 토번(土蕃)과의 전투 도중에 전사하였다.

조선시대 성주이씨에서 배출된 과거급제자를 보면 문과 102명, 무과 32명, 사마시 352명, 역과 2명, 의과 12명, 음양과 1명, 율과 2명, 주학 3명 등이 있다.

현대에 와서도 성주이씨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인 이규동, 삼촌인 이규광씨가 있으며,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병희씨를 비롯해 이용택, 이대순, 이해봉씨가 있으며, 이종률(전 정무제1장관), 이재식(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 이학봉씨(안기부 차장) 등이 성주이씨의 인물들이다. 그리고 재계에서는 세방기업 회장 이의순씨가 대표적이다. 또 신영섬유(주) 회장 이운일씨, (주)국도화학공업의 이삼열씨도 성주이씨 재계의 인물이다.

성주이씨의 분파

밀직공파(密直公派)는 이장경의 장남 이백년의 후계로 성주군 벽진면(碧珍面) 봉계리(鳳溪里)와 자산리(紫山里), 가천면(伽泉面), 화죽리(花竹里), 수륜면(修倫面) 신파(新坡), 오인(五印), 포월리(浦月里), 용암면(龍巖面) 선송리(仙松里)에 각각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참지공파(參知公派)는 이장경의 차남 이천년의 후계로 손자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벼슬하였으므로 요녕성과 평양북도, 함흥 등지에 세거하였고 10세손 이천충(李天忠)이 경남 남해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시중공파(侍中公派)는 이장경의 삼남 이만년의 후계로 초전면(草田面) 검단(黔丹)에 집성촌이 있으며, 6세손 이지활(李智活, 호 孤隱)은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으며, 함양과 거창에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다.

유수공파(留守公派)는 이장경의 사남 이억년이 개성유수직(開城留守職)에 있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경남 산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경남지역에 세거하고 있다.

문열공파(文烈公派)는 이장경의 오남 이조년의 후계로 성주읍 예산리(禮山里)에 집성촌이 있으며 고려와 조선 초에 정계에 많이 진출한 까닭에 그들의 근무지에 따라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특히 5세손 이직이 태·정·태·세(太定太世) 4대에 걸쳐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며 서울, 경기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계속...>

[정의]

이순유(李純由)를 시조로 하고 이석견(李碩堅)과 이조년(李兆年)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고령군 세거 성씨.

[연원]

성주(星州)는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로,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는 신라 경순왕 때의 재상이었다. 신라가 망하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에 이주하여 숨어 살았다. 이에 태조 왕건이 그 절의에 감복하여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고려 원종 때의 인물인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중흥 시조로, 그의 손자인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 황제가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여 본관을 농서로 하였다.

그 후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 등 아들 5형제가 각기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 따라 본관을 성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이포(李褒)와 이인복(李仁復)이 이름을 날렸고,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발(李潑), 이숭문(李崇文), 이지활(李智活), 이지원(李智源) 그리고 이견기(李堅基)와 이집이 유명하다. 이직(李稷)은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은 대사헌을 지냈다.

[입향경위]

고령에 입향한 성주이씨들은 밀직공파 이석견(李碩堅)의 후손들과 문열공파 이조년의 후손들이 많다. 이들은 예부터 정치·행정·경제적으로 동일한 생활권인 고령 지역으로 분가, 분촌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고령군 지역에는 6개의 대표적인 성주이씨 세거지가 있으나 가구 수 및 인구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집성촌을 보면 7세손 이덕구 대에 이르러 세거한 것으로 보이는 덕곡면 광천마을과 덕곡면에서 분가한 개진면 반운리, 성산면의 밀직공파에서 분가한 개진면 생리, 문열공파의 후손으로 난을 피해 이주한 다산면 송곡리, 문열공파 시조 이조년의 증손인 이이의 후손들이 이거한 성산면 원당마을, 임진왜란 때 피난한 운수면 팔산리 등이 있다.

[관련유적]

운수면 대평리에 이조년의 묘소와 재사인 매국정이 있고, 다산면 벌지리에는 이포의 묘소와 재사인 누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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